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형…….”
지친 얼굴 위로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찬희가 뒷걸음질 치며 눈을 세게 꿈뻑였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타이밍 좋게도 찬희가 몇 번 눈을 깜빡이자 시스템 창은 사라졌다. 도현이 다시 표정을 갈무리하고 찬희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일찍 자야지, 왜 나와 있어.”
“형한테 이거 주려구…….”
찬희가 꼭 쥐고 있던 펜을 도현에게 건넸다. 도현이 몸을 숙여 찬희가 준 펜을 받아 들었다. 도현의 얼굴은 미묘하게 굳어 펴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찬희는 방금 본 것이 무엇이냐 도현에게 당장 묻고 싶었지만 갑자기 붕 뜨는 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꼬맹이가 위험하게 바깥이나 돌아다니고.”
“내려 줘!”
“안 돼.”
도현이 찬희를 들쳐 매 방에 내려다 주고 사라졌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찬희가 꾸물꾸물 침대로 기어올라 이불 속에 들어갔다. 옆에 누워 있던 현재가 물었다.
“찬희야, 무슨 생각 해?”
“있잖아.”
진짜 강한 랭커들은 유령 같은 것도 보이는 걸까? 찬희가 뒷말을 삼키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냐.”
“형한테 혼났어?”
“아니. 아니야.”
찬희가 눈을 감았다. 어차피 형은 강하니까, 그 파란 창이 귀신이었든 몬스터였든 무조건 물리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
일본 정부는 도현의 성공을 예측하고 미리 가족을 초청해 관광 경로를 모두 짜 두었다. 다섯 살짜리 아이 두 명은 쏟아지는 진귀하고 재밌는 것들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이들이 귀빈급 경호를 받으며 관광을 할 동안 도현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에 넋을 놓고 신나게 놀던 두 아이도 가끔 형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했다. 엄마는 그냥 형이 피곤해 쉬고 있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실제로 도현은 찬희와 현재가 호텔 레스토랑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으면 가끔 부스스한 얼굴로 내려오곤 했다.
일정의 마지막 날엔 산중턱에 있는 사찰로 갔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야 했지만 다행히 차로 이동할 수 있는 경로가 있었다.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찬희는 조금 멀미를 했다. 컨디션이 안 좋아진 찬희는 도착하고도 벤치에 누워 움직이지 못했다. 현재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찬희의 곁을 지켰다. 그냥 내려갈까? 하지만 관광청에서 애써 모시고 온 여행지였다. 쉽사리 바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기엔 조금 어려운 감이 있었다.
엄마가 차가운 물을 사러 간 동안 찬희는 여전히 벤치에 누워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평일 비수기라 그런지 그마저도 많지 않았다.
그때 찬희의 시야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젊은 남자였다. 남자는 안경을 쓰고 머리를 짧게 친 터라 얼핏 보면 고등학생으로도 착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자와 찬희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찬희를 빤히 쳐다보던 남자가 고개를 돌리고 저편으로 사라졌다.
“찬희야, 물 좀 마셔.”
찬희가 몸을 천천히 일으켜 엄마가 건네준 생수를 꼴깍꼴깍 마셨다. 여전히 속이 뒤집어질 듯 울렁거렸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살 만했다. 찬희는 벤치에 올려놨던 다리를 내리고 편한 자세로 앉았다.
“찬희야, 괜찮아?”
“아니.”
살짝 심술궂은 목소리로 대답하니 현재의 표정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저기 들어가 보고 싶어.”
찬희가 마당을 가운데 두고 마주하고 있는 낡은 목조 건물을 가리켰다. 엄마의 걱정 어린 잔소리 끝에 찬희와 현재는 드디어 몸을 일으켜 사찰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찰은 어린아이들이 올라가기엔 다소 비탈지고 높은 돌계단이 제법 길게 이어져 있었다. 열심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 두 사람은 금세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너무 높아!”
찬희가 우는 소리를 하자 옆에서 같이 숨을 몰아쉬고 있던 현재가 살짝 망설이더니, 결심한 듯한 목소리로 찬희를 불렀다.
“찬희야.”
“왜애.”
“내가 업어 줄게.”
두 사람의 뒤에서 따라 걷고 있던 엄마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현재 네가 찬희를 업고 여기 올라가겠다고?”
“네. 찬희는 아프잖아요.”
“이 바보야. 네가 날 어떻게 업어.”
“업을 수 있어.”
현재가 굳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는 심지어 굉장히 결연하기까지 해서, 주변에 있던 관계자들도 귀엽다는 듯 미소 지을 정도였다. 진지한 건 오직 현재와 찬희 두 사람뿐이었다.
“그럼 넘어진다니까?”
“안 넘어져.”
“네가 어떻게 알아?!”
“예전에 벌칙으로 너 업고 2층 올라간 적도 있구.”
