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자초지종을 들은 유현재와 고한결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고한결이 먼저 부러 넉살 좋은 척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야, 그래. 나도 너 그때 피 흘리는 거 보고 놀라긴 했어. 나을 때까진 훈련 같은 거 쉬는 게 나을 것 같아.”
“아니, 진짜 괜찮다니까? 나 약도 잘 받는댔어.”
“그거랑은 별개지. 너 좀 쉬어. 어차피 1급인 거 어디 안 가잖아.”
유현재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긍정의 의미인 듯했다. 더군다나 유현재는 내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까지 알고 있으니 더더욱 훈련하는 것에 대해 탐탁지 않아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조금 불퉁한 얼굴로 오후 수업 교과서를 챙기며 괜히 그들과의 자리를 피했다. 분명 맞는 말이긴 하지만, 어쨌든 유현재에게 나는 한국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남은 한 달 동안 보여주고 싶었다. 적어도 강해져서 돌아오려는 사람 앞에서, 도리어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찬희야, 수업은 잘 듣고 있어?]
문자가 온 건 막 5교시 시작 종이 쳤을 무렵이었다. 한재민의 말과 행동이 적어도 내가 아는 범주 안에 있기 바랐기 때문에 차마 핸드폰을 두고 다니지 못했다. 나는 여느 때처럼 확인 후 답장은 하지 않고 그대로 가방에 집어넣어 버리려 했다. 띠링. 두 번째 문자 수신음이 들렸다. 미리보기에 뜬 내용은 이랬다.
[5교시 끝나고 1층 조제과학실로 와]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와’라는 말은 본인이 그곳에 있다는 뜻이었다. 순간 온몸에 섬칫한 기운이 돌았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유현재가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내가 이번 시간 내로 안 돌아오면.”
“……어?”
“1층 조제과학실로 와 줘.”
“그게 무슨…….”
말을 끝낸 나는 문을 박차고 복도를 뛰어갔다. 야, 유찬희! 너 또 수업 중에 어디 가는 거냐? 뒤에서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단을 서너 칸씩 뛰어 내려갔다. 조제과학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쉽게 열렸다. 수업이 따로 잡혀 있지 않았던 터라 내부는 어둑했다. 나는 넓은 과학실 안쪽으로 들어가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찬희야!”
유현재의 목소리가 입구에서 들려왔다. 나는 몸을 돌려 유현재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왜 따라왔어.”
“그럼 안 따라가?”
유현재는 과학실의 문을 닫고 거리낌 없는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무슨 일인데. 대체.”
“…….”
“또 숨길 거야? 거짓말 칠 거냐고.”
“……한재민이 여기로 오라고 연락했어.”
“한재민? 아직도 걔랑 연락해?”
“연락 안 해. 그냥 일방적으로 통보만 온 거야. 무슨 일 있을 수도 있으니까 온 거고.”
“너 여기에 누가 잠복해 있다가 납치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거야…….”
“왜 이렇게 무모하냐고. 차라리 아저씨한테 내용을 전달하거나 선생님들께 말하든가.”
그 선생조차 한재민의 수족이라면? 내가 지금 믿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유현재, 그리고 나 자신 둘뿐이었다.
“……그래, 내가 판단을 잘못했어.”
순순히 인정하는 내 모습에 유현재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생각이 조금 정리되니 모든 것이 이상했다. 아무리 스파이가 심어져 있다 해도 이곳은 학교이며, 특히나 보안이 철저한 랭커 양성 학교다. 아무리 한재민이라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장소는 아니다. 만약 들어왔다 치더라도 내가 오면 안됐다.
“아무래도 나한텐 쓸데없는 영웅 심리가 있나 봐.”
유현재가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여기로 오라 한 것 빼곤 아무런 정보도 없는 거야?”
“어. 아버지가 협조한 이후론 한재민 얼굴도 못 봤어.”
“일단 나가자. 위험해.”
불도 켜지지 않은 과학실 내부는, 각종 실험 기구들 때문에 다소 통로가 복잡한 상태였다. 겨우 입구로 돌아가 문고리를 잡자마자 나는 이곳이 잠겼음을 바로 눈치챘다.
“왜? 설마 잠겼어?”
“어. 잠겼어. 걸렸나 봐.”
유현재가 자연스럽게 내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렸다. 나는 슬쩍 뒤로 빠지며 자연스럽게 손을 놓았다. 유현재가 힘을 줘서 세게 문고리를 흔들었다. 열릴 리 없었다.
“이거 부숴야 하나?”
“문을 부순다고?”
“아니면 쌤 부르던가. 핸드폰 되잖아.”
“나 지금 한재민이 준 핸드폰밖에 없어.”
유현재가 자신의 핸드폰을 들어 담임의 핸드폰 번호를 찾았다. 수업이 시작된 터라 받을 리 없었다.
“특관쌤한테라도 전화할까?”
“아니.”
내가 즉답하자 유현재가 나를 쳐다보았다.
“특관쌤 한재민 쪽 사람일 수도 있어.”
나는 최대한 솔직하게 유현재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더 이상의 비밀을 만들면서까지 유현재에게 벽을 두르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뭐?”
“저번에 이주현이 말했잖아. 갑자기 특관쌤이 나 데리고 한성병원 간다 했던 거. 그것도 마나연구센터.”
