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스론 상단 (23/67)

이스론 상단

그 얘기가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회가 찾아왔다. 아레인에서 보낸 사자에 의해서였다.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가져서인지 로테노아의 병세가 조금 나아진 후였다.

그들이 원하는 일은 어려운 게 아니었다. 다만, 협조 요청이 아닌 반 강압적인 서한을 보내었던 것이다.

내용인즉슨 매우 간단했다.

얼마 전 바리톤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그를 조사해보라는 것이다.

미간에 주름이 생기려는 것을 꾹 참고서 로테노아는 얼마 전 전대 현자 클라베르가 했던 얘기를 몇 번이나 곱씹었다.

‘그는 나를 시험해보고자 한다. 그러니 이런 무례한 서한을 보냈겠지. 이제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외부의 세력에 도움을 청하는 수가 있겠지만, 그렇다 한들 아레인을 이기리라는 보장이 없다. 파국으로 치닫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그런 생각으로 로테노아는 사자를 마치 귀빈을 맞이하듯 대했다. 사자는 별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분명 이 같은 일을 전할 것이다.

곧 그는 리먼 백작을 불러들였다.

리먼 백작은 로테노아와의 독대에서 사정을 다 듣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데, 왜 저들이 그것을 조사하라는 것인지 저로서는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현재 아레인의 정벌에 동참했던 모든 귀족들의 기분은 가라앉아 있었다.

리먼 백작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그의 군대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으므로 남들보단 덜하다고 봐야 했다.

또한 자신이 믿고 따르는 이 왕자 유프라 역시 나은 점수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다른 왕자들처럼 점수를 깎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에 따른 결과가 좋질 못했기에 상심한 것뿐이다.

로테노아라고 귀족들의 심정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찬성을 하였다고 하지만 안건을 꺼낸 것은 자신이 아니던가.

당장은 그들을 어르고 달랠 필요성이 있었다.

그리고 최후의 카드 정도는 만들어두어야 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하여.

확실한 카드는 아레인이 되어야 할 것이지만, 그전의 카드 또한 필요했다. 적어도 그들의 마음에 들기 전에 사용할 카드 말이다.

그것이 로테노아는 리먼 백작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왕자에 대해 지극히 실망한 후다.

어떤 의미로 보자면 지금의 시국에 가장 잘 어울릴 만한 왕세자는, 될 수 있으면 마찰을 일으키고 싶어 하지 않는 유프라가 되어야 했다.

이 모든 게 그를 불러 독대를 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로테노아의 리먼 백작을 대하는 시선이 달라졌다.

“백작이 날 도와주어야 하네. 아레인에 의해 우리 왕국이 공국으로 그 위상이 추락했다고 하지만, 어쩌면 더 큰 물을 볼 수도 있네. 짐 역시도 이를 받아들이는 데에 오래 걸렸다네. 일단은 아레인이 원하는 것들을 들어줄 생각이네. 그러니 이유는 묻지 말아주게나.”

그냥 ‘나도 모르겠다’라고 하고 끝내도 될 말이었지만, 그의 입장을 추켜세우며 이렇게까지 말을 곁들인 것은 왕이 그에게 사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리먼 역시 그를 깨닫고는 황송하게 머리를 수그렸다.

“국왕 폐하의 명이시오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공왕이라고 불러주게. 짐도 슬슬 적응해야 하지 않겠나.”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로테노아가 그렇게 말하자 리먼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스스로를 낮춘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음에도 벌써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바리톤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얘기와 같질 않은가.

그래서인지 리먼의 태도가 한풀 더 수그러졌다.

“예전에 살인 사건의 현장에 가본 일이 있사옵니다. 폐하께옵서 이리 마음을 열어 환하게 맞아주시니 솔직히 말씀드리겠사옵니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모르겠사오나 인간이 벌인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거인의 칼에 잘리기라도 한 듯 집이 잘려 있었으며, 대단한 마법사라도 대동했는지 사방이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끔찍한 것은 마을 주민들의 시체였습니다. 당시에 생각하기로 이성을 가진 존재라면 그 같은 일은 행하지 않았을 것으로 사료되었습니다.”

“듣고 나니 간단한 일이 아니로군. 시일 또한 꽤 흐른 일이 아닌가?”

“그렇사옵니다. 듣기로는 대륙에 살인 사건을 위주로 수사하는 전문가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을 불러보심이 어떠실지…….”

돈이 많이 들지언정 그게 나았다.

하지만 로테노아는 왠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일 자체가 수사의 목적도 있겠지만, 바리톤을 시험하려는 의도도 있다는 판단이 앞섰기 때문이다.

“백작, 될 수 있으면 우리가 처리해보도록 함세. 정말 단서를 찾지 못해 오리무중이 됐을 때 의뢰하더라도 말이네.”

“폐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독대를 마치고 돌아가면서도 리먼은 힘들어하는 로테노아가 계속 맘에 걸렸다.

모든 책임을 통감하고 자존심까지 내팽개친 왕의 모습이 그렇게 씁쓸해 보일 수 없었던 것이다.

리먼이 수사에 착수하기 시작한 그 시점이었다.

스스로를 공왕이라 불러달라는 로테노아의 결정에 귀족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두 패로 갈라졌다.

한 패는 더 멀리 내다봐야 한다는 진보 성향의 귀족들이었고, 다른 한 패는 왕국의 자존심을 버릴 수는 없는 일이라며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는 바리톤의 대표인 국왕의 면모에 대해 실망한 보수 성향의 귀족들이었다.

이들은 시일이 흘러갈수록 서로의 시각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점차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보수 성향은 일 왕자 헥토르를 주축으로 몰렸으며, 진보 성향은 이 왕자 유프라를 주축으로 몰렸기에 장차 걱정스런 앞날을 예고하고 있었다.

* * *

아레인의 왕성 앞으로 군대가 도열하고 있었다.

의외로운 것은 이 중 태반이 갑주조차 착용하질 않았다는 점이다.

모양이 다른 다섯 종류의 깃발을 든 기수들이 열의 제일 앞을 선점하고 섰다.

각각 음영대, 철왕대, 마혈단, 질풍대, 흑풍단이라는 단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 뒤로 이름만 대면 알 법한 귀족들이 서 있었으며, 제일 앞쪽에 임시로 자리한 단상에는 오딘이 서 있었다.

자신의 뜻대로 단체를 창설한 덕에 나름 감회가 새롭긴 했지만, 분명한 건 썩 만족스럽진 못하다는 것이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실망이 컸다.

‘예전 같질 않군.’

분위기 자체가 너무 달랐다.

마교의 고수들은 마기를 풀풀 흘리기 때문에 이렇게 모아놓으면 꽤 보기가 좋다.

그러나 이들은 뼛속까지 군사들일 뿐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마교의 고수와 부합되는 사람을 꼽으라면 마타하리와 외눈이 되어버린 발데르 정도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시작한 김에 끝까지 밀어붙여야겠다. 이제부터라도 마교의 수련 방식을 적용시켜야 한다. 위험은 좀 따르겠지만… 새로 설치한 진 역시 각자의 단체 성격에 맞게 해놓았으니 저들이 수련만 열심히 해준다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겠군.’

또 다른 욕심도 있었다.

‘마혈단이 좀 늘어나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러나 오딘도 양심이란 게 있었다. 그렇다고 생사람을 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질 않은가.

돌연 기발한 생각이 났다.

‘크큭, 그래. 그 방법이 있었지. 무기수, 사형수들을 끌어다놓으면 되겠군. 죄를 사면시켜 주는 대가로 말이야.’

그다운 생각이고 발상이었다.

군사들을 세워둔 채 그는 사악한 미소까지 머금어가며 혼자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었고, 덕분에 군사들은 멀뚱멀뚱 단상만 바라보았다.

2천에 이르는 눈들의 주목을 느낀 오딘은 그제야 자세를 바로 하고 위엄 있는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을 축하한다. 제군들은 아레인의 핵심이 될 것이다. 하나, 마음을 놓아서는 곤란할 터. 성의가 없거나 단체에 반하는 행동을 할 시에는 엄벌이 내려질 것이다. 대신에 그대들은 명예와 자부심을 갖게 된다.”

