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엘룬의 분노 (30/67)

엘룬의 분노

덴은 죽을상을 짓고 있었다.

카반, 그것도 자신들의 총본산이라 할 수 있는 라파고에 돌아왔지만 그는 더 이상 대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칙칙한 검은색 로브를 걸치고 후드까지 뒤집어쓴,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사내는 발본이었다.

그리고 살집은 없지만 뼈가 굵고 장대한 키에 이마가 톡 불거진 사나운 인상의 남자가 바로 카반의 울프 단장인 엘룬이었다.

실제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던 이곳은 그들의 성지나 다름없었다. 라파고를 포함한 카반 전체가 말이다.

엘룬이 저렇게 좋지 못한 기분이니, 그 질책은 자신에게 쏟아질 것이다.

덴은 엘룬의 포악한 성정을 너무도 잘 알았다.

조금의 일만 그르쳐도 발로 차고 몽둥이로 사정없이 두들겨 팼던 그다. 더구나 그것은 근래에까지 계속되던 일이었다. 그러니 겁을 먹을밖에…….

탁한 목소리로 엘룬이 물었다.

“어떤 놈들이냐?”

“그, 그게 형님, 저도 잘…….”

당하기만 했을 뿐이지 들은 것은 없었다. 그들은 정체 또한 밝히지 않았던 것이다.

덴이 아무리 일처리를 엉망으로 한다고 해도 그 정도 절차를 잊을 정도는 아니었다. 심문을 해서라도 알아냈어야 했지만, 막상 전투가 벌어졌을 때는 계속 밀리기만 했으니 달리 도리가 없었다.

엘룬은 눈썹을 지그시 모으며 눈알을 돌려 덴을 직시했다. 그에 덴은 눈을 마주칠 용기도 나지 않는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때, 그의 귀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스르릉.

깜짝 놀라 덴은 고개를 쳐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엘룬이 피를 머금은 것처럼 붉은빛이 감도는 검을 빼어든 채 자신을 노려보는 모습이 보였다.

덴은 하늘이 꺼지는 줄만 알았다.

여태 아무리 화가 나도 엘룬이 벌을 주려 진검을 뽑은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손에 죽지 않으려 덴은 그 큰 덩치를 뒤쪽 수하의 등 뒤에 숨기고는 잔뜩 웅크린 채 고개를 빼어 엘룬의 눈치만 살폈다.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무심하게도 발본은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그때, 서열 4위인 마탄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급하게 말을 더듬었다.

“혀, 형님…….”

마탄은 말재주가 있어 종종 마찰이 일어나는 것을 중재해주곤 했다.

발본은 음침할 정도로 조용해서 엘룬이 덴의 목을 거둔다 해도 말리지 않았는데, 이럴 때마다 마탄이 그를 대신했다.

화가 날 때마다 마탄이 말리는 통에 엘룬은 썩 기분이 좋질 않았지만 그의 고충을 이해하기에 참아 넘기곤 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걷잡을 수 없는 성격을 조절해주는 것도 다 마탄이 아니던가. 다시 말해 그에게는 마탄이 꼭 필요한 존재이며 동시에 고마운 존재였다.

정말 벨 생각이었을까?

마탄을 보고 그나마 기분을 누그러뜨린 엘룬은 주위에 명했다.

“몽둥이를 가져와라. 가장 단단한 걸로.”

즉시 두 남자가 어디론가 허둥지둥 뛰어가더니 보통 사람의 키만큼은 됨 직한 허벅지 두께의 쇠몽둥이를 낑낑거리면서도 용케 들고 왔다.

그 하단부를 잡고서 엘룬이 팔을 걷어붙이자 덴은 명을 내리기도 전에 잽싸게 엎드렸다.

엘룬은 쇠몽둥이를 사정없이 휘둘러댔고, 그것은 머리고 허리고 가리지를 않았다.

퍽! 빡! 쩍!

각 부위마다 다른 구타음이 산에 메아리쳐 울릴 정도였다.

그런데도 덴은 이를 악물고서 신음도 내뱉지 못했다. 아픔을 내색하면 더 얻어맞을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수백 대쯤 때렸을까?

엘룬은 쇠몽둥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팽개쳤다.

땡캉!

엎드려뻗친 자세 그대로 덴이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만 돌려 그를 살폈다.

언제나처럼 엘룬은 전혀 지친 기색이 아니었다. 그 무거운 몽둥이를 힘껏 휘둘렀는데도 땀 한 방울 솟지 않았다.

물론 덴이 살피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그가 하려는 말이었다.

예상대로 엘룬의 입이 열렸다.

