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성 잠입
“난 바람처럼 빠르다.”
언제나처럼 게티롱은 스스로를 세뇌시키듯 뇌까리며 아레인 왕성으로 향하였다.
‘벌써 칠 일째. 그 녀석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왕성에 있을 수도 있겠지.’
사실 이곳에 오기 전, 로테노아로부터 몇 가지 귀띔을 받았다.
오딘이라는 이방인이 아레인에서 가장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사항이 그중 하나였는데, 그게 이유가 되었다.
왕국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왕성에 있을 것이라는 추측.
그가 팔테스를 데려갔다고 했으니 왕성을 뒤져 볼 생각을 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왕성에 도달하기는 했지만 여기서 또 난국에 부딪혔다. 성벽이 예상외로 높았기 때문이다.
‘흐음, 어찌한다?’
혹 누가 볼세라 게티롱은 풀숲에 바짝 엎드려 왕성의 정면을 바라보았다.
“경계가 철저하군.”
그의 감상만큼 철저한 것은 아니었다.
성문을 지키고 있는 수문병 둘과 이상한 낌새가 있는지 파악하려 주변을 돌아다니는 서넛의 병사들, 그리고 망루 위에서 망을 보는 망루병들을 제외하면 없었으니까.
“일이 일인 만큼 조심에 조심을 거듭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너무 가까이 다가온 것 같군. 훗.”
무려 7백 보는 떨어진 거리였다.
그냥 왕성을 구경하러 온 사람이라 봐도 무방했으련만 그는 엎드린 자세 그대로 몸을 뒤집어 어깨로 바닥을 밀며 왕성과 멀어졌다.
“소리가 새어서는 안 된다.”
그게 이유였다.
포복이라고 하는 이것은 그가 나름대로 세상을 살며 느낀 바에서 독창적으로 만든 것이다.
어쨌거나 아무런 의심도 사지 않고 그는 아레인 왕성과 멀리 떨어질 수 있었다.
일어서서 옷에 뭍은 흙먼지를 털어낸 후, 옆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에 손을 짚고 기대선 상태 그대로 그는 고뇌에 빠졌다.
“어찌한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란 말이 있었지. 어쨌거나 왕성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군. 하지만 불필요한 마찰을 줄이려면 의심을 사지 않아야 한다. 우선은 그게 관건이겠어.”
생각은 좁혀졌지만 좀체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게티롱은 조금 더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왕성 인근에서 지낸 지 이틀이 지났을 때, 말이 끄는 수레들이 왕성의 안으로 진입을 시도하려 하고 있었다.
불현듯 게티롱은 묘책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래, 저곳이야.”
번득이는 눈초리를 하고 게티롱은 즉시 생각을 실천에 옮겨 갔다.
‘우선은 저 녀석들의 눈을 속이는 것도 좋겠지.’
바람처럼 빠르게 그들과 거리를 좁혔다.
그러나 재수가 없었던 탓인지 마부의 눈에 발각이 되고 말았다.
‘아뿔싸.’
자신을 매우 수상쩍게 여기리라는 것과는 달리 마부는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다는 듯한 눈을 하고 성문과의 거리를 좁혀 갔다.
‘인생 경험상 확실하지 않으면 그만두는 편이 좋아. 내가 수레 안으로 숨어든다면 틀림없이 경계의 눈을 하게 될 터. 그럼 일은 더욱 어렵게 된다.’
소심한 성격 때문인지 아니면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 때문인지, 숨어서 왕성 안으로 진입하려던 시도는 그렇게 무산되고 말았다.
또 하루가 흘러갔다.
벌써 열흘이 넘는 시간이 이 일에 허비되었지만, 그는 조금도 조바심을 부리지 않았다.
‘때가 오게 될 것이다.’
언젠가 찾아올 때……. 그저 막연한 기다림이었다.
정말 기회가 찾아오긴 했다.
다른 방법을 고안해보려 납작하게 몸을 웅크리고 왕성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때였다.
추레한 차림새의 노인이 성벽 근처에 다다른 그에게 다가오더니 물었다.
“뭘 하시는 게요?”
게티롱은 대상도 확인해보지 않고 번개같이 몸을 일으키더니, 즉시 노인의 뒤에 자리를 점하고 서서 언제 빼들었는지 모를 단검으로 그의 목을 겨눈 채 위협했다.
“네 이놈, 소리를 지른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니라.”
“소인 외형은 이래 보여도 아직 살날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게티롱이 살핀 그는 겁을 먹고 바짝 얼어붙은 듯했다. 그래서인지 경계를 풀고 노인을 차근차근 훑어보았다.
낌새나 차림새로 보아서는 절대 왕성 내에 거주하지는 않을 것 같은 인물인지라, 게티롱은 적잖은 긴장으로 인해 이마에 솟아오른 식은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그러다가 갑자기 돌변하여 노인을 매서운 시선으로 쏘아봤다.
“바른대로 말해야 할 것이다. 왜 기척을 죽이고 접근해왔지?”
노인은 그에 손사래를 치며 대꾸했다.
“기척을 죽이다니요? 아닐 말씀입니다. 소인은 그저 주변을 지나다가 풀숲이 움직이기에 무언가하고 궁금하여 와보았을 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게티롱은 아연실색한 표정이었다.
‘내가 부주의했구나. 노인에게 걸릴 정도로 움직였다니, 하마터면 경비들에게 발각이 되었을 수도… 더더욱 만전을 기해야겠구나.’
긴장의 끈이 느슨해짐을 느꼈는지 노인이 물었다.
“그런데 왕성 주변에서 무얼 하시는 건지요?”
게티롱은 성문을 향해 시선을 두고 있는 상태에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들어갈 생각이다.”
방심하고 있던 찰나에 기습적으로 꺼낸 질문에 별 생각 없이 답하다가 실수를 깨닫고 게티롱은 화들짝 놀라 노인을 보았다. 그러나 위협이 될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싹텄고, 그로 인해 또 긴장의 끈을 풀고 말았다.
“왕성으로 말입니까? 그럼 수문병들에게 용무를 말하고 들어가시면 되지 않습니까.”
“멍청하군. 그게 가능하다면 진즉에 했을 것이다.”
계속 앞쪽만 보고 있는 게티롱에게 노인이 썩 마음에 들 만한 얘기를 꺼냈다.
“제게 출입할 수 있는 패가 있습니다.”
“패가 있다고?”
당장에 뒤돌아서는 게티롱.
다시 노인에게 온 관심이 집중되었다. 아니, 노인이 가지고 있다는 패에 집중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제가 이 패를 빌려 드릴 수도 있는데…….”
말끝을 흐리는 노인.
그의 손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패를 보며 게티롱은 눈을 빛냈다.
욕심이 과해져 손을 뻗으려는 순간, 노인은 잽싸게 패를 품속에 갈무리했다.
“공짜는 곤란합니다.”
게티롱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나, 지금은 다른 방도가 없는지라 곧바로 흥정에 들어갔다.
“얼마를 원하지?”
“저 역시 어렵게 구한 물건입니다.”
“싸게 해다오. 분명 돌려주겠다. 일이 끝나는 즉시…….”
“당연히 돌려주셔야 합니다. 제 밥벌이와 연관되는 것이니까요.”
그리 말하고 노인은 생각에 잠기더니 선심 쓴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금화 네 닢으로 해야겠습니다.”
“뭐, 뭣이?”
게티롱이 크게 놀라자 노인은 너무 많이 불렀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다시 말을 바꿨다.
“조금 많습니까? 그럼 세 닢으로 하지요.”
