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여 가는 관계
덴이 후발 부대와 함께 현장에 도착했을 땐, 사방에 마적단들의 시체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어림잡아도 이곳에는 1백여 구의 시신이 있는 듯했다.
단 30명이었다. 보고를 받았을 때도 그쯤이라 했었다.
의외롭게도 저들은 다친 이들조차 없었다.
조금 전 다녀갔던 머리가 박살이 난 수하의 모습도 눈에 들어오며 덴은 더욱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뭐야? 저 돌대가리가 박살이 나? 해머로 내려쳐도 멀쩡한 대가리가?’
혹여 이상한 무기가 있나 훑어보았지만, 저들이 가진 무기라고는 검뿐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치가 이뤄지고 있는 형국에 음영부대주가 걸어 나오자 잘되었다는 듯 덴이 소리쳤다.
“너 이 자식, 우리와 무슨 원수를 져서 행패를 부리는 거야?”
그의 곁에는 방에서와 마찬가지로 두 여인이 함께 있었는데 좌측의 여인은 여전히 좌측에, 그리고 우측의 여인은 여전히 우측에 서 있었다.
이들이 이곳에 따라오는 것을 덴은 문제 삼지 않았다. 그녀들은 심지어 그가 화장실을 갈 때도 함께였으므로.
음영부대주는 말을 아꼈고, 그 점이 더 덴의 심기에 거슬렸다.
“왜 말이 없어? 다 벙어리 새끼들이야?”
그가 죄다 싸잡아 욕을 하고 있자 음영부대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오딘을 의식한 것이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무슨 욕지거리를 할지 몰라 음영부대주는 앞서의 물음에 낮게 깔린 목소리로 답을 들려주었다.
“원수랄 것까지는 없다.”
덴의 목소리가 더 커지고 더 날카로워졌다.
“원수가 아니라고? 그럼 뭐야? 우리한테 도전이라도 하려는 거냐?”
그 물음은 음영부대주보다 젊은 목소리가 답해주었다.
“도전이 아니라 멸하려는 것이다.”
덴은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린 쪽을 좇았다.
대여섯의 남자들이 눈알을 돌리며 시선을 피하는 것에 반해, 유독 한 사내만이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시선이 머문 곳에 검은 머리카락의 젊은 사내가 의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덴은 눈꺼풀이 찢어져라 부릅뜨고 오딘을 쏘아보았다.
“뭐냐, 애송이!”
목소리는 여전히 컸다.
귀가 근지러웠는지 오딘은 귓구멍을 후벼 파며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렸다.
“별로 필요한 녀석들이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정리를 하려고.”
덴은 악을 바락바락 썼다.
“네깟 놈이 뭔데!!”
날카로운 목소리가 이스론에서 따라온 사람들의 귀를 아렸다.
“더 얘기하기 피곤하군. 정리하도록…….”
오딘의 말에 음영부대주가 굵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지엄하신 명을 받들겠나이다.”
그리고 음영대 무사들에게 일렀다.
“지금부터 음영대는 이곳을 정리한다. 나를 따르도록.”
그 소리에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내며 앞으로 나서는 음영대 무사들 때문에 덴의 눈은 더 이상 오딘을 잡아두지 못했다.
틴 역시 재차 몸이 치유되어서인지 곁에 있던 쉬바인에게 말하고 나서려 했다.
“저도 도우겠습니다.”
그러자 그를 가로막는 손이 있었으니, 바로 오딘의 것이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그에게 쉬바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이 알아서 할 것이니 나서지 마시라는 뜻이오.”
틴은 무력함을 깨달았다. 자신의 실력이 저들에 못 미치는 것을 통감해서다.
“경험도 좋지만, 때로는 곁에서 지켜보는 것도 도움이 되는 법이지.”
시선조차 주지 않는 오딘의 말에 틴은 뭔가를 깨우쳤는지 잠시 표정이 굳어 있었다.
마르크 역시 걱정하던 차에 잘되었다며 다가왔다.
“오딘 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딘의 눈치를 살피며 행여나 목소리가 샐까 손바닥을 입 옆에 바짝 붙인 후 틴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저분이 검술에는 일가견이 없으시지만, 사리를 보는 눈은 정확하신 것 같아요. 저렇게 뛰어난 무사들을 데리고 계신 것만 봐도 말이에요.”
문득 틴의 시선이 오딘을 몰래 훑어보았다.
괴이한 생명체를 양각해놓은 검갑은 이제 보니 예사롭지 않았다. 30년을 넘게 대륙을 돌아다녔지만 결코 저런 검은 목격한 적 없었다.
화려함 따위에 빗댈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듯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보고 있으면 빠져 버릴 것만 같은 생김새. 보검도 저런 보검이 없었다.
물론 이 모든 감상평이 검갑 하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마르크 일행과 함께하며 오딘은 단 한 번도 흑룡검을 뽑질 않았던 것이다.
또 그의 중지에 끼워진 반지가 눈에 들어왔는데, 그것 또한 예사 물건이 아닌 것 같았다. 평범한 모양이지만 은은하게 초록빛이 감돌고 있었다.