“짐작 가는 곳도 없어?”

입술을 비죽 내민 채 덴은 머리를 끄덕였다.

누군지도 모르는 적에게 전력의 상당수가 줄어들었다.

오랜 시간을 양성해온 세력이었다. 그리고 내년이면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동시에, 공국을 발아래 둘 수 있었다.

엘룬은 분을 감추지 못하고 검갑을 움켜쥐었다.

콰- 콰지직!

압박을 이기지 못한 검갑이 깨어지는 소리였다.

그때, 한쪽 건물의 뒤쪽에서 빛이 일었다. 엘룬의 시선은 그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분해 죽을 것만 같던 그의 표정이 서서히 바뀌어갔다. 아주 잔혹하고 사악한 표정으로…….

“쫓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어. 제 발로 올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

* * *

카반에 있는 사람들은 상당히 초조한 기색이었다. 이스론 상단의 사람들이 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솔직한 말로 그들은 카반의 울프가 전복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에는 그것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계산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괜히 들쑤셔 저들의 난폭한 성격을 돋운다면, 홧김에 이곳을 불태울 수도 있는 노릇이다. 여태의 정황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전에 그 마적단 셋이 마을에 당도해 화나는 일이 있었다면서 아무런 죄도 없는 마을 사람 다섯의 머리채를 끌고 가 한쪽에서 잔인하게 살해하지 않았던가.

하는 짓들로 봐서는 카반의 울프는 사람의 탈을 쓴 짐승에 빗댈 수 있었다.

미친 집단. 그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공포는 대단했다.

마을 사람들의 속도 모르고 마르크는 입술이 부르터져라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막바지에 다다라가는 중이었다.

“그 뚱땡이 도망가는 꼴이 가관이었어요. 아하하하하! 비대한 몸집인데도 제법 빨라서 엉덩이가 파도처럼 흔들리는 게, 캬캬캬캬캬캬!”

그게 그리도 우스운지 마르크는 배꼽이 빠져라 웃어댔다. 얼마나 웃겼으면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이 찔끔 배어나올까?

상단에서 나온 사람들도 기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일을 무사히 마치고, 좋은 일마저 했으니 뿌듯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왜 그런 짓을 했습니까!”

“저흴 봐서라도 참으셨어야 합니다.”

저마다 제 목소리를 내는 가운데 이 마을의 촌장이 지팡이를 짚고 한 손은 뒷짐을 진 채 다가와 마르크의 등을 툭툭 쳤다.

“이보게.”

조금 전의 분위기에 마르크는 웃음을 그치고 꽤나 무안해져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촌장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네. 우리가 미리 경고를 하지 않았나.”

“어르신, 그건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저도 경황이 없어 숫자를 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적어도 이백 명은 넘는 마적단이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마르크는 ‘이제 저들의 인원이 많이 줄었으니 걱정을 덜어라’는 의도로 꺼낸 말이었지만, 노인의 이마에는 주름살이 두어 개나 더 그어져 있었다.

“자네가 본 사람은 덴이라는 자일 거야. 그도 높지. 우리는 감히 얼굴도 못 쳐다볼 정도니까. 하지만 말일세.”

“하지만요?”

“정말 무서운 건 그가 아니라네.”

마르크는 적잖이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오딘이 데려간 음영대에 의해 무너지기는 했지만, 저들의 무력은 자신이 보기에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뚱땡이는 너무도 빨라 마치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또한 힘이 무지막지하게 세서 그가 든 묵직한 장검이 땅이라도 내려칠 때면 어김없이 땅이 주저앉았다.

그보다 더 무서운 자가 있다고 하니 어찌 걱정이 안 될까?

특히나 오는 길에 음영대의 사람 하나를 붙잡고 물어본 결과, 그때 갔던 사람들 중에는 자신들의 부대주가 가장 강하다고 하였다.

그가 느낀 감상평은 딱 부러졌다.

뚱땡이 더하기 네 사람. 그게 음영부대주의 실력이었다.

마르크가 침을 꿀꺽 삼키는데, 노인은 절망이라도 닥친 듯이 불안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만약 그를 잡았다면 걱정을 덜했을지도 모르네. 재수가 없다면 마을이 몰살됐겠지만, 그런 자들을 절대 못 보았다고 잡아뗀다면 얼마의 희생으로만 끝났을 테지. 하지만 그가 도망친 이상 엘룬이 오게 될 거야.”

“엘룬이오?”

“그렇다네. 정말 무서운 위인일세. 내 세상 경험이 적어 잘은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이 공국 내에 그를 상대할 사람은 없다는 걸세.”

