리턴 플레이어 82화
32장 대공이 잠든 곳(2)
실버레인 경이 소리쳤다.
테일러는 고개를 들어 전방을 주시했다.
우측을 무너뜨리느라 상당량의 체력을 소진했던 탓에 겨울바람 기사단 5조와의 전투에서 끝내 아군이 패배한 모양이었지만 겨울바람 기사단 5조 또한 체력이 상당히 소진되어 있었다.
“4조 전진.”
테일러가 명령을 내렸다.
그는 4조와 함께 전진했다.
“적은 지쳐 있다!”
케이트 경이 아군을 독려하기 위해 소리쳤고, 아군의 사기가 상승했다.
퇴각은 곧 패배를 의미했기 때문에 리시아 라스트 준남작은 불리한 전투를 피하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전투는 당연히 라스트 준남작이 불리하게 돌아갔고 그는 욕설을 내뱉었다.
그가 욕설을 내뱉는 사이 제이드 기사단의 케이트 경이 겨울바람 기사단원들이 구축한 인간의 벽을 뚫고 들어와 라스트 준남작의 목에 목검을 살짝 찔렀다.
“적장의 목을 베었다!”
“지휘관 전사. 제이드 기사단의 승리입니다.”
모의전이 끝나고 승리한 테일러는 휘하 기사들 그리고 실버레인 경과 함께 낙담하고 있는 리시아 라스트 준남작에게 다가갔다.
겨울바람 기사단의 기사단원들 또한 부단장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제 불만은 없겠지?”
“으으.”
테일러의 말에 라스트 준남작은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런 그의 불손한 태도에 하인즈 실버레인 경이 나섰다.
“부단장! 더 이상의 무례는 실버레인의 이름이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크윽. 죄송합니다. 기사단장.”
실버레인 경은 평기사였지만, 하츠 실버레인 후작의 차남으로 훗날 북부 군단에서 높은 자리에 앉을 확률이 높은 기사이기도 했다.
북부 군단 사령관 실버레인 후작의 가문 구성원이니, 부단장 리시아 라스트 준남작이라고 해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가 기사의 명예를 걸고 맹세한 것도 있었으나, 라스트 준남작은 고개를 숙이고 테일러에게 사죄할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들도록.”
그리고 그의 사죄를 테일러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 * *
“준남작. 제이드 기사단이 그랑키아 숲에 진입했다는 정보기관의 보고입니다.”
“드디어 왔는가. 주군의 적들이여.”
부하의 보고를 들은 요크 벨라크루소 준남작은 피로 얼룩진 돌계단에서 일어서며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검은 투구 틈으로 빠져나온 긴 귀가 그가 인간이 아닌 엘프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오크의 시체가 가득했고, 간혹 가다가 검은 갑옷을 입은 그림자 기사단원의 시체도 볼 수 있었다.
소수의 그림자 기사단원들이 동료들의 시체를 수습하고 있었다.
“놈들은 어디쯤 왔는가?”
“뱀파이어 남작 로이하퍼의 영지 옆을 지나고 있습니다.”
부하의 말에 요크 벨라크루소 준남작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아, 로이하퍼 남작의 영지를 지나고 있단 말이지? 정말 재밌게 되었구나. 알로스.”
“예. 벨라크루소 준남작.”
옆에서 망을 보고 있던 알로스가 벨라크루소 준남작에게 다가왔다.
“충분한 양의 금을 가지고 로이하퍼 남작을 방문해라. 충분한 금이 있다면 그는 불청객을 몰아내 줄 것이야. 아니, 몰아내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 수는 상당히 줄여줄 수 있을 것이야.”
뱀파이어 로이하퍼 남작은 금을 아주 좋아하는 뱀파이어 귀족이었다.
그는 당장 움직일 수 있는 3백의 뱀파이어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반도가 아닌 그랑키아 숲의 뱀파이어 군대 3백이면 상당한 전력이었다.
“그가 거절하면 어떻게 합니까?”
알로스가 질문했다.
로이하퍼 남작은 금을 좋아하지만 만약의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들어둘 필요가 있었다.
요크 벨라크루소 준남작은 자신의 긴 귀를 살짝 건드리며 가지고 놀면서 입을 열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거절하면 조용히 빠져나와라. 로이하퍼 남작과 전투를 벌여서 쓸데없는 병력 소모를 할 필요는 없다.”
