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바와 파르티잔
어둑함이 가시지 않은 새벽.
높이 뜬 달은 희뿌연 구름들에 가려져 있었고, 사위마저 캄캄해 대상의 형체는 불분명해 보였다.
왼손에 길게 늘어뜨린 작대기는 바닥에 닿을 듯 보였으며, 오른손에 든 자루에는 무언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언뜻 보면 음산하기 그지없었다.
스슥, 스스슥.
이를 목격한 것이 제4연무장의 관리인이었다.
덜 떠진 눈을 비볐음에도 인영의 윤곽이 드러나질 않는지 그가 대상을 향해 물었다.
“거, 뉘시오?”
목소리에 인영은 뒤늦게 당황하나 싶더니 민첩하게 다가와 관리인의 입을 틀어막았다.
“쉿.”
소리가 새는 것을 꺼려했음이라.
관리인이 경각심을 곤두세우기도 전,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요, 나.”
틀어 막힌 입에서 얕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조, 조르바 훈련관?”
“그렇소.”
한때는 아레인의 자작이었으며 더 나은 미래를 꿈꿨던 조르바. 그는 마땅한 직책조차 없이 아직도 훈련관이라고만 불리고 있었다.
관리인은 억압에서 풀려났지만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물었다.
“꼭두새벽에 여기서 무얼 하시는 게요?”
“보면 모르오? 제사 연무장 앞은 나도 사용하는 곳이니 잔 쓰레기나 치우는 거지.”
“청소라면 사람들을 시키면 되질 않소.”
조르바는 말아 쥔 손가락 중 검지만 치켜세우고는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들이 하는 것과 내가 하는 것은 다르지.”
조르바가 직접 청소를 하는 것은 자신이 일한 흔적을 남겨 놓기 위해서였다. 그렇게라도 해야 보람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 말을 관리인 또한 못 알아듣지는 않았다.
언젠가 그와 술자리를 가진 후에 알게 된 사연이었다.
조르바는 어떤 식으로건 아레인에 기여를 하고 싶어 했다. 그것이 이런 허드렛일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 그렇다고 청소를 직접…….”
언성이 높아지려 하자 조르바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의를 주었다.
“소리를 낮추시오. 무사들이 깨어날 수도 있잖소. 기왕 일어난 김에 좀 걷지 않겠소?”
관리인은 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수풀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면서도 조르바는 통행에 방해가 될 만한 가지들을 꺾어놓고 발에 걸리는 돌들을 길 밖으로 밀어냈다. 그간 유독 울퉁불퉁한 길이 평평해진 것은 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조르바의 노력이 있어서였다.
이를 보자니 관리인은 적잖이 감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못내 불쌍해 보였다.
“당신도 참 비운이오.”
조르바는 풋 웃음을 지었다.
“이제 더 이상 일신의 영달 따위에는 관심이 없소. 그 얼마나 미련한 짓이었는가를 새삼 깨달았소.”
“그래도 한때는 떵떵거리며 살았을 텐데, 이후에 힘들지 않았소?”
“안 힘들었다면 거짓말이겠지. 대신에 귀중한 것을 깨달았소.”
“귀중한 것?”
“그렇소. 낮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더군.”
대화 도중에도 조르바의 손과 발은 능숙하게 움직이며 주위를 정돈했다. 간혹 무사들이 흘리고 간 소지품들이 있다면 한쪽으로 모아두었다.
“듣기 싫은 소리일 수도 있지만, 이런 일을 한다고 해서 그분께서 알아주시는 것도 아니지 않소.”
관리인의 말에 마침 조르바가 뻑적지근한 허리를 펴며 숨을 돌리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 절망 속에 한 가지 깨닫게 된 것이 있소. 하늘을 바라보았지. 내 기분 따위에는 아랑곳 않고 예외 없이 푸르더군. 실망스러운 나머지 시선이 아래로 내려왔는데 저 나무를 보게 되었소.”
그가 가리킨 건 제4연무장을 대표하는 커다란 나무였다.
“저 나무는 말이오,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 제 역할을 다하고 있소. 다른 나무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지. 이 쓰레기들처럼 정화를 위해 걸러져야 할 것들은 있지만, 묵묵히 제자리에서 역할을 다하는 것들처럼 세상에 필요한 존재가 어디 있겠소?”
조르바는 진심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관리인에게도 남다른 감회를 불러일으켜 아쉬움까지 남게 했다.
‘이 사람은 정말 많이도 달라졌구나. 오딘 님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좋을 것을…….’
그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난 말이오, 근래 들어서만큼이나 아레인이라는 이름에 자부심을 가진 적이 없소이다. 정말 나 자신을 위하는 것만이 만족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소. 내가 나무가 되고 땅이 되어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고, 그들을 지켜보는 것도 하나의 만족이 아니겠소? 그들에게 내 존재를 인정받고 부러움을 사는 게 다가 아니라는 얘기지.”
