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운 대상
바리톤의 위기는 구체화되고 현실화되어갔다.
1차로 바리톤의 국경 지대를 밟은 신성 제국의 군사는 대략 2천이었다.
로테노아가 중심이 되어 긴급회의가 벌어졌다.
그러나 대안을 세우기 전, 여러 귀족들은 한목소리가 되어 성토했다.
“공왕 전하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옵니다. 하오나 저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는 것이 우선 아니겠사옵니까?”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큰일임이 분명했기에 저마다 급박해 보였다.
하지만 의외로 로테노아는 평온한 모습이었다.
“경들은 잘 들어주시오.”
평소의 그답지 않은 침착한 말투에 신하들은 저마다 입을 닫고 귀를 기울였다.
로테노아의 말이 이어졌다.
“분명 이는 우리 바리톤의 일이 아니오. 아레인의 일이지. 짐이 과거에 어리석은 판단을 하여 왕국을 쇠망의 길로 걷게 만들었다는 것은 경들도 잘 아실 게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에도 신하들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 그들 역시 같은 뜻을 피력했던 위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공왕 혼자 짐을 떠안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던지 대전 안의 분위기는 한층 숙연하고 경건해졌다.
로테노아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때 아레인을 몰랐다면 우리는 분명 신성 제국의 편을 들어주었겠지. 결국 매를 먼저 맞았다고…….”
“전하, 말씀 도중 죄송하오나 상대는 대륙을 주름잡는 신성 제국이옵니다. 어찌 아레인이 승기를 잡을 것이라고 속단하시옵니까?”
공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사를 내는 것은 결례였다. 워낙 답답했으니 튀어나온 얘기였다.
그럼에도 로테노아는 그의 행동을 일절 문제 삼지 않고 타이르듯 얘기했다.
“그대는 아레인을 모르오. 아레인이 얼마나 강성한 나라인지를……. 신성 제국의 군사력을 몸소 체험한 경이 있으시오? 없으실 게요. 짐 또한 그러질 못하였으니. 하지만 짐이 겪었던 아레인은 그 누구보다 무서운 존재였소.”
억측이라고 해도 좋을 말이었다. 그러나 당시 전장에 있었던 귀족들은 통감하는 바였다.
“비단 아레인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다 하여도 짐은 같은 길을 걸을까 하오. 요 근래 우리가 저들에게 얻은 것은 모를 리 없을 것이오.”
로테노아의 말마따나 바리톤은 아레인과의 무역 연계로 적잖은 수혜를 입었다. 삶은 풍요로워졌으며 궁핍했던 백성들은 배불러졌기에 현 공왕의 치세를 칭송했다. 이를 모르는 귀족은 없었다.
“원수나 다름없던 이웃에 자비를 베풀어준 저들이오. 이제는 의리를 지켜야 할 때라고 보오. 과거와 같은 엇나간 길을 걸을 순 없소.”
“전하, 신 레고타 감히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패전 이후 레고타 후작은 일찌감치 헥토르를 포기하고 로테노아만을 보며 살아왔다. 그런 그 또한 공왕이 무리수를 두고 있다는 생각이 깊게 박혀 있었다.
“말해보오.”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레고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저희가 전면에 나서는 것은 불합리한 듯싶습니다.”
로테노아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도대체 현자만 한 신하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구려. 왜 허락도 없이 떠나신 게요? 왜…….’
그가 떠올리는 사람이란 전대 현자 클라베르였다.
제아무리 충직하고 잘 따르는 신하들이라 할지라도 그만큼 사리가 밝은 인물은 없었던 탓이다.
허탈한 심정을 제쳐 두고 로테노아는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게끔 얘기했다.
“짐 또한 그러고 싶소. 하지만 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우리가 변심하지 않는다는 결심을 보여 준 후가 아닐까 하오.”
그제야 신하들은 이해할 수 있다는 표정이었다.
공왕은 출혈까지 감수하려 한다. 물론 운이 없다면 바리톤은 저들이 알아주기도 전에 쑥대밭이 되고 말 것이다.
답답한 생각까지 들었던지 바리톤의 신하들은 한숨이라도 쉴 기색이었다.
그 눈빛들을 읽었던지 로테노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못을 박아두겠소. 짐은 아레인을 적으로 돌리는 자들을 적으로 간주할까 하오.”
신하들의 눈이 하나같이 휘둥그레졌다.
“저, 전하.”
“더 이상 왈가불가 않겠소.”
입을 굳게 닫아버린 로테노아를 보며 신하들은 ‘다 틀렸구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처럼 그는 한번 결심한 바를 밀어붙이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전대 현자 클라베르가 살아 돌아와 그를 설득한다면 또 모를까.