‘아레인 내에서 지위가 있으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저 검은 그냥 보검 정도로 생각했는데, 볼수록 예사 물건이 아닌 듯하다.’
호리호리한 오딘의 체형 역시 그의 눈이 살피게 되었다.
그때, 틴은 마르크와는 다른 생각을 품었다.
‘검술을 익히기 좋은 체형이다. 군살이 없으시니…….’
그것이 틴의 한계였다.
벌써 오래전에 오딘의 몸은 환골탈태를 하여 무술을 익히기에 가장 좋은 신체로 거듭났다.
동물이나 식물, 미생물들이 진화를 하는 것처럼 오딘의 몸 또한 환경에 맞게 변화한 것이다.
왠지 모르게 틴은 오딘에게서 거대한 존재감을 느꼈다.
“구경을 해야 배울 게 있지 않을까?”
오딘의 타이름이었다.
틴은 그만 그를 훔쳐보는 데에 정신이 팔려 앞에서 난전이 펼쳐지는 것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음영대 무사들은 더 강해진 것 같았다. 그들의 행동은 더욱 신속해졌으며 검을 휘두르는 데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실력을 감추고 있었던 것 같군요.”
마르크의 솔직한 감상평이었는데, 그것이 틴의 자존심을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서, 설마…….”
농간당한 기분이었다. 저런 실력이 있는 데에도 자신을 끌어들였다는 것에 대한.
수치심으로 인해 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저도 모르게 주먹까지 쥐며 그가 물었다.
“일부러 그런 것입니까?”
마르크는 갑자기 싸늘해진 분위기에 영문을 몰라 하고 있었지만, 오딘은 재미있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셈이지. 자네가 나가길 원했지 않나.”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압니까?”
“눈빛이 그랬거든.”
틴이 쉬이 기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을 때, 오딘은 경고성 언사를 내뱉었다.
“알량한 자존심 따위는 내세우지 않는 게 좋아.”
그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말에는 거부 못할 힘이 실려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틴을 향한 그의 목소리에는 살기가 깃들어 있었는데, 그 때문에 틴의 얼굴은 공포심으로 까맣게 질렸다.
그제야 틴은 깨우치고 말았다. 자신은 정말 무서운 존재를 대해 왔다는 것을.
살기가 거두어졌지만 틴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마르크는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틴은 용기를 내어 오딘에게 물었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당신은 어떤 존재입니까?”
오딘이 어이가 없는지 낮게 웃었다.
“존재라니? 조금 웃기는 말이로군. 본 좌 역시 인간일 뿐이다.”
전투의 판세는 음영대 쪽으로 기우는 중이었다.
음영부대주는 덴과 정규군 3명의 합공에도 불구하고 전혀 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도리어 정규군이 하나씩 쓰러졌고, 그럴 때마다 다른 정규군이 수를 채웠지만 이젠 그마저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덴은 모종의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는 매번 자신을 따르던 두 여인마저 내팽개치고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또한 여인들 역시 눈치를 살피다가 왔던 곳으로 달아났다.
자연히 마적단들의 사기는 땅으로 꺼졌고, 이후는 학살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들은 덴의 방으로 돌아왔다.
한 여인은 두려움에 질려 있는 데에 반해 덴에게 가장 사랑을 받던 여인은 그렇지 않았다. 인상은 구겼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 표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곧 그녀는 교태스런 미소를 흘렸다.
‘남자란 것들, 어차피 다 똑같잖아? 여차하면 갈아타면 되지. 돼지가 슬슬 질렸었는데… 오히려 그쪽 남자들이 끌리네. 기왕이면 그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의 남자라면 좋겠는데.’
그 남자에게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숱하게 만나왔던 남자들과는 차별된…….
그를 생각하자 가슴이 설레고, 절로 흥분이 되기 시작했다.
눈은 몽롱해지고 볼은 홍조를 띠었다. 그녀는 혀를 내밀어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바로 그때 발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옆의 여인은 긴장하며 몸을 떨기 시작했지만, 이리스라는 이 여인은 기대에 들떠 보였다.
‘누굴까… 누굴까……?’
이리스는 그 발소리들이 덴과 그 추종자들이 아니길 바랐다.
곧 장막이 걷히며 발소리의 주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이리스의 요사스러운 눈이 한 남자에게 꽂혔다. 찜해둔 대상이 이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와 다르게 옆의 여인은 잔뜩 겁을 먹고 물었다.
“그, 그는……?”
그 물음을 틴이 답했다.
“그는 도망쳤소. 뚱뚱한 몸에 잘도 도망가더군.”
덜덜 떠는 여인을 보며 이리스는 코웃음을 쳤다.
‘멍청한 것, 길들여져서는. 세상에 널린 게 남자인데.’
음영부대주가 무심한 눈으로 그들을 보며 오딘에게 물었다.
“저 여자들은 어떻게 할까요?”
“제 버릇 남 못 주는 법. 쉽게 사는 버릇을 들였으니 다른 일에는 적응을 못할 것이다. 배운 게 저 짓이니 평생 저렇게 살아야겠지.”
그녀들에게는 서운할 말이었다.
이리스는 당장 옷자락을 나풀거리며 오딘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착 달라붙어서는 뜨거운 입김을 내뿜으며 귀에 대고 말했다.