구구절절이 와 닿는 말이었다. 이에서 관리인 또한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
말을 마치고 조르바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대다수의 귀족들은 자신들이 죽을 때까지 귀족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변고가 일어나 노예로 팔려가더라도 그 생각을 바꾸기란 쉽지가 않다. 해서 몰락한 귀족들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빈번했다.
그러나 조르바는 그렇지 않았다.
관리인이 기사들이나 지인들로부터 들었던 말에 의하면 조르바의 인생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꿋꿋이 버텨 냈으며, 그것으로도 모자라 깨우침을 얻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가.
‘만일 내가 그와 같은 환경을 거쳤다면 어땠을까?’
존경심이 절로 일어 관리인은 조르바에게 바짝 다가가 그의 일을 거들었다.
“훈련관, 내 당신과 둘이 있을 때만은 말을 높여도 되겠소?”
조르바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허허, 그 무슨 소리를… 관두시오.”
전에 없이 친해진 분위기였다.
그리고 멀리서 그런 두 사람을 지그시 보며 흡족히 웃는 얼굴이 있었으니, 오딘이었다.
* * *
행운은 종종 뜻하지 않을 때 찾아온다고들 한다.
지금 조르바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는 휘둥그레 눈을 뜬 채, 오딘의 말이 도통 믿기지 않아 되묻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자, 자작이라굽쇼?”
“그래.”
“다, 당치도 않습니다. 부디 명을 거둬주시옵소서.”
“아냐, 정말 잘할 것 같아서 그래. 설마 실망이야 시키겠어?”
예전이었다면 눈시울을 적실 정도로 고마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미약하나마 조르바는 석가모니가 겪었다던 해탈에 다가간 상태였으니……. 도리어 일방적으로 작위를 쥐어주려 하니 혼란이 가중되었다.
“하, 하오나 오딘 님, 전 지금 일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제 더는 권력을 탐하지도 않을뿐더러…….”
너무나 과한 것을 주려 하니 부담이 되어서 했던 말인데, 오딘의 눈이 실쭉해지니 조르바의 말끝은 자동적으로 흐려져 버렸다.
잔뜩 기가 움츠러든 틈을 타 오딘은 자신의 결정에 대못을 박아버렸다.
“청렴하라느니, 결백하라느니 하는 말은 안 하겠다. 부패가 없다면 좋겠지만, 해먹더라도 적당히만 해먹어라. 그리고 양심에 찔리거든 더 열심히 일하면 되는 거야. 알았어?”
선심이나 쓴다는 양 하는 얘기.
조르바는 굽실거려 가며 일단 대답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네, 네.”
과거 조르바는 재물을 탐하고 권력을 탐했다. 그러나 현재에 해당하는 얘긴 아니었다. 그는 정말 현실에 만족하며 나무 같은 삶을 살아보리라 다짐했지 않은가.
이대로라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떨어진 작위. 물론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했던 대로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될 것이므로.
따져 보면 오딘에게도 이익이 되는 일이었다.
단언컨대 바닥을 기어본 경험은 아랫사람들의 입장을 헤아리는 데 효과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작금, 조르바가 품고 있는 마음도 그와 동일했다.
오딘이 자리를 뜬 후에도 조르바는 창문 너머로 멍하니 하늘만 응시했다. 두둥실 떠가는 구름들이 자신을 보며 축하라도 해주는 것 같았다.
“허허, 허허허…….”
이제는 근처에 두었던 환경이 조금은 멀어질 수도 있다. 좋으면서도 허탈한 웃음이 자꾸만 입 주변에서 맴돌았다.
* * *
가르텐 백작은 켈타스 후작 휘하의 음영부대주가 가져온 보자기로 감싼 나무 상자들을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중이었다.
나무 상자는 총 7개였다.
“이게 무엇입니까?”
“열어보시지요.”
선뜻 손이 가질 않았지만, 마냥 망설이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가르텐은 주섬주섬 묶인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무 상자의 덮개를 열었을 때, 가르텐은 미간이 찌푸려지며 눈빛은 진지해졌다. 상자 안에는 수급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 이게…….”
“그들이 맞습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당혹감을 금치 못하고 가르텐은 재깍 문밖을 향해 소릴 높였다.
“여봐라, 밖에 누구 없느냐?”
차양이 걷히며 경비를 서고 있던 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부르셨사옵니까?”
“지휘관 분들을 막사로 모셔 오너라. 어서!”
“알겠사옵니다.”
고개를 숙이며 대답을 마친 경비는 차양을 원상태로 돌려놓을 생각도 못하고 즉시 움직였다.
남은 매듭들을 풀어보느라 가르텐의 손이 바빠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곱의 덮개들이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널렸다. 그중 몇은 가르텐의 눈에도 익은 자들의 수급이었다.