사람의 마음이란 자고로 솔직한 법.

오딘도 그러했다.

때문에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연설은 지금처럼 흐지부지했다.

그리고 그 부족함을 각 대주들과 단주들이 부복함으로써 채워주었다.

제일 처음은 가장 왼편에 위치한 켈타스에게서였다.

“음영대 대주 켈타스, 충성으로 보답할 것을 맹세합니다.”

“철왕대 대주 발데르, 충성으로 보답할 것을 맹세합니다.”

“마혈단 단주 아렌, 충성으로 보답할 것을 맹세합니다.”

“백의질풍대 대주 가인, 충성으로 보답할 것을 맹세합니다.”

“적의질풍대 대주 헤르, 충성으로 보답할 것을 맹세합니다.”

“흑풍단 단주 보탄, 충성으로 보답할 것을 맹세합니다.”

오딘은 조금이나마 허전한 마음이 달래짐을 느꼈다.

이들의 목소리들은 하나같이 컸지만, 마혈단의 단주를 책임지게 된 아렌은 표정에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초라한 사람은 분명 그였다.

이때까지 아렌은 자신이 담당한 단체가 대륙에 가장 소름을 돋게 할 것을 감히 예상치 못하였다.

* * *

살인 사건의 수사를 맡게 된 지 어언 한 달.

리먼 백작은 사건 현장을 뒤지고 시신들을 매장했던 곳을 파내 사건과 연계될 만한 모든 것을 수집하다시피 했다.

범위가 점점 좁혀 들고 있었다. 아니, 넓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발견한 것은 이 이상한 펜던트와 검 자루에 달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푸른색 실뿐이로군.”

매우 진한 푸른색이었다.

보고 있으면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줄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이것은 아레인의 것도, 바리톤의 것도 아니야.”

외부의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두 곳이 아니라면 이 넓은 대륙 어디에서 이것의 주인을 찾는단 말인가.

일이 훨씬 더 힘들어질 것 같아 리먼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문득 펜던트의 덮개를 열자 안은 무슨 공간이라도 자리하고 있는지 하얀빛을 내며 계속하여 일렁거렸다. 마치 게이트처럼 말이다.

“아무리 봐도 신기하군. 이런 펜던트는 나도 처음 보는 거야. 인간이 만든 공예품은 아닌 것 같아.”

수사에 착수하고 있는 다른 수하들도 그에 대답을 못하였다. 그들도 이 난제에 골머리를 앓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한 남자가 리먼 백작에게 바짝 붙어 그것을 들여다보더니 조심스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펜던트의 줄은 그자가 직접 끊은 게 아닐까요?”

“그렇겠군. 금속으로 된 연결 부위는 그대로이니……. 도대체 왜 끊었을까? 쉽게 구할 수 없는 귀중한 물건일 듯한데.”

“이해하기 힘든 일투성입니다. 대륙의 사람이 왜 저희 왕국에까지 발을 뻗어 이런 일을 벌여 놓은 것일까요?”

“발각되지 않으려는 주도면밀함이겠지. 원한에 의한 일만은 아닌 것 같아. 그저 욕구불만을 풀었던 것일 수도…….”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존재한다.

사소한 일로 감동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남을 괴롭히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거나 엉뚱한 곳에서 쾌락을 찾는 사람도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죽여 쾌락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지금 리먼의 추측대로 말이다.

리먼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결단을 내렸다.

“여기서 일단락을 지어야겠군. 일단은 이 일에 대해 폐하께 보고를 올려야겠어. 무엇보다 앞으로의 일이 더 골칫거리야. 폐하께서는 우리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을 원하시니 말이야.”

굳이 뒷말을 듣지 않아도 알 법했다.

리먼 백작은 살인 사건의 원흉을 찾으려 저 넓은 대륙까지 발을 내디뎌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 * *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갔다.

근 2년 동안 아레인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특히나 마교에서 착안한 다섯 단체가 그러했다.

짐을 가득 실은 6대의 사두마차가 아레인 왕성에 입성을 시도하는 중이었다. 이들은 벽곡단을 만드는 곡물들을 납품하는 상단의 상인들이었다.

“이봐, 마르크, 뭔가 이상해진 것 같지 않아?”

질문을 받은 사내는 스물 남짓의 청년이었다.

몸은 비교적 왜소했지만, 피부색이 구릿빛이어서인지 건강해 보였다.

이스론 상단의 단주 폴칸은 일찍이 그의 총명함을 한눈에 꿰뚫어 보고 후에 상단의 중책을 맡기려 위해 여러 가지의 일들을 떠넘겼다.

그가 아레인 왕성에 오게 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는데, 뛰어난 눈썰미 덕에 그 역시 아레인의 변화를 한눈에 알아챘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분위기뿐만 아니라 이상한 기운까지 감도는군요.”

그가 본 대로 아레인성의 가장 위쪽을 장식하고 있던 반원형의 돔 장식은 사라지고, 대신 무섭도록 치솟은 뿔 탑이 그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성벽을 허문 대신에 왕성은 그만큼이나 넓어졌는데, 다섯의 건물들이 왕성을 호위하듯 자리하고 있었다.

“맞게 온 걸까? 어째 털이 쭈뼛쭈뼛 서는 게 좀 무섭기까지 하군.”

두 사람이 느낀 것을 다른 사람이라고 못 느낄 리가 없었다. 다른 마부들과 상단에서 파견된 사람들 역시도 조금 움츠러든 모습이었다.

그 같은 현상은 왕성에 다가갈수록 더해졌다.

마르크가 말에서 내려 경비들에게 다가갔다.

“이스론 상단에서 왔습니다. 이것은 부탁하신 물품들의 목록입니다. 확인해보시고 출입을 허가해주십시오.”

목록을 살펴본 경비는 마차를 두루 돌아다니며 물품을 확인하고는 자리로 돌아와 차가운 태도로 말했다.

“맞군. 들어가시오.”

구태여 성문을 열 필요도 없었다.

두꺼운 성벽을 허문 대가로 본래의 성문은 자리하질 않았던 것이다.

대신 여러 개의 낮은 벽이 자리하고 있었고 벽마다 고풍스러운 문양을 새긴 두꺼운 나무문이 자리했는데, 문들은 각기 다른 글씨가 적혀진 현판이 걸려 있었고 문마다 범상치 않아 보이는 2명의 경비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마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문이 열리고 또 문이 열리고 하는 진풍경이 연출되어 상인들은 마치 신기루라도 목격하는 표정이었다. 대륙 어딜 가더라도 이와 같은 모양새의 왕성은 없었으니까.

어느 부분을 지날 때에는 상인들 모두가 숨 쉬는 것이 버거울 정도였는데, 매우 탁한 기운이 주변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그곳이 마혈단의 수련장이라는 것을 이들이 알 리 없었다.

비단 그곳만이 아니었다. 다만 정도의 심하기에 따르자면 마혈단의 수련장이 최고조였던 것이다.

안쪽까지 이동했을 때에야 이들은 그제야 한시름을 돌릴 수 있었다.

여기저기 꽃들이 만발해 있었으며, 보이는 연못마다 연꽃이 띄워져 있고 살이 통통하게 오른 비단잉어가 돌아다녔다. 또 그 위로는 돌다리들이 늘어서 있어 보는 이들의 눈까지 즐겁게 해주었다.

“이곳은 매우 아름답군. 입이 쩍 벌어질 정도야.”

“영문을 모르겠군. 아레인 왕성에 무슨 바람이 불어 이렇게 변했는지…….”

저마다 그렇게 자신의 느낀 바를 털어놓는 중이었다.

곧 뒤편의 건물에서 상인들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는지 늙수레한 집사가 걸어 나왔다. 그라니트성에서부터 쭉 거래해왔던 사람이다.

궁금함을 못 참고 상인 하나가 물었다.

“왕성에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이오? 그래서 이렇게?”

집사는 그에 대해 일절 언급을 않고서 그냥 방그레 웃기만 하였다.