“그, 그렇게 강한가요? 근위 기사들도 못 감당할 정도로?”

노인은 잠시 숨을 돌리려는지 고개를 끄덕여 그렇다고 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문제는 그뿐이 아닐세. 발본이라고 있지? 발본 역시 너무 무섭다네. 일전에 영주님을 죽인 것은 그라고 들었네.”

잠자코 듣고만 있던 헤르미온이 끼어들며 물었다.

“그 영주님이라는 분이 강하셨나 보죠?”

“그렇소. 적어도 덴이라는 그자보다는 강했지. 둘이 맞부딪쳤을 때 덴이 도망쳤다고 했으니까.”

그 대화로 인해 마을 사람들의 긴장은 이스론의 사람들에게까지 번졌다.

마르크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래도 오딘 님께서 더 많은 분들을 데려오셨으니 승산이 없는 건 아니에요. 저분들도 음영대의 분들처럼 강하실지는 모르겠지만요.”

묻고 싶은 욕심이 굴뚝같았다. 음영대가 아니신 분들 역시 강하냐고…….

하지만 그러기엔 저들은 너무 거리감이 있었다. 아직 친해지지를 못한 탓이었다.

마르크가 망설이는 동안에도 숱하게 많은 시선들이 이스론 상단의 사람들을 원망하는 듯 보였다.

부담감을 떠안고 마르크는 잰걸음으로 음영부대주에게 다가갔다.

음영대가 뭉쳐 있는 곳에서는 어쩐 일인지 스산한 기운마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저, 저어기…….”

평소에는 아무리 유창하게 언어를 구사하던 그일지라도 섣불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이들은 원래 어두운 분위기였고, 이번의 전투로 인해 정말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음영부대주는 마르크가 어려워하는 것을 알고 편히 대했다.

“얘기하시오.”

그 딴에는 편하게 대한 것이었지만, 마르크에게는 그렇게 비춰지지 않았다.

‘으… 두렵다. 좀 살갑게 대해주면 덧나나? 말 꺼내기 더 무섭게.’

그가 해야 할 질문, 그것은 엉뚱하게도 틴에게서 흘러나왔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이번에 도착한 분들도 음영대만큼 강합니까?”

그 질문에 음영부대주는 완고한 태도로 딱 부러지게 답했다.

“대답하기 곤란하오.”

상단 사람들에게는 별거 아닐지라도 아레인에서 온 무사들에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는 철칙과도 같았다.

그들은 비밀을 유지해야 할 의무가 따랐던 것이다.

물론 무력 세력 간에 힘 차이는 존재했다. 그중 가장 약한 것이 켈타스가 이끄는 음영대였다.

그다음으로는 가인과 헤르의 백의질풍대와 적의질풍대였으며, 그보다 강한 집단이 보탄 백작이 이끄는 흑풍단이었다. 그다음은 발데르 공작의 철왕대였다. 이 중 철왕대와 흑풍단의 전력은 절반에 달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아렌 준남작의 마혈단이었다.

그러나 마혈단은 조직의 특성상 철저한 비밀에 싸여 있었다. 심지어 각 조직에 몸을 담고 있는 무사들조차도 그들과 마주치는 일이 없어 구성원의 숫자가 얼마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런 속사정을 모르는 틴은 섭섭한 심정이었다.

마르크 역시 그와 같았다.

“서로 믿기로 하셨잖아요. 그러면 저희도 아레인에 대해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도 음영부대주는 눈빛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불가하오.”

짤막한 대답에 마르크는 더 이상 질문하는 것이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아, 그래. 오딘 님, 오딘 님께서 이리 오신다면 직접 여쭤봐야겠어. 그래도 그분은 대하기가 편하니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오딘이 그 짝이었다.

인근의 숲에서 걸어 나오는 그를 보며 마르크는 의아함을 지우지 못했다.

“어? 저쪽에도 길이 있었나요?”

아침 산책을 저쪽으로 했었다. 그러나 어느 곳에도 훤히 뚫린 길은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우리도 도주했을 거야. 고향 땅이라지만, 삶이 너무 힘들어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꽤 되거든. 아래로 떨어져서 운이 좋게 산다고 해도 사방엔 몬스터가 득실득실하네.”

촌장의 설명이 끝날 무렵 오딘이 다가왔다.

마르크는 황당한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오딘의 뒤를 가리킨 채 고개를 쭉 빼어 물었다.

“거긴 길이 없다는데요?”

“그런가?”

‘그런가?’라니… 도대체가 시원하게 대답하는 것이 없다.