한동안 가르텐은 돌처럼 굳어 충격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인근의 막사에 머무르고 있던 지휘관들이 하나 둘씩 들어왔다.
“찾으셨사옵니까.”
“무슨 일이오, 백작?”
가르텐의 손이 벌벌 떨리고 있어 음영부대주가 그를 대신해 수급들을 상자에서 꺼내 펼쳐진 보자기 위로 늘어놓았다.
지휘관들은 하나같이 기겁하는 모양새였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누군가가 저들의 수급을 베어왔다는 것. 그것이 이들에게 충격을 떠안기고 있었다.
음영부대주가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들이 맞습니까?”
“마, 맞소.”
“맞습니다.”
틀림없었다. 요 근래 공국 연합에 패전을 안겨 주었던 원인!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은 발군의 성기사 넷과 사제 셋의 수급이었다.
“죄송합니다. 나머지 한 명의 수급은 거두어오질 못했습니다.”
부족함을 시인하는 음영부대주의 말에 지휘관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손사래를 쳤다.
“다, 당치도 않습니다. 이것도 감지덕지요.”
“아닙니다. 약속한 바는 이뤄야 하는 법. 추이를 지켜본 후에 계속 문제가 된다면 제가 직접 거둬오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놀래기만 할 뿐이었다.
음영대에 대해서는 가르텐 백작을 통해 대충 듣기는 했다.
자연히 제일 우두머리는 스스로를 음영대주라 일컫는 켈타스 후작이고, 그 아래에 음영부대주가 있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는 말은 두 사람은 이 암살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얘기와 같다.
이로 미루어볼 때 가르텐 백작을 포함한 지휘관들은 음영대가 얼마나 무서운 단체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물어도 되겠소? 이 일에 얼마나 투입된 것이오?”
아레인의 전력을 추정하고자 함이었다. 아니 그 일부, 음영대의 힘을 가늠하고자 함이라 봐야 했다.
타 지휘관이 물었다면 대답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지만, 지금의 질문은 아레인과 직결된 로만의 가르텐 백작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음영부대주는 성심껏 답했다.
“권한 밖이라 자세한 것은 일러드리기 힘이 듭니다. 다만, 일 개 조가 투입되었습니다.”
“일 개 조라 함은?”
“열 명입니다.”
졸지에 지휘관들의 얼굴이 샛노래졌다.
“여, 열 명? 고작 열 명으로 이들의 수급을 거둬왔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한 지휘관은 눈으로 보면서도 믿질 못하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익스퍼트 최상급도 있었을 텐데…….”
다른 지휘관이 한 수급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자가 검술이 특히 뛰어난 자 아니었소?”
“그런 것 같구려.”
“우린 이들이 어느 군영에 속해 있는지도 몰랐는데…….”
“그건 둘째 치고, 도대체 이들의 수급을 어떻게 가져온 겁니까?”
점점 더 자세한 것을 물어왔지만, 음영부대주는 그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급하질 않았다.
그러나 입을 닫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궁금해서 그러오. 알려 주실 순 없으시오?”
이렇게까지 나오니 뭐든 답은 내주어야 했다.
“야행을 틈탔습니다.”
“야행을 틈탔다? 어떻게 말이오?”
지휘관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그 삼엄한 경계를 뚫고 어떻게 저들의 목전까지 다가갔느냐이다.
밤이라 한들 발소리나 기척 정도는 새지 않겠는가. 저들이 보통내기들도 아닌 것을, 단 열 명으로 어떻게 수급을 거둬왔는지 쉬이 이해가 가질 않는 모양이었다.
분명 그랬다.
과거 음영대가 악명 높은 카반의 울프들을 상대할 때는 제 실력을 내지 못했다. 이들은 전투보다는 암살에 능했던 탓이다.
애초부터 오딘은 음영대를 암살에 특화된 단체로 만들었다. 때문에 음영대는 기척을 죽이고 소리 없이 접근하여 상대의 목숨을 앗는 것에서는 타 단체의 추종을 불허했다.
만일 이를 대답해준다고 해도 더 많은 질문이 쏟아질 기세였다. 말을 아껴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지 음영부대주는 양해를 구하는 쪽으로 대신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수 없으니, 이 점 너그럽게 받아들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휘관들이 계속 질문을 퍼부어대자 미안한 것은 가르텐 백작이었다. 그는 이를 수습해야 할 일말의 책임감을 느꼈다.
“하, 하하, 말씀하시기 곤란하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만 보챕시다.”
그제야 질문 공세가 멎어들었다.
왁자지껄 떠들던 입들이 다물어지자 막사 안은 무안할 정도의 정적이 흘렀다.
가르텐은 진땀을 뺀 후, 애써 화제를 돌렸다.
“우리를 대신해 힘든 일을 해주셨는데 감사부터 표하는 게 도리일 듯합니다.”