* * *
효시가 되었다.
창대에 꽂힌 목의 주인은 어쌔신이었다. 더 자세히는 음영대의 무사였다.
하멜은 그를 보면서도 개운치가 않았다.
자신의 손으로 잡아 죽였더라도 직성이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상부에서 쓸 만한 녀석들을 데리고 올 때마다 어쌔신들이 소리 없이 드나들며 그들의 수급을 베어갔던 것이다.
한참 벼르던 찰나, 저 녀석이 자신의 손에 붙들렸다.
배후를 캐고 어떻게 요리를 할 것인가 고민할 때, 녀석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음독자살이었다.
저 녀석들만 없었더라도 판세를 벌써 수 번은 뒤집을 수 있었을 것!
으드득.
하멜이 이를 가는 소리가 옆에 선 척후병에게까지 들렸다.
그 소름 끼치는 소리에 척후병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양손바닥으로 귀를 닫았다.
척후병들은 벌써 여러 번 물갈이가 되었다. 적들의 동태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곧 하멜의 입에서 사람의 목청에서 흘러나온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우렁찬 소리가 터졌다.
“로만은 왜 답이 없느냐? 목을 찾아갈 위인이 없는 모양이지?”
저들의 진영을 목전에 두고 하는 말이었다.
벌써 두어 차례 같은 말을 반복했지만, 그럼에도 대답이 없었다.
하멜은 신경질적으로 창대를 뽑아 거꾸로 세워들었다.
“빼라.”
“네?”
“머리를 빼란 말이다.”
“네, 넵.”
뒤늦게 말귀를 알아듣고 잔뜩 기가 죽어 창대로 다가선 척후병이 머리를 빼어 바닥에 내려 두자, 성질 급한 하멜의 군홧발이 그 위에 올려졌다.
돌연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퍼석.
이미 혼이 나간 머리통이 하멜의 발의 육중한 무게와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스러지는 소리였다.
신경질적으로 돌아서며 하멜은 차게 말했다.
“수거해 돌아오라.”
“네, 넵.”
아무리 척후병이라 해도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끔찍한 잔해를 안고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 말이다.
하지만 불복종은 군법에 의해 처벌될 일. 척후병은 떫은 감이라도 씹은 듯한 표정을 하고서 바스러진 잔해를 주섬주섬 챙겨 하멜을 따랐다.
그게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그날 당일을 제외하고 하멜은 발 뻗고 제대로 누워본 기억이 없었다. 누군가 소리 없이 자신의 막사를 다녀갔다는 괴리감 때문이었다.
그가 양피지에 남기고 간 시뻘건 문구는 끝 모를 불안함을 던져 주었다.
<오늘 벌어진 일은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녀석을 붙잡고, 죽였다고 해도 따지지 않을 셈이었다. 하나, 네놈은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을 더럽힌 것!
살고 싶다면 네놈이 바스러뜨린 머리를 원상 복구시켜 직접 들고 와 빌어야 할 것이다.
총 세 번의 경고를 하겠다.
이것이 그 첫 번째 경고다.>
하멜이 제아무리 강심장이라지만 섬뜩했다. 자신이 곯아떨어졌기로서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나태해진 정신을 문제 삼아 경비를 선 녀석들을 엄벌에 처한다고 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경비를 보강하고 난 후 4일째가 되는 날, 그는 또 다녀갔다. 어이가 없게도 때는 한낮이었다. 간밤에 잠을 설쳐 식사조차 거른 채 낮잠에 빠져 있던 바로 그 시각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직도 준비가 되지 않았나?>
퀭한 눈, 초췌한 안색일 수밖에 없었다. 짜증이 치솟았던 탓에 거식증까지 발병했다.
보다 못한 고위 사제가 일언을 올렸다.
“이러실 게 아니라 사제를 따라가 안식을 취하고 오시는 게…….”
“시끄럽다!”
벌컥 화를 낼 만도 했다. 천하의 하멜이 뭐가 두렵다고 어쌔신 따위를 피한다는 말인가. 또한 그 말을 따른다면 이는 자신의 무능을 입증하는 꼴이 될 것이다.
오기 반, 허영 반이었다.
심사가 곱지 못했던 탓에 그는 바드득 이를 갈아댔다.
“내 눈앞에만 나타나 보라지. 그 즉시 몸뚱이를 양단 내버릴 테니까.”
맞대결이라면 자신 있었다. 하지만 소리 소문 없이 다녀가는 녀석을 어찌한다는 말인가.
