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 사용 설명서-98화 (98/115)

98.

“왜. 진짜 죽었니?”

“……그래. 넌 죽었어.”

한재민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내가 실제로 수긍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는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고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무감하게 한재민과 눈을 맞추고 말을 이었다.

“내 기억의 너는 죽었어. 아주 오래 전에.”

“그런데 난 이렇게 살아 있네. 그럼 네 기억은 도대체 뭔데?”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아는 게 뭔데, 너는.”

“한재민.”

“왜.”

“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뭐?”

“생각하고 나서 지랄해 주면 안 될까?”

“뭐라는 거야 진짜, 내가 무슨 네…….”

“진짜 생각만 하고 너한테 다 말할게.”

한재민이 진심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이렇다 할 말도 덧붙이지 않고 내 방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버렸다. 씻고 누울 계획이었지만 지금은 씻을 힘조차 없었다. 아니, 힘이 없었다기보다는 씻는 것에 힘을 쓸 수가 없었다.

“하아…….”

그러니까, 여태까지의 경험과 말로 정리한 상태는 이랬다. 나는 내가 읽던 소설에 빙의했고, 알 수 없는 시스템의 아래에 죽어도 과거로 돌아가는 이상한 상황을 반복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유현재를 사랑하게 되었고, 오로지 유현재를, 유현재와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살아왔다.

그런데 이 모든 전제를 부정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그러니까, 내가 소설에 빙의한 것이 아니라면.

나는 나지막이 시스템을 불렀다.

“야, 시스템.”

<용무를 말씀하십시오.>

“여기가 소설이 맞아?”

<가능하지 않은 기능입니다.>

“확실해?”

<가능하지 않은 기능입니다.>

하, 하하. 나는 헛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아직 밖에 있는 한재민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가능하지 않은 기능’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는데 이제야 짐작이 갔다. 애초에 소설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허구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걸 알아야 했다. 전혀 이 세상과 관련이 없는 그 허무맹랑한, 몇 권에 걸친 유현재의 ‘성장’을 담은 그 글들.

덧붙여, 나는 왜 유도현이 주인인 그 시스템의 아래에서 그가 수행하던 ‘죽음’을 반복하고 있었는지. 유도현은, 왜. 나와 유현재를…… 살리고 싶지 않아 했는지.

사실 이것에 대한 대답은 짐작이 갔다.

그도 살고 싶었던 것이다.

나와 유현재를 살리고 죽어야 할 본인의 운명을 어떻게든 거스르고 싶었으니까. 이 대답은 히든 엔딩을 깨기 직전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모든 것은 퍼즐처럼 딱딱 제자리를 찾아갔다.

나는 침대에 누워 뻐근해지는 눈가에 손을 얹었다. 손은 놀랄 만큼 차가웠다. 혹시 내가 사람이 아닌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

“넌 진짜 제정신이 아니다.”

나는 잔소리를 쉬지 않는 고한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언제 또 와서 저렇게 떠들어대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재민은 그날 예상외로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다. 떠들썩할 줄 알았던 뉴스도 잠잠했다. 아마 한재민이 손을 쓴 것이리라 예상하며 나는 힘없이 소파에 누워 있었다.

“갑자기 거기 뛰어들 생각을 왜 한 건데?”

그러게. 포기해봤자 고작 700명의 인간과 너와 이주현의 목숨만 날아갔을 텐데. 나는 굳이 그런 대답을 하지 않고 다른 말을 했다.

“이든사우스 콘서트 하던데.”

“그건 또 언제 봤냐? 오늘 뜬 건데.”

“집에 처박혀 있는데 할 게 뭐가 있겠어.”

“뭐, 그래서 가기라도 하게?”

“티켓팅 빡세냐?”

“……진짜 가게?”

“가면 안 되냐?”

“아니……. 너 갈 수는 있어? 지금 그냥 근신하고 있는 거 아냐?”

“야, 내가 무슨……. 범죄자냐? 그런 것도 안 되게?”

“그 한재민 이사가 너 못 나가게 하는 거 아냐?”

“그래서 표 구해 줄 거냐고 말 거냐고.”

“구할 수는 있는데 너 잘 생각해라, 진짜.”

“그럼 가자.”

“난 진짜 모른다고 했다.”

“알겠다고, 좀.”

나는 컵라면에 물을 받아 가지고 오는 고한결을 보다가 툭 질문을 내뱉었다.

“넌 진짜 랭커 안 할 거냐?”

“갑자기 왜 그딴 걸 물어봐?”

“학교까지 멀쩡하게 나와서 전공해놓고 손 놓은 게 신기해서 그런다.”

“몰라. 생각해 볼 거야.”

“아주 느긋하네.”

“야, 우리 아직 스무 살이거든? 존나 어려. 다른 애들은 이제 막 대학교 다니면서 술 처먹고 놀고 있는데. 이 정도는 좀 놀아도 되지 않겠냐?”