정말 지휘관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곧 서넛의 지휘관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고맙소.”
“고맙소이다.”
“우리가 아레인에 빚을 졌습니다.”
이쯤 되면 웃어주어도 괜찮을 것을, 음영부대주는 내내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별말씀을…….”
어쩌면 그 때문일지 몰랐다.
‘여우를 쫓으려고 호랑이를 끌어들인 게 아닐지…….’
이처럼 지휘관들 중 일부는 그 무심함에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 또한 음영대란 단체의 성격을 잘 알지 못했기에 벌어진 오해였다.
* * *
이 무렵, 맞은편 신성 제국의 진영에서는 난리가 났다. 인근에서 목이 사라진 일곱 구의 시신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시신들을 둘러싼 모두가 당혹해하고 있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음을 맞을 위인들은 아니었던 탓이다.
깔끔하게 잘려져 나간 목 부위를 제외하고 상처는 없어 보는 이들을 더욱 경악케 했다.
혼란을 잠재워줄 사람은 없었다.
뒤늦게 고위 신관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어, 어째서……?”
그가 보는 바와 같이 주검으로 변한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근래, 로만 연합과의 전투에서 전투를 주도했던 인물들이라는 점!
가벼이 볼 사안이 아니었다.
신성 제국의 병력은 로만 연합보다 수적으로 열세였다. 그를 만회하기 위해서 적 진영을 휘저을 정도의 실력자를 대동하는 것은 필수였다. 여기 4명의 성기사와 3명의 사제들은 상부에서 나름 신경을 써서 보내준 이들이었다.
고위 신관이 쉽사리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뒤편에서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곱게도 죽었군.”
시신들을 에워싼 무리들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며 좌우로 길을 터고 있었다.
워낙 거구였던 탓에 고위 신관은 고개만 돌려도 그 대상이 누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오셨습니까.”
고위 신관이 고개를 숙일 정도의 인물. 그는 템플 기사단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들 중 하나인 하멜이었다.
오르골이 인사불성 상태로 병석에 누워 있는 지금, 하멜 같은 실력자들의 두각은 더욱 드러났다.
비센이 카르만을 폐위시키고 성황으로 등극하며 운이 좋았던 것 중 하나가 바로 템플 기사단을 몸통째 집어삼켰다는 것이다. 하여, 카르만을 옹호하고 따르던 템플 나이트들 역시 고스란히 비센의 손아귀로 들어왔다.
하멜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센이 아레인에 더 많은 병력을 보낸 것은, 로만보다는 아레인에 대한 경각심이 커서였다.
그러나 로만 역시 얕잡아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간의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로만에도 아레인의 주력 일부가 주둔하고 있음이 밝혀진 판이었으므로.
특히 소드마스터 2명이 머물고 있음이 템플 나이트 일부를 보낸 계기가 되었다.
과연 하멜은 고위 신관의 인사를 묵살해버리는 거만함을 내보였다. 아랫사람들 앞에서 무시를 당한 꼴이라 고위 신관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인사를 받을 생각은 있기나 한 건지…….’
그의 기분은 아랑곳 않고 하멜의 관심은 오직 목 없는 시신들에게만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들의 죽음의 원인을 공들이지 않고 어렵지 않게 추측해냈다.
“암살이로군. 아마도 어쌔신이겠지?”
예측하지 못한 것을 풀어냈음에 고위 신관은 불쾌한 기분을 접어두고 물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몸 상태로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시체가 크게 흐트러져 있지 않다. 따로 발작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하멜은 몸을 숙여 한 시신의 목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예리한 검이다. 단번에 목을 끊었어. 소리도 없이 다가와 목을 베었다? 섬뜩한 놈들이군.”
의외였다. 고위 신관은 하멜이 저런 소리를 늘어놓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렇게 무서운 자들입니까?”
“세상에 암살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이들이 몇이나 될까? 잠을 잘 때, 볼일을 볼 때에도 그들은 생명을 노릴 수 있다. 하물며 죽은 녀석들도 가해자를 모를 만큼 기척을 죽이고 접근할 수 있는 자들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이건 실력의 문제가 아냐.”
무거워지는 신관의 표정을 보다 하멜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심각해질 필요는 없다. 허술한 경계가 원인이었을 터. 주의한다면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신관은 그의 말에도 난색을 표했다.
당연한 얘기였다. 하지만 죽은 자들을 어떻게 되살린다는 말인가. 다시 저만한 인재의 지원을 요청한다면 무능하다는 질책을 면키는 어려울 것임은 불을 보듯 훤하다. 문제는 당장이라는 얘기다.
뜻밖에도 하멜이 그를 자청하고 나섰다.
“증원은 내가 요청할 테니 무리수를 둘 필요는 없다. 우선은 간을 봐야지. 그 녀석들이 모습을 드러낼 때 템플 나이트도 움직일 것이다.”