“한 번 대여해주는 것이 그렇게 비싼가?”
“그럼 어르신께서는 얼마를 원하십니까?”
“은화 세 닢 정도면 어떻겠나?”
“말도 안 됩니다. 세 닢이라니요? 그냥 빌려 줘도 그 이상은 받을 겁니다.”
패가 거래되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그러니 이와 같이 특수한 상황에서는 부르는 게 값인 것이다.
또한 노인이 보기에 게티롱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낯빛이어서 조금 무리하게 가격을 올린 것이다.
“그럼 금화 한 닢에는 안 되겠나?”
“금화 두 닢, 더 이상은 안 됩니다.”
그렇게 못을 박아버리는 노인의 고집스런 입술을 보며 게티롱은 품속에 손을 넣어 돈이 든 주머니를 끄집어내더니, 매우 아쉬운 표정으로 금화 두 닢을 꺼내었다.
언젠가 바리톤의 청부를 받은 대금의 절반 가까이가 날아가게 되었으니 어찌 아쉽지 않으랴.
패 한 번 빌려 주는 금액치고는 너무 비싸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서라. 바리톤 왕이 말하기로 이 일이 성공하면 저번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지불한다고 했다. 이깟 금화 두 닢에 아쉬워하지 말자.’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고는 떳떳하게 왕성의 문으로 향하려는데 노인이 물었다.
“저기 언제쯤 패를 돌려받을 수 있습니까?”
“최대한 일을 빨리 마무리하고 돌려주도록 하겠다. 그러고 보니 네 이름을 묻지 않았군. 이름이 뭐지?”
“제 이름은 츠카불타 라바 고르다노스 파라놀로 가이제스라마하입니다.”
“이상한 이름이로군.”
“본래 저희 가문의 사람들 이름이 조금 독특합니다.”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고 멀어져 가는 게티롱.
그 뒷모습을 보며 노인은 모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사실 이 모든 게 철저한 연극이었다. 게티롱과 흥정하고 패를 건네준 것은 다름 아닌 괴짜 노인이었던 것이다.
* * *
“나른하군.”
왕성의 문을 지키는 왼쪽의 수문병에게서 나온 소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레인은 전쟁을 치르고 있었지만, 왕성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마음이 편하고 긴장이 되질 않으니 몸이 늘어지는 것이다. 그러자 옆쪽의 수문병이 들고 있는 창만큼이나 몸을 뻣뻣이 세운 채로 입만 열어 말했다.
“그것도 다 윗분들 덕택이라고. 우린 그에 대해 고마워할 줄을 알아야 해.”
“누가 아니라고 했나? 그러나저러나 그분은 왜 그런 지시를 내리신 거지?”
무엇인가를 지칭해서 말한 것을 용케도 알아들었는지 동료 수문병은 그에 답을 해주었다.
“우리가 알 턱이 있나? 내려진 지시니 따라야지. 가만, 저기 온다.”
둘은 눈알만 굴려 대상을 좇았다. 그러자 한 남자가 의젓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수문병들은 입을 닫고는 그가 목전까지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가 당도했을 때,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서로의 창을 비껴 세우고 출입을 막았다.
게티롱은 미리 건네받은 패를 내보였다. 그를 확인한 경비 하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가죽 세공 장인이로군. 들어가시오.”
절차치고는 너무도 간단했다. 미리 괴짜 노인이 수상한 자가 다가와 이 패를 내어 보이면 의심 없이 들여보내라는 언질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티롱은 어떠한 의심도 품지 않고 수문병들을 보며 미소까지 지어주고는, 쪽문이 열리길 기다렸다가 문이 열리자 즉시 걸음을 들여놓았다.
그가 멀찌감치 사라지는 걸 보고 있던 수문병은 잠시나마 그를 본 소감을 툭하고 내뱉었다.
“좀 바보 같은데?”
“그러게. 일부러 그래 보이는 것인지도…….”
어쩐지 편안한 분위기의 왕궁이었다.
내부의 장식 때문이었는데, 이것들은 게티롱이 대륙 전역을 돌아다니며 봐왔던 성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들이었다.
수로를 내어 자리한 돌다리는 고풍스러운 운치를 자아냈으며,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수목들에 색색으로 얼룩진 단풍은 그와 어울려 지금의 계절인 가을의 정취마저 물씬 풍겨 냈다. 그 외에도 난생처음 보는 조형물들이 주변을 장식했다.
그에 넋을 빼앗겨 한동안 게티롱은 목적조차 까맣게 잊어버린 채 주변 경관의 감상에 여념이 없었다.
풍경에 매료되어 발길이 이끌렸고,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왕성의 뒷마당으로 향하게 되었다.
돌연 인근에서 누군가를 윽박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쭈? 요령 피우지?”
자연스레 게티롱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한 청년이 맨땅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같이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는데, 그것을 막기 위해 손으로 허벅지를 잡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는 매우 괴로운 듯했다.
반면 그 앞쪽에 가지를 꺾어 만든 몽둥이로 자신의 손바닥을 탁탁 때려 가며 으르렁거리고 있는 사내는, 피도 눈물도 없는지 청년의 자세가 흐트러질 때마다 그의 엉덩이를 발로 뻥뻥 걷어찼다.
땅에 나뒹굴기 무섭게 청년은 퍼뜩 일어서 재깍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나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다시 얼마 버티지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군대에도 가혹 행위가 있었지만 이보다는 덜했다.
게티롱은 자칭 정의로운 사내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자신이 간섭할 수는 없었다.
거기에 더해 거사를 앞두고 있지 않은가.
그냥 관심에서 떨쳐 내기 위해 몸을 돌리려는 순간, 얼핏 쓰러졌던 청년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새로운 체벌이 행해지고 있었다.
“하나에 정신, 둘에 통일.”
엎드려 두 팔로 땅을 지탱하고 있는 자세였다.
“하나!”
라고 사내가 소리치자 청년은 힘겹게 팔을 굽히며 목소리를 쥐어짜내 소리쳤다.
“정시~ 인!”
둘이라는 구호가 떨어지자 청년은 굽혔던 팔을 뻗어 상체를 일으키면서 재차 소리쳤다.
“통~ 일!”
어찌나 고되었는지 청년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비지땀들이 떨어지며 모래 속으로 스며들었다.
게티롱은 품 안에서 로테노아가 주었던 초상화를 꺼내들었다.
초상화라고 하지만 실물과 다름없었다. 마법 도구를 이용해 그려진 초상화였으므로.
사실 바리톤에는 그럴 만한 능력자가 없었다. 그래도 왕자들의 얼굴이었기에 로테노아는 거액을 들여 대륙의 뛰어난 마법사에게 의뢰했던 것이다.
얼핏 봤기에 긴가민가하고 있는데, 드디어 청년이 몸을 일으켰다.
물론 저 독하디독한 사내의 명령에 의해서였다.
“그 정도밖에 못해?”
청년은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고, 그게 또 빌미가 되었다.
“울게? 어디 한번 울어봐라. 팔 번 자세로 엎드린다, 실시!”
8번 자세.
시키는 본인도 제일 싫어하는 자세였다.
땅에 머리를 박는 것보다, 일어섰다 누웠다를 반복하는 것보다 훨씬 고되고 짜증나는 자세인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훼방꾼이 끼어들게 되었다.
자세를 변형시키는 동안 청년이 일어섰고, 그 바람에 게티롱의 육안에 확실한 외모를 보였기 때문이다.
“팔테스로군.”
게티롱이 그리 말하였다.