마르크의 뇌리에 막 드는 생각이 있었다. 오딘 이 사람은 수수께끼가 뭉쳐 만들어진 사람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직접 오신 게 아니에요? 설마 마법을 쓰실 수 있는 건 아니겠죠?”

“마법사는 아니다.”

시시콜콜 대답해줘야 할 필요성이 없음에도 다 대답을 해주는 것은 오딘이 마르크에게 괜찮은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거기에는 조금 엉뚱한 마르크가 특별하게 비춰진 면도 있었는데, 낮아진 마음의 벽 덕분에 마르크는 오딘을 어렵게 대하질 않았다. 불과 몇 달 사이에 많이 바뀐 것이다.

“그럼 어떻게 오셨나요? 설마 새처럼 날아서 오신 것은 아닐 테고…….”

“날아서 온 건 아니지.”

말장난을 치는 오딘을 보며 이대로라면 대화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지 마르크는 조금 역정이 났다.

“그럼 어떻게 오신 거냐고요?”

“공간 이동이라는 걸 했다.”

마르크의 얼굴이 붉어졌다. 창피와 무시를 한꺼번에 받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오딘 님, 방금 마법사가 아니라고 하셨죠? 그런데 공간이동을 했다니, 그럼 마법을 쓰신 거잖아요.”

“썼지.”

“그럼 마법사 맞잖아요.”

“마법사는 아니다.”

더 이상 얘기를 늘어놓았다가는 화병이 날 것 같았는지 마르크는 홱 몸을 돌렸다.

“말을 말죠.”

토라진 모양새였다.

오딘은 그 모습을 보며 슬그머니 웃었다.

모든 비밀은 오딘의 손에 착용한 반지에 있었다. 숲의 정령 사이하드로부터 선물이랍시고 건네받은 숲의 반지.

미리 이 숲을 인지하고 갔기에 오딘은 꽤 먼 거리를 금방 이동해온 것이다.

상단 사람들과 다르게 마을 사람들이 오딘을 대하는 시선은 결코 곱지 못했다. 오히려 더한 불안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를 따지려 촌장이 앞으로 나서려 할 때, 누군가로부터 머릿속으로 말이 전해졌다.

-그분을 귀찮게 하지 말아주시오.

촌장의 안색이 샛노래졌다.

환청을 들은 게 아닌가 하여 귓구멍을 후벼 팠다. 그런데도 똑같은 현상이 빚어졌다.

-당신들의 일은 알아서 처리할 것이오. 불안에 떨 필요는 없소. 당신들은 조만간 저분께서 이곳에 들르셨다는 것에 크게 감사하게 될 것이오.

촌장이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마을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겼다. 전에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 세실리 역시도 까닭을 몰라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촌장은 분위기 파악 못하고 대상을 찾기 위해 여전히 고개를 반복해서 좌우로 흔들며 물었다.

“누, 누구요……?”

다행히 오딘과 마르크는 얘기 중이어서 촌장에게 신경을 안 쓰는 듯했다.

-우측을 돌아보시오.

촌장이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자 음영부대주가 직시하고 있었다.

-묻지 말고 듣기만 하시오. 저분께서 눈치 채시면 곤란한 입장이니까.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입술조차 움직이지 않고 자신에게 말을 전하고 있질 않은가.

놀라움을 뒤로하고 알았다는 듯 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촌장을 보며 의아하게 생각했다. 흡사 유령에라도 홀린 것 같질 않은가.

그가 보는 대상은 분명 한 사람이었지만 전음을 들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니, 답답한 나머지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서 물었다.

“촌장님, 지금 뭘 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촌장이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채 자신의 입술에 쭈글쭈글한 손가락을 가져다대며 주의를 주었다.

음영부대주는 그 모습을 보고 미소를 머금다가 정색하며 뜻을 전했다.

-더 길게 얘기하지 않겠소. 단, 하나는 알아두시오. 여기 모인 네 단체의 힘이라면 당신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카반의 울프는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오.

돌연 한쪽에서 빛 무리가 일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을 향해 쏠렸다.

정확히 두 사람이 오딘에게 다가왔다. 쉬바인과 음영대의 무사 중 하나였다.

“그들이 도착했습니다.”

“예상보다 일찍 왔군.”

“전부가 도착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아마도 수뇌부들이 당도한 것 같습니다.”

오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적단이 일망타진되지 않는 이상 이들은 편치 않을 것이다.

동정은 아니었다. 일단은 뱉은 말이 있질 않은가.

한번 뱉은 말은 될 수 있으면 지켜야 한다. 더군다나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

‘일부를 주둔시켜야겠군.’

그 방법밖에는 없었다.

“이곳의 영주를 보게 해주겠나?”