“아.”
유현재가 알겠다는 듯 대답했다. 나는 문을 열길 포기하고 유현재가 쥐고 있는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차라리 고한결 같은 애들한테 문자를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알겠어.”
유현재는 화면을 토독거리며 두드리더니 이내 문자 전송을 완료했다. 나는 벽에 기대 주르륵 내려앉았다.
“답장 오면 말해 줄게.”
“응. 고마워.”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불과 얼마 전이었다면 어두운 과학실에 단둘이 앉아 있기만 해도 마냥 기분이 좋았을 텐데. 이젠 유현재 쪽에서 먼저 선을 그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괜히 손장난을 치다가 툭 질문을 던졌다.
“유학 준비는 잘 되고 있어?”
유현재는 잠시 대답을 하지 않다가 응, 하고 짤막하게 말을 끊었다.
“정말…… 가는 거야?”
내가 묻고도 어이없는 질문이었다. 유현재는 여전히 바닥만 바라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 같아.”
유현재의 말대로 유현재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의 삶은 모든 것이 그대로 멈출 것이었다.
“넌 어떤 사람이야?”
유현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내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유찬희 말고, 진짜 너.”
“……나?”
“응, 너. 이름은 뭐야? 나이는 몇 살이고?”
“몰라.”
“모른다고?”
“응. 몰라.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
자연스러운 질문에 자연스럽게 답한 것이었지만, 나는 유현재와 어느샌가 이런 이야기까지 할 수 있게 된 것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심지어 시스템 또한 이것이 ‘개연성 침범’이라 생각하지 않는 모양인지 잠잠했다.
“그냥…… 눈을 뜨니까, 나였어.”
“그게 언젠데?”
언제냐는 말에는 정말로 대답하기 애매했다. 일곱 살 유현재와 놀고 있던 그 놀이방? 아니면 유현재를 문 너머에 두고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던 졸업식 시즌? 만약 지금 죽게 된다면 바로 어제가 내 생의 시작이 되는 건가?
“그것도 모르겠네.”
“……그렇구나.”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야. 정말로.”
“안 믿는 거 아냐.”
내가 황급히 변명하자 유현재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궁금하다. 너.”
“별 볼 일 없을걸.”
“글쎄. 전혀 그렇게 생각이 안 들어.”
“……왜?”
“내가 처음 너에게 새로운 감정을 느꼈을 때, 정말 단단하고 곧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그런 사람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그런 불가항력적인 시스템이 내재되어 있는 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내부가 어두워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니면 시뻘게진 귀를 들킬 게 뻔했다.
“그땐 나도 많이 혼란스러웠거든.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은 편해지더라. 그냥 원래 자리로 돌아온 것처럼.”
“…….”
“이전의 삶이 뭔가 만들어진 불편한 삶이고, 요즘이 진짜 내 삶 같아. 이상하지 않아? 근데 이 모든 것의 원인이 다 너인 거야.”
“……그러게, 신기하다.”
실제로 네 삶은 나 때문에 더 불행해졌을 텐데.
“내가 영국 가려는 이유는 그냥 강해지려고가 아니야.”
“그럼?”
“그냥…… 우리가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이 거기 있어서.”
“거기 있다고?”
“응. 네가 저번에 했던, 그 의식…… 이라고 하나. 도현이 형을 불렀던, 그 일.”
“…….”
“나도 미친 듯이 찾아봤어. 도대체 누가 그 스킬을 고안해낸 거고, 책으로 남긴 건지. 왜 보통 사람들은 그 스킬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건지.”
“……그래서, 답이 나왔어?”
“응. 그걸 집필한 사람의 동생이 그 학교 교사야.”
“……뭐?”
“가서 물어봐야 할 것들이 많아.”
나는 어느 사이에 그 모든 정보를 찾아본 유현재가 고마우면서도 애틋했다. 한참 정적이 흐르다 내가 몸을 일으켰다.
“불 켜고 있을까? 너무 어둡네.”
“……응.”
“왜 진작 불을 안 켰지. 여기 전등 스위치 어디 있더라?”
“문 왼쪽 편에.”
나는 더듬거리며 손을 뻗어 스위치를 찾아냈다. 구역별로 전등이 나누어진 모양인지 스위치의 개수가 꽤 많았다. 나는 첫 번째 스위치를 켰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형광등이 켜졌다. 그제야 서로의 얼굴이 보였다. 유현재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나는 일부러 다른 쪽을 보는 척하며 두 번째 스위치를 켰다. 이번엔 바로 옆에 있던 불이 켜졌다. 그때, 어디선가 똑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으나 규칙적인 기계음은 점점 소리가 커졌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디서 소리 나지 않아?”
“그러게.”
유현재도 주변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소리의 근원은 스위치에 있었다. 내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순간, 유현재가 소리를 질렀다.
“찬희야!”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유현재가 나를 끌어안고 최대한 멀리 몸을 내던졌다. 바닥에 몸이 닿는 순간 커다란 굉음이 들리며 스위치를 중심으로 문과 벽이 무너져 내렸다. 시멘트 조각들이 강하게 날아와 팔과 다리에 내다 박혔다. 유현재의 등은 이미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게…… 뭐야?”
우리는 헐떡거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명백히 의도적인 폭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