“많이 변했지요?”

“많이 변하다 뿐입니까. 저희들은 잘못 찾아온 게 아닌지 오해까지 하였습니다.”

상인들에게 그는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다.

자신들과 거래하는 곡물로 무엇을 만드는지 물었을 때도 대답해주지 않았으며, 지금도 그러했다.

그래도 상인들은 그에 대해 아쉬운 소리를 할 수 없었다.

물건 중에는 사람들이 잘 먹지 않아 거래되지 않는 품목도 있었는데, 그런 것까지 사주고 있는 귀중한 소비자니까.

왜인지 몰라도 몇 년 사이에 시키는 양이 더욱 늘어 이 거래는 상단 내에서도 중요한 거래로 자리 잡게 되었다.

물품을 내어주고 계산을 마친 마르크가 말했다.

“저번 거래의 잔고까지 총 백오십입니다.”

금화의 양을 말함이다.

대부분의 거래가 이렇게 외상을 깔아두었다. 그 대상이 제국이라도 말이다.

집사는 근처의 사람을 부르더니 그에게 돈을 내어주게 하였다. 그를 확인하던 마르크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

“이걸 다, 다 주시는 겁니까? 설마 저희와 거래를 끝내시겠다는……?”

이렇게 큰돈을 한 번에 내어주었다는 것에 대해 더러는 고마움을 느꼈고, 더러는 불안함을 느꼈다.

그리 보는 게 무리도 아니었다.

이는 다른 곳과 거래를 시작하게 됐을 때 벌어지는 현상이었으므로.

집사는 여전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항상 잔고를 깔아둘 수는 없지요. 그건 그렇고 잠시 기다려 주셔야겠습니다.”

마르크를 포함한 상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무엇인가를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 집사가 걸어 나왔던 돌길을 통해 한 남자가 장포를 휘날리며 걸어 나왔다.

상인들도 익히 알던 사람이다.

그의 정체는 이들이 신처럼 떠받드는 오딘이라는 사람이었다.

집사는 아뢰지 않고 부복하기만 했다.

당사자가 너무 오딘 님, 오딘 님 하는 바람에 귀찮아져 자주 마주치는 경우에는 따로 말을 꺼내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던 탓이다.

“사람이 꽤 많이 왔군.”

상인들도 수그리는 모습이었다.

이 거래를 원한 사람이 그였으니 대고객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오딘은 그중 한 사람과 대화하길 원했다.

“상단주와 얘기하고 싶은데, 이 중에 상단주는 없겠지?”

“단주님을 만나 뵙길 원하시면 말씀을 올려 수일 내로 찾아 뵙게 해드리겠습니다.”

그 말은 상단 자체가 그를 꽤나 중히 여긴다는 뜻이었다.

오딘은 가볍게 고개를 젓고 말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군. 내 의사를 대신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이면 되겠어.”

집사는 한 걸음 물러서서 겸허한 자세를 내보였다.

한쪽에서는 그를 안 좋게 보는 시각도 있었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반말지거리군…….’

그러나 다수가 그렇지 않았고, 처음부터 거래를 해왔던 사람은 미심쩍은 기분마저 느꼈다.

‘이상해, 저 사람은 늙질 않아.’

어쨌거나 대표와 얘기하겠다는 말에 여러 상인들에게 등이 떠밀려 마르크가 앞으로 나서게 되었다.

덕분에 마르크는 이 오딘이란 청년과 같이 주변을 걸으며 담소를 나누게 되었다.

알싸한 꽃향기가 절로 기분을 들뜨게 만들고 있었다.

동년배 정도로 생각되는 남자가 극진한 대접을 받는 것은 전부터 이상하게 여겨졌던 부분이라 말꼬나 틀 작정으로 그를 물었다.

“부럽습니다.”

“뭐가 말인가?”

아랫사람 대하듯 하는 말을 마르크는 기분 나쁘다거나 아니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선은 오딘이라는 이 남자가 꽤나 높은 직위의 사람이라 생각되었고, 상인이다 보니 별별 꼴같잖은 모습들을 많이 봐온 탓에 웬만한 일에는 이처럼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나이로 보면 대충 제 또래라고 생각되는데, 큰 출세를 하신 것 같아 말입니다.”

여태껏 일 위주로만 살다 보니 그들은 아레인의 속사정을 몰랐다. 그러니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어려 보인다는 데 좋지 않을 리가 없어 오딘은 마르크를 마주 보고 웃었다.

“내가 그렇게 젊어 보이나?”

“많이 봐줘도 스물다섯이 안 되어 보이는데, 제 눈이 잘못된 것입니까?”

“겉으로 드러난 외모가 다는 아니지. 그러고 보니 내 나이를 잊고 살았군.”

정말이었다.

어느 해부턴가 오딘은 자신의 나이를 계산하지 않았다.

놀람이 적지 않았는지 마르크가 큰 눈을 하고서 물었다.

“그, 그럼 당신의 정체는…….”

“정체까지 들먹일 건 없어. 또 드래곤이라는 말을 하려거든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가까운 예로 쉬바인이 그렇게 물었었다. 자신이 신봉하는 드래곤은 혹시 그가 아닐까 했던 것이다. 사람 같지 않은 힘에 전혀 늙지를 않으니 말이다.

얘기가 따분해질 것 같았는지 오딘은 바로 화제를 돌려 버렸다.

“이스론 상단이라고 하였나?”

“그렇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지. 본 좌는 그대들과 손을 잡고 싶다.”

짧으면서도 강렬한 말이었다.

마르크는 대담하게도 서슴없이 조건을 꺼내고 있었다.

“저희가 얻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쁘게 듣지는 말아주십시오. 저희는 상인이고 이익을 추구하는 단체입니다. 그러니 이는 오딘 님께서 먼저 배려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단주님께 말씀을 드려야 하는 처지이니 너그러이 이해해주십시오.”

오딘이 이런 말을 꺼내게 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장차 전 대륙을 상대로 무역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자면 직접 펼치는 것보다 전문 상단의 도움으로 일어서는 것이 나았다.

무엇보다 대륙의 실정을 그가 몰랐기 때문이고, 설사 다른 자들이 안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상인이 아닌 일반인으로서다. 때문에 그를 깨달아가는 데 엄청난 시일이 소요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 사람들이 아닌, 다음 대에 이르러서야 상단이 빛을 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직접 상단과 거래를 해볼 생각이었다.

애초에 이들을 적대할 필요는 없었다.

이 상인들은 주종 관계가 아닌 협력자, 혹은 동업자로서 받아들일 생각이었으므로.

“상단이 얻는 것이라… 더 많은 이익을 주면 되지 않을까?”

마르크는 사람을 대하는 처세술도 뛰어났다. 그래서인지 오딘의 지금 이 말을 전혀 고깝게 받아들이지 않고 반갑게 받아들였다.

“하하! 저희가 가장 필요한 것이로군요. 그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우선 한 가지 묻지. 이스론 상단은 대륙에서 몇 번째로 크지?”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마르크는 이조차도 슬기롭게 받아넘겼다.

“이스론은 크긴 하지만 대상단이라고 단언하긴 어렵습니다. 아쉽지만 제 손가락과 발가락을 다 합쳐도 순위를 매길 수 없군요.”

태도가 마음에 들었던지 오딘도 그를 살갑게 맞아들였다.

“그 이유가 있겠지? 자본력이 모자란다거나 힘이 부족하다거나…….”

모자란 부분은 인정하더라도 허세라도 부려야 했다.

왕국과 손을 잡는다는 것은 그들에게도 좋은 일이 될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둘 다입니다. 자본력도 힘도 모자랍니다. 하지만 저희 상단은 다른 상단보다도 우수한 인재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우수한 인재들이라… 제일 좋은 것이로군. 장사는 사람이 하는 것이지, 물건이 하는 것이 아니니까. 물론 좋은 물건이라면 아무렇게나 내다놓아도 팔리겠지만.”

지금 하는 얘기들로 봐서는 마르크는 흡사 오딘이라는 이 사람이 상인이라는 착각까지 들었다.

