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 사용 설명서-95화 (95/115)

95.

그 꿈이라고 해도 될지 의심되는 체험을 하고 나서, 나는 더욱더 자주 관리자 모드에 접속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점점 유도현의 마나를 체화하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피를 토하거나 헛구역질을 했지만 횟수는 현저히 줄었다.

“정말 괜찮은 징조네요.”

“그런가요?”

연구원 한 명이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기존의 약만 계속해서 투약했는데, 계속해서 찬희 님의 마나 순환 능력이 발전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그럼 이대로 가면 완전히 마나가 안정화될 수 있단 건가요?”

“장담할 순 없지만, 글쎄요. 이런 상태라면 정말 머지않았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네요.”

“그럼 헌터 복귀도 가능하고요?”

“그럴 수 있겠지만, 지금은 무리입니다. 아직까지는 멀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원은 나를 북돋아 주고 싶었는지, 계속해서 좋은 말을 반복했다. 잘 되고 있고, 점점 좋아지고 있고……. 나는 그 말에 안심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도 만약 내 마나가 빠르게 안정화된다면 유현재가 갖는 부담은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그때 말했던 유현재의, 한재민을 벗어나야 한다는 그 말 또한 실현 가능할 것 같고.

“다행히 이사님께서 계속 전폭적인 지지를 해 주셔서……. 언론에 그렇게 공개가 됐는데도요. 참 좋으신 분이죠.”

“네. 그러게요. 감사하네요.”

“병원 시설도 많이 좋아졌답니다.”

“잘됐네요.”

“네. 이쪽으론 제법 소양이 있는 연구원도 새로 오셔서, 개발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요.”

“그래요? 도움이 많이 되겠네요.”

“그럼요. 다음엔 그분도 오실 수도 있겠어요.”

크게 관심 없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마나만 안정된다면 어떤 사람이 내게 약을 주입하던 크게 상관없었다.

“몇 시간 동안은 안정을 취해 주세요.”

“네. 조심히 가세요.”

나는 연구원들이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한숨을 돌렸다. 사람들이 사라지자 귀신같이 시스템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전까지는 거의 사라진 것처럼 굴더니, 이제는 귀찮을 지경이었다.

[새로운 업데이트가 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내용은 비슷했다.

[목표 달성치가 1% 올랐습니다! 유저의 기운이 향상됩니다. 유저는 목표에 더더욱 가까워집니다. 목표를 수정하려면 ‘목표 수정’을 말해 주세요.]

웃기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유도현이 설정한 유찬희의 궁극적 목표는 죽음인데, 유찬희는 이렇게 건강해질수록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거잖아? 나는 일전에 꿨던 꿈에서 유도현의 목표가 ‘궁극적인 행복’이었다는 걸 상기하며 피식 웃었다. 그게 진짜, 유도현의 의지이자 현실이었다면 유도현은 진짜 세상 제일가는 사이코패스였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

잠시 쉬고 나서 나는 거실로 나가 뉴스를 틀었다. 오늘은 C급 게이트가 열리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C급이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래도 게이트 오픈은 습관적으로 체크하고 있었다. 뉴스를 보니 2급 헌터 2명과 3급 2명이 출정한다고 했다. 위치는 도곡 2동 부근. 이곳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일전에 열렸던 이태원 게이트보다도 더 인구 밀도가 높은 곳이라 제재가 많이 어려워 보였다. 땅값에 예민한 주민들의 반발도 심했다고 들었지만, 사실 나와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C급 게이트, 일명 25차 도곡 2동 게이트가 곧 열릴 예정입니다. 무리 없이 토벌이 진행될 것으로 보이며 해당 주민들의 일상 안정화는 3시간 이내로 정리될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무료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앵커의 말을 흘려 들었다.

[다음 소식입니다, 경기가 침체되면서…….]

게이트에 관한 뉴스는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C급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게이트가 보일까 싶어 괜히 베란다 쪽을 내다보았다. 어차피 반경 한참 바깥에 있어 보일 리 없는데도 그랬다. 몇 번 출정(한 척)했다고 그새 습관이 든 모양이었다. 고한결에게서 문자가 왔다.

[고한결: 이든사우스 다 들음?]

[ㅇㅇ]

[나쁘지 않은 듯]

[고한결: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존나 좋은 거다 ㅡㅡ]

[난 2집이 더 좋았는데]

[고한결: 그건 타이틀을 밖에서 받아왔잖아 ㅡㅡ 이번에 전곡 내부 작사작곡이라고]

[ㅇㅇ 그래서 퀄이 별로인가 보네]

나는 일부러 고한결을 놀리며 문자를 이어갔다. 사실 이든사우스의 곡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신보는 항상 내 취향에 딱 맞았다. 그러나 락에 상당히 이입한 고한결을 놀리는 데에는, 이런 식으로 신랄하게 까내리는 것만 한 게 없었다. 나는 고한결의 육두문자에 답장을 해 주려다가 갑자기 끊긴 인터넷에 주변을 살펴보았다.