“저도 데려가셔요.”
순간 헤르미온의 눈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저 여우같은 게…….’
당장에라도 할퀼 기세다. 그를 보며 마르크는 한숨을 쉬었다.
오딘도 기가 찬지 헛웃음을 짓다가 점잖게 말했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가 보군.”
그 말에 이리스는 고개를 팩 돌린 채 소맷자락으로 코와 입을 가리며 흐느꼈다.
“흑…….”
보호 본능을 자극하려 함이었다.
애초에 음영대는 그녀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지만, 이스론에서 나온 사람들은 그녀가 정말 가련해 보였다.
“저도 이렇게 살긴 싫었어요. 그에게 끌려온 후에 혹사만 당했답니다. 제발 측은히 여기시어 소녀도 데리고 가셔요.”
그러면서 그녀는 급작스레 오딘의 목에 팔을 둘러 꽉 끌어안았다.
그 광경에 울컥한 헤르미온이 더 참지 못하고 이리스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야!”
오딘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지만, 지금 헤르미온의 눈엔 뵈는 게 없었다.
“이게 어디서 수작질이야?”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이 방에 모인 많은 이들이 난처해했다.
오딘 역시 얼떨떨한 표정이었는데, 헤르미온이 성깔을 부리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전에는 자신을 의식하던 모습에 낯선 사람 앞에서 그저 부끄럼을 많이 타는 성격이겠거니 했었다. 그러나 지금 보니 그게 아니질 않은가.
그뿐이 아니었다. 지금도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있는 이 여인의 심장도 세차게 뛰고 있는 상태였다.
‘이상하군. 중원에서는 이러지 않았는데…….’
여자관계가 꼬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이유도 없이 얽히는 데에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잘생긴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중원에서의 평도 그러했다.
외모로만 보자면 밋밋한 인상에 불과했었는데, 이곳에 와서 이성들이 그를 보는 시선은 그때와는 달랐다.
이곳에서의 그는 개성이 강하고 매력이 철철 흘러넘치는 외모로 여겨지는 듯했다.
오딘이 상념에 빠져 있을 때에도 헤르미온은 당장 눈에 불을 켜고 그녀의 허리를 부여잡아 떼어놓으려 했다.
“놔, 안 떨어져? 당장 떨어지라고!”
그에도 아랑곳 않고 이리스는 행여나 떨어질까 오딘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면서, 덜컥 겁을 먹은 목소리로 도움을 요청했다.
“무, 무서워요.”
속이 새까맣게 타서 헤르미온은 거의 울먹일 지경이 되었다.
“놓으라고, 빨리…….”
음영대는 오딘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오딘은 헤르미온을 직시하다가 이리스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거짓말같이 그녀의 손이 풀어졌다.
그 바람에 오딘의 등 쪽에서 이리스의 손을 떼어놓으려던 헤르미온이 그의 등에 안기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순간, 헤르미온의 눈이 놀람으로 치떠졌다. 뜻하지 않게 그의 품에 안기게 된 꼴이 아닌가.
여러 사람들이 보고 있으니 이성은 떨어지라고 명령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 모습에 마르크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풉.”
여럿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음을 느끼고 오딘도 무안했던지 나지막이 그녀를 타일렀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지?”
그제야 헤르미온은 손을 풀며 붉어진 얼굴로 황급히 사과했다.
“미, 미안해요.”
이리스가 그녀를 흘겨보며 둘의 관계를 유추해보자 어렵지 않게 예측이 가능했다.
‘흥, 짝사랑이었군. 괜히 놀랐잖아.’
오딘은 쉬바인과 음영대 전부에게 전음을 보냈다.
-돈이 될 만한 것들을 끌어 모아라. 양이 꽤 될 테니 근방에 숨겨 두고. 일을 다 마칠 시에는 쉬바인과 남을 두 사람을 제외하고 카반으로 돌아와라. 남은 이들은 단장이라는 녀석이 돌아오면 부대주에게 보고토록.
음영대 무사들의 입술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으며, 전음을 행하지 못하는 쉬바인은 통신 마법으로 답을 했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분부대로 따르겠나이다.]
음영대를 제쳐 두고 오딘은 이스론의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그럼 가도록 하지.”
그 즉시 돌아서서 가려는데 이리스가 처연하게 쓰러지며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소녀는 어찌하옵니까? 소녀도 데리고 가주셔요. 제발 저의 주인님이 되어주세요.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이리스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돌아설 것이라고. 남자란 것들이 보통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은 크나큰 착각이었다.
싸늘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려왔다.
“거추장스럽군. 한 번 더 붙든다면 베어버리겠다.”
그 한마디에 이리스는 얼어붙었다.
살아오며 지금까지 자신이 마음을 품어 넘어오지 않은 남자는 없었다. 따지고 보면 덴 역시 자신이 선택한 것이다.
단장인 엘룬이 있는데 왜 덴을 택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엘룬에게는 이미 많은 여자들이 있었고, 숱하게 만나왔던 남자들과 별반 다른 점이 없어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해서였다.
충격이 적질 않아 이리스는 오딘과 이스론에서 온 사람들이 떠난 후에도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음영대 역시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질 않고, 자신들의 할 일만을 했다.