오딘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서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될 수 있으면 믿어주지.”

마르크의 마음이 왠지 모르게 편했다.

몇 마디의 대화, 그것만으로 그는 오딘이라는 존재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렸다. 그 끝 모를 여유와 자신감,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 사람, 보통내기가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직감이 뛰어났다.

특히 장사에 관계된 것은 더욱 그랬는데, 지금 역시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이 거래를 성사시켜야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입에 침이 마를 새도 없이 마르크는 부지런히 혀를 놀려 댔다.

“지금 주신 제안,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제게 결정권이 없으므로 상단주님께 일단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우선은 많은 현안들이 오가야 할 듯합니다. 구체적인 논의는 제가 조만간 상단주님을 모시고 와 하겠습니다.”

“간단한 문제가 아닐 텐데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군.”

오딘의 말에 마르크 역시 속내를 털어놓았다.

“때로는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비단 국가에만 해당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서로에게 득실을 따져 이권 다툼을 행하는 일은 이곳 라비아 항만 근처에도 자주 있던 일이었다.

무려 2백 년 전까지만 해도 규모가 작은 상점을 운영하는 장사치들은 시정잡배들에게 시달렸으며, 내로라하는 장사치들은 시정잡배에서 조금 더 발전한 폭력 조직에게 시달렸다.

상인들은 경쟁 때문에 서로를 헐뜯고 싸웠으며, 그들에게 돈을 걷고 보호해준다던 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구역 다툼을 벌였다.

영지가 있고 왕국이 있는데 왜 그럴까란 의문이 드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것은 이 항만이 자유경제 구역으로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그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상점들도 힘을 가진 자에게 빌붙어야만 했다.

조합이 그 단적인 예였다.

하지만 영세 상인들은 조합에서 주기적으로 요구하는 관리비를 감당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런 그들 위주로 뭉친 것이 로마노스 대륙 최초의 상단이었다.

상인들이 많이 몰린 곳에는 이처럼 사설 경비를 운용하는 상단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그 때문에 시정잡배들의 손아귀에서는 벗어났지만 위협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다.

운송이 그러했다.

목적지에 물건을 운송하기 전까지 산적이나 해적의 습격을 받을 수도 있는 노릇이고, 몬스터의 침공을 받을 수도 있다.

그 때문에 무역을 하는 이들에게 상단이나 조합의 가입은 불가결한 요소가 되어버렸다.

권력이 아니라면 돈이라는 말이 있다.

막대한 부를 이룬 상인들은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많은 일들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돈으로 사람을 고용하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 항만에 이스론 상단을 세웠던 이스론 역시 계속하여 성공 가도를 달렸기에 이처럼 커다란 규모의 상단을 세울 수 있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스론이 15년만 더 살았더라도 대륙 최고의 상단을 만들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었다. 그 정도로 이스론의 존재는 대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이스론 상단은 대륙 7위라는 영예에서 물러난 지 오래였다.

그는 분명 뛰어난 안목과 선견지명 덕에 많은 일들을 이뤄 막대한 부를 이루고 그 돈으로 상단을 발전시켰지만, 그것이 천년만년 가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이스론 상단은 그의 사후 쇠락의 길을 걸어왔다고 봐야 했다.

그래도 그는 분명하게 이름을 남겼다.

경제에 관련된 책에도 이름이 회자되어 있기도 했지만, 이곳에 지어진 건물들의 상당수에는 이스란이라는 이름이 양각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그 이름에 가지는 자부심은 남달랐다.

“이봐, 부지런히 움직이라고… 오늘 안에 선적을 마쳐야 하니까 말이야.”

앞쪽으로는 거대한 배가 선착장에 정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 인부들이 뙤약볕에도 불구하고 혼자나 둘 혹은 서넛 이상이 한 조가 되어 비지땀을 흘려 가며 포장된 나무 상자들과 소금 포대들을 비롯한 여러 짐을 그 배에 싣고 있었다.

더 이상 이곳에 눈을 둘 필요가 없어서인지 지시를 내린 등이 굽은 남자가 적재 품목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창고로 발길을 옮겼다.

매우 커다란 창고였다.

그 너비만 해도 5백 보는 됨 직한 창고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계속해서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굳이 따지자면 사람들만은 아니었다.

간간이 오크 노예들도 보였으며, 귀가 길고 뾰족하며 피부색이 매우 하얀 엘프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어른의 반 만한 키에 가늘고 긴 팔, 엘프보다도 커다란 귀에 매부리코를 하고 있는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을 가지고 있는 존재도 있었으니, 바로 고블린이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 고블린이었는데, 인상만큼이나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들은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정크, 거기가 아니라고… 저쪽, 저쪽!”

정크라 불리는 대상은 다름 아닌 오크였다.

그 오크는 고블린의 말과 손짓에 당황하며 포대를 들고 어찌할 바를 몰라 이리저리 방황했다.

결국 참다못한 고블린은 똑같은 포대가 놓여 있는 곳까지 걸어가서는 오크를 보며 소리치다시피 말했다.

“여기라고, 여기. 딱 보면 몰라? 네가 들고 있는 포대랑 모양이 똑같잖아!”

오크는 그제야 자신의 우매함을 깨우쳤는지 한 손으로 머리를 박박 긁으며 포대 자루를 들고 와 그곳에 내려놓았다.

이후는 같은 행동이었다.

고블린은 화를 삭이지 못하고 다시 제자리로 걸어가면서도 내내 툴툴거렸다.

“에이, 멍청이 같으니라고. 누가 오크 아니랄까 봐 꼭 두세 번씩 알려 줘야 되네.”

사실 정크라는 오크는 인간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이 고블린은 아니었다.

고블린은 비교적 지능이 뛰어난 편인데, 그중 더러는 매우 특출나 꾸준히 배울 경우 이 녀석처럼 종종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고는 했다.

그를 지켜보던 남자는 신경 쓸 것 없겠다는 듯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떴다.

감독관이 가고 난 후에도 고블린은 계속하여 조바심을 부리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천성이 부지런했기 때문이리라.

그때 문득 한 남자가 찾아왔다.

마르크였다.

고블린은 그를 발견하고 긴 팔을 뻗으며 매우 반가워했다.

“여어, 마르크, 갔던 일은 잘되었나?”

마르크는 고블린이 내민 큼지막한 손바닥을 탁하고 내려치며 입술을 비죽 내밀어 퉁명스럽게 말했다.

“못 될 건 또 뭐야?”

마르크는 고블린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며 창고를 휘 둘러보더니, 잊고 있었다는 듯 중요한 용건을 꺼내어 물었다.

“참, 상단주님은 어디 계시지?”

“방금 이곳에 들르셨는데, 아마 저리로 가셨을걸.”

“그래? 그럼 계속 수고해.”

말을 마치고 마르크는 고블린이 가리키는 쪽을 따라 걸었다.

마치 기계 같았다. 동료가 자리를 떠나자 고블린은 그 잠시의 시간을 헛되이 보냈다고 생각했는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딸그락.

3층의 창가에 위치한 원목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은 것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남자가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찾아온 사람이 입을 열었다.

“단주님, 마르크입니다.”

그 말을 듣고도 등이 굽은 남자는 창밖의 광경에서 눈을 떼질 않았다.

밖에서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그의 어깨는 꽤나 무거워 보였다.

“벽이 너무 많아.”

그것이 그의 첫마디였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마르크는 그가 참 고민이 많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혼자서 너무 많은 것을 떠안고 살아온 탓일 것이다.

상단을 비롯해 사람들과 물건들, 그리고 신용.

다시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인부가 없어. 인부가…….”

그 말의 속뜻을 마르크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단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물이겠지.”

그에 대해 마르크는 답하지 않았다.

정말 그가 필요로 하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는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그때서야 상단주로 칭해지는 남자가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래, 무슨 일이냐?”

“제게도 차를 한 잔 내주시지 않겠습니까?”

원래 이곳 사람들은 상단주를 매우 어려워했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디나 다 마찬가지였다.

