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 플레이어 1화
프롤로그
825년 12월.
사우스 왕국 북쪽, 프랑츠 제국 남쪽의 그랑키아 숲.
그랑키아 숲에 가득한 몬스터들의 흉포함을 억누르는 억제기와 그것을 지키는 병력이 주둔한 주둔지 근처를, 수십의 그림자가 포위하듯 서서히 다가가고 있었다.
달마저도 구름에 가려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숲속을, 검은 암행복을 입은 암살자들은 마치 대낮에 아무것도 없는 대로를 거니는 것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빠르고 민첩하게 움직였다.
나무나 바위 등의 장애물은 그들을 막지 못했다.
앞서 나가던 암살자는 주둔지와 거리를 상당히 좁히게 되자 발걸음을 멈추고 손을 들어 올려 부하 암살자들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잘 훈련된 암살자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그들의 움직임은 한 명의 움직임처럼 통일되어 있었다.
“감시탑의 보초를 제거한다.”
리더로 추정되는 암살자는 붉은 눈을 번뜩이며 품속에서 암기를 꺼내 들었다.
어둠 속에서 붉은 눈이 감시탑을 서성이는 보초를 향해 날카롭게 주시했다.
“알겠습니다, 조장.”
조장이라고 불린 암살자 주변에 있는 암살자들이 일제히 품속에서 암기를 꺼내 들었다.
날카로운 단검과 비수 등의 칼날이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빛났다.
조장은 붉은 눈을 빛내며 주둔지 성문에 붙어 있는 두 개의 감시탑을 서성이는 보초들을 번갈아 살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각자 다른 곳을 향하는 순간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과 동시에 암기를 던졌다.
날카로운 빛을 발하며 어둠을 꿰뚫고 날아간 암기들은 감시탑에서 근무를 서고 있는 보초의 급소를 꿰뚫었다.
조장의 신묘한 암기 공격에 보초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다른 감시탑의 보초 역시 부하 암살자 2명이 날린 암기에 급소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쓰러졌다.
감시탑의 보초들을 제거하고 조장의 붉은 눈이 어둠 속에서 위험하게 빛나며 주변을 살폈다.
성벽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원, 성벽을 넘는다.”
붉은 눈의 조장이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로 지시를 전달하자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암살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리 짜두었던 계획대로 움직였다.
조그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성벽에 도달한 그들은 밧줄도 꺼내지 않고 일제히 성벽 위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손에서 검은 기운이 발사되어 성벽 너머에 달라붙었다.
암살자들은 성벽 위에 달라붙은 검은 기운으로 이루어진 밧줄을 잡고 성벽을 넘었다.
“누, 누구…….”
마침 성벽로에 올라온 늙은 기사가 깜짝 놀라 검을 뽑으려는 순간 암살자가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잡고 단검으로 목을 그었다.
늙은 기사는 목에서 붉은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비틀거리다 이내 힘없이 쓰러졌다.
“……이거 너무 쉬운 것 같습니다, 조장. 크큭…….”
늙은 기사의 목을 그은 암살자가 쓰러진 늙은 기사를 발로 툭툭 건들며 말했다.
“방심하지 마라. 이렇게 보여도 사우스 왕국의 정예들이 지키고 있는 곳이다.”
조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쓰러진 늙은 기사가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혼신의 힘을 다해 마력을 운용하여 경보 결계를 자극해 가동시킨 것이었다.
“멍청한 녀석.”
“죄송합니다…….”
조장은 늙은 기사의 목숨을 한 번에 끊지 못한 부하를 탓하며 기다란 장검을 뽑아 들었다.
날카로운 칼날 위로 검은 마력검이 깃들었다.
조장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한 번 경보가 울린 이상 이제 암살이 아닌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주둔지의 병영에서 무장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우스 왕국이 그랑키아 숲의 억제기에 배치한 수비대는 전원 기사로 이루어진 정예 부대.
그 수는 100명을 조금 넘는 수였다.
당연한 소리지만 암살자와 기사의 정면전에서는 기사가 유리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억제기 수비대 주둔지를 습격한 암살자들은 평범한 암살자들이 아니었다.
“그림자의 힘을 사용하는 것을 허가한다. 모두 죽여라.”
조장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암살자들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깃들어 춤추기 시작했다.
“저기다! 국왕 폐하의 이름으로!”
고위 기사로 보이는 이가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며 조장에게 달려든다.
암살자 조장은 검은 기운이 깃든 검을 휘둘러 무려 고위 기사의 검격을 쳐냈다.
“이럴 수가?”
고위 기사는 경악했다.
고위 기사는 뛰어난 실력을 지닌 기사 중에서도 시험을 통과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이름이었다.
그런 자신의 일격을 너무나 쉽게 쳐내는 조장의 모습은 고위 기사에게 있어서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 충격은 조장의 반격을 쉽게 막아내지 못하는 상황으로 고위 기사를 이끌었다.
“크헉……!”
검은 마력의 기운이 깃들어 있는 검은 고위 기사가 급하게 챙겨 입은 판금 갑옷을 종이 자르듯이 자르고 들어가 갈비뼈를 가르고 심장을 노렸다.
고위 기사는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으면서도 심장이 꿰뚫리기 직전에 간신히 몸을 빼내는 것에 성공했다.
“제법이군.”
억제기를 습격한 암살자 조장은 고위 기사의 움직임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 짧은 순간에 고통을 참아내면서 몸을 뒤로 빼내는 것은 상당히 힘든 것이었다.