정말 그가 맞았다. 핍박을 받는 이는 바리톤의 삼 왕자 팔테스였으며, 그를 핍박하는 사람은 조르바였던 것이다.
나무 뒤에서 몸을 드러내는 인영을 보며 조르바는 의아한 낯빛을 지었다.
“댁은 뉘시오?”
툭하고 쏘아붙이는 물음.
그에 게티롱은 거만한 태도로 일관했다.
“놀라지 마라. 이 몸의 이름은 게티롱이라 한다.”
조르바의 기억 속에는 일체 없는 인물이었지만, 그래도 스스로가 대단한 것처럼 말을 하니 좀 유명한 사람인가 싶었다.
반면에 팔테스는 희망이 찾아왔다고 느꼈다.
그는 게티롱이라는 이름에 대해 들었으며, 대단한 사람이라고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절 구하러 와주셨군요!”
상황이 이래서인지 팔테스는 스스럼없이 그에게 말을 높이고 있었고, 그것이 나쁜 기분은 아니었는지 게티롱은 그에게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냈다.
그리고 조르바 역시 난데없이 등장한 그에 대해 생각을 달리하며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 녀석의 말에 따르면 바리톤에서는 꽤 유명한 녀석인가 본데? 가만, 이럴 게 아니라 누구라도 불러와야겠군.’
검을 허락받지 못한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다.
조르바 역시 오래전부터 검술에는 일가견이 있었지만, 지금 가진 무기라고는 팔테스, 이 녀석을 괴롭혀 줄 몽둥이뿐이었다.
그러나 조르바의 바람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사람은커녕 그 어떤 생물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래 이곳은 인적이 매우 드문 곳이었다.
‘내가 자리를 비우면 저 녀석이 이 녀석을 데리고 도망칠 것은 불 보듯 훤한 일. 그럼 그분의 질책을 받게 될 것이다. 아니, 모든 게 원 위치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일단은 시간을 끌어야겠다. 이곳이 인적이 드물긴 해도 종종 경계병들이 돌아다니니 누구라도 다가오면 그에게 소리를 쳐서 알리라고 하면 된다. 아니지, 사람이 없다고는 해도 소리를 친다면 누구라도 들을 것 아닌가.’
그리 마음을 굳히고 조르바는 힘껏 소리칠 요량으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는 동안 게티롱은 팔테스에게 다가갔다.
그때 난데없이 조르바의 입에서 커다란 소리가 터졌다.
“불이야~!”
팔테스가 아연실색을 했고, 게티롱도 사색이 되었다.
게티롱은 당장 허리춤에 있는 검갑에 손을 가져가며 죽일 듯 조르바를 위협했다.
“한 번 더 소리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게티롱과 팔테스에겐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직 별 반응이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반면에 조르바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그도 입장이란 게 있는지라 그 경고를 묵묵히 들어줄 순 없어 또 한 번 크게 소리쳤다.
“불이야, 불이 났다!”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음을 깨닫고 게티롱은 당장에 검을 빼어들어 조르바에게 달려들었고, 조르바도 그의 행동을 눈여겨보고 있던 차라 재빨리 몸을 빼며 계속하여 소리쳤다.
확실히 그의 목소리는 과거에 비할 것이 못 되었다.
그라니트성에 끌려온 이래 고통받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심신이 단련되었기 때문이다.
우렁찬 소리가 연달아 울리자 급기야 인기척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게티롱은 팔테스에게 한쪽에 숨어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는 화근이 될 듯한 조르바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네 이놈, 거기 서지 못할까!”
엄포에 멈출 조르바가 아니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쉽사리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게티롱의 달리기와 조르바의 달리기 속도는 비슷해 보였으므로.
상대가 계속하여 도망치면서 소리만 질러대자 게티롱은 안달이 났다. 이러다간 많은 사람들과 함께 중무장을 한 왕성 안의 기사들도 모여들 것이다.
그리되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걱정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무슨 소란인가 싶어 근방에 있던 하인 하나가 다가와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 것이다. 평소 조르바를 흠집 내던 하인들 중 하나였다.
조르바는 화색을 띠고는 잘되었다며 소리쳤다.
“어서 이 일을 알리시오! 오딘 님께서 데려온 이자를 저자가 데려가려 그러오!”
이 말을 듣고 당장에 몸을 돌리려던 하인을 향해 게티롱이 짓쳐들었다.
내키지 않은 일이 될 것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다른 해결책이 없었다. 죽이진 않더라도 다리에 생채기라도 내어 쓰러뜨려야 했다.
서슬이 퍼런 검이 날아오는 데 어찌 겁을 먹지 않겠는가.
하인은 놀라서 움직일 생각도 못한 채 그 자리에 멈춰버렸다.
게티롱의 검이 그의 허벅지를 훑으려는 찰나였다.
뻑!
한데, 검이 살을 찢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 소리는 바로 조르바의 몽둥이가 묵직한 힘으로 게티롱의 검을 쳐낸 소리였다.
조르바가 죽음도 불사하고 파고든 것이다.
하인에게 정을 주어서가 아니었다. 그만큼이나 조르바는 절실했다.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이딴 식으로 날려 버려서는 아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몽둥이가 검을 친 후,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땡캉!
게티롱의 검이 그리 울며 반쪽이 나버린 것이다.
제법 굵직한 나뭇가지를 꺾어서 만든 몽둥이라고는 하나, 적어도 조르바는 그가 실력자라고 생각했다. 이런 공격 따위에 그의 검이 부러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게티롱 또한 멍한 표정이 되었는데, 그보다는 철석같이 그를 믿고 있던 팔테스가 더욱 어이없는 표정이 되어버렸다.
‘어, 어째서지? 왜 저놈의 몽둥이에 검이…….’
적막이 감싸고도는 이때, 왜인지 모르게 게티롱은 허리를 젖히며 웃었다.
“하… 하하하하…….”
팔테스도, 그리고 조르바도 그 연유를 알 까닭이 없었다.
그를 본인이 알기 쉽도록 설명해주었다.
“방심을 한 건 인정하지. 하나 이 검은 오래되어 부러진 것뿐, 내겐 다른 검이 있다.”
하며 긴 망토를 젖히자 정말 오른쪽 허리춤에서도 검갑이 드러났다. 좀 전과는 다른 조금 독특한 모양새였다.
그렇다고 해도 조르바는 이제 겁먹은 기색이 아니었다.
‘얼뜨기 같은 놈이군. 해볼 만하다. 그래도 안심하지 말자. 괴물 같은 놈들이 득실거리는 왕성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부터가 심상치 않으니까. 우선은 하인을 보내야겠구나.’
생각을 굳히는 즉시 하인에게 악을 질렀다.
“뭣 하시오! 어서 가서 이 일을 알리지 않고!”
하인이 상황에 놀라고, 소리에 또 한 번 놀라 몸을 돌려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차, 싶었는지 게티롱이 검을 뽑으려 했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조르바가 득달같이 달려들며 몽둥이를 휘두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휭! 휘잉!
몽둥이가 바람을 가르며 적잖은 파공음을 토하자 게티롱은 더더욱 긴장을 하고 말았다.
‘이자, 보통이 아니로군. 어쩌다 이런 강적을 만나게 되었는가? 하긴 이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 삼 왕자를 데리고 있었겠지.’
커도 너무도 큰 착각이었다.
팔테스는 팔테스대로 난색을 표했다.
조르바가 보통이 넘어 보이긴 해도 저렇게 검도 뽑지 못할까란 한심한 생각마저 들었던 것이다.