고위 신관에게는 너무 고마운 말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멜이 거론한 그 녀석들이란 아레인의 소드마스터들이었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미리 이쪽의 전력을 보일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그동안 미리 로만 연합의 떨거지들의 수를 줄이는 게 하멜이 속한 이 진영의 계책이었다.
단지 그가 크게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었다.
저들의 목숨을 앗아간 음영대를 과소평가한 것과 그들이 속한 아레인에 무시무시한 대상이 있다는 것을 몰랐음이다.
전혀 짐작치도 못한 것!
그것은 하멜 자신에게 손도 까딱하지 못할 정도의 무력감과 치욕을 안겨 주었던 오딘이 아레인의 수장이라는 것을 뜻했다. 이는 성황이었던 카르만과 작금의 신성 제국의 크나큰 실책이었다.
앞서 엠팔레스 신전에 들렀던 리먼의 뒤를 캤다면, 그리고 그 바리톤과 아레인의 관계를 조사해보았다면 지금처럼 섣불리 전쟁을 벌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당시 브란트에서 그와 마주쳤던 카르만과 하멜, 그 여파로 식물인간이 되어 있는 오르골 또한 오딘이 아레인의 하늘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 그 짐은 비센에게 고스란히 떠넘겨졌다.
만약에 그 남자, 즉 오딘이 배후라는 것을 알았다면 하멜은 지금처럼 으스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마땅히 두려워하며 작금의 성황 비센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어 보다 신중한 판단을 내려 주기를 성토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던 까닭에 저들의 진영을 향한 하멜의 눈은 오만한 빛을 풍기고 있었다.
* * *
역시나 부작용이 따랐다.
오딘으로부터 네 번째의 쇠침을 맞은 파르티잔은 그 부작용으로 입이 돌아가 생활에 지장을 겪었고, 남들의 눈초리를 의식하게 되었다.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정상인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았다. 이 부작용은 전과 달리 증세가 더 악화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이대로라면 입이 한쪽으로 돌아간 채 굳어버릴지도 모른다. 해서 신전을 찾아가 치료를 부탁할까도 고민해보았지만 쉬이 엄두가 나질 않았다.
치료를 하게 된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엔 애꿎은 돈만 날리게 될 일.
결심이 서질 않았던 탓에 당장엔 여관의 방구석에 콕 틀어박히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좀이 쑤시는 건 둘째 치고 여관비도 걱정이었다.
늘어가지는 못할망정 줄어드는 돈을 보는 건 마음이 쓰리는 일이었다.
“췌, 이뤄단!언 가 이 바닥날 텐뒈(쳇, 이러단 언젠가 돈이 바닥날 텐데)…….”
마르크 일행으로부터 받은 돈은 아직 유효했다.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는 현재 지닌 것보다도 많은 돈을 거머쥐었던 파르티잔이었지만, 어디까지나 과거지사. 작금의 팔자에 이 정도의 돈을 수중에 들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감지덕지였다.
그러나 쥐고 있는 게 쥐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촌구석에 집을 구해 근근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면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농사를 짓는다는 게 쉽지도 않을뿐더러 일이 고되다.
자고로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법.
입이 돌아가 버렸으니 밥벌이 수단인 마법은 사용할 수도 없다. 자연히 밑 빠진 독에 담긴 물처럼 돈은 하염없이 빠지기만 할 것이다.
‘되든 안 되든 치료가 우선이다.’
결단이 섰다.
즉시 파르티잔은 로브를 걸치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그길로 밀린 여관비를 몽땅 지불하고는 여관을 빠져나왔다.
두려운 게 사실이었다.
세상에는 무서운 사람들이 있다. 게다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게 사람의 일. 어디서 그들을 또 마주치지 않으리라는 걸 누가 장담하겠는가.
해를 거듭하며 파르티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니 더더욱 행동에 조심을 기해야 했다.
나선 길은 인적이 드물어 의외로 한산했다.
시원스레 불어오는 바람이 커다란 나무의 이파리들을 흔들어 파르티잔의 눈을 흡족케 했다. 코로 스미는 향내에 조금이나마 무거운 마음이 가라앉았다.
마음이 가볍고 상쾌해져 여유가 생겼던 나머지 파르티잔은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게티롱과 헤어질 때를 말이다.
부득부득 우겨 게티롱은 파르티잔을 끌고 자신 소유의 집이 있다는 그 망할 놈의 산어귀에 다다랐다.
그러나 그는 파르티잔에게 돈을 줄 수 없는 형편이 되어버렸다. 오딘과 아그리스의 싸움에 주변 일대가 풍비박산이 나버린 게 원인이었다.
돈은 물론이요, 집이라고 일컬어지던 게 파편과 잔해들로 변해 있었으니…….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사람의 표정을 접했다면 가련해야 정상이다. 그러나 게티롱은 파르티잔에게 미운 털이 박혀도 제대로 박혀 있었다.