한참을 충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이리스는 겨우나마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곧 분한 마음이 들었다.
“흥, 네가 그렇게 잘났어? 세상에 널린 게 남자인데…….”
포기했어야 정상이거늘 그녀는 그렇지 못했다. 그녀의 눈이 독기를 품었다.
“대륙을 다 뒤져서라도 기필코 다시 찾아낼 테다! 그리고 나 없이는 못 산다고 애원하게 만들 테다!”
덴이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은 오딘이 잡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서였다. 그는 기왕이면 일을 빨리 마무리 지으려 하이에나 한 마리를 흘려보내 다른 동료들을 불러오기를 바랐던 것이다.
* * *
이스론 상단은 의뢰인들에게 무사히 물품을 전달할 수 있었다.
그들은 꽤나 놀란 기색이었다. 도착한 인원이라고는 짐꾼을 포함하여 도합 50이 되질 않았던 것이다.
“아니, 이 인원이 전부요?”
마르크는 뿌듯한 얼굴로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카반의 울프는? 그자들의 눈을 피해 오기 쉽지 않았을 텐데…….”
그에 마르크는 오기 전의 일을 얘기하려다 참았다. 그들 일부가 소탕된 것을 알면 이 일을 다른 상단에 의뢰할 수 있다는 계산이 앞서서였다.
대신 교묘히 돌려 말했다.
“저희만 아는 길이 있습니다. 그곳으로 오면 안전합니다.”
거래를 마친 상인들은 마르크의 얼굴을 범상치 않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젊은 나이에 대단하군.’
하나같이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는 눈빛이었다.
그들이 주문한 물건은 값도 비쌌지만, 근방에서는 구할 수 없는 물건인 샤릭의 뿔이었다.
샤릭은 일반 사슴과 비슷하다. 투명하게 빛나는 뿔을 제하고는 말이다.
이 뿔은 고가에 거래되었는데, 가공을 거친다면 상품 가치가 더욱 높아졌다. 뿐만 아니라 뿔에 함유된 투명한 액체는 장기가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특효약이었다.
이스론 상단이나 아레인이 들어서 있는 대륙의 남쪽보다도 이곳에서 샤릭의 뿔은 더욱 비쌌는데, 이유를 들자면 운송 때문이었다.
지금은 다른 곳에 가 있지만, 오딘은 친절하게도 남은 여정에 10명의 수하들을 딸려 보내주었다.
음영대는 아니었지만 이자들 또한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
단지 이 질풍대란 사람들은 음영대가 주는 분위기와는 조금 달랐는데, 이들 중 다섯은 백의를 걸치고 있었으며 나머지 다섯은 피처럼 붉은 적의를 걸치고 있었다.
오는 길에 마르크는 신이 나서 그들에게 음영대와 맞붙는다면 어느 쪽이 이기느냐는 질문을 던졌지만,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상인들의 눈은 그들에게도 오래 머물렀다.
‘상단이라더니 보통 호위 무사들이 아닌 것 같아. 예전에 이스론을 방문했을 때에는 못 보았었는데…….’
서 있는 자체만으로 그들은 위압감을 내뿜었다.
마르크 역시 저들로 인해 이스론 상단의 신뢰가 더해진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욕심 아닌 욕심을 품는 중이었다.
‘이런 분들만 함께해준다면 걱정이 없겠다. 정말로…….’
* * *
이곳에 목조로 이루어진 단층 건물인 포목점이 들어서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두 달 전이었다.
이 포목점은 ‘문 샤인’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파는 옷감은 대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거기에 푸근하고 산뜻한 느낌을 주는 색상은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건물과 내부의 독특한 분위기 때문인지 이곳은 저녁까지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파는 옷감들의 가격대도 천차만별이었다. 노예들도 살 수 있는 싼 옷감에서부터 귀족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값비싼 고급 옷감까지, 그 종류가 매우 다양했던 것이다.
좋은 옷감과 나쁜 옷감은 질감부터가 달랐다.
다만 나쁘다는 옷감 역시 옷감과 맞닿는 살이 거부를 일으킬 정도는 아니어서 이곳에 진열되는 옷감들은 들여놓기가 무섭게 불티나듯 팔려 나갔다.
입소문이 퍼져 찾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기에 포목점의 주인은 점포의 크기를 늘려 나갔다.
바로 옆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상인의 건물을 사들였고, 그 옆의 건물도 사들였다. 그렇게 해서 졸지에 상점가의 한 구역을 잠식해버렸는데, 그 까닭에 이곳은 ‘문 샤인 골목’이라는 이름이 붙어버렸다.
근처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상인들은 처음엔 시기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 모든 게 자신들에게도 득이 되는 일임을 깨달았다. 이 상점가에 드나드는 유동 인구가 전보다 배는 많아져 버렸기 때문이다.
칸막이로 구분이 지어진 포목점들은 각기 다른 옷감들을 내다 팔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사람들에게 더 큰 호응을 얻게 되었다.
안 그래도 귀족들이 신분이 미천한 자들과 옷깃이 스치는 것을 상당히 불쾌하게 여기고 있던 차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한 가지의 문제점은 안고 있었다.