“수, 순 허풍쟁이였군.”
지금 상태로만 본다면 그 말이 나올 만도 했다.
그렇다면 과거에 들었던 드래곤 얘기며, 제국 얘기, 신성 제국 얘기는 다 거짓이었다는 말인가.
또 아레인을 정탐했던 일도 거짓이었을 수도 있다.
사기꾼에게 농락당했다는 생각까지 들자 울분이 솟구쳤다.
“으드득! 저자를 믿다니……. 아바마마께서 안목이 저리도 없으셨단 말인가.”
그렇게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
슈칵!
검날이 예기를 발하며 게티롱의 검갑에서 뽑혀져 나오는 동시에 조르바의 뱃가죽을 찢어놓았다.
발검으로 인한 공격에 예기치 못한 상처를 입은 조르바는 당황했고, 게티롱은 사악한 미소를 머금었다.
“웬만하면 피를 보지 않으려 했는데 말이야. 불쌍하게 되었군.”
팔테스도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러면 그렇지. 실력을 숨기고 있었구나. 이제 나는 살았다.”
게티롱은 피 묻은 검을 쓸어보며 꽤나 만족스런 미소를 흘리는 중이었다.
조르바는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쥐고 있다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몽둥이로 게티롱의 어깨를 후려쳤다.
퍼억!
그 공격이 어이없게 또 먹혀들며 게티롱이 어깨를 감싸 쥐고 나뒹굴었다.
팔테스는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럴 게 아니다. 도망치자. 아니다, 어설프게 도망쳤다가 걸리면 다시 악몽을 꾸게 될 것이다. 큰일이구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서서히 무겁고 가벼운 여러 종류의 발소리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팔테스는 발만 동동 구르다가 결국 자포자기해버렸다.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자. 아바마마가 보내신 것이지, 내가 부탁한 일이 아니잖은가.’
곧 사람들이 팔테스의 눈에 모습을 드러냈다.
최악이었다.
그들 중에는 왕성 내에서 으뜸가는 실력의 근위 기사들과 근위 기사단장, 그리고 궁정 마법사라는 쉬바인을 포함해 정체불명의 괴짜 노인과 악마 오딘까지도 섞여 있었으므로.
아직도 조르바와의 싸움에 정신이 팔려 다른 사람들이 온 것도 모르는 게티롱을 보자 한숨이 앞을 가렸다.
팔테스가 할 수 있는 선택이라고는 하나였다. 당장에 오딘 앞으로 뛰어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자가 절 데려가려고 왔다고 합니다. 하여 전 오딘 님의 허락 없이는 못 가겠다고 끝끝내 버텼습니다.”
오딘은 난감했다.
칭찬을 해줘야 할지, 다그쳐야 할지 쉽사리 판단이 서질 않았기 때문이다.
게티롱과는 다르게 직감만으로 조르바는 오딘이 다가왔음을 알았다.
하도 당해 이제는 그가 근방에만 와도 알게 모르게 털이 쭈뼛쭈뼛 곤두서는 것이다.
조르바는 더더욱 용기를 냈다.
‘내 몸이 바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인정을 받고 말 것이다. 과거의 생활을 청산할 것이다. 꿈이 멀지 않았다.’
몽둥이로 검을 든 사내에게 용감하게 대들고 있는 조르바를 보며 오딘도 뭔가 느끼는 게 있었던지 지척에 있던 근위 기사에게 명을 내렸다.
“그에게 검을 내주어라.”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기사가 즉시 그렇게 답하고 질풍처럼 둘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게티롱을 어깨로 밀친 후에 틈이 생긴 사이 조르바의 손에 검을 쥐어주었다.
“오딘 님께서 그대의 실력을 견식하고자 하시오.”
조르바의 두 눈에 눈물이 다 글썽거렸다.
검을 잡아본 지 이 얼마 만인가. 더욱 중요한 건 이로 인해 점수를 딸 수 있을 것이란 점이다.
다시 기사가 뒤로 물러서자 게티롱은 그제야 상황을 깨달았다.
“비겁한 놈들, 떼로 몰려오다니…….”
다른 사람은 대꾸할 필요가 없었다.
조르바가 눈에 불을 켜고 받아든 검갑에서 검을 빼어 그에게 겨눈 채 버럭 성을 내었기 때문이다.
“비겁하긴 누가 비겁하다고 하는가? 겁도 없이 우리 왕성에 침입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리라!”
게티롱도 지지 않았다.
“바리톤의 삼 왕자를 납치해간 것은 네 녀석들이 아니었나? 난 그를 돌려받기 위해 왔을 뿐이다.”
그러자 오딘이 물끄러미 팔테스를 바라보았는데, 팔테스는 그 시선을 감당 못하고 움찔하며 오히려 게티롱에게 대들었다.
“납치는 누가 납치를 했다고 그러오? 난 제 발로 온 것이오!”
살아남기 위한 발악이었다.
결국 게티롱만 불쌍하게 되어버렸다. 당사자가 아니라고 하는데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래도 그는 끝까지 떳떳한 것 같았다.
“그래? 그렇담 나는 그냥 가겠다. 바리톤 국왕이 잘못 알았으니 가도 되겠지.”
조르바는 조르바대로 필사적이었다.
“어디서 어영부영 넘어가려는 수작이냐? 여기서 나가려거든 날 쓰러뜨려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마치 한 편의 연극 같았는지 오딘은 아예 의자를 가져오게 하여 자리에 앉아 느긋하게 둘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때 게티롱이 갑자기 오딘 쪽으로 검을 겨눈 채 물었다.
“그 이방인이로군.”
그러고 보니 오딘도 게티롱이 낯이 익었다. 할라리야 평야의 전투에서 보았던 얼뜨기, 바로 그였다.
하지만 모르쇠로 일관했고, 게티롱은 더더욱 모를 소리를 해댔다.
“모략에 의해 허무하게 세상에 등을 돌리게 되다니… 과연 대단해. 아레인과 바리톤이 짜고서 천하의 게티롱을 이렇게 궁지에 몰아넣을 줄이야.”
착각도 이런 착각이 없었다.
그는 계속하여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 들며 구시렁거렸다.
“두 왕국이 적지 않은 희생까지 하였으니 아무리 나라고 해도 속지 않을 수가 없군.”
“헛소리 작작해라! 싸울 테냐? 말 테냐?”
호기 있게 소리치는 조르바의 목소리에 게티롱은 오딘에게 두었던 검끝을 다시 조르바에게로 겨누었다.
“나 게티롱, 아무리 위협이 있다고 해도 그 앞에 무릎을 꿇지는 않는다. 설혹 이런 함정을 파놓았다고 해도 말이다. 선수를 내어주지. 먼저 오도록.”
더 이상 말을 섞었다간 자신의 정신세계까지 피폐해질 것 같았는지 조르바는 게티롱에게 매섭게 파고들었다.
곧 우열을 가리기 힘든 난전이 벌어졌다.
조르바의 검이 게티롱의 목젖에 다가가는가 하면, 겨우 몸을 뺀 게티롱의 검이 궤적을 그리며 조르바의 허리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둘 모두 이렇다 할 공격을 명중시키지는 못하고 있었다.
둘의 사투는 꽤나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지친 두 사람.
뒤로 갈수록 힘이 빠져 더 이상의 재미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오딘은 게티롱을 포박하라는 명을 내렸고, 조르바의 얼굴은 착잡함으로 물들었다.
끌려가면서도 게티롱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탄식했다.
“하늘이 날 버리는구나. 어찌하여 날 나게 하고 저자 또한 세상에 나게 하였을꼬.”
