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86화 (386/400)

Round 386. 상처투성이의 성과

가늘게 비가 흩날리는 가운데 대한민국과 소련의 후반전 경기가 시작되었다.

후반전은 전반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그것도 매우 나쁜 의미로서.

“Засранец!”

“으악!”

소련 센터백 쿠르트실라바의 깊은 태클에 정병탁이 나동그라지자, 관중석에서 곧장 야유가 쏟아졌다.

“우! 우-!”

소련 선수들을 비난하는 건 한국 응원단만이 아니었다.

영국 관중들, 심지어 중계 캐스터조차도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지금 소련 선수들은 여기가 축구장이라는 것을 망각한 것 같습니다. 승부욕 이전에 신사도를 보여 줬으면 좋겠군요.」

중립을 지켜야 할 중계 캐스터가 쓴소리를 할 정도로, 쿠르트실라바를 비롯한 대다수 소련 선수들은 경기를 무척 거칠게 하고 있었다.

돌파 중에는 높고 깊은 태클이, 공중 경합에서는 팔꿈치와 박치기를 한국 선수들에게 날렸던 것.

한두 번이면 모를까, 연거푸 더티 플레이로 선수를 가격하고 경기 흐름을 끊어 버리니 한국 팀에서도 분통을 터트렸다.

“왜 퇴장시키지 않는 거요! 방금 전에도 우리 선수가 다칠 뻔했는데!”

격분한 나머지 윈터보텀 감독을 비롯한 한국 팀 코칭스태프들이 터치라인 가까이 몰려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 주심을 맡은 스페인 출신의 후안 가라이 심판은 관중과 한국 쪽의 항의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빨갱이 자식, 기왕에 파울을 할 거면 페널티박스 안쪽에서 하든가.”

“절대 그럴 놈들이 아니지. 상당히 의도적이니까.”

준영이 판단한 대로 소련의 더티 플레이는 니콜라이 모로조프 감독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한국의 빠른 기동력과 끈끈한 조직력에 경기가 뜻대로 되지 않으니, 더티 플레이로 깽판을 놓으려 하는 것이다.

“다들 잘 들어. 저놈들 의도는 우리를 주눅 들게 하거나 흥분시켜서 경기 집중력을 흐트러트리려는 거야. 넘어가면 절대 안 돼.”

그리 일러둔 준영은 특히 차태성에게 주의를 주었다.

“태성이는 특히 조심하고.”

“쳇, 참으려고 해도 도가 지나치다고!”

성질이 불같은 차태성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았다.

그렇다 보니 경기 중에 상대편 선수뿐만 아니라 심판에게도 거칠게 대들곤 했다.

방금 전에도 쿠르트실라바와 주먹다짐을 할 기세로 대치했기에 준영이 뜯어말렸다.

“북한의 한봉진이란 놈이 저지른 일 생각나지? 잘못하면 그리될 수도 있다고.”

“으윽, 알았다. 어떻게든 참아 보지.”

차태성이 물러난 후, 준영이 프리킥을 차기 위해 공 앞에 섰다.

뻐엉-!

힘차게 찬 슈팅이 수비벽을 서고 있던 쿠르트실라바의 안면에 정통으로 꽂혔다.

강슛을 맞은 쿠르트실라바는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Ты чо блять!”

“Щас по ебалу получишь!”

소련 선수들이 바로 발끈해서 준영에게 달려들었다.

좋지 않은 의미가 분명한 말을 사납게 내뱉어 가면서.

그 바람에 경기는 다시 중단되었고, 가라이 심판은 준영에게 구두 경고를 주었다.

“보복 행위를 하면 퇴장까지 당할 수 있어. 유명 선수라고 봐줄 거라 생각하지 마.”

“눼눼, 명심합죠.”

물러나는 준영에게 다가온 차태성이 투덜거렸다.

“너 인마, 남보고는 조심해라 참아라 잔소리해 놓고 사고 치기냐?”

“의도적인 건 아니었다고.”

“그 말을 누가 믿어?”

준영은 반박할 수 없었다.

슛을 차는 순간, 골대가 아니라 쿠르트실라바의 얼굴이 보였던 게 사실이었으니까.

‘나도 좀 더 냉정해야겠군.’