촌장이 바삐 뛰어와 대화에 응했다.

“영주님은 없습니다.”

“없다니?”

“토르시에서의 시가지 전투에서 엘룬의 검에 쓰러지셨습니다.”

오는 길에 들은 얘기였다.

토르시와 카반은 한 영지 내에 속한 모양이다.

“그럼 일부를 잔류시켜도 되겠군.”

당장에 촌장은 기뻐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들의 말 전부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검을 찬 무사들이 아닌가.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걱정이 들었다.

‘혹 이들이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지는 않을까?’

힘을 가진 사람들. 그들은 항상 약자를 괴롭혔다.

많은 세월을 살아오며 겪어온 경험에 의하면 그러했다.

착하던 녀석도, 정이 많던 녀석도 이상하게 힘을 가지게 되면 남을 핍박하고 괴롭혔으며 제 잇속만을 챙기기 바빴다.

이 마을 사람들 중 일부는 영주의 기사로 불리어갔었고, 또 일부는 카반의 울프의 단원이 되었다.

자라날 때부터 보살폈던 녀석들도 그 위치에 올라서자 사람들을 무시하고 깔아뭉갰다.

그때를 회상하자 촌장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그놈들만 하려고?’

그리 생각하고 촌장은 대답했다.

“상관없을 겁니다. 이곳은 공국에서도 손을 놓은 지 조금 되어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으니까요.”

정말 그랬다.

공국은 그들의 힘을 좌시할 수 없으면서도, 섣불리 대응해서는 안 된다는 염려 섞인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마적단을 소탕하고자 이웃 국에 손을 벌린다면 그것 역시 비웃음을 사게 될 일이었다.

언젠가 부딪칠 일임에도, 공국의 귀족들은 카반에 발을 들여놓는 자체만으로 마적단과의 마찰을 빚게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귀족들이 서로 규합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온통 이해관계에 얽히고설켜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해버려 하나로 뭉치지 못하는 것이다. 공왕 역시 이 점을 분하게 여겼다.

불쌍한 사람들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방금 촌장의 생각처럼 마을 사람들 역시 피도 눈물도 없는 마적단보다는 세를 부당하게 늘려 피를 빨아먹는 귀족들이 낫다고 여겼다.

이후, 촌장은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 * *

“무능한 녀석.”

초목 사이에서 엘룬은 불만을 토로하는 중이었다.

그가 지칭하는 대상이 덴이었음을 알았던지 발본도 수긍하는 눈빛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겠습니까. 조만간 녀석들이 오게 될 것이니 너무 분해하지 마십시오.”

“이게 하루 이틀에 이룬 것이더냐? 다시 이 정도의 힘을 모으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수는 둘째 치고 다시 녀석들을 그 위치까지 끌어올리려면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라는 것은 발본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분을 삭이지 못하는 엘룬의 머리에서는 금방이라도 모락모락 김이 날 것 같았다.

추궁을 통해 캐낸 사실 중 하나가 저들의 인원이 총 30이 되지 않는다는 것과 그중 한 명은 무시무시한 실력자라는 점이었다.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엘룬이 물었다.

“어떤 녀석들이지? 대체 어떤 녀석들이… 발본 넌 짐작 가는 녀석이라도 있느냐?”

발본은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 여태 자신에게 피해를 입은 대상 중에 실력이 뛰어난 이들을 되짚어보는 것이다.

왜 잘난 놈들은 잘난 놈들대로 어울려 다니고, 못난 놈들은 못난 놈들대로 어울려 다니며 끼리끼리 논다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만한 실력을 가진 자들은 없었다.

그때, 전혀 예상 못한 곳에서 엘룬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들려왔다.

“제가 그들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

막 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평범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근처에 있던 근위병이 청년을 무릎부터 꿇리려 하자 엘룬은 손을 뻗어 만류했다.

“알고 있다고? 그래, 얼마나 알고 있지?”

호감으로 대하는 듯했지만,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목숨을 취할 수도 있을 분위기였다.

청년은 잔뜩 겁을 먹고서 당장에 땅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이 많지 않더라도 용서해주십시오.”

엘룬은 사악한 웃음을 머금었다.

“너는 내가 죽일 것처럼 말하는구나. 어서 말해보아라.”

말하기 전에 한 가지의 약속이 필요했다. 청년이 이곳에 온 목적은 그것이었으므로.

“제가 알고 있는 것 모두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신 부탁이 있습니다.”

엘룬이 눈을 치뜨며 물었다.

“부탁?”

“그렇습니다.”

“말해보아라. 듣고 나서 판단하지.”

“저를 카반의 울프에 입단시켜 주시면 안 될까요?”

