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축하드립니다! 개입 인물 ‘유현재’의 히든 루트가 개방되었습니다!>
나는 경쾌하기 짝이 없는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니까 내가 방금 유현재의 히든 루트를 열었다고?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생각해 봐도 루트에 진입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유현재가 나를 진짜 ‘자기 편’으로 인식했다는 것. 하지만 쉽게 답이 나온 만큼 더 무거운 의문이 그 뒤를 따라왔다. 만약 유현재의 마음을 얻는 것이 히든 루트로 가는 정식 열쇠였다면, 내 초반부의 삶들은 모두 뭐였단 말이지? 물론 그놈의 망할 업데이트 때문에 히든 루트가 생성된 것이었겠지만, 이쯤 되니 그 업데이트조차 이렇게 늦게 된 건지 억울해졌다.
스스로 외면하고 있었지만, 적지 않은 횟수의 죽음을 반복하며 조금씩 마모된 내 정신은 조그만 의문과 충격에도 큰 영향을 받는 중이었다. 내게 중요한 건 인간으로서의 성취나 결과가 아닌, 삶을 영위하는 것 그 자체였다. 그저 살아남는 것이 목적이 된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 유현재가 나를 ‘자기 편’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단순히 인간으로서 기쁨이 아닌 나의 목숨 연장에 대한 수단으로서만 여기게 되는 지금 이 순간처럼.
하지만 내 불행은 늘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처한 이 상황에서 약간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는 기미가 보이면 조금이라도 희망을 걸었다. 그건 늘 나의 불행을 증폭시키는 기폭제와 같았다. 아주 사소한 희망과 행복 그 자체의 대가가 잔인한 죽음의 반복이란 걸 알면서도 나는 항상 상황을 낙관했다. 이건 일종의 도피였다. 나는 순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이며, 스스로 죽을 자유조차 없는 마리오네트라는 사실을 외면하고자 하는 도피.
그러니까 나는 말하자면 또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거였다.
밤마다 포기하려 노력하면서도 해가 뜨면 가지게 되는 부질없는 희망. 나는 이 히든 루트라는 단어에 많은 감정을 느껴야 했다. 억울함, 분노, 짜증, 그리고 희망. 종래엔 행복.
아버지는 유현재의 등장에 결국 하던 말을 중단하고 방을 나갔다. 방 안엔 유현재와 나만이 남게 되었다. 지긋지긋한 절벽이 아닌, 새로운 갈림길에서 만난 유현재는 평소의 모습과 조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안, 들으려는 생각은 없었는데….”
유현재가 내뱉은 첫 말은 사과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대답하면 바로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런 내 표정을 눈치챘는지 유현재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내가 얼른 기억해낼게.”
네가 기억해내서 뭘 어쩌게.
“기억해서… 아저씨한테 다 설명할게.”
어차피 바뀌는 건 없는데.
“넌 아무 잘못 없다고. 네가 원하는 거 다 하게 해 달라고.”
근데 왜 이렇게 너는 매 순간 나에게 따뜻한 건지. 나는 결국 눈물을 쏟았다. 쏟았다는 말로밖엔 이 어마어마한 슬픔의 양을 설명할 수 없었다.
*
<히든 루트>에 진입하고 나서부터 유현재는 확실히 달라졌다. 예전엔 대부분 내 말에 따르는 수동적인 모습이 다였다면, 지금은 좀 더 적극적으로 나를 보호하려 애썼다. 보호라는 단어가 좀 어색하긴 했지만, 아무튼 유현재가 하는 행동은 보호, 그것도 과잉보호에 가까웠다. 유현재는 매일 내 방에 와서 내게 대화를 시도했다. 그리고는 다섯 살 난 아이처럼 어마어마한 질문 세례를 해댔다. 너랑 나는 얼마나 친했어? 나는 너 말고 다른 사람이 있었어? 너는 나보다 친한 사람이 있었어?
“그런 게 대체 왜 궁금한 건데?”
나는 유현재가 과거에 있었던 사실보다 우리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복기에 치중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내 진심 어린 물음에 유현재가 다시 말했다.
“그것 말곤 궁금한 게 없으니까.”
“보통은… 자신의 정체성… 이런 거에 가장 먼저 의문을 가지지 않아?”
유현재가 고개를 갸웃했다.
“같은 거잖아.”