반성한 준영은 다시 수비에 전념했다.

현재 상황을 잘 넘기고, 마지막에 좋은 결실을 거두기 위해서.

***

준영의 강슛을 맞고 기절했던 쿠르트실라바는 얼마 후 재투입되었다.

하지만 살짝 뇌진탕이 와서 그런지 판단이나 대응이 떨어져 있었다.

‘호재로군. 이대로 상대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면…….’

준영 말고 다른 한국 선수들도 그리 생각했는지 쿠르트실라바 쪽으로 집중적으로 파고들려 했다.

그러나…….

「캡틴 리의 날카로운 패스, 하지만 잡지 못하고 쓰러진 한국 9번 Jung. 아무래도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은데요.」

쓰러진 정병탁 쪽으로 준영과 한국 선수들이 달려왔다.

“아까 태클에 채였던 쪽이지?”

“예, 괜찮은 것 같더니…….”

왼쪽 발목을 움켜쥔 정병탁은 쉬 얼굴을 펴지 못했다.

팀 닥터가 들어와서 살펴보고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골절은 아니지만, 인대가 다친 것 같으니 바로 병원에서 정밀 진단을 받아 봐야 할 것 같군.”

“그럼 경기는요?”

“무리야. 억지로 뛰다간 더 나빠질 수 있어.”

“그런…….”

정병탁의 얼굴이 납빛으로 변했다.

선수들은 물론 필드 밖에 있던 최정민 코치의 표정도 굳었다.

‘젠장, 왜 이런 악재가 또…….’

들것에 실려 나오는 정병탁의 모습이 칠레 월드컵 플레이오프 때의 자신과 겹쳐 보이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다.

혹시나 이 악재 때문에 그때와 똑같은 결과가 나타나는 건 아닌지?

‘애들이 동요하지 말아야 하는데…….’

최정민이 걱정하는 가운데, 준영은 재빠르게 선수들을 다그치며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당황하지 마. 한 명 빠진 상황 정도는 대비하고 훈련했잖아. 국천이가 병탁이가 있었던 측면 쪽을 막아. 중앙은 나랑 승옥이에게 맡겨.”

10명으로 줄어든 한국 대표팀.

당연히 소련은 이를 호재로 여기고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빠른 발을 가진 갈림쟌 쿠사이노프가 집요하게 왼쪽 측면을 파고들며 크로스를 올리면 중앙에서 바니셰프스키와 말로폐예프가 달려들며 헤딩골을 노렸다.

하지만 한국 중앙 수비를 맡은 김청남과 김효가 그들을 잘 막아 냈다.

신장 차이도 별로 안 나는 데다 몸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았기 때문.

‘훈련 때 주장을 상대로 했던 것에 비하면야…….’

‘문디 자슥들, 힘으로 밀기만 하면 될 줄 아나.’

영국 전지훈련 때는 물론, 월드컵 개막 직전까지 둘은 준영에게 호된 특훈을 받았다.

거기다 그 전부터 웨이트 트레이닝도 열심히 해 왔고.

이렇다 보니 소련의 단조로운 공격은 통하지 않았다.

「바니셰프스키의 발밑에서 공을 빼내는 3번 Kim, 침착하게 소련 공격수들을 따돌리고 전진해 나옵니다. 하지만 시치나바가 잡아채는군요. 저건 파울이죠.」

「측면에서 다시 소련의 크로스! 하지만 5번 Kim이 끊어 냅니다. 한국 팀 Kim 콤비의 수비가 상당히 뛰어납니다.」

소련 선수도 힘으로 밀어붙이는 게 능사가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중앙에서 패스를 뿌려 줘야 할 사보와 시치나바가 이준영과 한국 미드필더들에게 막혀 있는 데다, 어지간한 발재간은 통하지 않았다.

수비를 끌어내려고 외곽에서 과감한 슈팅도 시도했지만, Hahm이라는 골키퍼가 침착하게 막아 냈다.

그럼에도 소련의 모로조프 감독은 공격을 독려했다.

“계속 밀어붙여! 어차피 우리가 한 명 더 많다!”

두들기다 보면 나자빠지기 마련.

더구나 상대는 전반부터 오버 페이스를 했고, 후반에 한 명이 부상으로 이탈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발이 느려질 것이라고 봤는데…….