강해 보이지 않는다. 배짱도 없어 보인다. 아무리 살펴봐도 단원으로서는 실격이었다.

엘룬이 잠시 고민에 잠겨 있을 무렵 청년은 애걸하듯 말했다.

“시키시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엘룬은 코웃음을 쳤다.

“마음가짐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그래, 받아주기로 하지. 단, 네 녀석이 하는 말이 아무런 영양가가 없을 시에는 네 몸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

청년은 침을 꼴깍 삼키며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엘룬의 눈이 묻기 시작하자 궁금해하는 그를 보며 청년이 말을 이었다.

“본래 저는 카반의 주민입니다. 어느 날 그들이 찾아왔습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동공의 젊은 남자와 은발의 엘프, 그리고 몇 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앞서 절 입단시켜 주시기로 한 분이 그들의 손에 죽음을 맞았습니다.”

엘룬은 점점 더 궁금증이 일었다.

처음에는 될 수 있으면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들으려 했지만, 청년이 하는 말이 매우 흥미로워 다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제지하지 않았다.

“저 역시 카반의 울프를 추종하고 따랐다는 이유만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궁지에 몰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화살을 돌림과 동시에 자신이 맹목적으로 그들을 따랐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자연히 엘룬이 청년을 대하는 표정이 바뀌었다.

“괘씸한 놈들이군. 너희 마을 사람들은 얼마 사이에 겁을 상실한 모양이구나. 그래, 어디 더 얘기해보거라.”

그 말에 청년은 힘을 얻어 뒷말을 이어나갔다.

“예. 저들은 예사 인물들이 아니었습니다. 앞서 죽었던 영지의 기사들과 비교해보더라도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저들의 우두머리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의 젊은 남자인 것 같습니다.”

갑자기 발본이 끼어들었다.

“어디서 온 놈들이냐?”

엘룬에게도 제일 궁금한 대목이었다.

청년은 그것마저도 알고 있었다.

“저들은 두 패로 갈려 있습니다. 일부는 상단에서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상단?”

“그렇습니다.”

“그럼 나머지 하나는?”

청년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끝을 흐렸다.

“그쪽은 저도 잘…….”

발본의 눈이 살기를 띠며 실쭉해졌다. 흡족하지 못한 것이다.

다시 엘룬이 물었다.

“그럼 상단은 어느 상단이지?”

그 역시 청년은 자신 있게 대답을 못했다. 겁을 집어먹어서인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스… 이스 뭐라고 했는데…….”

발본의 지팡이 상단부에 위치한 수정구에 거무튀튀한 마나가 모여들기 시작하자 그를 보며 청년은 기겁했다.

다행히 늦지 않게 엘룬이 비슷한 상단 이름을 들먹였다.

“이스론?”

“예, 이스론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론 상단.

대륙에 제법 굵직한 상단이라면 엘룬 역시 알고 있다. 상대에 따라 때로는 피해가야 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군사력이 제법 되는 곳들은 행여 자신들의 세력이 피해를 입을 시엔 무자비한 보복을 강행했다.

다시 말해 카반의 울프도 감당 못할 상단들도 있단 얘기다.

그러나 이스란은 아니었다.

제법 규모가 크다고는 하지만, 군사력은 형편없는 곳이 바로 이스란 상단이었다.

사실 이스론이 이곳에 와서 단원들에게 당한 적은 없다.

언젠가 엘룬은 그를 비꼬아 이스론 같은 곳을 ‘겁쟁이 상단’이라고 비하하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지금은 평소에 깔보고 있던 놈들에게 당했다는 수치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곧 웃을 수 있었다.

“다시 오겠지. 상단 놈들을 인질로 잡아 몸값을 요구하는 것이 좋겠어. 죽은 녀석들의 피해 보상까지 받아내야지.”

발본이 음침한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나쁘지 않은 방법인 듯합니다. 그러기 전에 일단 겁을 주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겁? 어떻게?”

“덴 녀석을 보내는 겁니다.”

듣고 보니 그럴싸해 보였는지 엘룬은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당장에 그 꼴도 보기 싫은 상판대기를 치우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방법이었다.

또한 미리 협박을 해놓는다면, 인질을 데리고 가 피해 보상을 요구할 때 더 수월하게 먹힐 것이었다.

운이 좋게 상단주를 잡는다면 더 좋을 일.

엘룬은 즉각 찬성했다.

“그것 좋겠구나. 덴 녀석은 당장 출발시켜야겠어. 이곳에 그 녀석이 머물러 있다는 것만으로 화가 치밀거든. 가만, 이스론 상단이 어디 있다고 했지?”