작금, 하멜은 허상과 싸우고 있음이었다.
싸움에서 중요한 것은 승리지, 비겁하고 말고가 아니었다.
목숨이 오가는 전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저자의 비겁함을 떠들어봐야 하나 득 될 게 없는 것이다.
밤이 늦어 고위 사제는 개인 막사로 돌아갔지만, 하멜은 잠을 청할 수 없었다. 경비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잠이 든 야심한 시각까지도…….
막사 내부는 고사하고 외부에서도 정적만이 흘렀다. 주위를 밝히는 횃불이 아랫동아리를 태우는 소리만이 들렸다.
실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하멜의 눈꺼풀도 내려앉았다 치켜떠지길 반복했다.
더 버티기에는 고된 몸이었다.
경비 몇을 더 세웠다는 안도감이 커졌기 때문일까. 하멜의 눈은 서서히 감기고 있었다.
어느 틈일까.
차양 사이로 흘러들어오던 실바람이 미풍으로 변했다.
훅!
초가 꺼지는 건 일순간이었다.
서걱!
몸뚱이는 힘없이 쓰러졌다.
흥건한 피를 적신 검이 비켜섰을 때, 하멜의 음성이 낮게 투덜거렸다.
“겁도 없는 녀석, 모를 줄 알았느냐?”
그러나 다시 초에 불을 붙였을 때 그는 큰 오판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불에 비춰진 둘로 나뉜 몸뚱이는 경비의 것이었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경비를 나무랄 게 아니었다. 경비는 분명히 기별을 고하고 들어왔으므로.
하멜은 정말 잠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얼굴에 쓰디쓴 미소가 자리하며 하멜의 볼이 씰룩였다.
곧 고음성이 막사가 찢어져라 퍼져 나갔다.
“네 이노옴! 감히 나 하멜을 모욕하고도 성할 듯싶으냐?”
그 소리에 응답하는 것은 인근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들뿐이었다.
<세 번째다.
네놈은 운도 없구나. 내 직접 찾아갔다면 고통을 느끼지도 못하고 죽었을지 모를 일을…….>
불미스런 일을 경험하고 이틀이 지나서 날아온 서한이었다.
의미 모를 말이었다.
이걸 쓴 자가 찾아온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럼 누가 찾아온다는 말일까?
‘살아생전 누군가 날 이렇게 농간한 자가 있는가?’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던지 하멜의 안면이 푸르르 떨리고 서한을 쥔 손이 진정되지 않았다.
“기필코 잡아 죽이리라. 기필코…….”
그 말엔 분명한 각오가 서려 있었다.
어떤 놈이 온다 해도 겁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물러서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설혹 이 일을 계기로 건강이 악화된다 하여도 그놈은 꼭 죽일 심산이었다.
하멜의 간절한 바람 덕분이었을까. 대담하게도 당사자는 그날 밤에 찾아왔다.
-그다지 반가운 녀석은 아니군.
머릿속을 울리는 비아냥거리는 말투.
위치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해서 하멜은 신경질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대상을 찾았다.
“어떤 놈이냐?”
공교롭게도 대상은 뒤에 있었던 모양. 그는 하멜의 뒤통수에 코를 대고 바짝 다가섰다.
“쉿, 그렇게 큰 소리를 내면 곤란하지, 안 그래?”
하멜에게는 온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로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보통 녀석이 아니다. 섣불리 행동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하멜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뒤에 있는 대상이 방심한 틈을 타 큰 걸음으로 확 거리를 벌리고는 단숨에 등을 돌렸다.
그곳엔 한 남자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외람되게도 그는 더 이상 마주쳐서는 안 될 자였다.
거북함까지 안겨 주는 흑발에 흑안의 악마. 그게 그였다.
기실 하멜이 보고 있는 대상은 다름 아닌 오딘이었다.
원래 경고를 했던 자는 음영대의 대주였던 켈타스 후작이었는데, 오딘이 발걸음을 한 것이다. 이 같은 행차는 잠시나마 엘레느를 피하기 위해서라고 보아야 했다.
오딘은 하멜이 앉아 있던 철제 의자의 모서리를 툭툭 쳐 가며 이죽거렸다.
“사람 머리통을 부수는 것이 재미있나 보지? 네 녀석의 머리통도 그리 단단하진 않던데.”
당시 하멜은 오딘의 손아귀에 광대뼈가 함몰되었고, 이빨은 사정없이 깨져 버렸었다. 지금 이빨은 미스릴 원석을 특별히 가공해서 해 넣은 것이었다.