순간적으로 쿠궁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주변이 강하게 진동했다. TV장 앞에 놓여 있던 화분이 떨어졌다. 깨지진 않았지만 흙이 바닥에 퍼졌다. 나는 몸을 일으켜 베란다로 뛰어나갔다. 여진은 계속됐다. 나는 발끝에 힘을 주고 계속해서 진동을 느꼈다. 점차 줄어드는 진동과 함께, 전화벨이 울렸다. 고한결이었다.

-야, 방금 지진 느꼈지?

“어. 뭐냐? 갑자기 웬 지진?”

-지진 경보 이런 거 없었잖아.

“없었어. 게이트 열리는 것 말고. 근데 C급이라 이정도 지진은 절대 안 일어날 텐데.”

-이게 다 네가 이든사우스 욕해서 그런 거다. 알겠냐?

“별…….”

-…….

갑자기 고한결의 말이 뚝 멈췄다.

“별 개소리를…….”

-야. 야야.

“왜.”

나는 고한결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에 느릿하게 대답했다.

-야. 뉴스 봐.

나는 언젠가 이런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TV를 켰다. 아까까지만 해도 경기 침체에 대해 떠들던 앵커 두 명이 다급한 목소리로 속보를 전달하고 있었다.

[속보입니다. C급 게이트인 줄 알았던 25차 도곡 2동 게이트가 S급으로 등급 조정되었습니다. 반경 500m 주민들의 대피가 아닌, 반경 2km 주민들의 대피가 필요해 보입니다. 해당 동에 사시는 분들은 반드시 긴급 대피령을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25차 도곡 2동 게이트는 S급, S급입니다. 현재 1급 헌터들이 바로 해당 게이트로 가고 있습니다. 주민 여러분들은 안심하시고…….]

나는 고개를 돌려 베란다 너머를 다시 바라보았다. 멀리 있긴 했지만 확실히 게이트로 보이는 검은 구멍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저 정도 크기의 게이트 구멍은 살면서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베란다 끝까지 뛰어나가 그 모습을 확인했다.

그때 갑자기 모든 배경이 회색으로 빠르게 변했다.

[이벤트 발생! 목표 달성에 빠르게 가까워질 수 있는 이벤트가 발생했습니다! 실행하시겠습니까?]

“미쳤구나, 네가 드디어.”

저기에 몸을 던지라 이건가. 그러면 바로 달성할 수는 있겠네. 다시 열일곱으로 돌아가겠지만.

[이벤트에 참여하지 않을 시 기회는 소멸됩니다.]

“기회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이벤트를 포기할 시 패널티가 생깁니다.]

[패널티: 시민 700여 명의 죽음]

“와, 씨발……. 미쳤네, 이게.”

나는 절로 나오는 욕을 막지 않고 계속해서 내뱉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왜 나한테 700명의 목숨을 책임 전가하는 거지? 애초에 내 일이 아닌데.

[이벤트에 참여하시겠습니까?]

[패널티: 시민 700여명의 죽음, 인물 ‘이주현’, ‘고한결’의 죽음.]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이래야 시스템 개새끼지. 나는 결국 신발을 꿰어 신고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한다고. 그만 따라와!”

[이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지금 당장 25차 도곡 2동 게이트로 가십시오! 그 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차도, 뭣도 없는 나는……. 근처에 있는 자전거를 타고 존나게 달렸다. 도곡 2동까지면 자전거로 밟았을 때 10분이다. 그전까지 게이트가 더 커지지 않길 바라며 나는 페달을 밟았다. 아, 정말 가오 안 산다. 이런, 철없는 생각을 하면서.

사람들이 도망치는 곳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생각보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나는 점점 게이트에 가까워질수록 기분 나쁜 바람이 거세지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펜스가 보였다. 펜스 앞에는 다수의 헌터와 실더, 그리고 전투국 직원들이 보였다.

“유찬희?”

나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이주현이었다.

[당신을 기다리던 ‘이주현’에게 합류하십시오!]

“야! 같이 가!”

“미쳤어? 네가 어디라고 와?”

“일단 같이 가!”

“안 돼, 야!”

누군가가 나를 잡을 새도 없이 나는 펜스 안으로 허리를 굽혀 쏙 들어갔다. 이주현이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아직 1급 헌터야. 자격 박탈 안 당했다고!”

“너 마나도 못 쓰잖아. 가면 그냥 개죽음당해!”

“쓸 수 있어! 그러니까 들어가자. 지금 안 들어가면 몬스터 나와!”

맞는 말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이주현이 고갯짓으로 나머지 헌터들을 이끌고 따라왔다. 게이트에 들어가는 것은, 열일곱 살 때 인공 게이트에 들어간 이후 처음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맨 몸 그 자체였다. 몸이 게이트로 빨려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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