‘등이 굽은 사람이다’라는 인식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었고, 인상도 원체 험상궂었으며 사람을 대하는 말투나 행동 또한 친절하지 못해서였다.

그러나 마르크는 아니었다.

병을 이기지 못하고 이미 세상은 떠났지만, 살아생전 그의 동생 역시도 상단주와 비슷한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동정을 해주지는 않았다.

그것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자존심을 깡그리 뭉개버리는 꼴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의 그런 부분은 꼭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타 종족, 더 나아가 몬스터에게까지 비슷한 시선을 건네었던 것이다. 고블린이나 오크가 그를 달갑게 맞아들이는 이유도 그에서 기인했다.

덕분에 상단주와의 거리는 마르크만큼 가까운 사람이 없었다.

그는 전혀 어려워하지 않고 얘기를 꺼내려 했다.

“다름이 아니오라…….”

그러나 채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상단주의 한숨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후우, 갈수록 태산이야. 일거리는 많은데 진행할 수 있는 일이 반도 되질 않아.”

할 말도 잊고 마르크가 그 연유를 물었다.

“왜입니까?”

“경호 문제 때문이야. 위험한 지역이 많아. 상단 내의 군사력으로는 무리라 용병이라도 고용해볼까도 생각하고 있다.”

듣고 보니 반가운 얘기인지라 마르크는 할 말을 함으로써 그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제가 드릴 얘기와 상통하는 듯합니다.”

“상통하다니? 그게 무슨 얘기냐?”

“갔던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일은 무사히 잘 마쳤습니다. 그들은 잔금까지 모두 지불했습니다.”

상단주의 눈빛이 조금 변했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다른 곳과 거래를 하겠다고 하더냐?”

“그들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얘기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경우라니? 알아듣기 쉽게 얘기해봐라.”

“그들은 저희와 손을 잡고 싶어 합니다.”

반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단주는 뼛속까지 철저한 상인이었다.

“손을 잡다니, 그래서 대뜸 허락했느냐?”

많은 결정을 그에게 맡겨 왔다. 때문에 어지간한 일은 그의 선에서 처리하란 얘기 또한 있었고, 죽 그래왔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가 무턱대고 이 일을 허락하고 온 게 아닌지 걱정이 되어 물은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는 그리 허술하지 않았다.

“쉽게 결정할 사안은 아닌 것 같아 상단주님을 만나서 얘기하시는 게 낫겠다고 말했습니다.”

상단주의 속마음은 이러했다.

힘은 필요하다. 하지만 지출은 최대한 줄여야 한다.

상대가 왕국이라면 욕심 또한 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려면 용병단을 고용하는 게 낫겠어.”

마르크가 예측했던 거절이었다.

돌연 그는 마르크를 보고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만나본 사람은 일전에 보았던 오딘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제안하는 것이 동업인지, 아니면 협력에 의한 관계인지를 모르겠습니다. 다만…….”

“다만?”

“놓쳐서는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주는 마르크의 눈빛을 훑어보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가 마르크를 높이 샀던 가장 큰 이유는 장애를 차별하지 않는 성격도, 남들보다 뛰어난 처세술도 아니었다.

사람과 대상을 보는 눈이 정확했던 것이다.

단주는 표정을 달리하고 진지하게 물었다.

“그가 손을 잡자는 것이냐? 왕국이 손을 잡자는 것이냐?”

“손을 잡자는 얘기는 그 사람이 하였으나 바탕엔 왕국이 깔려 있다는 뉘앙스가 풍겼습니다. 사실 처음의 거래를 담당했던 사람이 말하기로 오딘이라는 사람이 꽤나 높은 직위에 있어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단주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왕국이라… 가만히 따져 보면 납품할 것이 많을 텐데, 관계만 잘된다면 다른 곳에서 사들였던 물품을 우리 쪽으로 들일 수도 있을 게 아닌가. 그러나 저들이 원하는 바를 모르겠군. 설마 이스론을 아래에 두자는 생각은 아닐 테지?’

그건 싫었다. 그 이유로 여러 곳에서 왔던 제안을 번번이 거절해왔던 그다.

마르크에게 말을 안 했다 뿐이지 제국의 백작에게서 연락이 닿은 적도 있었다.

당시 그는 진땀을 빼야 했다. 그의 비위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열 달간의 구애를 끝끝내 거절한 후 겨우 따돌릴 수 있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처럼, 가까운 곳에 그런 세력을 둔다면 언젠가는 힘에 의해 억눌릴 수도 있게 마련이었으므로.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스론의 생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이스론 상단과 경쟁 관계에 놓여 있던 상단은 결국 힘에 의해 흡수되고 원래의 상단주 역시도 누명을 쓰고 명을 달리하였던 일이 있었다.

생각이 길어지는 듯하자 마르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 결정하실 일은 아닐 듯합니다. 단주님께서 그를 만나 내용 전반을 들어보심이 어떠하실지…….”

흘려듣지는 않았는지 단주의 이맛살에 자리한 주름이 서서히 펴졌다.

그는 일어서서 몸을 돌린 후 다시 창가로 다가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네가 처리하여라.”

“네?”

크게 놀라 눈을 치켜뜬 그에게 단주는 좀 전의 말을 반복했다.

“네가 처리하라는 말이다. 정말 필요한 일 같으면 하여라. 그리고 이득이 없을 일 같으면 가차 없이 그만두어라.”

마르크는 어찌할 바를 몰라 꽤나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간 굵직한 일 몇 가지를 처리해보았다고는 하나 이렇게 큰일은 해보질 않았던 것이다.

“명심해라. 네 결정이 상단에 큰 파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을.”

잠시 동안 내부에는 정적이 흘렀다.

이 정적이 영원해질 것 같았는지 단주는 몸을 돌린 그 상태로 말했다.

“먼 길을 왔을 테니 이만 돌아가 쉬어라.”

막대한 짐을 떠안았다고 생각했는지 마르크의 발걸음이 꽤나 무거워졌다.

그가 문을 나선 이후 단주의 이마에 숨겼던 주름이 다시 자리를 잡았다.

‘신탁을 받은 아이니, 서서히 맡겨 보는 것도 낫겠지.’

그것은 여태 마르크에게 철저히 숨겨 왔던 비밀이었다.

이스론의 현 상단주 폴칸은 16년 전 신성 제국을 경유했던 일이 있었다.

별로 즐겁진 않은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체가 남과 달라 누구보다 신을 많이 원망하며 살아왔으므로.

유년 시절을 불우하게 보낸 후 그의 신에 대한 나쁜 감정은 더욱 커져만 갔다.

자신의 불우함과 반비례했다고 봐야 맞을 것이다.

신성 제국에서는 어디에서나 신을 칭송했다.

거리에서도 종종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가 하면 기념품 상점 또한 그랬으며,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물건을 취급하는 곳까지도 ‘주신 아스카론의 은총이 함께하시길’이라는 문구를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었다.

웃긴 점은 전쟁에서나 쓰이는 병장기에도 그런 문구가 적혀져 있다는 것이다.

그를 보며 폴칸은 속으로 조롱을 했다.

‘흥, 자애롭다는 신이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하다니.’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신을 알린다는 미명하에 애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경우만 얼마인가.

굶주린 사람들은 사방에 널려 있는데 신은 자신의 명예나 드높이기 위하여 사방에 신전을 세우고 있다. 그것도 엄청난 돈을 쏟아 부어가면서 말이다.

그 잇속을 들여다보자면 신관들에게 신은 뒷전이었다. 태반이 장사치들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상인이 낫군.’

누구보다 상인들의 졸렬함을 잘 알고 있던 그다.

상인의 입에서 나온 90퍼센트가 허풍과 거짓이라고 하질 않던가.

그러나 이들에 비하자면 상인은 그나마 나은 것이었다.

적어도 상인들은 누군가의 이름까지 팔아가며 자신들의 뱃속을 채우려 하진 않았으니까.

이때까진 모든 신관을, 아니 신까지 매도했다고 봐야 했다.

그러다 폴칸은 잊지 못할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어둠의 숲이라 명명된 곳에서의 일이었다.