브란트에서의 일은 하멜에게 있어서 악몽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가위에 눌린 것처럼 자다가도 식은땀을 흘리며 벌떡벌떡 일어난 것이 몇 번이었던가.
두려워서 그렇게 기피하고 멀리했던 인간이 눈앞에 있다. 사지가 벌벌 떨리고, 입 안의 침이 바싹바싹 말라갔다.
제국의 태자와 성황 카르만, 템플 기사단장 오르골, 그 외 고위 사제들과 명망 있는 기사들까지 함께한 자리에서도 그 하나를 어쩌지 못했다. 더군다나 지금은 혼자가 아닌가.
머릿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꿩고기라도 삶아먹은 모양이지? 왜 말이 없어?”
불평하는 오딘의 말이 들린 후에야 하멜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다, 당신과 연관된 자라는 걸 몰랐소.”
“몰랐다?”
“그렇소. 정말이오.”
수치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 인간은 피하고 봐야 한다.
어떻게든 이 사태를 넘겨야 한다는 생각이 하멜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오딘은 그냥 물러가줄 태세가 아니었다.
“그래도 이미 벌어진 일, 되돌릴 순 없잖아. 안 그래?”
“그놈은 내가 손을 쓰기도 전에 스스로 자결했소. 사체를 더럽힌 것이 잘못이라면, 그리고 당신이 원한다면 고위 사제에게 말해 최대한 원형대로 복구시켜 주겠소.”
오딘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속내가 여전히 불쾌한 것이다.
저놈의 기분을 되돌리는 방법이 없겠다 싶어 하멜은 검에 손을 가져갈까 망설였지만,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았다.
‘크, 크윽…….’
오가던 손이 힘없이 처졌다. 포기하는 게 옳았다.
“원하는 게 뭐요?”
“그 다리.”
하멜은 눈을 치떴다.
정말 심보 한번 고약했다. 이미 죽은 자의 머리를 바쉈다고 해서 제 다리를 내놓으라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억울함이 앞섰던지 하멜의 목소리가 커지고 눈알엔 핏대가 섰다.
“이건 너무한 처사가 아니오! 따지고 보면 피해자는 우리요. 소리도 없이 우리 진영으로 들어와 수급을 베어간 것은 당신네들이란 말이오.”
그 때문이었을까. 조심스레 막사 밖에서 안녕을 물어왔다.
“경비대장입니다. 별고 있으신지요?”
하멜은 머리를 굴려 보았다. 하지만 도움을 청할 일이 아니었다.
경비대장이 아니라 신성 제국의 템플 기사단장이 온다 해도 내줄 대답은 하나였다.
“꿈을 꿨다. 별일 아니니 물러가라.”
“알겠사옵니다.”
오딘은 차게 웃었다.
“그래도 썩 바보는 아니군.”
밖이 조용해져서야 하멜은 결심한 바를 내보였다.
“평생을 검술에 정진해왔소. 당신의 요구는 천부당만부당하오. 다리를 내줄 바에는 차라리 내 목숨을 주겠소.”
스르릉.
하멜의 손에 의해 검갑을 빠져나오는 검이 부드러운 마찰음을 흘렸다.
“기왕 죽을 바엔 명예로운 죽음을 맞는 게 낫겠지.”
검술가에게 있어 명예로운 죽음이란 자신보다 뛰어난 상대와 싸우다 죽는 것이었다.
상대는 손색이 없었다. 아니, 과하기까지 했다.
저자와 검이라도 마주치고 죽음을 맞이한다면, 생에 대한 미련은 남을지언정 한 점 부끄럽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스산한 미소가 그를 허락지 않았다.
“선택은 없다.”
손을 쓸 새도 없이 몸에 붙었다 떨어지는 저치의 손.
하멜은 괴이한 기분이 들었다.
몸이 포대 자루 안으로 집어넣어져, 반항을 해야 하는데도 의지와 달리 꿈쩍도 하질 않는다.
그는 분에 받친 목소리로 항의했다.
“무, 무슨 짓을 한 거냐?”
“알 것 없어.”
촤악!
말을 마치는 즉시 차양이 찢겨 나가며, 오딘은 하멜을 집어넣은 포대 자루를 어깨에 둘러멘 상태로 신성 제국 진영에서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가물가물해져 가는 의식 속에 철창 밖 2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분께선 애 다루듯 하셨다지만, 위험한 인물이야. 템플 나이트라고. 그것도 소드마스터의 무력을 지닌. 그러니 각별히 조심해야 해. 허우대만 멀쩡해 보이는 게 아니라고~”
“소드마스터 템플 나이트?”
과연 야외 수용소 밖에서 간수 둘이 주고받는 대화였다.