“라비아 항만에 있을 겁니다.”

엘룬이 발본을 총애하는 이유는 비단 뛰어난 흑마법 실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아는 것 또한 많았다. 덴과 다르게 말이다.

그렇다고 덴이 멍청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녀석은 여자와 술에 빠질 줄만 알았지 이런 쪽에는 영 관심이 없었던 까닭에 머리가 텅 비어 묻는 데에 제대로 대답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본래 미운 털이 박히면 좋게 생각하려 해도 힘든 법이다.

덴의 여러 단점들이 머릿속을 장식하자 엘룬은 결심을 굳히고 그 의견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라비아 항만이라. 조금 멀긴 하지만 마법사 몇을 딸려 보내면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겠군.”

결국 명령에 못 이겨 덴은 10여 명의 수하들과 길을 떠나면서도 울분을 금치 못했다.

“썅! 내가 왜 거기에 가야 하는 거냐고!”

격분한 목소리에 같이 길을 떠나는 수하들은 그의 눈치만 살피기에 바빴다.

먼 길을 가야 하는 번거로움도 번거로움이지만, 그는 자신이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자신을 농락한 녀석들을 벌할 게 아닌가.

“내 손으로 찢어죽이고 싶었다. 그래야 했다.”

엉망진창이 된 그의 기분을 위로해주는 목소리가 있었다.

“좋게 생각하십시오. 그래도 덕분에 단장님의 분노는 피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덴은 귀가 얇은 편이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어서 조금 얼굴색이 펴지긴 했다.

“그건 그래. 그래도 그 녀석들이 죽는 걸 내 두 눈으로 봐야 하는 건데…….”

방금 그 목소리가 덴을 또 달랬다.

“모처럼의 나들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또 좋은 점이 있습니다.”

“뭐냐?”

“뒷돈을 챙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비굴하게 웃어 보이는 수하를 보며 덴은 좀 더 기분이 나아져 얼굴에 미소를 그릴 정도까지 되었다.

“그 돈으로 괜찮은 여자들을 살 수도 있겠군.”

“그렇지요. 안 되면 강제로 끌고 와도 되니까요.”

덴의 머릿속은 금세 음흉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당한 울분은 아직 가슴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성욕이 치밀어 잠시나마 까맣게 잊게 되었다.

그러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표정이 확 변했다.

“맞다!”

“왜 그러십니까?”

“그 엘프 년, 은발의 엘프 계집도 다시 올 것 아냐.”

수하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이번엔 이렇게 달랬다.

“혹시 모를 일입니다. 어쩌면 그녀는 상단에서 파견 나온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요. 그러니 전투에 한 번도 나서지 않았고요.”

그가 이리 잘 알고 있는 이유는 덴과 같이 그 피해 현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덴은 살집이 가득한 주먹으로 반대편 손바닥을 내려치며 좋아라했다.

“그럼 잘하면 그곳에 있을 수도 있겠군!”

수하는 아부 섞인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렇겠지요.”

덴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아니, 욕심으로 일렁거리기까지 했다. 콧구멍으로 뜨거운 바람이 숭숭 뱉어졌다.

“그년이라면 됐어. 목에 줄을 달아 마음껏 가지고 놀 테다.”

옆의 수하가 조심스럽게 타일렀다.

“미모가 상당하던데 망가뜨리시면 아깝지 않겠습니까?”

“누가 망가뜨린대? 나도 아낄 줄 안다고.”

실제로 그랬다. 덴의 손에 걸려 멀쩡한 여자는 이리스 하나뿐이었다.

그녀의 옆에 있던 여자가 멀쩡했던 이유는 잡혀온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덴은 변태적 성욕을 일삼고 여자들을 고문했는데, 다친 여성들은 버려지거나 죽임을 당했다.

이리스가 그것을 알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덴을 가지고 놀 만한 능력이 되어서였다.

왜인지 덴은 말을 몰아가는 속도에 점점 더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 * *

헤르미온은 오른쪽 귓구멍을 후볐다.

“누가 내 욕을 하나?”

“욕을 하다니?”

“오른쪽 귀가 간지러워.”

“오른쪽 귀가 간지러우면 누가 네 욕을 하는 거야?”

마르크의 반복되는 질문에 헤르미온은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

“너 정말 바보구나. 그것도 몰라? 오른쪽 귀는 욕하는 거, 왼쪽 귀는 칭찬. 왼쪽 귀가 간지러웠으면 누가 내 칭찬을 하는 거라고!”

그녀들은 이스론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마냥 카반에서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오딘과 헤어질 땐 숨어서 엉엉 울기까지 한 헤르미온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평온을 찾게 되었다.

