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 사용 설명서-69화 (69/115)

69.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옷을 던져준 한재민이 유유히 옷방을 나갔다. 옷 사는 데에 취미가 있는 건지 규모가 작지 않은 옷방엔 옷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천천히 재킷을 벗기 시작했다.

“잠깐.”

“뒤돌아서 갈아입자고?”

유현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재킷을 바닥에 던져놓은 뒤 유현재를 등지고 뒤돌았다. 티셔츠와 바지, 점퍼까지 꿰어 입고 나니 찝찝함이 조금 덜어지는 듯했다.

“아까 피 많이 흘렸는데, 안 어지러워?”

“딱히. 그런 건 없어.”

“아프면 언제든지 말해 줘.”

“현재야.”

내가 유현재를 나지막이 부르며 뒤를 돌았다. 바지를 막 주워 입으려던 유현재와 눈이 마주쳤다. 유현재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잽싸게 다시 뒤돌았다.

“그…… 미안.”

“어, 어……. 괜찮아.”

유현재가 말을 더듬으며 애써 괜찮은 척했다. 나는 유현재의 벗은 몸을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단단한 팔뚝이라든가 근육이 자리 잡힌 배……. 나는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멈추려 노력했다.

“다 입었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잠잠해지고서야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다시 또 보게 되면 좀 힘들 것 같아서 확인사살을 하기 위해서였다. 유현재가 온순하게 대답했다.

“응.”

“뒤돌게.”

“그냥 돌아.”

나는 뒤돌아 유현재를 마주 봤다. 없을 줄 알았던 민망함이 다시 우리 사이를 급습해왔다.

“……아예 봤어?”

“아, 아니. 그다지 깊게 보진 않았어.”

“깊게……?”

단어 선택이 좀 잘못된 것 같긴 했다. 나는 서둘러 내 말을 정정했다.

“깊게가 아니라 아무튼 자세하게.”

“응……. 다행이야.”

그래도 몸 엄청 좋더만, 뭐. 나는 뒷말을 삼키고 아까 하려던 말을 계속했다.

“그, 아무튼, 어쨌든. 미안해.”

유현재가 나를 쳐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이제야 알겠다는 듯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어제 미안하다고 한 것도 이것 때문이구나.”

이게 다가 아니긴 해. 정말로 네게 미안한 건, 네게 속죄해야 하는 건 따로 있어. 그런데도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현재를 맹목적으로 믿으면서도, 언젠가 나를 받아 주던 유현재의 한계치가 분명히 폭발할 것 같단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마지막 진실을 알게 되면 유현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니, 생각할 것도 없었다. 비겁한 나는 내 앞에서 웃는 유현재를 보며 다시 안심했다. 지금의 조그만 가능성, 행복, 놓치고 싶지 않은 일상을 거짓말 하나로 붙잡는 것은 이제 쉬웠다. 한재민은 틀렸다. 나는 모든 것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말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은 절대 드러내지 않는다.

“네가 어떤 의도였든 간에 지금은 아니란 걸 너무 잘 알아.”

“내가 거짓말한 거면 어떡하려고.”

“그럼 그냥 내 잘못이지.”

“내가 널 죽이려고 했었는데.”

“안 죽었잖아.”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닌 걸 알잖아.”

“아니.”

유현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간단해. 그냥 과거 따위 생각하지 않으면 돼.”

어떻게 저런 말을 저렇게 간단하게 할 수 있을까? 나는 교수형에 처해진 죄수처럼 과거에 대롱대롱 매달려 끊임없이 혀를 빼고 있는데. 목이 졸려 숨이 막히고 머리가 하얘지는 와중에도 삶에 대한 집착 때문에 죽질 못하는데. 나는 유현재의 심중을 꿰뚫어 보기 위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알 수 없었다. 알 리가 없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은, 죽은 사람이 다시 되돌아오는 것보다도 불가능했으므로.

“그게 돼?”

“나도 될지 안 될지 긴가민가했는데, 되더라. 봐봐. 지금의 우리가 증거잖아.”

“넌 진짜…….”

“누가 보면 진짜 바보 같다고 할 수도 있겠지.”

유현재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근데 누군가는 와, 유현재가 유찬희를 너무너무 좋아하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거면 됐어. 유현재가 한 발자국 내게로 다가왔다. 서로를 안으려던 그때 문 쪽에서 경쾌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다 갈아입었냐? 거기서 물고 빨고 하는 거 아니지? 그럼 나 찝찝해서 그럼 방 버린다, 진짜.”

한재민의 목소리에 우리의 시선이 순간 맞부딪혔다. 웃음이 나올 상황이 아님에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찰나의 행복이었다. 우리는 잠깐 손을 붙잡았다 놓고선 옷방 문을 열고 나갔다.

“찬희 너.”

한재민은 언제 따랐는지 위스키가 담긴 온더락을 들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소파는 네 사람이 누워도 넉넉할 정도로 컸다. 겉보기엔 우리 집과 규모가 비슷해 보였지만, 4인 가구와 다르게 혼자 사는 탓인지 유독 집 안이 더 넓어 보였다.

한재민이 예고도 없이 내게 뭔가를 던져 보냈다. 나는 얼떨결에 그 물건을 받고 내려다보았다. 흔한 디자인의 핸드폰이었다.

“앞으로 우리랑 연락할 땐 그걸로만 해.”