이 소리는 여지없이 하멜의 귓가로 파고들었고, 대상이 깨어났음을 자각하지 못했던지 둘은 거리낌 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앞서 아레인의 두 귀족 분들께서도 소드마스터라고 하지 않았었나?”
“아암, 그랬지.”
“그분들보다 더 무서운 분은 이번에 아레인에서 새로 오셨다는 후작님일 거고, 또 그보다 더 무서운 분은 아레인의 하늘이라는 오딘 님이겠지? 주변에 무서운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아?”
“낸들 알까? 하여간 난 자러 가야 하니 수시로 확인해보라고.”
새로 배정된 듯한, 막 교대를 한 간수는 식사를 손에 받쳐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달빛에 드러난 하멜은 목에 칼을 쓰고 있었으며 발목에는 어른의 머리통보다도 큰 쇠공을 달고 있었다.
더더군다나 팔목에 채워진 팔찌는 체내의 마나를 흩뜨리는 효과가 있었다.
간수는 하멜의 눈치를 살피며 가져온 식사를 매우 조심스럽게 그의 앞쪽으로 들이밀고는 잽싸게 빠졌다. 그 행동이 마치 맹수를 처음 접한 겁 많은 조련사와 비견될 정도였다.
그러나 물러섰을 땐 언제 그랬냐는 듯 당당했다.
“식사요. 손은 움직일 수 있을 테니 알아서 먹으슈.”
눈앞의 식사는 하멜의 관심 밖이었다.
비몽사몽간에 하멜은 몇 날 며칠을 보냈다. 오딘이라는 그자가 다른 흑안에 흑발의 사내를 데리고 와 자신에게 몹쓸 장난질을 친 것이 주된 이유였다.
오딘이 손을 썼을 땐 뼈마디와 근육이 뒤틀어지며 몸은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면서도 살아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텨 냈다.
제법 버텼던 게 더 큰 화근이 되었다.
더욱 심하게 손을 쓴 탓에 결국 하멜은 실신했고, 간수들이 미음을 떠먹여 준 덕분에 지금껏 멀쩡할 수 있었다.
“내가 며칠이나 이러고 있었지?”
못할 말도 아니었기에 선심이나 쓰는 셈치고 간수는 손가락으로 셈을 해보더니 말을 이었다.
“글쎄? 한 일주일 정도?”
하멜의 머릿속은 지극히도 혼란스러웠다. 그토록 두려워하던 대상이 로만 연합과 연관되어 있다니.
‘제길,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
이는 본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군사를 둘로 나눈 것. 그것은 신성 제국에 치명타를 안겨 줄 수도 있었다.
게다가 간수들의 얘기를 들은 후다. 분명 그들은 아레인을 거론했다.
아레인이라면 비센 추기경이 상당수의 전력을 편성해 내려보냈다는 곳이 아니던가.
작금의 사태는 진행형이었다.
로만 연합의 힘이 신성 제국에 미치지 못한다 한들, 어디까지나 조력자가 없을 때의 얘기였다.
‘자칫하면 신성 제국이 위태롭다…….’
불현듯 드는 직감이었다.
사색이 되어버린 하멜을 멀뚱히 보던 간수는 괜한 일로 고민하기 싫다는 듯 돌아섰다.
“다 먹으면 부르슈.”
간수가 철창 밖을 빠져나가는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상부에 어떻게 해서든 경각심을 일깨워주어야 한다. 유야무야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끼릭.
힘이 가해질수록 하멜의 손목을 옥죄는 팔찌가 서서히 어그러졌다. 그 대가로 심줄이 툭툭 불거지며 피가 쏠린 얼굴은 붉다 못해 터질 듯 보였다.
그러나 하멜은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서 끝낼 수는 없다… 끄으으…….’
근육이 팽창하며 더욱 단단해지더니, 곧 왼손의 팔찌가 힘을 견디다 못해 부서졌다.
꽈작!
괴력이었다.
보통 상위 기사들의 방패를 만들 때 쓰이는 아다만티움으로 만든 팔찌가 육신의 힘만으로 부서진 것이다.
이는 하멜에게도 상당히 버거운 일이었던지 그는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후우~”
하멜은 목에 뒤집어쓴 칼을 우악스럽게 쪼갠 후, 마나의 힘을 빌려서 오른손에 있는 팔찌 또한 끊어버렸다. 남은 것이라고는 이동을 제약하는 쇠사슬에 달린 쇠공이었다.
하멜은 쇠공 대신 쇠사슬을 택했다.
“끄으응.”