말로나마 조르바를 높게 평가한다는 뜻이었다. 듣는 조르바로서는 황당함의 극치였지만 말이다.
아주 나중의 일이지만 후에 게티롱이 남긴 자서전에서는 이와 같은 글귀를 발견할 수 있다.
<내 상대는 오직 조르바 그자뿐이다.>
* * *
게티롱은 감옥에 가둬졌다.
크게 벌하려는 생각은 없었는지 그에겐 별 제재가 따르지 않았다.
“영웅에게는 시련이 있다더니 나 역시 피해가지 못하는군.”
하루 세끼의 식사가 제공되었고, 조금 딱딱한 돌침대지만 마음대로 잘 수도 있었다.
그래도 게티롱은 불만이었다. 자유롭지 못했으므로.
자아도취에 빠져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그의 입.
결국 다른 죄수들의 하소연에 못 이겨 게티롱은 지하의 뇌옥으로 옮겨졌다.
그 뇌옥엔 그 말고도 다른 존재가 있었다.
“못 보던 오우거 같군. 진화한 종인가?”
인간과 닮아 있었다. 그러나 인간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난폭했고 덩치 또한 오우거에 비할 정도였다.
어두컴컴한 뇌옥을 밝히는 것은 그의 눈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망이었다.
“정말 위험한 존재긴 한 모양이야. 저렇게 두꺼운 쇠사슬로 묶어놓은 걸 보면, 너도 참으로 가련하구나. 사람들에게 묶여 사육을 당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때 철문이 열리며 한 청년이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
게티롱은 묵묵히 그 대상을 노려보았다.
그는 곧장 이곳으로 향하는가 싶더니 게티롱이 오우거라고 착각한 대상에게 다가가 겁도 없이 철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어 가지고 온 정성스레 싼 보자기를 풀었다.
음식 냄새가 건너편의 철창에 있던 게티롱의 코에까지 스며들었다.
“향이 그윽하군. 꼭 혀를 대어보지 않아도 알겠어. 이래 봬도 난 미식가라고.”
청년은 게티롱의 말은 신경도 쓰지 않고 직접 그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며 말했다.
“오늘 저녁은 특식이래요. 원래 이건 제 몫인데 마타하리 님 생각이 나서 목구멍으로 넘어가야 말이지요.”
마타하리라 불린 대상은 그의 말에 신경을 쓰는 건지 마는 건지 주는 음식만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게티롱은 그를 안타깝게 여겼다.
“아서, 동물이나 몬스터는 맛있는 음식을 주면 다른 음식은 입에도 잘 대지 않아. 그럴 바엔 차라리 나에게 다오.”
청년이 갑작스레 고개를 돌렸다. 기분 나빠하는 눈초리였다.
“댁은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다시 한 번 마타하리 님을 그런 식으로 지칭한다면 가만있지 않겠소.”
“오, 오우거가 아니야?”
“닥치시오! 오우거는 누가 오우거라 그러시오?”
마타하리의 앞에 있는 청년은 아렌이었다.
아렌 역시 저자에 대해 들은 것이 있었다. 순 허풍쟁이에 자아도취에 빠진 심각한 사람이라는 걸. 그래서 되도록 말을 섞지 않으려 했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그의 입은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아니라니, 그것 참 의외로군. 사람이라니……. 허허, 참, 세상이 넓긴 넓어.”
속을 박박 긁는 말에 아렌이 결국 참을 수 없어 그에게 따졌다.
“이분이 뭐가 어떻다고 그러시오!”
게티롱은 검지를 이리저리 흔들어 아렌을 가르치듯 말했다.
“이보게, 청년, 자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걸 수도 있어. 인간은 그럴 수 없지. 그 덩치하며 빛나는 눈하며……. 무게만 해도 소보다도 몇 배는 더 나가겠군.”
아렌이 화가 나서 철창문을 당장이라도 열고 게티롱의 철창으로 들어갈 태세였다.
그때 게티롱이 옛일이 떠올랐는지 주억거리며 나불거렸다.
“가만, 그러고 보니 빛나는 눈은 한 번 본 적이 있잖아. 그도 인간이었나? 잘 모르겠군. 잘 모르겠어.”
아렌은 달려가려다가 멈칫했다.
“미친놈이었지. 온 마을을 몰살시킨 작자였으니. 그때 내가 손을 봐줬어야 하는 건데……. 분명 경고를 해놨으니 다시 나타나진 못하겠지. 혹시 저자도 살인광인가?”
“그자, 어디서 보았습니까?”
아렌의 두 눈이 위협을 넘어 살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 * *
바리톤의 대군은 더 버티지 못하고 바리톤으로의 회군을 결정짓고 만다.
로테노아는 자신이 이렇게 무력해 보일 수가 없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줄 알았다. 단시간에 전쟁을 결정짓게 되어, 바리톤이 대국으로 거듭날 줄 알았었다.
하나, 그 대가는 지독히도 처참했다.
다시 바리톤이 재기를 꿈꿀 수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다른 귀족들 역시도 심정은 마찬가지였다. 하나같이 어깨가 축 처져 있질 않은가.
반면 헥토르는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린 모양이었다. 현실보다는 이상을 가까이해서였다.
이처럼 의지만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 하는 것이 그의 고질적 문제점이었다.
또한 이 와중에서도 긍정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바리톤의 이 왕자인 유프라가 그였다.
‘지나친 욕심이었다. 아바마마께는 죄송할 일이지만 뿌린 씨를 거둔 것뿐이다.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떠하리.’
그러나 그도 단 한 가지의 욕심만은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아, 이제 가면 당신을 또 언제 볼 수 있을까요?’
깊은 그리움, 아레인의 여왕 엘레느를 향한 것이었다.
헥토르의 미련 중에서도 그녀는 있었다.
‘내 꼭 다시 오겠다. 다시 와서 기필코 너를 가지겠다. 그때까지 다른 사내를 허락하지 말도록.’
그다운 착각이었다.
당사자는 안중에도 없는데 일방통행이 먹혀들 것이라 자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약자는 엘레느가 여왕으로 있는 아레인이 아닌 바리톤이었으니 기도 차지 않을 일이었다.
* * *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골백번 가까이 생각했다. 과연 자신이 지금 옳은 일을 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하지만 아렌의 고민을 해결해줄 다른 곳은 없었다.
그는 작위도 지니지 않은 상황이었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지도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단독으로 진행시킬 일은 아니다.
전해듣기로는 마타하리의 원수는 그럴 만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으니 말이다. 그 당시 마스터라고 하질 않았던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전의 힘은 더욱 강맹해졌을 것이다.
지금은 도움이 절실했다. 마타하리의 원수라고 생각되는 ‘그’의 소재라도 알아볼 요량이었다.
어떻게 보면 아렌은 마타하리를 자신보다 더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만약 이와 같은 상황에 빠졌다면 감히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진 못할 것이었다.
그렇게 오딘을 뵙겠다고 궁내부원에게 어렵게 말을 올렸지만, 대답은 부정이었다.
“오딘 님께서는 왕성을 비우셨소. 어떤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차후에 오길 바라오. 내 당신이 찾아왔었다고 전해드리도록 하겠소.”
“감사합니다.”
아렌은 축 처진 어깨를 하고서 물러났다.
무조건 나쁘게만 생각할 것은 아니었다.
일단 시급을 요하는 일이 아니었다. 게티롱이 그를 목격했던 게 꽤 되었다고 하질 않았던가.