“큭… 큭… 큭.”
절로 웃음이 나온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자화자찬에 자신밖에 모르고 살던 녀석이 그렇게 참담한 얼굴빛을 띤 채 당황해하던 모습이 파르티잔에게는 고소하고 우스워 보였다.
“고 녀석 참 쌤통이었지(그 녀석 참 쌤통이었지).”
말을 하다 말고 파르티잔은 고개를 돌려 한쪽 콧구멍만 막은 채 바람을 쏘아냈다.
“펭-!”
입이 뒤틀린 후 생긴 괴상한 버릇이었다. 가끔씩 코가 막혔던 탓이다.
그러나 이 행동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야기되고 말았다. 험상궂은 사내의 옷에 파르티잔의 코에서 튄 누런 콧물이 덕지덕지 붙어버린 것이다.
‘재수 옴 붙었군.’
식은땀을 흘리며 당황하는 파르티잔을 사내의 잔혹한 시선이 마주했다.
사과를 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당장에 자신의 옷을 더럽힌 파르티잔을 베어버릴 생각인지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가져다댔다. 생긴 것만큼이나 성질도 더러운 작자였다.
오그라들고 말 것도 없었다. 워낙 놀랬던 터라 파르티잔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으므로.
절체절명의 위기.
그때, 불행 중 다행으로 사내를 제지하는 손이 있었다.
“아서라.”
손의 주인은 검은 로브를 걸친 인물이었다.
딱 보아도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게 파르티잔으로 하여금 절로 경계심을 품게 했다.
“네 녀석도 흑마법사인 모양이구나.”
로브의 말에 파르티잔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구궤 휘망이었숩죠. 아쥑 훅마법솨가 되쥐는 못했쥐만(그게 희망이었습죠. 아직 흑마법사가 되지는 못했지만)…….”
로브는 씨익 웃더니 파르티잔의 후드를 확 벗겨 냈다.
입꼬리가 틀어진 해괴망측한 노인이 얼굴을 드러내자 로브는 기분 나쁜 조소를 머금었다.
“클클클, 이놈 보게.”
파르티잔은 손발이 다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로브는 자신이 흑마법사임을 자인했다. 보통의 마법사들도 겁을 내는 것이 흑마법사들이거늘, 지금 자신은 마법도 사용하지 못하는 처지다. 이 상태라면 여타 노인들과 다를 바 없다. 별 저항조차 못해본다는 얘기다.
자신이 거짓을 말했음을 들켰다고 생각해 꼼짝없이 죽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이때, 로브는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배워도 참 이상하게 배웠군.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로구나! 크하하하!”
의심이 풀어진 듯해 파르티잔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로브는 반가운 기색을 지우지 않고 물었다.
“이름이 뭐냐?”
누가 뭐래도 파르티잔 본인의 겉모습은 노인이고 또 어른 행세를 하며 살아왔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노인에게 하대하는 녀석이 밉살스러워 보일 만도 하건만, 파르티잔은 비위 따윌랑은 싹 잊어버리고 비굴한 태도로 임했다.
“퐈루튀잔윕니다.”
“크큭, 내 정신 좀 보게. 비틀어진 네 입부터 손보아야겠구나.”
그의 손바닥에서 칠흑의 마나가 일렁이자 파르티잔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다뤄온 마나가 다르다 보니 암흑의 마나가 거슬리는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내색을 한다면 기분 나빠 할 것.
오딘의 밑에서 익히게 된 능력이 발휘되었다. 속으로는 더러워하면서도 겉으로는 기뻐마지 않는… 바로 그런 표정이었다.
또 하나의 위기가 도래했다.
암흑의 마나가 별 효용을 얻질 못했던 것이다.
세 번째 시도 끝에서야 파르티잔의 입은 그나마 제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이 녀석이 눈치를 챘을까? 내 아무리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이 녀석에 비할 바가 아니다. 추궁을 한다면 무조건 발뺌을 해야 한다.’
이렇게 작심하고 있는데 로브는 일절 의문을 가지지 않고 혀만 찰 뿐이었다.
“쯔쯧, 네 녀석은 아직 마나를 느껴 보지도 못했구나.”
파르티잔은 우선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척을 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리고 허리까지 젖혀 가며 당장에 굽실거렸다.
“아차, 우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좋을 일만은 아니었다. 곧 불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으므로.
“내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군.”
파르티잔의 콧물이 옷으로 튀었던 남자의 목소리였다.
“미안하다. 내가 이 녀석의 빚은 대신 갚지.”
“받을 것도 없다.”
기분이 상했는지 험상궂은 사내는 그렇게 말을 끝맺었다. 그러자 로브는 쓴웃음을 짓더니 파르티잔에게 재차 물었다.
“그래, 이름이 뭐라고 그랬지?”
“아! 전 파르티잔입니다.”