상점과 상점 사이의 간격이 매우 좁아 이두마차 이상은 거리에 세워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가능하다면 이곳의 영주에게 말을 넣어 상점가의 재정비를 부탁하고 싶네.”
늙수레한 포목점 상인이 말을 건네고 있는 대상은 앞쪽의 레인 상단에서 나온 젊은 남자였다.
“그리되면 좋겠군요.”
레인 상단에서 나온 남자는 웃으며 그렇게 대꾸했다.
상단이라는 간판은 걸었지만, 레인 상단은 포목점 3개 정도의 크기밖에 안 되었다.
레인 상단은 포목점에 비해 매우 한산했는데, 다만 손님이라도 오기로 되어 있는지 몇 사람이 나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도 올 것처럼 꼿꼿이 선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하지만 포목점을 드나드는 누구도 그 광경을 크게 이상히 보진 않았다.
포목점 주인과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다가 젊은 남자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오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포목점 상인의 표정도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 정도가 흘렀을까? 그 시간 동안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두 사람의 눈에 기다리던 대상이 보였다.
더욱 경건한 마음 자세로 그들은 대상이 다가오길 기다렸다가 허리를 직각으로 숙이며 낮게 아뢰었다.
“오딘 님을 뵈옵니다.”
그뿐이 아니었다.
레인 상단에서 나와 있던 사람들이 한쪽 무릎을 땅에 붙였으며, 손님들을 대하고 있던 상인들 또한 다가가 직접 인사를 못 올리는 대신 눈으로나마 경외를 담고 있었다.
자연히 포목점 안과 밖에서 여럿의 시선들이 그를 보며 놀라는 중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 같은데, 어떤 인물이지?’
‘젊은 나이에 대단하군.’
근 두 달 만에 막대한 부를 거머쥐게 된 이 포목점의 실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노인과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레인 상단의 사람들이 이제 갓 스물을 넘긴 듯 보이는 청년을 지극히 높은 사람 대하듯 하니 놀라는 것이다.
오딘은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같이 온 헤르미온과 마르크, 틴을 데리고 레인 상단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마중 나와 있던 젊은 남자와 포목점 주인이 행여나 그림자라도 밟을세라 조심스레 그 뒤를 따랐다.
또한 문에 서 있던 남자들은 그대로 입구를 점하고 서서 눈을 번뜩이며 호랑이가 오더라도 길을 내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안으로 들어선 오딘은 레인 상단의 사람들, 즉 아레인 왕국에서 파견을 나온 이들과 회동을 가졌다.
“오딘 님께서 예측하신 대로 포목점은 하루가 다르게 번창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대륙에 없던 옷감을 꺼내놓은 것이 커다란 작용을 한 듯합니다.”
같은 재료라도 짜는 방식에 따라 다른 옷감이 만들어지고, 염색 방법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
이 대륙 역시 염색 방법이 발달하기는 했지만, 중원이나 고려처럼 천연 염색이 발달하지는 않았다.
천연 염색은 자연의 색 그대로를 입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옷에 밴 향이 독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보아도 질리지 않는 장점을 안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을 본 지도 꽤 되었군.’
오딘이 이 염색 방법을 알게 된 것은 고려에 둘도 없는 죽마고우 덕분이었다.
그는 문무를 겸비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재주도 가지고 있었는데, 천연 염색뿐만 아니라 도자기도 구웠으며, 회화(繪畵)나 악기를 다루는 것 역시 뛰어났다.
또한 무공에도 타고난 소질이 있었는데, 검 대신 권을 사용했다. 따지고 보면 흑월파천무의 수수께끼와도 같은 한 구결은 그가 풀어준 것이 아니던가.
오딘은 그의 무력을 높이 샀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손사래를 쳤다.
잠시나마 오딘의 눈이 고향에 대한 향수로 물들었다.
중원이 그리운 것이 아닌, 하나뿐인 죽마고우와의 추억이 깃든 장소들이 그리운 것이다.
그러나 중원에 남아 있었다고 해도 그를 보기란 어려웠을 것이었다. 무려 15년 전, 그는 세상을 등지고 은거를 했기 때문이다.
죽마고우인 만큼 오딘은 그의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수하들을 풀어 찾는다고 해도 자신을 반기지 않을 것이라는 걸.
고려 태생이어서인지 억센 성격에 쇠심줄 같은 고집이 있었던 것이다.
과거를 회상하는 오딘의 눈에 다정한 빛이 스치자 수하들은 의아할 뿐이었다.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제대로 배운 셈이었군.”
애초에 두 사람은 가는 길이 달랐다.
오딘은 무를 숭상하여 그쪽 방면으로만 걸어왔으며, 그의 죽마고우는 여러 것을 접하며 복잡한 세상을 깨우쳐 보려 했다.
그러니 오딘이 그가 하던 것들을 즐기며 배우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을 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으니 흡족할 수밖에. 그에 비하면 장난질 같은 데도 말이다.
과거의 기억이 그리도 우스운지 오딘은 천진난만하게 키득거리기까지 했다. 그러자 멋쩍은 것은 도리어 그의 수하들이었다.