그리고 수사에 착수하려면 무엇보다 바리톤의 협조를 얻어야 했다. 때문에 쉬이 진행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마음을 차분하게 갖자. 차분하게…….’
그런데도 자꾸만 조바심이 나는 자신의 마음을 달랠 수가 없는 아렌이었다.
* * *
로테노아는 대부분의 군대를 돌려보낸 후, 왕성에 다다르는 순간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 무슨 경우에 없는 행동이오?”
자신의 왕좌에 버젓이 앉아 있는 사람은 다시는 마주치기 싫은 오딘이었다.
그를 주축으로 발데르 공작과 보탄 백작, 샤르트와 크레멘을 포함해 아레인의 궁정 마법사인 쉬바인까지 그곳에 있었는데, 그들은 마치 이곳이 자신들의 왕성이라도 되는 양 버젓이 자리를 점하고 서 있었다.
오딘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까지 머금고는 되물었다.
“경우? 아레인을 일방적으로 침공한 것은 경우에 있는 행동이고, 이것은 경우에 없는 행동인가?”
“그, 그건 그대들이 우리의 경고를 무시했지 않소? 우린 그저 말로써…….”
목소리에는 전혀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속으로도 떳떳치 못했기 때문이다.
오딘이 도중에 얘기함으로써 그의 말끝을 흐려 버렸다.
“말이라? 아레인의 여왕에게 직접 인사를 하러 오라는 것이 그런 뜻이 되는가?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아레인을 바리톤의 속국으로 만들고 싶었겠지? 안 그래?”
금세 로테노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일 왕자와 이 왕자마저 자리에 있는 상황에서 이 무슨 굴욕이란 말인가.
그의 기분 따위는 염두에 두지도 않고 오딘은 계속하여 자신의 할 말만을 내뱉었다.
“자연의 섭리나 다름없는 약육강식, 본 좌 또한 그것을 탓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호랑이 굴에 와서 호랑이를 제압하지 못했다면 그 밥이 되는 이치 정도는 알고 있겠지?”
당연한 말이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로테노아의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당장에 그가 불만인 것은 얘기도 없이 불쑥 남의 왕성을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무례하게 자신만 앉을 수 있는 왕좌에 앉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 역시 힘의 논리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었다.
속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달리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마음의 준비조차 못한 이때 그는 자신을 더 난처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때 헥토르가 또 사고를 치고 말았다.
“네 이놈, 이 무슨 행패냐? 네놈들은 귀족의 법도조차 모르느냐? 타 왕국에 왔으면 예의를 갖춰야 하는 법이거늘!”
그렇게 말을 끝마쳤으면 되었을 것을 그는 불끈 솟아오르는 화를 주체 못하고 한마디를 더 내뱉고 말았다.
“배짱도 좋구나, 이 녀석들! 네 녀석들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제 발로 우리 왕성에 들어왔으니 스스로 무덤을 판 격이로구나!”
로테노아는 등에 식은땀이 다 났다.
저 놈의 입방정 때문에 일을 더 그르치게 될 것 같아, 서둘러 근위 기사들에게 명했다.
“여봐라, 일 왕자를 당장 처소로 돌려보내어라.”
곧 근위 기사 둘에게 끌려가면서도 헥토르는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은 로테노아가 야속하기만 했다.
이미 대전 안에 있는 인물을 샅샅이 훑어보았던지 헥토르는 자신의 뺨에 깊은 자상을 새긴 외눈박이의 사내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아바마마, 발데르 저자만 제압하면 일이 순조롭게 풀릴 것이옵니다. 제가 처리하겠사옵니다, 제가…….”
그러나 소리는 점차 멀어져 갔다.
다른 이들만 있었다면 로테노아 또한 그가 했던 생각을 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오딘이란 저 악마는 아니었다.
헥토르 또한 그의 가공할 힘을 직접 보질 못했으니 저리 말한 것이다.
오딘은 사라져 간 헥토르의 자취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매우 음흉한 표정이었다.
“그 녀석에 대해서는 이해하시오. 천성이 저러하여 나조차 포기한 녀석이니…….”
아들을 나무람으로써 화제를 돌릴 생각이었지만, 오딘은 대놓고 그를 비꼬았다.
“매가 없었으니 그랬겠지.”
따지고 보면 오딘의 말이 맞기는 했다. 오냐오냐하며 키운 탓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 큰 자식을 이제 와서 매로 다스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남의 가정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기에 로테노아는 씁쓸한 표정을 떠올렸다.
결코 좋지 못한 사이가 아닌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가 창칼을 맞대던 상대이니…….
다행히 오딘 역시 그에 대해 더 문제 삼지는 않았다.
돌연 로테노아가 물었다.
“삼 왕자는 언제 돌려줄 생각이시오?”
그는 잃은 것이 많았다.
그렇다고 죽은 이들을 거론해가며 배상해달라는 얘기는 꺼낼 수도 없는 노릇. 남아 있는 것,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을 되찾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 물은 것이었다.
오딘은 여전히 장난스런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대 역시 빼앗고 싶어 전쟁을 벌인 것이 아닌가? 내가 가져온 것이니 내 것이 되어야지.”
더 이상 참지 못해 로테노아는 폭발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되었다. 만에 하나 그랬다간 바리톤이라는 왕국 자체가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몰락과 왕자들의 몰락, 그리고 왕비를 비롯한 수많은 몰락이 뒤따를 것은 꼭 보지 않아도 추측 가능한 일이었다.
로테노아는 유프라에게 고개를 돌려 낮은 어조로 말했다.
“너도 물러가도록 해라.”
원래 사람이란 게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잘나 보이고 싶어 하는 경향이 짙다. 괜히 주변을 생각해 스스로를 내세우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생길 것 같았기에 로테노아는 주변을 물린 것이다.
유프라마저 대전 안을 빠져나가자 로테노아는 그제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다.
그때 오딘이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날 제거하려 자객을 보냈더군.”
묻고 싶어도 못 물었던 얘기에 로테노아의 안색이 급변했다.
“부, 부정하진 않겠소. 그는 어떻게 되었소?”
오딘은 그저 웃을 뿐 그에 답해주지 않았다. 자연히 로테노아는 추리만으로 이를 풀어나가야 했다.
‘혹시 게티롱, 그자가 아레인을 휘저어 이리로 피신한 것일까? 아니다. 그럴 가능성은 없다. 궁지에 몰린 사람은 숨기 바쁠 뿐이니까. 그렇다면 그가 실패한 쪽에 더 가능성이 실리는구나. 애석하게도 그자의 힘이 미치지 못한 게야.’
모든 가능성이 떠났다. 결국 로테노아는 체념한 듯 물었다.
“원하는 게 무엇이오?”
그러자 오딘이 보탄을 눈짓으로 가리켰고, 기다렸다는 듯 그가 앞으로 나서더니 로테노아의 앞쪽에 서서 준비해온 서신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본래 아레인은 바리톤을 이웃으로 대해왔었다. 엘레느 여왕님께서도 이에 문제를 삼으실 생각은 없었다. 하나, 그대들은 아레인의 경고를 묵살하고 흙발을 들여놓았으므로 이는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마땅하다. 아레인의 여왕께서는 싸우다 죽은 군사들보다 신의를 배반한 이들에 대해 크게 진노하고 계시는바, 바리톤은 이에 대해 일체의 책임을 져야만 한다.”
한줄 한줄 읽어나갈 때마다 로테노아의 무력함은 더해져만 갔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가는 데에도 꿋꿋하게 참으며 들었다.