속마음 같아서야 대충 인사를 마치고 떠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끔찍한 사태가 벌어질 수 있었다.
성격이 괴팍한 흑마법사들이니 오죽하겠는가. 비위는 최대한 맞춰주어야 한다.
“실례가 안 된다면 어르신의 존함을 여쭤보아도 될는지요?”
“문제 될 건 없지. 난 슐트라 한다. 이쪽은 엘룬이다. 빚을 갚으려면 열심히 따라야 할 게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자신의 입을 고쳐 준 것은 고맙지만 흑마법사 따위를 따라다니긴 싫었다.
또다시 인생 자체가 심하게 꼬이고 있다는 예감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불안함을 가져다줄 미래는 미연에 방지할 필요성이 있다.
‘돈을 준다고 할까? 금화 다섯 닢 정도면 저 녀석의 눈에 차려나?’
그때, 녀석이 가진 은빛 찬란한 지팡이가 파르티잔의 눈길을 오래도록 붙잡아두었다.
‘배, 배반의 지팡이?’
배반의 지팡이.
지팡이를 제작한 장인과 그 주인들이 원인도 모르게 죽었다고 해서 붙여진 지팡이의 별칭이었다.
이후 배반의 지팡이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수십 년을 잠들어 있었는데, 이를 소유하고 있던 누군가가 그것을 경매장에 내놓으며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문제는 그것에 매겨진 액수가 워낙 커서 어지간한 부호가 아니라면 소유하는 건 꿈도 못 꿀 정도라는 점이었다.
자연히 금화 5닢 정도로 마무리를 하겠다던 파르티잔의 기대는 무너졌다. 이제 와서 그를 살펴보니 과연 범접하지 못할 기운이 풍겼다.
옆의 사내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언제까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는 없었다. 그가 성난 표정으로 재촉해왔기 때문이다.
“어이, 내 말 듣고는 있나?”
“예이~ 예, 물론입죠. 어르신들을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썩 달가워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던지 로브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고, 엘룬도 분이 약간은 사그라진 눈치였다.
파르티잔의 부담감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이들의 행선지엔 몇 사람이 더 있었는데, 하나같이 귀빈들이었다. 옷차림새와 그들이 타고 있는 무성한 갈기털에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말만 보아도 능히 짐작 가능한 일이었다.
엘룬과 슐트는 그들 중 흰 말에 탄 젊은이에게 직각으로 허리를 굽혀 보였다.
“황자 전하를 뵈옵니다.”
본의 아니게 일행에 합류하게 된 파르티잔은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황자?’
입을 벌리고 선 그에게 황자 타츠만의 시선이 꽂혔다.
“처음 보는 자 같은데?”
“황공하옵니다. 소인을 따르길 간청하건대 하는 수 없이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타츠만은 보기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그대는 마음도 넓도다. 나쁠 건 없지.”
반면 황자의 옆에 나란히 어깨를 대고 있는 남자 알베른은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불편해하는 기색이었다. 어중이떠중이를 데리고 온 것이 못마땅한 것이다.
데리고 온 노인은 관심에서 멀어졌는지 황자가 슐트에게 입을 열어 물었다.
“그래, 부탁한 것은 알아보았느냐?”
“그렇사옵니다. 이미 신성 제국은 비센 추기경에 의해 장악되었다고 합니다.”
타츠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억울한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때 카르만이 자신을 종용하지만 않았더라도 그와의 마찰은 피할 수가 있었다. 한데, 이제 와서 성황의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하다니…….
당장의 열을 식히지 못해 금세 그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해졌다.
“어찌 성황이란 작자가! 우리 제국에 이 일 모두를 떠넘기려 함이 아니냐!”
타츠만은 그가 책임 회피를 위해 성황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났다고만 여기고 있다.
슐트가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오나 전하, 저들은 공교롭게도 아레인으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그 소리에 타츠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군?”
“그렇사옵니다.”
그 순간, 말 위에 있던 알베른이 입을 열어 허락을 구했다.
“전하, 잠시만 기다려 주옵소서.”
타츠만이 고개를 끄덕이자 알베른이 물었다.
“아레인을 아느냐?”
물음이 향한 곳은 파르티잔. 알베른은 파르티잔의 동공이 산만하게 흐트러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파르티잔은 또 한 번 놀라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저요?”
“그럼 누구에게 묻고 있는 것 같나?”
파르티잔은 황망해하며 손사래를 쳤다.
“어이쿠, 소인이 무얼 알겠습니까요.”
발뺌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챘을까. 알베른의 노한 목소리가 무섭게 날아들었다.
“네 이놈! 감히 뉘 앞이라고! 거짓을 논한다면 네 목이 달아날 것이다.”
놀람이 원인이었다.
어떤 환경에서도 비굴한 표정을 지어 보일 수 있는 파르티잔이었거늘, 작금의 상황은 그의 평정을 흩뜨려 버렸다.