돌연 오딘이 웃음을 그치고 그의 앞에 앉은 포목점의 대표인 노인을 보며 말했다.
“근방에 쓸 만한 재봉사가 있는지 알아보아라.”
“그리하겠사옵니다.”
노인은 대답부터 하고 나서 궁금한 것을 물었다.
“한데 재봉사를 왜 구하시는 것인지 감히 여쭈어봐도 될 는지요?”
원래대로라면 묻지 않을 것이었으나 지금은 경우가 달랐다. 오딘이 이곳에 자주 발길을 하지 않아서다.
기왕이면 뒷일까지 처리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레인의 옷감들을 사용해 치파오와 한복을 만들어보려 한다.”
오딘의 말에 노인은 많이 놀란 기색이었다.
“그것이라면 일전에 아레인 왕성에서 만드신 것 아니옵니까?”
“왜, 이상하더냐?”
노인은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저은 후, 이내 환한 낯빛이 되었다.
“아니옵니다. 절대 그렇지 않사옵니다. 이 늙은이가 그렇지 않아도 그것을 건의 올리고 싶었사옵니다.”
치파오와 한복. 이 역시 대륙엔 없는 것이었다.
만들기에 따라, 또한 색에 따라 두 가지는 많은 아름다움을 창조한다.
물론 이 대륙에 있는 옷들도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것은 많았다. 하지만 한복이나 치파오는 없다.
이는 철저히 차별화된 것이었다. 없는 것일수록, 흔하지 않을 것일수록 귀한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였으므로.
거기에 시험해볼 요량으로 오딘은 시녀에게 두 종류의 옷 모두를 입혀 보았는데 모두가 잘 어울렸다.
오딘은 거짓을 담고 있지 않은 그의 말이 만족스러운지 미소를 짓고서 뒷말을 이었다.
“우선은 귀족들을 대상으로 삼을 것이니라. 가격은 높여 불러도 좋다. 단, 재봉사는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 하며 다른 곳에 알려져서는 안 될 것이다. 만에 하나, 같은 장사를 시작하는 쪽이 있거든 저들에게 알려라.”
실내에 의젓하게 서 있는 무사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잘되는 장사가 있으면 따라 하기 마련이며, 그렇게 되면 이윤은 줄어든다.
이를 막으려면 철저히 차별을 두어야 한다.
노인은 겸허한 마음을 담아 아뢰었다.
“그리하겠사옵니다.”
그에 덧붙여서 오딘은 말했다.
“그들 중에 혹 실력이 뛰어난 자가 있다면 회유해보도록 하라.”
그러자 레인 상단의 젊은 단주와 노인이 같이 읍을 했다.
“분부대로 따르겠나이다.”
* * *
브란마 협곡 위를 30여 마리의 말들이 먼지를 휘날리며 질주하는 중이었다.
유독 2마리의 말들이 앞서가고 있었는데, 그 위에 올라탄 사람 중 한 명은 엘프 소년이었고, 다른 한 명은 중년인이었다.
둘의 얼굴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으며, 오는 도중 상처라도 입었는지 각기 입은 옷에는 굳은 피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나마 나은 것은 엘프 소년이었다. 중년인의 옷은 걸레조각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쉬어갈 법도 하건만, 이들이 쉬지 못하는 이유는 서슬이 시퍼렇게 검이나 마법 지팡이를 들고 뒤따르는 자들에게 있기 때문이었다.
엘프 소년이 고개를 돌려 나란히 달리는 옆의 중년인에게 말했다.
“리먼 아저씨, 헤이스트(Haste:속도 마법)가 시간이 다 되어가요.”
“그럼 저 망할 자식들이 잠깐 멈출 때가 되었겠구나.”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랬다.
이들은 쿤과 바리톤의 백작 리먼이었던 것이다.
협곡 위를 내달리는 말들이 유독 빠른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그들은 말에 헤이스트를 걸어 이동속도를 높였던 것이다.
다행인 점은 엘프 소년이 걸어놓은 버프가 저들의 버프보다 지속 시간이 길다는 점이었다.
50에 이르렀던 추격대가 이렇게 줄어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리먼은 말을 멈춰 헤이스트를 걸고 있는 사제들과 말 위에서 자신들을 쏘아보고 있는 성기사들을 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신성 제국? 흥? 너희들이 말하는 주신이 비웃겠구나.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생돈을 헌납하지 않는 건데… 한 푼이 아깝군. 개나 줄 걸 그랬다.”
“하하하.”
그 말에 쿤은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여러 날을 함께하며 쿤은 리먼과 정이 많이 들어 있었다. 본래 쿤 자체가 서글서글한 성격이기도 했지만, 리먼 역시 그를 친조카처럼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것이다.
그것이 쿤이 유랑을 그만두고 그를 따라다니게 된 동기였다.
쿤은 말 위에서도 마법을 시전할 수 있었기에 다행히 저들과의 거리를 더 벌여 놨지만, 느닷없이 불행이 닥쳐왔다.
길이 끝난 것이다.
아래로는 나무들이 무성히 자라 있지만 낭떠러지나 다름없었다.
두 사람이 멈칫하는 사이에 추격대는 거리를 좁혀 오는 중이었다.