결국 아레인이 원하는 부분이 낭독하는 자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리톤은 공국으로 그 위상을 추락시킨다. 또한 아레인에 복속되어야 한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테노아가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그를 본 바리톤의 근위 기사들이 그를 부축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내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바리톤은 각 왕자들을 한 해에 한 차례씩 아레인으로 보내야 한다. 그리고 바리톤의 왕성에서 나오는 수입의 열의 둘에 해당하는 액수를 돈으로 환산하여 아레인에 바쳐야 한다. 이는 그대들이 얼마나 잘 따르느냐에 따라 추후 조정되게 될 것이다. 당장 아레인은 그대들을 믿지 않으니 감시단을 파견할 것이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로테노아가 실신해버렸다.
후들후들 떨리는 몸은 그의 상태가 제법 위중하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보탄이 잠시 말을 멈췄으나 오딘이 다시 읽게 하고는 대전 안에 있던 바리톤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못 들은 내용은 너희들이 일러주어라. 공왕으로 남겨 주는 것도 다행으로 알도록.”
* * *
진의 설치가 재개되었다.
뜻하지 않은 침공으로 오딘의 계획이 늦춰진 셈이다.
진은 총 세 군데에 설치되었는데, 그리 큰 규모가 못 되었지만 그래도 2교대로 훈련시킨다면 능히 1천의 병력은 수용할 수 있었다.
결코 적지 않은 인원이었다. 그중에서 추린 인원들을 교관으로 둘 시에는 엄청난 파급 효과가 일어날 터였다.
우선 오딘은 5개의 단체를 만들고자 했다.
음영대, 철왕대, 마혈단, 질풍대, 흑풍단.
하나같이 마교적 사상이 박힌 단체 이름이었는데, 딴에는 작명을 간단하게 한다고 애를 쓴 결과였다.
측근들을 불러 모아 이와 같은 얘기를 하였지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기기까지 했다.
“대륙엔 생소한 이름들입니다. 독특한 단체가 될 듯합니다.”
발데르의 말에 오딘이 흡족한 미소를 머금고 간략하게 설명을 해나갔다.
“내가 있는 동안에는 힘이 없어 굴욕당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니라. 발전하지 않으면 도태되기 마련이다. 아레인을 꼭 마교라는 단체에 부합시키지는 않으려 한다. 지금 거론한 이 다섯 단체는 아레인의 힘의 주축이 될 것이다. 각 단체에는 나름의 성격이 있다. 음영대는 정찰과 비밀스런 일을 주된 임무로 하게 될 것이며, 철왕대는 호위를 주목적으로 하게 될 것이다. 마혈단과 질풍대, 흑풍단은 대규모의 전투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이를 조마조마하게 듣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켈타스 후작이었다.
‘내가 저 단체에 낄 수나 있을까? 그래도 제라드 후작이야 검술 실력만은 대단하지 않은가.’
오딘은 그의 걱정은 아랑곳 않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각 단체에는 수장을 두고자 한다. 또한 필요에 따라 단체를 늘릴 수도 있다. 당분간 이에 대해 그대들과 의논하고 보충할 것이니 자주 찾는다고 불평하진 말도록.”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었지만 켈타스만 유독 굳은 얼굴이었다.
오딘은 대화를 일단락 짓고서 대전 안을 빠져나왔다.
주야를 가리지 않고 여러 곳에 진을 설치했던 탓에 몸이 말도 아니게 피곤했다.
그러나 바로 휴식을 취할 수는 없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였다.
“오딘 님을 뵈옵니다.”
말과는 다르게 목소리의 주인은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그 주인인 아렌을 오딘이 딱히 벽을 두어 대하지 않았거늘, 이런 모습이라면 말 못할 고민이 있는 것이다.
아렌이 황망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자 오딘이 그 연유를 물었다.
“무슨 잘못한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구나.”
“그게 아니옵니다. 다름이 아니라 오딘 님께 부탁이 있사옵니다.”
“말해보아라.”
오딘의 표정이 나쁘게 변하지 않았기에 그 자세 그대로 아렌은 용기를 쥐어짜내어 아뢰었다.
“얼마 전 마타하리 님의 앞쪽에 새로운 죄수가 왔습니다. 그자의 이름이 게티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자가 얼마 전 바리톤에서 살인광을 목격했다고 하옵니다.”
의외라는 듯 오딘이 약간 눈을 크게 떴다.
아렌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자신이 아는 바를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해야 하는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자 역시 마타하리 님처럼 안광이 빛을 발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검 한 자루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목격했다고 했는데, 사건의 현장에는 집이 반 토막이 되어 있었으며 거대한 구덩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일을 본 것이 어느 정도 흘렀다고 하였느냐?”
“시, 시일은 조금 흐른 것으로 아옵니다. 하나, 오딘 님께서 허락해주시오면 제가 물증이라도 찾아보겠습니다.”
귀찮게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말을 올리는 이 청년은 자신의 일도 아닌데 이렇게 나서고 있다.
그 마음 씀씀이가 썩 마음에 들었다.
또한 마타하리의 부인인 샬로트와 한 약속이 있다. 원수를 찾아보겠다는 약속 말이다.
“알겠다. 하지만 직접 찾아볼 필요는 없느니라. 내게 생각이 있으니. 그건 그렇고…….”
* * *
보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오딘은 측근들에게 귀족의 작위 말고도 직책 하나씩을 더 내주었다.
철왕대를 이끄는 수장은 발데르가 되었으며, 음영대의 수장은 의외롭게도 켈타스가 되었다.
질풍대는 백의질풍대와 적의질풍대로 나뉘었는데, 각각 가인과 헤르가 맡게 되었다.
그리고 흑풍단은 보탄이 이끌게 되었다. 이 때문에 보탄은 자신의 갑주를 적색에서 흑색으로 바꿨다.
딱히 오딘이 시키진 않은 일이었다.
보탄은 아무 소리 없이 단체와 가장 잘 어울릴 만한 색으로 바꾸었고, 그 때문에 발데르에게 잠시 놀림감이 되었다.
“자네, 걱정이 되었던 것이로군.”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말씀은 하지 않으셨어도 일종의 협박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그분이 듣는다면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구먼.”
이들은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 가지 더 놀라운 일은 얼마 전 마혈단의 단주에 오른 사람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였는데, 바로 아렌이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울 일은 마혈단은 일인 체제로 오직 마타하리만이 그 단원이었다.
말은 하지 않았어도 그때 모인 귀족들은 마혈단이 무엇을 하는 단체인지 직감할 수 있었다.
보탄이 묵묵히 앉아만 있던 켈타스에게 물었다.
“후작님께서는 어떤 일을 맡으셨습니까?”
발데르와 보탄, 켈타스와 제라드, 이 네 사람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온 얘기였다.
발데르와 보탄, 켈타스가 이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은 그가 안다고 해서 나쁠 것이 없어서였다. 또한 그 역시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 아닌가.
켈타스는 보탄의 질문에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를 헤아린 발데르가 마음 쓸 것 없다는 투로 얘기했다.
“말하지 않아도 되네. 우리가 알기를 바라지 않는 일을 시키셨을 것이니…….”
생각지도 않게 켈타스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라 하셨습니다. 아마도 제가 담당한 음영대는 암살이나 비밀스런 업무를 주로 하게 될 것 같습니다.”
발데르가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며 위로했다.
“나쁘게 받아들이지 말게. 사실 말을 꺼내지 않아서 그렇지, 예전의 아레인에도 그와 같은 업무는 공공연히 자행되어 왔질 않은가.”