그림자 대공이 아카사 유적으로 투입한 그림자 기사단원의 수는 제법 많았지만 그랑키아 숲에서 이동하면서 적지 않은 수를 잃었고, 아카사 유적을 점령하고 있던 오크들과 전투를 벌이느라 또 조금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이하퍼 남작의 뱀파이어 군대를 박살 낼 정도의 전력은 있었고 로이하퍼 남작 또한 요크 벨라크루소 남작이 처참하게 도륙할 자신이 있었지만, 전투가 벌어지면 적지 않은 피해가 발생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제이드 기사단에게 좋은 일만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요크 벨라크루소 준남작은 쓸데없는 전투를 원하지 않았다.
알로스는 신속하게 움직여 로이하퍼 남작을 찾았다.
로이하퍼 남작은 많은 양의 금을 받는 조건으로 그림자 기사단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뱀파이어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뭔가 이상해.”
“무엇이 이상합니까? 레드.”
수풀에 숨어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살피던 레드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고, 그런 그를 옆에서 호위하고 있던 알버트는 궁금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레드는 전방을 향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방금 뱀파이어 정찰대가 지나갔는데, 보통의 경우와는 다른 규모다.”
레드와 알버트는 테일러의 명령을 받고 뱀파이어 남작 로이하퍼의 영지에 은밀하게 침투하여 뱀파이어 군대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뱀파이어 남작 로이하퍼의 영지를 가로지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영지 주변을 지나치기 때문에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레드와 알버트로 하여금 정찰하게 한 것이었다.
사실 처음 레드는 혼자서 가겠다고 했지만, 테일러는 단호하게 알버트를 호위로 붙여 주었다.
“규모가 다르다는 말씀이십니까?”
알버트의 물음에 레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배운 게 틀리지 않다면 지금 이 규모는 전투를 시작하기에 앞서 적과의 교전을 염두에 둔 정찰대 편성이다.”
레드는 남부 레인저 여단의 에이스 레인저 출신이었고, 몬스터가 주로 서식하는 숲과 산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남부 레인저 여단의 레인저들은 모두 몬스터의 습성에 관한 깊은 지식을 습득해야만 했다.
레드 또한 에이스 레인저로서 관련 지식에 해박했다.
“즉시 본대로 돌아가야겠어. 이 소식을 전해야 해.”
“알겠습니다.”
뱀파이어 정찰대의 수상한 동향을 파악한 두 사람은 주변에 세워둔 말에게 이동한 후 말을 타고 신속하게 귀환했다.
지속적으로 소규모 정찰대를 운용하며 주위 몬스터 무리를 피하며 이동하고 있는 본대에 합류한 레드와 알버트는 즉시 테일러를 찾았다.
“뱀파이어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가 감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뱀파이어 정찰대의 규모는 전투를 각오한 공격적인 정찰을 감행할 정도의 규모였어. 아마도 곧 정찰대와 조우하게 되겠지.”
“그렇군요.”
테일러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가능하면 유적에 도착할 때까지 전력을 아껴두고 싶었지만 그러기는 힘들 것 같았다.
“레드. 정찰대 규모를 자세히 알려주겠어요?”
테일러의 뒤에서 말을 몰며 조용히 듣고 있던 일리아가 레드가 감지한 정찰대 규모를 자세히 알려줄 것을 부탁했다.
레드는 그녀에게 그 규모를 정확하게 알려주었고 잠시 생각에 잠긴 일리아는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반도의 뱀파이어와 그랑키아 숲의 뱀파이어는 그 강함은 차이가 나지만 성향과 군 편성은 비슷하다고 들었어요. 그들이 크게 다르지 않다면, 로이하퍼 남작은 필히 전투를 걸어올 것이에요.”
일리아 웨스트우드는 하이 엘프 마을의 수장으로서 한 숲의 패권을 놓고 오랜 시간을 뱀파이어 군대와 싸워왔다.
그녀의 의견은 충분히 새겨들을 만한 것이었고, 테일러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는 피할 수 없다.
이게 현재까지 파악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준비를 해야 할 차례였다.
최대한 병력을 잃지 않고 적을 격퇴하기 위해선 충분한 준비가 필요했다.
“어떻게 하겠소?”
로펜 경이 물었다.
테일러는 잠시 고민한 후 입을 열었다.
“내 예상이 정확하다면 그들은 밤에 공격해 올 것이다.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야영지를 구축하고 충분한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좋은 생각이오. 즉시 야영지로 쓸 수 있는 곳을 탐색하도록 하겠소.”
로펜 경이 옆으로 물러났다.
그는 곧 야영지로 쓰기 적합한 공터를 발견했고 제이드 기사단은 하룻밤을 보낼 야영지 구축 작업에 돌입했다.
“목책을 세울 수는 없겠지?”
“기사단장. 그건 무립니다.”