물품은 무사히 건네었고, 억지웃음까지 지어가며 거래를 성사시켰지만 돌아오는 길에서 문제가 생겼다.

그가 탄 말이 구덩이에 빠져 다리가 분질러졌으며, 돌아가기 위해 구입한 텔레포트 스크롤 또한 불량이었던 것이다.

자연히 마법진이 위치한 어둠의 숲에서 그는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신세 한탄이 절로 나왔다.

“쯧,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더니 내가 그 짝이로군.”

무엇보다 상인에게 속았다는 게 억울했다.

어떻게 보자면 스크롤을 팔았던 상인 역시 불량 체크를 못했던 것일 수도 있지만…….

동행했던 이들조차 시간을 아끼자고 각자 행동하기로 했던 탓에 되든 안 되든 간에 마을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날이 너무 어둑해져 버려 야행성 몬스터가 돌아다닐 수도 있다.

그는 그렇게 숲에서 오한에 시달리다 잠이 들었다.

추위를 견디지 못해 바들바들 몸을 떨며 새벽녘 눈을 떴을 땐, 더욱더 난감한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보다 2배는 커 보이는 키에 녹색으로 번들거리는 피부, 바다표범의 이빨만큼이나 긴 2개의 송곳니가 잇몸 밖으로 튀어나온 트롤 4마리가 당장에라도 자신을 뜯어먹을 듯이 침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폴칸은 운명을 직감할 수 있었다.

뭐 하나 이뤄보지 못하고 이렇게 허무하게 죽게 된다는 것이 억울하고 원통했다.

두려움에 사무쳐 폴칸은 질끈 눈을 감았다.

먼저 다가온 트롤이 당장에 입을 벌리고 그의 육신을 뜯으려는 찰나, 눈부신 빛이 일었다.

대낮보다도 환한 빛.

그 빛은 트롤들에게는 두려움을, 폴칸에게는 따스함을 안겨 주었다.

트롤들은 먹이를 코앞에 두고 줄행랑을 쳤으며 폴칸은 그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

원인 모를 가슴 떨림.

좀체 마음이 진정이 되질 않았다.

빛에 이끌려 폴칸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그 빛이 사라지고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허름한 신전 앞에 서 있었다.

“내, 내가 왜 여기에?”

신이라면, 신전이라면 치를 떨던 그다.

때문에 이곳에 왔다는 자체가 이상히 여겨졌던 것이다.

문득 가까운 곳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화답했다.

“신께서 말씀을 전해드리기 위해 이곳으로 부르신 모양입니다.”

“말씀이라니요? 난 신을 믿지 않는다오.”

한 신관이 누더기 옷을 걸치고서 걸어 나왔는데, 옷과는 상반되게 그의 얼굴은 매우 밝아 보였다.

그는 여전히 환한 미소를 띠고서 입을 열었다.

“그것은 당신의 자유입니다. 신께서는 자신을 믿으라는 강요를 하지 않으셨으니까요. 다만, 중요한 일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저를 따라오시겠습니까?”

거부할 수 없는 말이었다.

폴칸은 얼떨결에 그를 따라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유리로 된 천장에 빛이 반사되어 석판을 비추고 있었다.

신관은 그 앞에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다 석판을 보는 일을 반복하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동남쪽이로군요. 제 손을 잡아주시겠습니까?”

폴칸이 신관의 손을 잡자 두 사람 주위로 환한 빛이 일렁였다.

그리고 둘은 전혀 낯선 농가에 도달해 있었다.

폴칸은 입을 크게 벌리고 놀라야만 했다.

바닥엔 마법진 또한 자리하고 있질 않았다. 그 말은 이동 경로가 정해진 곳으로의 텔레포트가 아님을 의미한다.

그런 텔레포트를 행할 수 있다는 점만 보아도 이 신관이 보통의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이런 자가 어째서 신관 일을…….’

커다란 신전도 아닌, 오지에 자리하고 있는 허름한 신전이었다.

그 정도 능력이라면 여기저기에서 그에게 손을 뻗을 것이 자명한데 그는 왜 이런 생활을 할까란 의문을 가지고 있을 때, 신관이 손을 들어 한 여인이 업고 있는 아이를 가리켰다.

“저 아이라고 하셨습니다. 장차 저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가져다줄 아이라고요.”

듣는 폴칸으로서는 황당함의 극치였다.

“이, 이보시오,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이오! 다짜고짜 이상한 곳으로 데려와 그런 얘기를 늘어놓으면 나더러 어쩌라는 거요?”

신관은 이렇게 말했다.

“저 역시 미숙해 그분의 말씀을 다 알아듣진 못합니다. 다만, 신께서는 당신이 저 아이와 함께해주시길 원하고 있는 듯합니다.”

“웃기지 마시오. 당신 사기꾼이지? 석판엔 아무런 글도 쓰여 있지 않았어. 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

“난처하군요. 그분과 소통하는 것은 말도 글씨도 아닙니다.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도통 받아들이기 힘든 말만 하고 있었다.

욕이라도 한마디 내뱉어주고 싶었지만, 폴칸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게 신전에 다다르기 전의 일이 다시 한 번 상기되었기 때문이다.

또 이 신관은 여태 자신이 봐왔던 신관들과는 너무도 달랐다. 무엇보다 신관 본인이 아무것도 요구하고 있지 않음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그래서인지 태도가 누그러졌다.

“아이를 맡아달라? 내 직업이 상인이오. 이해관계에 반하는 일은 하질 않지. 아이, 좋소. 내 당분간 돌보겠소. 하나, 저 아이가 내게 필요한 재목이 아니라면 그땐 손을 떼겠소. 그것만 알아주구려.”

신관은 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이 신탁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인간 본연의 의지마저 조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서였다.

폴칸은 제일 궁금한 것을 물었다.

“당신이 믿는 신이 있다고 칩시다. 한데, 신이 왜 저 아이를 돌봐달라는 거요?”

그에 신관은 자신이 느낀 바를 말로 표했다.

“인간의 오만을 깨우쳐 줄 자의 매개체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꿈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하셨군요.”

마르크가 궁핍하지 않게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건 다 폴칸의 덕이었다.

그렇다고 그 가정에 많은 돈을 쥐어주진 않았다.

돈을 가볍게 여기고 하찮게 생각하게 될까 우려되어서였다.

우습게도 폴칸은 아직도 신을 믿거나 따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신을 부정하던 마음은 이상하게도 사라져 버렸다.

그의 꿈, 그것은 이스론 상단 과거의 영예를 되찾는 일이었다.

마르크를 믿고 신임하는 이유는 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 *

바리톤의 세 왕자가 드잡이질을 하는 중이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 세 왕자의 사이는 극도로 악화되어 서로가 서로를 시기하고 헐뜯는 단계를 넘어서 있었다.

팔테스는 그 후 6개월이 지나 돌아왔지만 많은 날들을 한숨으로 지새웠다. 이제 더는 그녀를 못 보게 될 것 같아서였다.

그가 세상에서 제일이라 여기던 아버지이자 바리톤의 국왕인 로테노아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돌변한 태도를 보였다.

‘저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가슴속에 묵혀 두었던 얘기를 꺼내었지만, ‘썩 물러가라’라는 대답만 듣게 되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간의 얘기를 들었을 때 팔테스는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자신은 바리톤이라는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것을.

아레인이 못마땅하고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이들은 많아도 누구도 다시 그곳에 쳐들어가고 싶다는 의견은 없었다.

그리고 시일이 더 흐르며 팔테스는 반가우면서도 두려운 소식을 접하게 된다.

해마다 왕자들을 아레인으로 보내라는 말이 그것이었다.

공교롭게도 달갑지 않은 사실을 접한 것은 바로 그 즈음이었다.

사모하는 그녀에게 연정을 품고 있는 것이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형 유프라도, 맏형 헥토르도 그녀에게 마음이 가 있었다.

누가 먼저 아레인으로 가느냐를 놓고 처음으로 설전이 벌어졌다.