어디든 마찬가지였다. 권력을 쥔 자들의 눈 밖에 난 자들을 제거하는 행위는 언제 어디서든 있었다. 때에 따라서는 그것을 어쌔신 길드에 맡기고는 했지만, 그 일을 시킨 이들은 대부분 양심의 가책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제라드는 복직 후 켈타스와의 사이가 더욱 돈독해져 이제는 말을 놓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냥 서로를 친구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래도 떳떳치 못한 일을 맡게 될 단체의 우두머리 격이니 상심하시는 것이로군. 내가 대신 말씀을 드려 보는 것은 어떻겠나? 켈타스 후작은 이 일을 못할 거 같다고 하니 내게 맡겨 달라고 말이지.”
제라드의 말에 켈타스는 버럭 화를 내었다.
“이 사람, 누가 안 한다고 했는가? 걱정은 그게 아닐세. 문제는 내 병력이 너무 약하다는 것이야. 행여 실패를 하여 상심을 안겨 드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리고 제라드 자넨 너무 정직하지 않은가?”
“날 잘못 보았구먼. 내 시켜만 주신다면 얼마든지 해 보일 수 있네.”
이에 발데르가 끼어들었다.
“설마 오딘 님께서 그 계산을 하지 않으셨을까? 후작은 미리부터 걱정하는군. 우리들을 미리 편성하시는 이유가 따로 있다네. 내가 알기론 단체에 따라 다른 수련 방식을 적용하실 모양이네.”
“그, 그렇습니까?”
“아마도 그럴 걸세. 아마도…….”
그 ‘아마도’가 맞았다.
오딘은 켈타스가 맡은 단체를 음지에서 활용하고자 했다.
또한 제라드를 활용하지 않음은 아직 그에 대한 파악이 덜 끝났기 때문이다.
켈타스가 제라드를 살피더니 이죽거렸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내 음영대를 둘로 나눠달라고 청을 올려 보겠네. 파렴치한 짓만 골라 담당하는 조를 따로 편성해서 제라드 후작에게 맡기는 게 어떠시겠냐고.”
“하하하!”
“하하하하!”
졸지에 웃음이 터졌다.
먼저 웃음을 그친 발데르가 켈타스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내일부터는 수련이로군. 자네는 걱정되지 않는가?”
“걱정이 되기는요. 전 오히려 어서 빨리 내일이 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 *
식음을 전폐하던 로테노아가 눈을 뜨고 제일 먼저 찾은 사람은 전대 현자인 클라베르였다.
“와, 와주어… 서 고맙소.”
그의 몸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지금도 몸을 제대로 가누고 있질 못하지 않은가.
반쯤 몸을 일으키는 것도 어려웠는지 옆의 시종이 그를 도왔다.
그를 보는 클라베르는 마음은 천근만근이나 무거웠다.
성군은 아니었을지언정 로테노아는 훌륭한 왕이었다.
결단력도 있었으며, 역대 바리톤의 왕들 중 여러 귀족들을 가장 잘 규합한 왕 중 한 사람이었다.
로테노아는 어렵게 미소를 떠올리고는 주위를 물렸다.
“콜록!”
매우 큰 기침 소리였다. 그에 클라베르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상태가 제법 위중하시다고 들었습니다.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폐하의 몸이 나아지면 그때 다시 찾아뵐까 합니다.”
“난 괜찮소.”
사실 그는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크게 심호흡을 하며 자신의 상태부터 추스른 그는, 클라베르를 똑바로 주시하며 말했다.
“내 그대의 말을 무시한 대가를 이렇게 혹독히 치르는구려. 이것도 다 자업자득이겠지.”
클라베르는 다시 자리에 앉았으나 말을 아꼈다.
곧 로테노아의 탄식이 이어졌다.
“후우, 어린 시절 상왕께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는군. 예상치 못한 충격은 더 큰 상처를 입혀 줄 것이라고……. 지금의 짐의 얘기 같소.”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아 일부러 로테노아는 창이 나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넓은 곳이라도 바라보지 않으면 걱정을 얘기하지 못할 듯하오. 부디 날 이해해주구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옵니다. 말씀하시오소서. 소신 폐하의 귀가 되어드리겠사옵니다.”
그 말이 조금이나마 짐을 덜어주는 것 같았다. 그는 항상 진심을 담아 얘기하고 있었으므로.
덕분에 로테노아는 무거운 마음의 짐을 약간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
“현자의 말이 꼭 맞았소. 아레인엔 무서운 별이 있더군. 오딘이라는 자였지. 사람? 사람이라고 단정 짓기도 힘들더군. 그런 자가 하늘 아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소. 그의 부하들 역시 귀신같은 자들로 우리 군은 단 한 번도 승리를 거머쥘 수 없었소. 여러 번의 패전 끝에 이해가 가더군. 왜 하인리히라는 자가 별다른 저항도 못해보고 왕성을 내어주게 되었는지……. 오로지 상처만이 늘어났을 뿐이지. 그들이 바라고 있는 대가가 무엇인 줄 아오?”
역시 침묵하고 있는 클라베르에게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창으로 시선을 옮긴 로테노아는 뒷말을 이었다.
“우리 왕국을 격하시킨다고 하오. 왕국에서 공국으로 말이오. 또한 세를 바치라더군. 아레인의 속국이 되라는 얘기도 하였지. 얻으러 갔다가 도리어 빼앗긴 꼴이 되었으니 내 신세가 참 우습게 되었소. 대신들은 날 어떻게 생각할 것이며…….”
더 들었다가는 왕의 이마에 주름살만 늘어날 것 같았는지 클라베르는 무리해 그의 말을 잘랐다.
“대신들은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그들 또한 원했던 전쟁입니다. 또한 폐하, 절 부르신 까닭은 제 의견을 듣고자 하심이 아니신지요?”
로테노아는 시선은 그대로 두고 차분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를 바라볼 용기조차 나질 않는 것이다.
클라베르 역시 고개를 숙이고는 아뢰었다.
“아레인이 그 정도의 강국이라면 이는 언젠가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사옵니다. 좀 전 폐하께서 말씀하셨듯이 예상하지 못한 충격은 더 큰 상처를 안겨 주는 것이고, 폐하는 그것을 이미 깨닫고 계시옵니다. 더 이상의 상처가 없을 것이라는 얘기이옵니다. 하면, 지금을 바라보시면 되옵니다. 이 기회를 노려 저들과 좋은 관계로 남을 수도 있으니 부디 지금 보는 하늘만큼 넓게 바라보시옵소서.”
말을 나눈 것뿐이다. 그러나 로테노아의 속에 가득 찼던 화가 씻은 듯 개운해졌다.
현자의 말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아레인이 강국이라 하오시니 말씀드리건대 이는 기회와 다름없습니다. 예부터 강한 친구를 사귀면 주위를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왕국을 빼앗지 아니하고 공국으로 놔두었다는 것은 저들이 저희에게 기회를 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신 클라베르, 간언컨대 좋게 보시오소서. 부정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끝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나쁘게 받아들이자면 아부나 떨라는 말과 같았다. 그러나 로테노아는 조금 전 말로 깨달은 게 있었다.
“내 충분히 알아듣겠소. 하나, 자존심 따위는 버려야 가질 수 있는 것이겠지?”
시선조차 두고 있지 않음에도 클라베르는 황망히 고개를 수그리며 자신이 생각하는 바의 답을 주었다.
“아까운 것은 아까운 것일 뿐이옵니다. 흑성을 가까이할 수만 있다면 더 큰 물을 보시게 될 것이라 사료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