리먼은 진지해진 표정으로 쿤을 보았다.
“전에 했던 말 기억하고 있느냐?”
쿤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무슨 말이오?”
“난 바리…….”
말이 이어지려는 찰나 쿤이 잽싸게 대답을 했다. 시간을 아끼려 함이다.
“아, 기억하고 있어요.”
리먼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지만, 조금 씁쓸한 느낌 또한 묻어났다.
“내 대신 그 말을 전해주려무나. 할 수 있겠지?”
“아저씨가 직접 하시면 되잖아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쿤은 직감할 수 있었다.
좌측과 우측으로 통하는 길이 있긴 하지만 너무 험했다. 그렇다고 몸을 사리지 않고 달리자니 말이 부상을 입고 쓰러질 우려가 있다.
모로 보나 잡힐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그 말인즉슨 이곳에서 갈라지자는 말이었다.
리먼은 흔들리려는 눈빛을 감추며 애써 완고한 태도를 보였다.
“각설하고 말하마. 내가 우측으로 갈 테니 넌 좌측으로 가려무나.”
“에이~ 같이 가요. 설마 잡히기야 하려고요?”
쿤의 눈에는 일체의 두려움도 없었다. 그의 눈에 담긴 감정이란 섭섭함과 아쉬움, 그리고 걱정들뿐이었다.
물론 쿤 역시 쫓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니 리먼보다는 잘 도망칠 수 있었다.
“벌써 저만치 다가왔구나. 이쯤에서 헤어져야겠다.”
말을 마친 리먼은 즉시 말고삐를 틀어 말 궁둥이를 때렸고, 말은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그 뒷모습을 향해 쿤은 양손을 모아 목소리에 힘을 주어 크게 소리쳤다.
“꼭 돌아오세요! 바리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살아서 만나요!”
그러고 나서 쿤 역시 자리를 뜨자 성기사들과 사제들은 각각 조를 나누어 두 사람을 쫓기 시작했고, 그중 거의 20에 가까운 무리가 리먼을 쫓았다.
사력을 다해 도망친다고 했지만, 또다시 마법 효과가 사라지며 리먼의 말은 느려졌다.
무리들의 발굽 소리가 가까워짐을 의식한 그는 짜증이 확 솟구쳤다.
“젠장, 이대로 생을 마감하게 생겼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힐책을 듣더라도 폐하의 청을 거절하는 건데…….”
뒤늦은 후회였다. 하지만 리먼은 작게나마 미소를 띨 수 있었다.
“그래도 널 만나서 즐거웠다.”
쿤이 있을 곳을 향해 잠시 뒤돌아본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되었다.
돌부리가 솟아 있는 것을 모르고 그가 탄 말이 발이 걸려 요란한 울음소리와 함께 투레질을 쳤다.
히히힝!
말과 함께 리먼은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그것은 검은 새였다.
리먼이 눈을 뜨고 몸을 꿈틀거리자 놀란 새가 날갯짓을 하며 날아올랐다.
푸드드득!
그 바람에 검은 깃털 하나가 그의 가슴팍에 내려앉았다.
먹구름을 드리운 하늘이 그의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난 살아 있는 건가? 아님, 죽은 것……?’
섣불리 판단하기는 일렀다. 아직은 확인된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일단 몸을 일으켜 봐야 했다.
등이 욱신거리고 쓰라리기는 했지만, 못 일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몸을 일으키다가 리먼은 깜짝 놀랐다. 한쪽 발이 바닥으로 푹 꺼진 것이다.
놀라 아래를 보았을 때, 그는 자신이 무성한 나뭇잎들 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 살았구나.”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조심에 조심을 더해 나무줄기를 잡고 슬그머니 바닥으로 내려왔다.
몸 상태만 좋았다면 뛰어서 내려와도 될 높이였다.
땅에 발을 디뎠을 때, 역한 냄새가 리먼의 코를 찔렀다.
“윽.”
냄새의 근원지를 발견한 리먼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줄만 알았다.
그것은 오장육부가 터진, 자신이 타고 있던 말이었다.
털이 곤두설 정도로 소름이 끼쳤다. 하마터면 자신이 저 꼴이 될 뻔하였지 않은가.
그도 잠시, 자신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휴, 그래도 아직 죽을 때는 안 된 모양이군.”
이윽고 그는 기어 내려온 나무를 어루만졌다.
“고맙구나. 네가 아니었다면 죽었을 거야.”
바로 그때, 풀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스스-!
리먼은 숨을 멈추고 즉시 주변을 살폈다.
‘설마… 그 녀석들이?’
그가 지칭하는 대상이란 자신과 쿤을 쫓던 신성 제국의 성기사들과 사제들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소리를 낸 건 오소리였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리먼은 주위를 살피며 앞을 향해 조심스럽게 걸었다. 하지만 주변 어느 곳에서도 인기척이라고는 느낄 수 없었다.
안심이 되자 불평이 절로 나왔다.
“쯧, 괜히 죽을 것처럼 말해버렸군.”
쿤을 떠올리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또한 바리톤에서 만나게 된다면 오랫동안 찾지 못한 행복이라는 것을 그 아이를 통해 얻게 될 것 같아 기분이 절로 들떴다.