제국의 황자란 신분… 그것이 동네 형 대하듯 할 수 있는 존재였던가.
덧붙여 자신은 흑마법사에게 원치 않게 끌려온 존재다.
원래 흑마법사들은 사악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그 무리와 연계된 황자라면 비슷한 부류일 터. 팔자 꼬였다고 자책하고 있는 와중, 아레인이란 국호가 나와 지레 놀란 결과였다.
알베른은 아레인과 이웃하고 있는 바리톤의 현자였다.
파르티잔이 과거 재수 없게 바리톤에 붙잡혀 아레인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유프라와 리먼 백작 진영에 있었지 로테노아 공왕의 진영에 발을 들인 적은 없었다.
애초에 둘은 서로가 마주친 기억이 없는 것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아 파르티잔은 목멘 소리를 냈다.
“소인, 이실직고할 터이니 노여움을 거둬주시옵소서.”
강을 건너기도 전에 죽을 수는 없는 판국이었다. 일단은 건너기라도 해야 앞길을 고민하지 않겠는가.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알베른의 목소리는 조금 잦아들었다.
“아레인을 아느냐고 물었다.”
“알고말굽쇼.”
“네 녀석은 아레인과 필시 연관이 있을 것이다.”
보통 위인들이 아니라는 생각에 잔뜩 기가 죽은 파르티잔은 그의 물음에 성실히 응했다.
“옳습니다.”
뒷말을 이을 준비를 하며 파르티잔의 눈은 허망한 빛을 그렸다. 그 눈빛이 어찌나 처량해 보였는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측은지심까지 이끌어낼 정도였다. 냉혈한인 엘룬을 제외하고 말이다.
“소인, 아레인의 마법사였습니다.”
첫마디에 슐트의 눈길이 싸늘해졌다.
그러나 파르티잔이 이를 변론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였다. 이럴 때는 상좌에 있는 인간들의 욕구부터 채워주는 것이 우선이었다.
“저는 그곳이 싫어 도망을 쳤습니다. 그것뿐입니다.”
그렁그렁한 눈물이 눈 가장자리에 들어찼다. 하지만 그의 기분 따위는 이들이 알 바 아니었다.
“그럼 아레인의 사정은 잘 알고 있겠구나.”
끄덕끄덕.
타츠만의 물음에 고개만 끄덕이는 파르티잔. 이게 또 빌미가 되었다.
“네 이놈! 그건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냐!”
다그침은 황자와 알베른을 호위하고 있던 기사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노인네가 바짝 움츠러든 모습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만 하라.”
타츠만의 제지에 기사는 허리를 숙이며 뒤로 물러섰다.
“아까의 상황부터 추론해봐야겠다. 책사, 자네의 생각은 어떠한가?”
알베른은 경건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서 소견을 피력했다.
“아마도 현 성황이 아레인을 침공하는 데에는 오딘…….”
여기서 시간이 잠시 멈춘 것 같았다.
파르티잔의 뇌리에 같은 이름이 반복되었다.
‘오딘… 오딘… 오딘… 오딘… 오딘… 오딘…….’
오딘과 무슨 철천지원수를 졌다고 이리도 자신의 인생을 힘들게 하는 걸까. 파이어볼로 옷을 살짝 태운 게 그렇게도 잘못한 것이냐는 얘기다.
알베른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의 존재에 대하여 모르는 듯하옵니다. 또한 병력을 양 방향으로 나누었다는 것은 저들의 전력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로만 연합과 신성 제국과의 전쟁은 세간에 알려진 뒤였다. 해서 타츠만에게도 이 같은 의견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럼 카르만이 물러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겠군.”
“신의 생각도 황자 전하와 동일하옵니다.”
오딘 그자가 있는 한, 아레인은 손쉽게 제압할 대상이 아니었다. 더해서 알베른은 발데르란 자의 무력 또한 가늠키 어렵다고 곁들였으며, 그들의 군대는 강성하다고도 했다.
신성 제국이 패한다면 다음 차례는 자신들이 될지도 모르는 일. 주변인들을 둘러보며 타츠만은 작금의 상황들을 종합해보았다.
‘필요한 것들이 알아서 찾아오는군. 이게 무슨 뜻일까?’
왜인지 세상이 자신에게 힘을 실어주는 느낌마저 들어 시름이 걷혀지고 기운이 생겼다.
‘황제 폐하께서 용단을 내리신다면 일이 수월하게 흘러갈 수도 있을 터인데…….’
말은 꺼내보지 않았지만, 황제가 타츠만을 대하는 태도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 점이 다시금 타츠만의 의욕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오락가락하는 것은 비단 그만이 아니었다.
환장할 팔자에 파르티잔의 정신 상태는 뇌에서 이탈 직전에 있었다.
‘나 확 죽어버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