약 반나절 전, 어제는 슬픔에 잠겨 말도 못하던 헤르미온이 우연찮게 틴과 마르크의 대화를 듣게 되면서부터다.

“아레인은 어차피 우리와 거래를 하게 되었으니, 저분을 조만간 또 보게 되겠군.”

그 말에 마르크는 헤르미온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춰 작게 말했다.

“사실 한 달 후 약속이 또 잡혀 있습니다.”

헤르미온의 커다란 귀가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인지 쫑긋 섰다. 그녀가 엿듣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르크는 재차 말을 이었다.

“헤르미온이 알면 또 따라온다고 난리를 칠 테니 일단은 비밀로 해주십시오.”

“하하, 알았다.”

둘 사이에는 통하는 게 있었다. 그녀를 데려와서 괜히 민폐만 끼치질 않았던가.

헤르미온은 둘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 이후, 헤르미온은 절로 기대에 들떴다.

머리도 좀 손질하고, 상점에 들러 쇼핑도 할 생각이었다.

본래 외모와 치장에 그리 신경을 안 쓰던 그녀가 이런 마음을 품게 된 이유는, 그에게만은 무작정 잘 보이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귀고리는 뭘 살까? 옷은 또 뭘 사지? 하아, 며칠을 허비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고민에 잠겨 있다가 싱글벙글 웃곤 하는 그녀를 보며 마르크는 수상쩍게 생각했다.

‘설마 엿들은 건 아니겠지?’

눈치를 챘는지 헤르미온은 애써 딴청을 부렸다.

“뭘 봐?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 아니…….”

내색하지 않으려는 자와 캐내려는 자. 두 사람의 신경전은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 * *

그 망할 작자들이 낯짝을 들이밀기를 학수고대했다.

분을 금할 길이 없어 어제도 잠자리에서 몇 번이나 뒤척였다.

반나체의 시녀와 시종은 누워서 꼼짝 않고 있었는데, 그 주위를 붉은 핏물이 더럽혔다.

벌거벗은 몸으로 다리를 쩍 벌린 채 소파에 앉아 있는 엘룬이 원인이었다.

그의 오른손에 들린 검은 땅에 박혀 있었는데, 검에서 흘러내린 피는 엘룬을 원망하기라도 하듯 그의 발바닥까지 더럽히고 있었다.

엘룬의 표정은 며칠 전보다도 더 잔혹한 빛을 띠었는데, 마치 인간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얼굴이었다.

덴을 보낸 후 이곳에서 상당수의 재물이 빠져나간 것을 알았다.

본래 참을성이 없는 그였다.

금세 오리라고 생각했던 녀석들이 아직까지 오지 않으니 점점 난폭해져 가는 중이었다.

피만큼이나 붉은 태양이 떠오르며 창으로 스며들었다.

그때, 문밖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기별을 전했다.

“단장님, 부단장님이 뵙고자 하십니다.”

부단장이라면 발본과 덴이다. 덴은 떠나고 없으니 발본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모두에게는 엄해도 발본에게는 한 번도 화를 내본 적이 없는 그였기에, 억지로 화를 누그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들어오라고 해라.”

곧 발본이 들어섰다.

발본은 언제나 그 차림새였다. 잠도 자지 않았는지 일어난 지 한참은 되어 보였다.

“형님, 저희가 직접 들어가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엘룬의 한쪽 눈썹이 사선으로 뒤틀렸다.

“직접?”

“예. 저들은 카반에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기왕 싸움을 벌일 것이라면 본산을 어지럽히는 것보다 저희가 직접 가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적들을 당장에라도 쳐 죽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던지라 엘룬은 대뜸 일어섰다.

“그러는 게 낫겠어. 밖에 누구 있느냐?”

“예.”

“당장 부대를 소집해라. 마을로 간다.”

“넵.”

대답에 이어 인기척이 사라지자, 엘룬은 방 한구석에 구비되어 있는 낮은 욕조에 발을 담가 핏물을 말끔히 씻어낸 뒤 옷을 걸쳤다.

그리고 발본과 함께 문을 열고 막 방을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한 마적이 부리나케 달려와 급하게 입을 열었다.

“첨병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수상한 자들이 다가오고 있다고 합니다.”

엘룬은 입꼬리까지 치켜들며 내심 반가운 얼굴이었다.

그에 반해 발본의 후드 사이로 비치는 얼굴은 더 칙칙해 보였다.

“보나마나 그놈들이겠군.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 말이야.”

말을 하는 엘룬의 얼굴엔 짙은 살기가 드리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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