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당신이 왜 여기에…?”
들리지 않는, 들을 수 없는 기억의 잔상이란 걸 알면서도 나는 그에게 더듬거리며 물었다. 김구현은 내 쪽으로 느릿하게 걸어오더니 아주 천천히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나는 그가 사라진 자리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게이트 내엔 이제 다시 나 혼자만 남게 되었다. 뭐가 있었냐는 듯 김구현이 서 있었던 자리엔 여전히 자갈만 굴러다녔다. 나는 지금 내게 보여진 이 광경들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지 머리를 굴렸다.
‘명령입니다.’
누구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명령이라고 했다. 그 말인즉슨, 김구현은 본인의 개인적인 의지로 ‘김 팀장’을 죽인 게 아니라는 말이었다. 누구의 명령일까? 외면하고 싶은 해답이 머릿속에 자꾸만 떠올랐다. ‘유 팀장’과 ‘둘째 아들’. 아버지와 일한 지 서류상만으로도 10년이 되었다는 젊은 김구현이 말할 수 있는 유 팀장은 누굴까. 아버지라고밖엔 할 수 없지 않을까.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도대체 무슨 일을 벌였던 걸까, 아버지는. 이렇게 내 기억을 헤집으면서까지, 시스템이 내게 권유를 하면서까지 보여 주려 하는 기억이라면 분명히 ‘유찬희’와 관계가 있는 사건일 게 분명했다.
“찬희야.”
나는 화들짝 놀라 빠르게 고개를 쳐들었다. 아무도 있을 수 없는 곳에서 누군가 갑자기 내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었다.
“유현재?”
나는 천천히 눈을 비볐다. 유현재가 숨을 몰아쉬며 무릎에 손을 짚은 채 내 앞에 서 있었다.
“뭐야?”
유현재가 슬쩍 웃었다.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따라왔어.”
“따라왔다고?”
“응. 따라왔어.”
“게이트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는 말이야?”
유현재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대신 여전히 싱긋 웃은 채로 다른 대답을 했다.
“네 기억을 따라왔어.”
“내 기억?”
기억을 따라왔단 건 대체 무슨 말이지. 설마 유현재도 시스템이 불러온 기억 같은 것일까? 하지만 유현재는 아까의 김구현과는 다르게 진짜 나에게 말을 걸고 있으며, 심지어 나를 바라보고 웃고 있었다.
“찬희야, 지금 몇 살이야?”
뜬금없이 나이를 묻는 유현재에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갑자기 그건 왜 묻지?”
“그야,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알아야 하니까.”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
“열일곱? 열여덟?”
유현재의 부드러운 채근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중얼거리며 대답했다.
“열일곱….”
“아, 역시.”
그 정도일 줄 알았어. 유현재는 살짝 처진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자세히 보니 그는 지금의 유현재보다 조금 더 키가 크고 나이 들어 보였다. 유현재가 대학생이 된다면 이 정도일까? 나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그 ‘기억을 따라온’ 유현재를 바라보았다.
“예상했긴 한데 너무 어려서… 놀랐어.”
“넌 몇 살인데?”
“몇 살인 것 같은데?”
“내가 어떻게 알아.”
“똑같네. 열일곱의 찬희는.”
웃는 모습이 어쩐지 지금보다 더 어른스러워 보였다. 나는 괜스레 대답을 튕긴 것이 조금 민망해져 얼굴을 붉혔다.
“좀 걸을까?”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리 나아가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황무지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유현재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내 걸음에 자신의 걸음을 맞춰 주었다. 적막을 이기지 못한 내가 먼저 입을 뗐다.
“넌 미래에서 온 거야?”
“음.”
유현재가 곰곰이 생각했다. 대답을 고르는 것 같았다. 생각을 마친 유현재가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아니.”
“뭐?”
“미래에서 온 건 아냐.”
“그치만 아무리 봐도 훨씬 나이 든 유현재 같은데.”
“엄청 나이 들진 않았는데.”
“그래서 몇 살이냐고.”
유현재는 또 입을 다물더니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나이가 중요한가, 뭐.”
“됐다.”
말을 말자. 내 말에 유현재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내가 아는 찬희와 똑같아 보여서 다행이다.”
“네가 아는 찬희가 누구냐고, 그래서.”
“찬희는 찬희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유찬희.”
“그럼 틀렸어.”
나는 덤덤하게 말했다.
“난 진짜 찬희가 아니거든.”
나는 몇 번의 생애에 걸쳐서 홀로 중얼거리다 만 그 말을 드디어 입 밖으로 내뱉었다. 내가 ‘진짜’ 유찬희가 아닌 이 몸을 뺏은 다른 무언가라는 게, 적어도 유현재에게 만큼은 늘 죄책감으로 느껴졌었기에. 유현재는 내 말을 듣고 아무런 대답이 없더니 흠, 하고 팔짱을 꼈다.
“아닐걸.”
“네가 뭘 알아.”
나는 욱하는 마음으로 유현재에게 대들었다.
“적어도 네가 찬희라는 건 알지.”
“그러니까 난 진짜 유찬희가 아니라고.”
“그럼 뭔데?”
유현재의 기습 질문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찬희가 아니면, 넌 뭔데?”