“사우스 왕국의 고위 기사를 우습게 보지 마라!”
“이건 좀 위험하군. 고위 기사 중에서도 소수만 쓸 수 있다는 마력 갑옷인가?”
고위 기사의 몸에 푸른 마력이 깃들어 춤을 추는 것처럼 흔들렸다.
조장은 고위 기사의 몸에 일어난 변화의 정체를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그것은 마력 갑옷이라고 불리는 마력으로 갑옷을 짜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기술이다. 고위 기사 중에서도 소수만 사용할 수 있는 고급 기술이었다.
마력 갑옷을 만들 수 있는 고위 기사는 소수로 혹독한 훈련을 받은 조장조차 힘겨운 싸움을 이어 나가야만 하는 상대하기 곤란한 수준의 상대였다.
“하지만 끝이다. 살아남은 것은 네놈뿐이야.”
암살자 조장의 차가운 말에 고위 기사는 깜짝 놀라 눈동자를 바쁘게 굴려 주변을 살폈다.
암살자 조장의 말대로 모든 것은 끝나 있었다.
붉게 물든 차가운 대지와 그곳에 누워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는 기사들이 아군의 패배를 말해주고 있었다.
한두 번의 공격을 주고받은 그 짧은 순간 동안 억제기를 지키기 위해 주둔한 기사단이 전멸한 것이다.
억제기 경비를 위해 사우스 왕국에서 주둔시킨 기사단은 수준 높은 정예 기사단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억제기 파괴를 위해 투입된 암살자들이 훨씬 더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위 기사는 검을 꼭 쥐고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굳센 의지가 엿보이는 눈으로 조장을 노려보았다.
“적어도 네놈만은 길동무로 삼겠다!”
고함 소리와 함께 푸른 마력에 휩싸인 한 명의 고위 기사가 유성처럼 쇄도했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움직임은 너무나 빨라 평범한 사람의 눈동자로는 쫓을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암살자 조장에게는 그 움직임이 눈에 보였다.
고위 기사의 움직임을 눈으로 읽고 치명적인 일격을 회피하려는 순간 고위 기사의 움직임이 갑작스럽게 변했다.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한 곳을 노리고 쏘아지던 그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경로로 움직임을 바꾼 것이다.
그 변칙적인 움직임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실전을 겪은 암살자 조장조차도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당황은 작은 틈을 만들었고 고위 기사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죽어라!”
고위 기사는 외침과 함께 푸른 마력이 깃들어 춤추는 장검을 힘차게 휘둘렀다.
장검은 조장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검은 기운을 베고 들어가 가벼운 갑옷을 찢고 깊은 상처를 남겼다.
고위 기사는 일격에 조장의 목숨을 빼앗으려 했지만 조장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목이 베이기 직전에 몸을 기형적으로 뒤틀어 피한 것이다.
조장의 몸에 상처가 생기자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암살자들이 일제히 암기와 장검 등의 무기를 꺼내 들었지만 조장은 뒤로 물러나며 손을 들어 올려 그들을 제지했다.
“내가 처리한다. 전원 대기.”
암살자들이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무기를 집어넣었고 조장의 눈동자는 고위 기사를 노려보며 날카롭게 빛났다.
조장에게서 느껴지는 살기에 고위 기사 또한 식은땀을 흘리며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았다.
“파도.”
조장의 입이 열리고 검은 기운이 뭉쳐 파도가 되어 고위 기사를 덮쳤다.
물리력을 지닌 검은 파도의 기습에 고위 기사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휩쓸리고 말았다.
푸른 마력 갑옷이 고위 기사를 검은 파도로부터 보호했지만 검은 파도의 일격에 마력의 상당량이 날아가고 말았다.
“창.”
어느새 뒤로 다가온 조장이 입을 열고 한 단어를 내뱉었다.
검은 기운이 뭉쳐 창이 되어 조장의 손에 들렸다.
조장은 그림자처럼 검은 창을 매끄러운 움직임으로 휘둘러 고위 기사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소나기.”
검은 기운이 뭉쳐 하늘로 올라가 넓은 지역이 비처럼 쏟아졌다.
고위 기사는 이 검은 빗줄기가 마력을 희미하게 만든다는 것을 눈치채고 재빨리 벗어나려 했지만 암살자 조장이 그것을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고 있지는 않았다.
“어딜 도망가시나.”
“기사는 도망가지 않는다!”
조장의 빈정거림에 고위 기사는 발끈하여 검을 휘둘렀다.
그것은 실수였다.
감정에 치우친 공격은 자세에 큰 허점을 만들었고, 그 틈을 조장은 놓치지 않았다.
조장의 검은 창이 빈틈을 노리고 파고들었고 빛을 거의 잃고 이제는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마력 갑옷은 그 일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컥!”
창은 정확히 심장을 꿰뚫었다.
창이 심장을 파괴하고 뽑혀 나오자 고위 기사는 가슴에 난 구멍에서 붉은 피를 폭포처럼 쏟아내다가 쓰러지고 말았다.
고위 기사가 쓰러지자 흩어져 있던 암살자들이 조장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억제기를 파괴한다.”
푸른 빛을 내뿜으며 그랑키아 숲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억제기가 의문의 집단에 의해 파괴되고, 사우스 왕국을 파멸로 몰아넣는 재앙이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