오우거가 따로 없었다. 제법 두꺼운 쇠사슬이 맥없이 늘어졌다. 범인이라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러나 하멜은 자신의 힘을 과신하지 않았다. 이곳엔 훨씬 무서운 위인이 있기 때문이다.
우연찮게도 간수와 눈이 마주쳤다.
간수는 주변을 휘 둘러보고는 창살 너머로 다시 그를 살피는 중이었다.
하지만 살기 가득한 눈을 접하자 놀람과 두려움이 극에 달한 나머지 두 다리를 벌벌 떨 뿐 소리 지를 엄두도 못 내었다.
하멜은 싸늘한 눈초리로 간수를 내다보다가 돌연 등을 돌렸다. 그리곤 돌 벽으로 직진했다.
쿵! 쿠웅! 꽝!
세 번의 부딪침 끝에 돌 벽은 와르르 무너졌다.
큼지막하게 뚫린 구멍 사이로 하멜이 야멸치게 달려가고 있었다.
꽤 큰 소음이 났기에 여러 막사 안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리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의 간수를 대신해 현장을 목격한 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놈이 도망친다!”
“잡아라!”
가르텐 백작 역시 검을 빼어든 채 황급히 막사 밖을 빠져나왔다.
“웬 소란이냐?”
“죄수가 도망치고 있습니다.”
손이 가리킨 곳에는 거구의 사내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여러 기사들이 쫓는 중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하멜과 그들의 거리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뒤늦게 말을 내와 쫓는 기사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야외 수용소에 하멜 그 말고 저만한 거구가 있었던가. 가르텐은 그 대상을 추측함에 어렵지 않았다.
“어찌 된 일이냐? 어떻게 저자가 탈옥을 했단 말이냐?”
간수는 두 기사에게 붙들려 와서도 억울함이 앞섰던지 죽을상을 썼다.
“그, 그가 스스로 포박을 풀고 도망쳤습니다.”
“그걸 지금 핑계라고 대느냐?”
상식적으로 이해 불가한 상황이었다.
아다만티움이 쉽게 끊어질 금속이던가? 그 또한 마나를 흩어버리는 아티팩트이다. 해서 가르텐 백작은 따로 간수를 세워둘 필요도 없다고 여겼었다.
간수가 지금 하는 말이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지 가르텐 백작은 이를 추궁하려고만 나섰다.
“허언일 경우엔 네 목숨이 온전치 못할 것이니라.”
그러던 중 다른 간수들이 증거품들을 들고 왔다.
처연하게 늘어진 아다만티움 팔찌 2개와 죄수의 목에 씌웠던 물푸레나무로 만든 칼, 그리고 부담스러워 보이는 무게의 쇠공이 그것이었다.
증거품들을 보자 더 이상 간수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가르텐은 두 손으로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쌌다.
이어지는 탄식.
“아아, 내 불찰이다, 내 불찰이야.”
소드마스터의 무력을 지닌 템플 나이트를 놓쳤다는 것보다 미안함이 앞섰다. 정말이지 그들을 볼 낯이 없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마침 아레인의 켈타스 후작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가르텐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를 고민했다.
“변고가 생긴 모양이오.”
켈타스의 물음에 가르텐은 도무지 안 열리는 입을 억지로 뗐다.
“면목이 없습니다. 하멜이 탈옥을 했습니다.”
하멜이 누구던가. 켈타스 후작이 오래도록 공을 들여 잡을 계획을 세웠던 인물이 아니던가.
주위에 쳐진 알람 마법 때문에 켈타스 후작 또한 잠입에 애를 먹었었다고 한다.
수하의 죽음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적잖이 기분이 상했던 그가 물러서게 된 계기는 오딘이 이 일을 자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켈타스는 도리어 가르텐을 위로했다.
“안색이 무거워 보이는구려. 이미 놓친 걸 어쩌겠소. 연이 있다면 후에 또 만나게 될 것이니, 그리 마음 두지 마시오.”
음영대가 활약한 이래, 로만 연합은 크고 작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물론 그것조차 전방과 측방에 위치한 가인 자작과 헤르 남작이 지휘하는 질풍대의 활약을 덧입어서였다.
고마움을 이루 말할 수 없는 때에 실책으로 인해 귀한 인질을 놓치고 말았으니 어찌 미안하지 아니할까.
게다가 인질을 잡아온 당사자는 이 자리에 없어 사과를 할 수도 없는 판국이다.
오딘은 바리톤의 일을 접하고 함께 온 아그리스와 어젯밤 이곳을 떠났던 것이다.
켈타스는 자괴감에 물든 가르텐을 독려한다고 애를 썼다.