엄마의 눈이 금세 세모꼴로 변했다. 그런 위험천만한 장난을 쳤다고? 말실수를 했단 얼굴로 현재가 엄마의 눈치를 보았다.
“그래도 안 돼.”
찬희가 그 말을 하고 다시 열심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의 끝에 도착하자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문 근처에서 붐볐다. 찬희가 금세 신난 얼굴로 뛰기 시작했다.
“유찬희! 다쳐!”
“괜찮아요!”
현재가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찬희는 그새 장난기가 발동해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건물 옆 좁은 통로였다. 한참을 기다려도 현재가 오지 않자 찬희가 슬쩍 기둥 바깥을 살펴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따라온 게 아닌가? 다시 통로 바깥으로 나가려는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유찬희?”
“네?”
“네가 찬희니?”
아까 전 눈이 마주쳤던 안경을 쓴 남자였다. 찬희가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찬희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나도 안 닮은 것 같은데.”
남자가 중얼거리며 찬희의 얼굴을 매만졌다. 찬희가 싫다는 듯 얼굴을 비틀어 남자의 손에서 벗어났다.
“형이 좋니?”
찬희의 적대적인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가 모호한 물음을 던졌다. 찬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네 형이 좋은 사람일까?”
“……저희 형은 좋은 사람이에요.”
“어떻게 알지?”
“저희 형은 항상 나라를 위해 싸워요.”
“나라를 위해?”
남자가 재밌다는 듯 푸하하 웃었다. 아무리 어린 찬희라도 그것이 절대 긍정적인 웃음이 아님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저희 형 욕하지 마세요.”
“찬희야.”
남자가 무릎을 굽혀 찬희와 시선을 맞췄다. 찬희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렸다.
“네 형은 나쁜 사람이야.”
“아니에요.”
“아주 나쁜 놈이라고.”
“아니에요!”
“아니라고?”
남자가 헛웃음을 내뱉으며 찬희의 얼굴을 조심성 없이 잡아챘다. 찬희의 몸이 힘없이 남자의 손에 딸려갔다.
“너같이 어린애들은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거 놔요!”
찬희의 발음이 뭉개졌다. 남자가 찬희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듯 밀치고 몸을 일으켰다.
“너 같은 꼬맹이가 길에서 칼 맞아 죽는다면 다 유도현 그 새끼 때문일 건데.”
“…….”
“그래도 안 나빠?”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고 했어요.”
“…….”
“싸우는 사람만 있다고.”
“유도현 그 새끼 동생 맞네.”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남자는 뭐라 얘기를 이어 가려 했지만,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엄마와 가이드 때문에 대화가 멈췄다.
“찬희야!”
“엄마!”
찬희가 엄마에게로 달려가 안겼다. 참고 있던 울음이 터졌다. 낯선 이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많이 놀란 탓이었다. 엄마가 찬희의 얼굴이며 등을 감싸고 토닥여 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엄마…….”
“그런데.”
엄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이랬니?”
찬희가 엄마에게서 몸을 뗀 채 눈을 깜빡였다. 길다란 속눈썹에 눈물방울이 달려 있다 툭 떨어졌다. 찬희가 뒤를 돌아보니, 남자가 서 있던 자리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분명히 어떤 사람이 있었어요.”
“어떤 사람?”
“뒤편으로 나간 사람은 없다는데요.”
“안경을 낀 남자였어요! 우리 형이 나쁜 사람이라고 했어요.”
경비원들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수상쩍은 기색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찬희가 엄마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진짜에요, 진짠데…….”
“도현 군을 언급했다는 걸 보면 관련 능력을 가지고 있던 랭커일 수도 있습니다.”
“랭커가 우리 찬희한테 대체 왜…….”
엄마의 의문이 채 꼬리를 잇기도 전에, 누군가가 입구에서 성큼성큼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어디에 서 있어도 큰 키와 탄탄한 몸, 사나운 인상이 누가 봐도 유도현이었다.
“도현아! 네가 여긴 왜…….”
엄마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도현을 향해 다가갔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찬희는 자신이 곤경에 처한 것을 알고 형이 직접 날아왔다고 생각했다. 슈퍼맨처럼. 도현의 시선이 바쁘게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어디 있어요?”
그 말을 하는 도현은 어쩐지 잔뜩 화가 난 것 같기도, 조금 달리 보면 제법 절박해 보이는 것도 같았다.
“누구…….”
“현재요.”
도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그제서야 엄마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찬희와 키가 비슷한, 검정 머리를 차분하게 내린 꼬마 아이는 어딜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다.
“현재 어딨냐구요.”
“네 동생이 방금…….”
“유현재 어딨냐니까요!”
도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굳어 도현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엄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제야 누군가 기둥 뒤 마루에서 꾸물꾸물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형…….”
현재가 겁에 질린 얼굴로 도현을 바라보았다. 찬희는 현재에게 달려가는 도현의 뒷모습을 허망하게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