유프라와 팔테스는 헥토르가 기회를 노려 그녀를 강압적으로 가질 것을 우려했고, 헥토르와 팔테스는 그녀가 유프라의 외모에 넘어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또 헥토르와 유프라는 팔테스의 어리광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세 사람 모두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과 그녀에 대한 막연한 걱정, 절대 자신이 아니라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유프라 역시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고 있긴 했지만, 헥토르와 팔테스의 치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 그녀를 두 사람에게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었다.

보름을 앞두고 세 왕자들은 말에 이어 주먹다짐까지 하게 되었으며, 결국엔 검까지 빼어들었다.

우연찮게도 그 현장은 로테노아에게 딱 걸려 버렸다.

겨우 마음을 잡아가려는 찰나에 벌어진 일이어서 로테노아는 끓어오르는 혈압을 주체 못하고 다시 한 번 드러누웠다.

그래도 자신들의 아버지가 쓰러지자 셋은 당분간은 조용하나 싶었다.

하지만 로테노아가 기력을 회복하려 할 때 또 한 번 그 일이 터졌고, 결국 로테노아는 세 왕자를 자신이 없는 한곳에 모아놓지 말라는 명을 내리고 그들에게 사람을 딸려 보냈다.

하지만 두 차례씩 아레인을 다녀온 왕자들은 다른 이유로 싸우고 있었다.

헥토르에게 멱살을 잡힌 유프라가 으르렁거렸다.

“언제는 형님께서 먼저 가시겠다고 하시질 않았습니까.”

“내가 언제 그랬느냐? 난 나중에 갈 거다. 팔테스 네가 먼저 가라.”

헥토르의 말에 팔테스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지지 않고 받아쳤다.

“전에는 제가 먼저 갔으니 이번은 형님들이 먼저 가셔야지요.”

“너 이 자식, 큰형인 내게 눈을 부릅뜨고 대들어?”

당장에 팔테스의 면상이라도 한 대 칠 기세였다.

이를 여러 사람들이 다가와 뜯어말렸다.

“폐하께서 아신다면 크게 상심하실 것이옵니다. 그쯤 하시옵소서.”

세 왕자가 이렇게 입장이 뒤바뀐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녀를 보겠답시고 아레인에 갔지만 찾아오는 것은 고통뿐이었다.

팔테스가 당했던 고통 말이다.

조르바라는 자에게서 혹독함을 겪으면서도 그녀만 볼 수 있다면 괜찮다고 생각했던 그들이다.

하지만 여왕 엘레느는 그 자리에 코빼기도 비치질 않았다. 이제는 갈 이유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지 말라면 더 한다는 얘기가 있다.

왕자들 역시 기사들이 말리는 것이 도화선이 되어 몸짓이 격해지고 언성은 더 높아졌으며 삿대질이 오갔다.

팔테스는 더 이상 큰형 헥토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렇게 말리는 사람들이 생길 시에는 더욱더.

“형님은 매번 동생들한테 강요만 하시고, 저희가 형님 종입니까? 종이에요?”

그 소리에 참다 못한 헥토르가 자신을 붙든 기사를 뿌리치려다 팔꿈치로 그의 머리를 찍고 말았다.

그러나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득달같이 달려서 당장에 팔테스를 향해 몸을 날렸다.

“네 녀석, 가만두지 않을 테다!”

팔테스의 옆에 있던 기사가 당장에 그를 막았는데도, 헥토르는 기사의 두 손에 얹힌 상태로 허공에서 팔을 뻗어 팔테스의 멱살을 그러쥐었다.

팔테스의 눈이 동그래지고 숨통이 조였다.

“캑, 캐엑…….”

소기의 목적을 이루자 헥토르는 팔테스를 씹어먹을 듯한 눈으로 이죽거렸다.

“이 자식, 네가 겁을 상실한 모양이로구나. 어디 다시 한 번 지껄여 봐라. 뭐가 어쩌고 어째?”

의외롭게도 유프라는 불난 데 불구경이었다.

본래의 그였다면 두 형제 사이가 틀어질 것을 우려해 말렸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저 두 사람은 형제가 아니라 앞으로의 걸림돌일 뿐인 것이다.

옆에 있던 기사가 그의 속도 모르고 물었다.

“이 왕자님이 저분들을 말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질문을 유프라는 그냥 함구했다.

차라리 잘되었다며 팔짱까지 낀 채 싸움이 붙은 두 사람을 지켜보려는데 근방에서 노성이 터졌다.

“이게 무슨 짓이냐!”

과연 세 왕자의 시선이 향한 곳에 로테노아가 노기 가득한 얼굴로 서 있었다.

제일 난감한 사람은 헥토르였다.

기사가 조심스레 그를 땅에 내려놨으며, 헥토르도 팔테스의 멱살을 쥔 손을 풀었다.

팔테스는 재빨리 방금 전의 일을 일러바쳤다.

“큰 형님이 저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죽이다니, 내가 언제 너를…….”

그러면서 로테노아의 표정을 보았는데 결코 곱지 않았다. 헥토르는 절실한 마음을 담아 물었다.

“아바마마, 설마 이 녀석의 말을 믿으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그때 팔테스가 분함을 주체 못하고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서 다리로 땅을 쾅쾅 찼다.

“죽을 뻔했단 말입니다! 아바마마께서 조금만 늦게 오셨더라면 숨통이 막혀 죽었을 것이었사옵니다.”

분한 것은 사실이지만 반은 연극이었다.

그의 큰형이 가장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하나, 바로 아버지였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가 큰형을 따끔하게 혼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뒷일을 전혀 계산하지 못한 행동은 아니었다.

‘설마 죽이기야 하려고? 또 그러려 한다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테다.’

오딘에게 붙잡혀 간 이후에 배짱이 듬뿍 는 팔테스다.

형의 위협 정도야 이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로테노아는 계속 헥토르만 주시한 채 뚜벅뚜벅 걸어와 대뜸 그를 나무랐다.

“못난 자식.”

“아, 아바마마.”

“닥쳐라!”

헥토르는 억울한 표정이었다.

상한 속은 곧 분노로 돌변했다.

로테노아의 시선이 유프라를 향할 때 그는 막내를 흘깃 째려보았는데, 팔테스는 경우에 없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혀를 쭉 빼더니 날름거리는 게 아닌가.

눈깔이 뒤집어지려 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꾹 참고 있었다.

‘두고 보자! 이 망할 녀석, 절대 가만두지 않을 테다!’

두 사람 간에 극렬한 신경전이 오가는지도 모르고 로테노아는 유프라를 보더니 조금 누그러진 태도를 하고서 물었다.

“그래, 이 왕자가 말해보아라. 무슨 일 때문에 싸운 것이냐?”

동생과 형을 싸잡아 욕을 보일 수도 있었지만, 그리해서는 안 되었다.

그렇게 되면 표적은 자신이 될 것이므로.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나을 것임을 깨닫고 유프라는 있었던 일 그대로만을 말하였다.

“이번 아레인에 가는 일의 순서를 두고 잠시 말다툼이 생겼습니다.”

이 한마디로 각기 다른 반응들이 나왔다.

헥토르는 둘째가 좋아진 건 아니지만 막내보다 백번은 낫다고 생각했으며, 팔테스는 억울함을 주체 못하고 당장 항의하며 따졌다.

“둘째 형님도 보셨지 않습니까? 큰 형님이 날아와서 제 멱살을 틀어쥐는 것을요.”

“그건 그랬지.”

은근슬쩍 헥토르를 매도하는 것이다.

헥토르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그 화살은 유프라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아바마마, 이 녀석이 눈을 부릅뜨고 저에게 먼저 대들었습니다. 정말입니다.”

로테노아가 여전히 믿질 않자 헥토르는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너희들도 보았지? 막내가 먼저 대들었지 않느냐!”

기사들 누구도 이에 대답하지 않았다.

헥토르의 편을 들어주어야 할 기사는 아까 그에게 팔꿈치로 얻어맞아 이마가 찢어졌는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역시 로테노아는 눈여겨보았다.

“네 이마는 왜 찢어진 것이냐?”