적의 공격이 확실한 지금 목책을 세운다면 큰 도움이 되겠지만 쟈크 경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전문적인 공병대가 함께하고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제이드 기사단은 전문적인 공병대가 함께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도 기병 장애물 정도는 설치할 수 있겠지?”
“그 정도는 가능합니다.”
테일러의 말에 쟈크 경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목책은 무리지만 비교적 간단하게 제작이 가능한 기병 장애물을 설치하는 것은 가능했다.
3시간이 지나자 야영지는 대충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원형의 야영지 주변에는 기병 장애물이 꼼꼼하게 설치되어 있었고, 유일하게 기병 장애물이 설치되지 않은 입구에는 남부 레인저 여단의 에이스 레인저 출신 레드가 직접 거대한 함정을 파놓았다.
함정 설치 또한 레인저의 기본 소양 중 하나였다.
오늘 적이 공격해오지 않더라도 사실상 내일이면 뱀파이어 영지에서 제법 멀리 떨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오늘만 버티면 되는 것이었다.
테일러는 기사단에게 무장을 갖춘 채 대기하거나 즉시 무장할 수 있는 상태에서 휴식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살라다르 경과 하인즈 실버레인 경에게 실비아의 호위를 부탁했다.
알폰스가 그녀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지만, 오늘 밤은 추가 호위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가 뱀파이어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신성력을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아군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무기를 사용하는 적을 먼저 처리하는 것은 병법의 기본 중의 기본.
전투가 시작되면 강력한 신성력을 발휘하는 실비아를 먼저 공격할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테일러는 적의 주력이 그녀에게 접근하면 즉시 포위하여 섬멸할 수 있도록 천막을 배치했다.
그리고 잠시 후 밤이 찾아왔다.
“주군. 기병 50. 보병 250. 모두 준비가 끝났습니다.”
로이하퍼 남작에게 충성을 맹세한 뱀파이어 준남작이 사악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로이하퍼 남작은 계약금으로 받아 영주성에서 기다고 있는 금을 생각하며, 그리고 일을 끝내고 받을 금을 생각하며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기병이 먼저 공격하고, 보병은 전 방향에서 공격을 개시한다.”
“예!”
명령이 하달되고 뱀파이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50의 뱀파이어 기병이 기병 장애물을 피해, 장애물이 존재하지 않지만, 함정이 설치되어 있는 입구로 말을 달렸고, 나뭇가지와 나뭇잎, 흙으로 가려진 함정에 말발굽이 닿는 순간 폭포처럼 함정 속으로 우르르 쏟아졌다.
“이런, 제길!”
뒤따르던 기병들은 뒤늦게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멈추려했지만 이미 가속도가 상당히 붙은 탓에 최후방의 기병 20명 정도를 제외하고는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함정에 빠지지 않은 20명의 뱀파이어 기병들을 향해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화살 몇 발쯤은 그랑키아 숲의 뱀파이어들에게는 치명적이지 않았지만, 아군의 구출을 막을 정도로 성가실 정도는 되었고, 결국 그들은 아군의 구출을 포기하고 말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기, 기름?”
“기름이다! 어서 빠져나가!”
함정 안은 기름으로 가득했다.
공성전 같은 것을 치를 생각으로 보급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양의 기름이 함정에 투입된 것은 아니었지만, 불이 붙는다면 함정을 뜨거운 불지옥으로 만들기엔 충분한 양이었다.
“불지옥에 온 것을 환영하네.”
주변에서 쟈크 경의 호위를 받으며 대기하고 있던 가이우스가 차갑게 말하며 작은 불덩이를 만들어 함정 안에 던졌다.
기름에 불이 붙고 함정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크아아아악!”
“으아아악!”
강력한 그랑키아 숲의 뱀파이어라고 하더라도 뜨겁게 타오르는 불 속에서는 느긋할 수 없었다.
뜨거운 불길에 휩싸여 불타오르며, 그들은 절규하고 고통에 찬 비명을 터뜨리며 울부짖었다.
“후후후. 간단하군.”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을 것 같네요.”
여유를 부리는 가이우스와 다르게 쟈크 경은 불평과 함께 검을 뽑았다.
푸른 마력검이 그의 검에서 춤을 췄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뜨겁게 타오르는 함정 속의 불지옥에서 뱀파이어 기사 다섯이 동시에 도약해 착지했다.
그들의 몸은 여전히 불에 타고 있었고 2명은 마력검을 시전한 상태였지만 몸이 불에 끔찍하게 타고 있는 탓에 집중이 흐트러져 마력검 또한 불안하게 사라졌다가 다시 생성되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