사실 문제는 하멜이 아니었다. 향후 그가 불러올 파장에 있었다.
켈타스는 벌써부터 그 부분을 걱정하고 있었다.
* * *
하멜에게 저들의 추격을 따돌리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며칠이나 감금되어 있었다지만 그 본신의 힘이 어디 간 건 아니었으므로.
평소 그를 접하던 고위 사제가 기력이 쇠해 돌아온 그를 보고 허둥대며 물었다.
“어찌 된 일입니까?”
“긴말할 거 없다. 지휘관들을 설득하여 군을 물려라.”
“구, 군을 물리다니요?”
하멜의 명령은 고위 사제가 가타부타할 일이 아니었다. 권한 밖이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하멜은 그의 입장은 헤아려 주지도 않고 호통을 쳤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하멜은 급박함을 느꼈다. 때문에 일일이 지휘관들을 만나 설득할 시간적 여유조차 느끼질 못했던 것이다.
화를 내놓고 보니 딴엔 미안함이 들었던지, 조금 전보다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뒷일을 부탁한다. 난 황궁으로 가겠다.”
“예에? 황궁으로 가시다니요?”
당연한 질문을 한 것인데 하멜은 받아줄 여유가 없는지 그를 다그쳤다.
“잡설 늘어놓지 마라. 한시가 급하다. 성황께 작금의 현실을 알려 드려야 한다.”
사정을 헤아리지 못한 고위 신관으로서는 알 수 없는 말들투성이였다.
“하오나 전 지금의 사정을 인지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지휘관들을 설득한단 말입니까?”
하멜은 인상을 잔뜩 구겼다. 그러나 성질만 앞서가서는 될 일이 아니어서 군을 물려야 하는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잘 들어라. 우리가 싸우는 상대는 로만 연합만이 아니다. 가장 무서운 적이 저들의 뒤에서 혀를 날름거리며 버티고 있다.”
의아한 나머지 고위 신관은 그 말을 되새겨 보았다.
‘가장 무서운 적……? 저들은 제국이나 신흥 제국이라도 등에 업었단 말인가?’
더 이상 물었다가는 역정을 내거나 한 대 칠 기세여서 고위 신관은 생각을 갈무리하고 그의 요구 사항을 수용했다.
“급박하시다 하시니 공간 이동 마법진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멜은 뒤를 잴 겨를이 없었다.
황궁으로 입궁한 후, 그는 급히 성황을 알현할 수 있기를 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려 반나절이 지날 때까지 고사를 지내야만 했다.
‘시급을 요하는 일이라고 알렸거늘, 뭐가 그리 바쁘기에…….’
그러나 성황을 알현하게 되었을 때 하멜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래도록 여색에 빠져 있던 탓인지 비센의 몸에서는 분 냄새가 진동을 했다. 무려 열 보나 거리를 둔 상태에서도 풍기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불쾌해진 기분을 피력할 순 없어 하멜은 절로 구겨지는 인상을 숨기기 위해 엎드린 자세 그대로 고개를 숙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신 하멜, 성황 폐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이렇게 찾아뵙길 청하였사옵니다!”
황좌에 앉은 비센은 못마땅해하는 기색이었다.
새로 거둔 이리스라는 여인과 있는 시간이 이 시간보단 소중할 것 같았다.
이리스는 카반의 울프 중 덴의 여자였다.
오딘에 의해 카반의 울프가 와해된 후, 그녀는 대륙을 떠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신성 제국의 황궁과 인접한 신전에 몸을 두게 되었는데, 우연찮게 비센이 이를 발견하게 되며 그녀를 거두게 된 것이다.
애초부터 이는 이리스의 계획이었다.
원래 그녀는 몸을 청결히 하며 신을 떠받드는 신관들이나 골려 줄 요량으로 몸을 위탁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성황이란 작자가 찾아왔는데, 이리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담하게 그를 유혹했다. 그의 앞에서 넘어진 것하며, 엉겁결에 뻗은 손이 비센의 사타구니를 부여잡은 것은 모두 우연을 가장한 연극이었다.
대다수의 남자가 그처럼 쉬웠다. 단 한 남자만을 제외하고…….
몸은 이곳에 있지만, 그녀의 마음은 아직 정복하지 못한 한 남자를 향해 있었다.
바로 오딘이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성황을 업게 되었으니, 이제 그를 찾아 억지로라도 자신에게 마음을 기울이게 만드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비센은 살그머니 열린 문틈 사이에서 눈을 호리는 이리스에게 관심이 쏠려 있었다. 충언을 하겠다는 신하를 제쳐 두고 말이다.