기사는 솔직히 대답했다.

“싸움을 말리다가 그만…….”

헥토르의 탓은 아니라지만 로테노아는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유독 헥토르에게 붙여 준 기사만이다. 그가 누구를 말렸을지는 그리 어려운 추측을 요구하지 않았다.

로테노아는 다시 한 번 헥토르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건네고는 조금이나마 흡족한 눈으로 이 왕자를 보았다.

‘역시 이 녀석밖에 없구나. 나빠진 사이에도 불구하고 둘을 헐뜯지도 않으니. 내 결정했다. 더 이상은 고민하지 말자.’

오랜 기간 동안 세 왕자를 저울질해봄은 바리톤을 위해서였다.

성군은 못 되더라도 폭군은 아니어야 할 것이며, 무능한 왕이 되어서는 더더욱 아니 된다.

이는 일종의 욕심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왕위를 이어받아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게 되면, 후세에 자신의 이름까지 더럽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 역시 판단 착오로 왕국이 공국이 되어버렸지만 이는 앞으로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는 일이다.

바리톤의 패전 이후 그는 전대 현자를 자주 만나게 되었다.

상왕이 왜 그토록 그를 아끼고 존중했는지를 이제는 알 수가 있었다.

그중 가장 마음에 와 닿던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바리톤이 왕국이라고 하지만 대륙에는 바리톤보다도 강력한 공국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국력, 형편 모두가 해당했다. 바리톤은 그리 큰 나라가 아니었으므로.

아레인을 침공하려던 이유도 다 약소 왕국이라는 서러움에서 비롯되지 않았는가.

이제 바리톤은 대륙에 이름을 알릴 기회가 없어져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레인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저들은 그럴 만한 힘이 있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그들을 따라가는 길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차 왕위를 이어받을 왕자 역시도 자신을 도와야만 한다. 이제는 더 절실해졌다고 봐야 했다.

마음을 굳힌 로테노아는 우선 유프라의 의중을 떠보았다.

“유프라는 언제 가고 싶으냐?”

예기치 못한 물음에 유프라는 당황하면서도 솔직한 바람을 담아 말했다.

“저, 전 일이 있어 조금 후에 가야 할 듯합니다.”

어렵지 않게 싸운 까닭이 정리가 되었다.

‘먼저 가기 싫은 것이로군.’

잠시 미소까지 짓던 로테노아는 고개를 돌려 헥토르를 보며 명령조로 말했다.

“일 왕자가 먼저 가라.”

* * *

늙은 나귀 5마리가 각자의 주인을 태우고 아레인 왕성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이들 중 두 사람은 나귀 옆구리에 지팡이를 두고 로브를 뒤집어쓴 것으로 미루어보아 마법사로 보였으며, 한 사람은 훤칠한 키에 체구가 제법 있는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다.

그는 근육질인 것과는 다르게 꽤 푸근한 외모였는데, 두 눈을 빙그레 감고 환한 웃음까지 지어 보는 이를 더욱 편안하게 만들었다.

다른 한 사람은 피부가 매우 희었으며 가녀린 몸매의 소유자였는데, 쭉 뻗은 다리에 허벅지의 반도 가리지 않은 짧은 치마를 입은 여인이었다.

그녀의 귀는 보통 사람의 2배에 달할 정도의 길이였으며 위가 매우 뾰족했다.

대륙에서는 이들을 통틀어 엘프라고 칭한다.

전해지는 바로는 엘프들은 자연과 어울려 살기를 좋아해서 숲 밖으로 나오기를 꺼려한다고 한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타의, 혹은 자의에 의해 인간이나 드워프, 또는 그 외의 종족과 섞여 사는 엘프들도 종종 있었으므로.

다른 한 사람은 조금 작은 키에 어디 내어놔도 눈에 띄지 않을 그런저런 외모를 지닌 청년, 마르크였다.

먼 길을 다녀왔지만 그에게 쉬는 날이라곤 없었다.

부모의 사후 죽 그래왔다.

그에게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상단 일이었다. 일 자체를 취미 생활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단주가 며칠 휴가를 주어도 마르크는 항시 일에만 매달렸다.

엘프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너무 심한 거 아냐? 아껴야 잘 산다지만, 이렇게 늙은 말을 내어주면 어쩌자는 거지?”

마르크는 그녀의 말에 그냥 웃을 뿐이었다. 그러자 그녀가 그런 태도를 바로 지적했다.

“또, 또… 별로 멋지지도 않는 웃음 짓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또랑또랑한 목소리, 질책을 담고 있음에도 듣는 이는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해서 마르크는 미소를 거두지 않고 반문했다.

“헤르미온, 그럼 웃지도 말라는 얘기야?”

“웃지 말라는 건 아냐. 하지만 그런 태도는 고쳐. 보기 좋지 않아.”

밑도 끝도 없는 엉뚱한 논리였다.

헤르미온은 상단주의 딸이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그는 헤르미온을 수양딸로 삼았는데, 언제부터인지 헤르미온과 마르크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나귀 위에서 마르크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미간과 입가를 잡아 누르며 웃어 보였다.

“그럼 이렇게 웃을까?”

바보 같은 표정에 그녀는 당혹한 빛이었다.

“하지 마.”

그녀의 이런 반응이 재미있기라도 한 듯 마르크는 더 바보같이 웃어 보였다.

“그럼 이렇게?”

“하지 마, 하지 말라고…….”

“헤~”

급기야 표정을 주체하지 못해 마르크가 침까지 흘리자 헤르미온은 팔을 뻗어 딱! 소리가 나도록 알밤을 쥐어박곤 말했다.

“하지 말라고 했지!”

마르크는 머리를 감싸 쥐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렇다고 때릴 것까진 없잖아.”

“흥.”

팩하고 고개를 돌린 그녀를 보며 마르크는 진정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보기 좋은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욕심이네. 혹시 나한테 사심이 있는 거야?”

“흥, 웃기는 소리. 인간은 내 취향이 아냐.”

고개를 돌린 채로의 대답.

문득 그녀는 진지해진 눈을 하고 마르크를 보았다.

그 바람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금발의 머리카락이 한올 한올 찰랑거렸다.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엉뚱한 모습이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너 딱 하나는 마음에 든다. 그 구릿빛 피부. 어중간한 흰색보다는 구릿빛이 낫지. 이건 남자에만 국한되는 거야. 넘겨짚지 말라고. 여자는 하얘야 해.”

“누가 뭐랬나?”

돌연 마르크가 자애로운 인상의 사내를 보았다.

“참! 틴 님, 상단주님 인장 챙기셨어요?”

“그건 헤르미온에게 있다고 들었는데?”

자연히 헤르미온에게 시선이 쏠리자 그녀는 당혹함을 금치 못했다.

“아, 깜빡했다.”

“그놈의 깜빡, 한두 번도 아니고…….”

마르크가 툴툴거릴 만도 했다.

지금 가는 길, 여러 번 발걸음을 하지 않기 위해 거래 조건이 나쁘지 않다면 마르크는 그 자리에서 계약 일부를 체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저 덤벙이 아가씨가 귀중한 것을 놓고 왔으니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지금 말을 돌려 인장을 찾아오거나, 아니면 후에 다시 발걸음을 하거나…….

마르크는 전자를 택하지 않는 대신 그녀를 보며 끌끌 혀를 찼다.

“누가 데려갈지 참 걱정이다.”

“누가 걱정해달래?”

자신의 잘못은 금세 잊어버렸는지 헤르미온은 그렇게 시치미를 뚝 뗐다.

새침데기에 엉뚱하고 덤벙대며 도도하기까지 한, 인생에 별 도움이라곤 되지 않을 존재. 하지만 마르크에게는 누가 뭐라 해도 둘도 없는 친구였다.

결국 마르크가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됐다. 내가 나중에 또 오지 뭐.”

미안함을 들키지 않으려는지 그녀는 고개를 돌려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한 무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어? 저 사람들, 뭐지?”

일행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 과연 말을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방향이 같네. 어디로 가는 걸까?”

4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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