“마누라가 일찍 죽지만 않았으면 지금쯤 아마 그만 한 아이가 있었겠지? 뭐, 날 닮았다면 꼭 그렇게 귀엽지는 않았을 테지만.”
툴툴거리면서 리먼은 무성한 나무숲을 벗어났다.
멀지 않은 곳에 도시가 들어서 있었다.
호주머니를 뒤적여 돈이 무사히 있는지를 확인한 후, 그는 망설임 없이 도시로 향했다.
도시는 엄연히 신성 제국의 영역이 아니었지만, 그곳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광경들을 접할 수 있었다. 거리 곳곳에서 전도사들이 간간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의도하지 않게 리먼의 입에서는 욕설이 튀어나왔다.
“망할 놈들.”
이는 리먼이 성기사와 사제들로부터 쫓기고 있는 데 대한 울분이기도 했지만, 그간 신성 제국에 머물며 소위 윗대가리라는 것들의 폐해를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우스꽝스럽게도 이들이 신을 전파하는 것은 더 많은 신도를 끌어들여 부를 쌓기 위함이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뿔탑 같은 구조였다.
탑의 맨 위에는 그들이 파견을 나온 신전의 수도원장이 있었다. 주신 아스카론이라는 허상을 세워두고 말이다.
문득 리먼은 자신이 주신이라면 어떤 기분이 들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고, 답은 어렵지 않게 나왔다.
“지랄 같은 기분이겠지.”
솔직한 말로 저건 주신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배때기를 채우는 것과 다름없질 않은가.
툴툴거리며 앞을 향해 걷다가 리먼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미행하는 이는 없었다.
“기분 탓인가?”
그는 차마 몰랐다. 자신을 보며 동질감을 표하듯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던 대상은 다름 아닌 주신 아스카론이었다는 것을…….
신성 제국에서 입버릇처럼 주장하는 것처럼 그는 실체라곤 없었다.
<믿어달란 적은 없었지. 그냥 내가 창조한 세상을 지켜보고 싶었을 뿐이야. 애석하고 미안하군. 내 기분을 헤아려 주는 자네를 지켜 주지 못해서. 부디 내 입장을 이해해주기를.>
목소리와 존재감은 거짓말처럼 바람에 실려 날아갔다.
이곳에도 종교의 자유는 있는 듯했다.
건물들이 죽 늘어선 곳과는 조금은 동떨어진 곳에서 리먼은 언덕 아래 가지가 무성한 나무로 둘러싸여 홀로 서 있는 신전을 보며 이를 갈았다.
“오줌이 마렵던 차에 잘되었군.”
신전의 뒤쪽에 오줌이라도 갈길 요량으로 그곳을 향해 다가갔을 무렵이었다.
뭔가가 크게 어긋나 있었다.
멀쩡해 보이던 건물 안은 폐허나 다름이 없었다. 신전을 상징하는 아스카론의 조각상은 반으로 베어져 있었으며, 시신들이 흥건한 피로 바닥을 적신 채 나뒹굴고 있었다. 신도들뿐 아니라 개중엔 사제와 성기사도 있었다.
“누가 이런 짓을…….”
그때, 뇌리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무처럼 깨끗하게 잘려 나간 시신들. 하나같이 겁을 집어먹고 죽은 표정은 바리톤에 사고가 있던 그때의 분위기와 유사했다.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대부분의 이들의 눈가에는 눈물이 말라붙어 땟국물이 얼룩졌다는 점이다.
리먼은 미친 사람처럼 주위를 헤집고 다니다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몸이 경직되었다.
펜던트였다.
이곳에 가지고 왔던, 그리고 신성 제국의 성기사한테 빼앗겼던 바로 그 펜던트 말이다.
리먼은 정신을 추스르고 잽싸게 그것을 챙겨 신전 문을 빠져나왔다.
펜던트를 든 손이 품에 들어가기 전, 경황이 없어 그는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쳤다.
“미, 미안하오.”
덜컥 겁이 났던 게 사실이다.
자신과 마주친 사람조차 확인하지 않고 말이 있을 곳으로 발길을 돌리려던 리먼은 석연찮은 기분이 들었던지 홱 고개를 돌렸다.
귀한 신분이었다.
일생 동안 만나보기도 힘들 정도로 귀한 신분.
고급스러운 망토와 옷을 제하고라도 바닥을 찍고 있는 지팡이가 그의 신분을 증명해주었다.
그 지팡이는 오래전부터 바로 신성 제국의 성황을 증명하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이는 무려 70년 전 편찬된 『대륙의 역사』라는 책의 그림에도 명시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신성 제국은 자신들을 상징할 만한 물건들을 책에도 기재했던 것이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물건, 또한 누구도 따라 할 수 없을 모양이었다.
그 모양이 하도 화려하고 고급스러워서 리먼은 그 지팡이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림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가 지닌 지팡이에는 푸른 색실이 달려 있다는 점. 그 역시 펜던트와 함께 발견했던 물건이었다.
놀람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자가 반쯤 고개를 돌린 채 리먼의 손에 들린 펜던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내 물건 같은데… 또 없어지면 곤란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