“말하라.”
대충 들어보고 끝낼 심산이었다. 하지만 비센의 속내를 모르는 하멜은 장황하게 말을 이어갔다.
“오딘이라는 자가 있사옵니다. 성황 폐하께서도 일전 브란트에서의 일을 기억하시리라 사료됩니다. 그자가 로만을 돕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성황께옵서 징벌을 명하신 아레인에 거취를 두고 있는 자이기도 하옵니다. 간청하옵건대 성황 폐하, 이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옵니다. 부디 현명하신 용단으로…….”
말이 길어지자 과연 비센을 짜증을 부렸다.
“그만, 그만!”
붉은 카펫 위에 납작 웅크린 하멜은 비센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싫은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하나도 못 알아먹겠다. 브란트가 어째? 네놈들이 행했던 일을 내가 어떻게 알까? 요점이 뭐냐? 요점이!”
애당초 성황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 자리가 싫음을 대놓고 드러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하멜은 그의 귀를 열어주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간절한 목소리로 성토했다.
“성황 폐하, 신성 제국의 존망이 걸려 있는 일일지도 모르옵니다. 부디 제 말을 새겨들어주시옵소서.”
“존망? 지나가던 개가 웃겠구나. 네놈이 무얼 잘못 먹어도 단단히 잘못 처먹었구나. 여봐라!”
말미에 가서는 목소리가 드세졌다.
“네, 폐하!”
기둥 뒤에 있던 템플 나이트들이 우렁찬 대답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이자를 당장 끌어내 하옥하라! 내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풀어줘서 안 될 것이니라.”
“폐, 폐하…….”
하멜은 황망해하며 눈알을 굴렸다.
비센은 주저하는 템플 나이트들을 노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끌어내지 않고!”
그제야 템플 나이트들이 하멜을 향해 다가섰다. 그 모습에 하멜은 더욱 다급해져 쉰 목소리를 냈다.
“정말 위험한 자이옵니다. 그를 무시하신다면 장차 큰 재앙으로 다가올 수도 있사옵니다.”
더 이상 템플 나이트들은 하멜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원래부터 대전 안에 배치된 그들은 비센을 따르던 자들이었으므로.
양팔이 붙들려 끌려가면서도 하멜은 비센의 눈을 직시하며 속으로나마 탄식을 내뱉었다.
‘도대체 무엇이 성황의 눈을 어둡게 만들었단 말인가? 내 그를 따르지 않았다만, 지금의 일은 참으로 애통하구나. 저를 위해 해주는 말인지도 모르고…….’
신성 제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위태하다 싶으면 제 한 몸 빼내면 그만일 일이었다. 그를 무릅쓰고 청한 독대가 아닌가.
여기서 끝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유구한 역사 동안 대륙에 빛을 낸 신성 제국이 망가지는 것은 정녕 원하지 않았다.
“이거 놓아라! 놓으라고 하지 않느냐!”
하멜은 발악하듯 팔을 휘둘러 자신을 구속한 자들을 뿌리쳐 냈다. 그리고서 대전 안이 울릴 정도로 웅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신 하멜, 성황 폐하께서 어떤 결정을 내리시든 간에 묵묵히 따르겠사옵니다. 대신에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아레인은 결코 쉬운 적이 아니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힘을 보태고 있는 로만도 그렇사옵니다. 지금의 전력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사옵니다. 정 의심스러우시다면 가까운 접경지대에서 대치하고 있는 지휘관들에게 전후 사정을 들어보시옵소서.”
이 말조차 귀찮았던지 비센은 고개를 돌린 채 손목을 털었다. 데리고 가라는 얘기다.
그를 데리고 감으로써 더 이상 대전 안을 시끄럽게 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가 남기고 간 말은 다행히 귀에 와 닿았던지, 비센의 신경을 계속 거슬렸다.
“로만이 쉬운 상대가 아니라고? 내가 네놈들 머리 위에 있다. 로만 연합에 대해 알면 내가 훨씬 더 잘 알 것이다. 그놈들이 뭐가 대수라고.”
그리고 일어서 문을 보았을 때 이리스는 없었다. 그 점이 비센의 발을 잠시나마 대전에 붙들게 했다.
“여봐라.”
템플 기사단장의 굵직한 목소리가 답했다.
“네, 폐하.”
“전장에 들러 그의 말을 확인해라. 만일 하멜의 말이 사실이라면 로만 근처에 증원하도록.”
“명을 받들겠나이다.”
비센의 명령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쉽게 얻은 권력이어서인지 공을 들여 지킬 생각은 안 하고, 쉽게만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