나는 곰곰이 대답을 생각해 보았다. 내가 유찬희가 아니면 무엇일까? 나란 존재는, 원래 뭐였더라.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너무 고되고 오랜 삶을 겪어와 잊어버린 건지 아니면 시스템의 농간인 건진 알 수 없었다. 내가 대답하지 못하자 유현재가 웃으며 말했다.
“거봐. 넌 찬희라니까.”
“아니라니까.”
“너 아메리카노 못 마시지?”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넌 커서도 못 마셔.”
“뭐라고?”
“너 고양이도 못 만지지?”
“만질 순 있어.”
“근데 무서워하잖아.”
“그걸 어떻게 알아?”
“찬희니까. 영화 볼 땐 늘 마지막 줄에 앉을 거고. 책을 볼 때는 어울리는 책갈피를 무조건 찾아서 끼워 넣고. 잘 때 베게는 무조건 두 개가 있어야 해.”
“야, 야.”
“맞지?”
나는 멍하니 내 신상을 읊는 유현재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아는 거야, 그걸.”
그건 유찬희가 아니라 ‘나’의 습관인데. 유현재를 포함한 이 세계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나’만의 습관이었는데.
“아직도 네가 찬희가 아닌 것 같아?”
유현재는 혼란스러운 나를 안심시켜 주려는 듯 예쁘게 웃었다.
“그러면.”
내가 유현재의 옷자락 끝을 잡으려 했다. 놀랍게도 옷 끝에 손이 닿지 않고 그대로 통과되었다.
“거기서 나랑 너는… 사귀어? 행복해?”
유현재가 눈을 깜빡였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해. 나한텐.”
“나는 네 미래가 아닌데 왜 중요해?”
“미래가 아니면 대체 뭔데, 네가.”
“나는 기억이야.”
나는 텅 빈 손을 내려다보았다. 유현재의 옷자락, 어깨, 얼굴. 어디든 건드려 보아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기억? 기억이라면 왜 있지도 않은 기억이 내게 나타난 걸까. 그것도 지금보다 더 큰 유현재의 모습을 하고. 아까 전 김구현을 봤을 때보다도 더 혼란스러웠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진실이라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이 어떻게….”
“사람이 모든 걸 기억할 수 있어?”
유현재가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매 생애 죽음을 맞이한 후 처음으로 돌아왔을 때 유현재는 늘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제발 기억하라며 허공에 빌 때도 있었지만 기억은 그리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너도 모든 걸 기억한다고 장담할 수 있어?”
다리에 힘이 풀려 나도 모르게 쪼그려 주저앉았다. 유현재는 여전히 자상하게도,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내 눈높이를 맞춰 주었다.
“잘 생각해야 돼, 찬희야.”
양 볼에 유현재의 손이 내려앉았다. 아무런 감각이 들지 않았는데도 어쩐지 따뜻하단 생각을 했다.
“기억해야 돼. 네가.”
나는 눈을 꾹 감고 고개를 푹 숙였다. 유현재가 살짝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미안해. 너에게 짐을 맡겨서.”
나는 진지한 와중에 살짝 웃음이 나 입꼬리를 올렸다.
“넌 맨날 미안하다고 하더라.”
나는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인 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기억에서 온 유현재는 참을성 있게 나를 기다려 주었다. 십여 분이 흘렀을 때쯤, 살짝은 잠긴 듯 다정한 목소리가 나를 불러 일으켰다.
“찬희야.”
나는 그 부름에 맞추어 고개를 들었다. 유현재는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 기억이 모두 끝난 것이었다.
“지금 게이트 밖에 있는 현재의 미래가 내가 될 수 없듯.”
유현재는 사라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알고 있었다는 듯 담담한 듯한 얼굴이 지친 기색을 더욱 더 뚜렷하게 만들어 주었다.
“내가 지키려는 지금의 찬희도 너의 미래가 될 이유는 없어.”
“…….”
“나는 나의 찬희를 지킬 테니까 너는 너의 현재를 지켜.”
유현재는 이제 반쯤 흩어진 상태였다. 나는 더 이상 무어라 말을 붙이는 대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쩐지 아주 슬프고 기묘한 순간이었다.
“알겠어.”
내 대답에 유현재가 활짝 웃었다. 황무지 위에 기적처럼 부는 따뜻한 봄바람 같은 미소였다. 마지막 한 조각까지 모두 날아가 버린 유현재를 바라보고 있는데, 어깨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또 뭔가 싶어 뒤를 돌아보니 하늘에 손가락만 한 구멍이 생기고 있었다.
검은 구멍은 소용돌이를 치며 점점 영역을 넓혀 갔다. 나는 살짝 뒷걸음질 쳐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찢어지는 것처럼 구멍이 커지고, 구멍 너머엔 블러를 먹인 것 같은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게이트의 출구가 생성된 것이었다.
“찬희야!”
출구를 비집고 나가자마자 유현재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다. 나는 열일곱 살의 유현재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까 전 보았던 20대 유현재와는 같은 듯 분명히 다른 얼굴이었다. 구조대원들이 빠르게 내 몸을 살피고 건강 상태를 묻기 시작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차수현까지 서 있었다. 차수현은 어딘가 불안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들을 모두 뒤로하고 간이침대 위에 순순히 누웠다. 일단은, 편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