“그런가.”

어린 시절부터 계속해서 랭커가 되기 위한 교육만 받아 왔어서 그런지, 쉬고 논다는 것이 영 와닿지 않았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지나치듯 툭 말을 내뱉었다.

“그럼 나도 좀 쉴까.”

“뭘 쉬어. 네가.”

“나도 랭커 때려치우고 진짜 쉴까? 어차피 세상에 랭커만 있는 건 아니잖아. 카페라도 할까? 아니면 뭐, 떡볶이 집이라도 할까?”

“너 진짜 백만 자영업자들이 개빡칠 만한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라.”

“왜? 나도 할 수도 있지.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아직 존나 어린데 왜 난 랭커만 생각했지? 아, 진짜 개 어이없네.”

“너 미쳤어?”

고한결이 라면을 한 젓가락 들다 말고 잔소리를 했다.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얼굴이었다.

“너도 내가 미쳐 보이냐?”

“원래 미쳤긴 했지.”

“그래. 그니까 이런 말도 하는 거 아냐.”

“……하긴, 뭐. 안 될 것도 없겠네.”

“생각해 보니까 진짜 이상하잖아. 왜 나는 누가 시킨 것처럼 이 짓만 하고 있었지? 사실 정해진 거 아니잖아, 미래 같은 거.”

“근데 되게 유찬희답지 않은 말을 한다.”

“그래?”

“어. 진짜 한 2년 전의 유찬희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이었어.”

“2년 전?”

“그땐 무조건…… 뭔가 랭커! 존나 탑티어! 이런 느낌이긴 했거든.”

“내가 그랬다고?”

“당연하지. 그런다고 유현재 감싸고 돈 거 아냐? 넌 유현재는 영국 보내서 랭커 만들어 놓고 떡볶이 집 한다 이런 말이나 하고. 유현재가 들으면 어떻겠냐.”

“걘…….”

“…….”

“그러게. 나 랭커 때려치운다하면 유현재는 뭐라 할까.”

“나한테 그걸 왜 묻냐. 뭐 괜찮다고 하겠지. 걔는 네가 땅끝 마을 가서 전복 캐면서 살자 해도 할 것 같은데.”

푸하하. 나는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내뱉었다. 고한결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그렇겠지?”

“아직도 걜 모르냐. 나도 아는 걔를.”

“아니…… 설정값이 그게 아니니까 유현재는.”

“뭐래. 설정값은. 무슨 게임 캐릭터냐?”

“그런 게 있어.”

“그럼 뭐, 나는 무슨 설정값이냐?”

“너?”

그러게. 너는 아예 소설 속에 없었는데. 나는 고한결을 쳐다보다 툭 말했다.

“넌…… 버그?”

“뭐야, 이 미친.”

그때 소파 밑에 있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인은 유현재. 나는 바로 통화 버튼을 슬라이드해 그의 전화를 받았다. 국제 전화가 아닌 걸 보니 어느새 귀국한 모양이었다.

“뭐야? 언제 한국 왔어?”

-찬희야, 너…….

“일단 집에 오고 말해. 고한결도 있어.”

“야, 유현재, 개빡치는 건 알겠는데 일단 와서 얘기해라. 나도 지랄해 놨으니까.”

-……찬희야, 진짜.

“나 진짜 멀쩡해. 다친 데가 하나도 없어. 너무 멀쩡해서 진짜 병원도 갈 필요가 없었다니까.”

-제발…….

“오고 있는 거지?”

-……응. 지금 빨리 갈게.

“그래. 조심해서 와.”

전화를 끊자마자 고한결이 툴툴댔다.

“야, 걔 오면 잔소리 개심할 텐데 난 그냥 가야겠다.”

“가지 마. 너 있어야 그나마 덜 한다니까.”

“내가 그렇게 너희 사이에 큰 존재냐?”

“……그러고 싶냐?”

“딱히 그러고 싶진 않아.”

“내가 딱 유현재 오자마자 땅끝 마을 가서 그냥 전복 캐고 살자고 하면 걔 반응은 어떨까.”

“미쳤냐고 하겠지.”

“유현재가?”

“미쳤냐…… 라는 눈빛을 보낸 후 알겠다고 하겠지.”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화면 한가득 유현재와 함께 찍은 셀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아, 같이 그냥 전복 캐고 살고 싶다. 진짜로.

*

……라고 했던 말은 바로 취소해야 했다. 유현재가 생각보다도 더 화난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찬희야, 나 진짜 장난치고 싶지 않아.”

“……어어. 나도 장난 아니고…….”

“…….”

“그…… 미안.”

내 순순한 사과에 유현재가 고개를 푹 숙이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말 공항에서 바로 달려온 듯 정신없는 몰골이었다. 고한결은 이미 꽁무니를 뺀 후였다.

“근데 현재야.”

유현재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제법 타격감이 큰 말을 했다.

“나 랭커 그만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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