“이게 왜…….”

“무조건 제때 제때 답장하고, 그 핸드폰으로 다른 사람들이랑 연락 절대 하지 마. 뭐 그렇게 멍청한 놈이 아니란 건 믿지만.”

나는 항의하려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논쟁을 벌일 기운이 없기도 했고 어쨌든, 그래. 맞아. 설령 ‘내’가 아니더라도 유찬희의 업보는 결국 한재민과 함께 짊어지기로 한 게 맞았다. 사실 결론적으로, 오히려 유현재가 내가 뒤에서 한 일들을 알게 되면서 한재민으로 인해 죽을 확률은 극도로 낮아졌기 때문에 안심한 것도 있었다.

“뭐 당연하긴 한데……. 너희 아빠한테 절대 이 일에 대해 얘기하지 말고.”

“안 해.”

“어차피 너희 아버지, 하나뿐인 아들내미가 한재민이랑 친하게 붙어먹는 건 알잖아.”

나는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 얼마 전 아버지에게서 정확하게 확인받은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 대단하신 보안 국장님인데 모를 리 없지. 뭐, 상관없어. 오히려 너랑 내가 가깝다는 거 알면 우리한테 함부로 못 대할 테니까. 대신.”

“대신?”

“네가 유도현의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만 하지 마.”

그건 나도 알고 있었다. 금단술을 해 죽은 형을 불러내고, 그 힘을 흡수했다. 형의 사진을 집무실에 버젓이 놔둔 아버지와 매일 살려 달라고 비는 형의 꿈을 꾼다는 어머니가 알면 분명 경멸해 마지않을 일이었다. 설령 내가 그들의 마지막으로 남은 자식일지라도.

“알겠으니까 우린 이제 갈게.”

“차 타고 가.”

“됐어. 택시 타고 갈 거야.”

나는 한재민의 제안을 거절하고 현관으로 향했다. 아예 저택을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나니 그제야 온몸의 힘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유현재의 어깨 위로 무너지듯 쓰러지니 유현재가 자연스럽게 내 어깨를 감싸 토닥였다.

“많이 힘들지.”

“응. 엄청나게.”

“집에 가서 얼른 쉬자. 눈 좀 붙여.”

하지만 온몸에 힘이 풀리고 피곤해질수록 정신은 더더욱 또렷해졌다. 왜인지는 알고 있었다. 나는 살짝 피곤한 목소리로 유현재에게 질문했다.

“있잖아.”

“응.”

“형……. 진짜 형이랑 똑같았어?”

“어?”

“얼굴이라든가 체형 이런 거 말이야. 외모.”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도. 마지막으로 봤던…… 형이랑 같았어.”

역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틀린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일부러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새삼스럽지만 나랑 되게 안 닮았네.”

“형은 아저씨를 많이 닮았잖아. 너는 아줌마를 많이 닮았고.”

그래. 확실히 그 얼굴은 내 아버지와 닮아 있었다. ‘진짜’ 내 아버지가 아닌, 유도현과 유찬희의 아버지. 그게 문제였다.

“그렇지. 피곤하네. 나 좀 눈 붙일게. 도착하면 깨워 줘.”

나는 결국 더 이상의 대화를 피하고 눈을 감는 걸 선택했다. 함께 있을 땐, 고요를 더 즐기고 싶었다. 설령 그것이 혼자 있을 때의 더 큰 마수가 되더라도.

*

요즘 들어 계속 늦는다는 엄마의 잔소리를 대충 듣고 우리는 2층으로 올라갔다. 유현재는 내가 피곤해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내 방에 나를 눕히고 이불까지 덮어 준 뒤 불을 끄고 나갔다. 나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드디어 혼자가 되었다. 생각해야 할 것들이 다시 머리를 덮쳐왔다.

우리를 싫어하는 유도현.

미래의 우리를 아는 유도현.

현재의 우리를 알았던 유도현.

모두 이상했다. 혹시 미래를 예측하는 스킬이라도 있었던 걸까? 세상에 스킬은 무궁무진하니 없을 것도 없었다. 시스템이라는 것도 존재하는 판국에 유도현 정도의 탑급 랭커라면 충분히 지니고 있을 만했다. 그렇지만, 그게 왜 나와 유현재를 싫어할 이유가 될까? 우리가 서로 좋아한다는 게 왜 유도현에게는 죽을 만큼 싫은 사실이 되는 걸까. 남자끼리의 사랑을 혐오해서? 그건 아니다. 본인 역시 차수현과의 무언가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나는 핸드폰 전원을 켜고 카메라 앱을 눌렀다. 셀프카메라 모드를 누르니 어둠 속에서 희미한 ‘유찬희’의 얼굴이 보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상한 것투성이긴 했다. 분명 내가 책 속에 빙의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빙의 직후를 제외하곤 이전의 삶에 대한 집착을 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그곳에서 무엇을 했던 사람인지. 어떤 이와 함께했던 사람인지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았다. 애초에 떠오르지 않았단 말이 맞았다.

나는 게이트 너머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던 유도현의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모든 게 없던 일처럼 기억나지 않던 그때가 유도현의 얼굴을 보자 귀신같이 떠올랐다.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모든 장면 장면이 생생하게 피어올랐다.

왜냐하면,

유도현의 얼굴이 내 빙의 전 얼굴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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