“그게 어떻게 같아?”
“같아.”
유현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물론 우리가 절친한 사이였던 것도, 그리고 미성년의 유현재의 세계는 나 이외엔 너무나도 좁았던 것도 맞지만 그게 유현재의 정체성을 대변할 순 없었다.
“보통 정체성은 온전히 너에 대한 거야.”
‘나’라는 게 없는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웃기긴 했지만, 나는 어쨌든 진지하게 충고했다.
“알고 있어.”
유현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런 유현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유현재는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게 실없는 제안을 했다.
“찬희야, 다리 낫고 나서 우리 놀러 갈까?”
“어디?”
“바다.”
나는 유현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춥잖아.”
“내 소원,”
“…….”
“들어주기로 했잖아.”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1급을 받게 되면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었던,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기억에 남아 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유현재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건 진짜인가 보다.”
어깨에 닿은 손은 너무나도 따뜻했다. 나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유현재가 웃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지긋지긋한 울음이었지만, 이번은 그 뜻이 달랐다. 유현재가 어깨에 얹고 있던 손으로 내 등을 감싸 안았다. 나는 유현재에게 안겨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미안해, 찬희야.”
유현재가 내 등을 토닥였다. 얜 항상 뭐가 그렇게 내게 미안한 걸까.
“정말 미안해….”
나는 유현재의 품 안에 여전히 안긴 채 세게 고개를 저었다. 내 움직임을 느낀 유현재가 작게 웃었다. 감싸고 있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그 품속으로 더 깊게 빨려 들어갔다. 더 이상 이 품의 온기를 잃고 싶지 않았다.
*
유현재의 기억은 불완전했다. 가령, 소원으로 바다에 가기로 말한 것은 기억했으나 그 소원이 1급을 성취한 대가라는 건 알지 못했다. 내가 차수현에게 목이 졸렸단 건 알고 있으나 그로 인해 죽었다는 것은 몰랐다. 모든 상황을 기억하려 노력하고 있으나 그것이 나의 수많은 죽음으로 인한 과거의 잔재임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걸 굳이 일깨워 주진 않았다. 그저 기억한 것만으로도, 내 고통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내 만족의 역치는 그 무엇보다도 낮았으니까.
우리는 겨울 바다를 걸었다. 바람은 모래를 머금고 한참 동안 바다를 맴돌았다. 젖은 모래는 찬 기운을 맞고 얼어 밟을 때마다 서걱서걱 소리가 났다. 우리가 남긴 발자국으로 파인 자리마다 파도가 물을 채웠다. 나와 유현재는 발자국의 시작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걸었다.
밝아질 것이라 생각조차 들지 않는 어두운 새벽이었다. 나는 추위에 이를 부딪히며 덜덜 떨었다. 유현재가 목도리를 둘러 주었다. 나는 좀 민망한 생각이 들어 대신 끼고 있던 장갑을 건넸다. 웃긴 상황이었다. 유현재가 내가 준 장갑을 낀 채 제 볼을 감쌌다.
“들어갈까?”
“아니.”
나는 무슨 대결이라도 하듯 눈을 부릅뜬 채 계속 추위에 맞서고 있었다. 유현재가 질린다고 할 때까지 바다를 볼 심산이었다.
“우리 2차 선발전 할 때.”
“응.”
“1급 받아 와.”
유현재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의 입장에선 당연히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무능력자가 1급을 받을 수 있는 건 한계까지 체술을 올리는 것 외엔 없었다. 그리고 남은 시간 동안 그걸 해내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알겠어.”
그러나 유현재는 생각보다 흔쾌히 대답했다. 오히려 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유현재를 올려다보았다. 유현재가 실없이 웃었다.
“네가 하라고 한 거잖아.”
“…….”
“그럼 할 수 있을 것 같아.”
감각이 없어질 정도로 추위에 굳은 얼굴이 열기로 점점 뜨거워졌다. 나는 유현재를 등지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유현재가 당황한 듯이 함께 걸음을 빨리했다.
“같이 가, 찬희야.”
“시끄러.”
“넘어져!”
“조용히 해, 진짜.”
나는 괜스레 성질을 냈다. 유현재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그 행동조차 이미 내 감정을 들킨 것 같아, 온몸이 걷잡을 수 없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면 유현재가 웃고 있을 것 같아 나는 앞만 보고 끊임없이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