‘아니, 이놈들, 왜 안 지치지?’

수적 열세 때문에 쉽사리 전진하지 못했지만, 한국 선수들은 예상했던 만큼 지치지 않았다.

오히려 밀어붙이던 소련 선수들의 움직임이 현저하게 느려졌다.

측면에서 활발히 뛰던 쿠사이노프와 치슬렌코도 패스를 놓치는 추태를 보일 정도.

‘훗, 삑삑이 열심히 한 보람이 있구만.’

잘 버텨 주고 있는 한국 선수들을 보며 준영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지금 한국 선수들의 선전은 단지 훈련의 성과만은 아니었다.

“이 악물고 뛰어!”

“빨갱이들한테 지면 안 돼!”

시대가 야기한 반공정신이 선수들의 투혼을 피어오르게 하고 있었다.

“승옥아, 윤옥이 쪽이 비었어!”

준영의 말이 나오기 무섭게 박승옥은 빈 공간으로 달려가는 조윤옥에게 롱 패스를 보냈다.

재빠르게 소련 페널티박스로 들어온 조윤옥은 파 포스트 상단을 보며 감아 찼다.

하지만 껑충 뛰어오른 야신은 손을 뻗어 그 슈팅을 골대 위로 쳐 넘겼다.

「또 한 번 엄청난 선방을 보여 주는 야신! 이변은 결코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한국의 코너킥 상황.

박스로 들어온 준영은 임국천이 올린 크로스를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뛰어오르는 순간, 갑자기 눈앞으로 허연 팔뚝이 날아들었다.

빡-!

뭔가가 부서지는 소음과 함께 눈앞이 한순간 번쩍였다.

‘젠장, 저 망할 자식……!’

알베르트 셰스테르네프.

폭군 이반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공격수들에게 사나운 수비를 하는 동토의 리베로.

공중 경합 상황에서 그의 팔꿈치에 맞았던 준영은 상처를 살필 틈도 없이 바로 태클을 날렸다.

그 바람에 경합 과정에서 튀어 오른 공을 가슴으로 받았던 셰스테르네프는 역습을 하지 못하고 나동그라졌다.

삐익-!

곧바로 휘슬이 울리며 한국의 파울이 선언되었다.

당연히 한국 선수들은 격분하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왜 주장이 파울인 겁니까?”

“아니, 파울이 맞다 쳐도 앞의 상황은? 저 자식이 팔꿈치로 주장을 쳤다고요!”

한국 측의 거센 항의에도 가라이 심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태성이나 조윤옥 등, 항의하는 한국 선수들에게 구두 경고를 주었다.

“물러나! 계속 판정에 불복하면 퇴장시키겠다!”

“으……!”

차태성의 이마에 핏발이 섰다.

마음 같아서는 확 달려들고 싶었지만, 여기서 경기를 망칠 수 없었기에 꾹 눌러 참았다.

그사이 준영은 라인 밖으로 나가 팀 닥터에게서 치료를 받았다.

“이거 코뼈 골절인데…….”

“빨리 지혈이나 해 주십쇼.”

“이봐, 골절된 상태로 뛰다 잘못하면 큰일 난다고!”

“됐으니까 빨리요. 지금 9명이 뛰고 있다고요!”

준영의 닦달에 팀 닥터는 그의 코에 붕대를 뭉쳐 집어넣었다.

덕분에 피는 일단 멎었지만, 숨쉬기는 힘들었고 통증은 계속 밀려왔다.

‘앞으로 10분, 조금만 더 버티면 돼. 조금만 더!’

응급 치료가 끝나기 무섭게 준영은 필드로 달려 들어갔다.

때마침 한국 측이 수세에 몰려 있던 상황.

서둘러 수비에 가담한 준영은 상대의 크로스를 헤딩으로 걷어 냈다.

그리고 이후 한국 박스 쪽으로 들어오던 패스들도 죄다 끊어 냈다.

「캡틴 리의 놀라운 부상 투혼. 흔들리던 한국이 다시 안정을 되찾아 반격을 시도합니다.」

준영이 끊어 낸 공을 확보한 차태성이 전방으로 달려가는 이희택에게 밀어 주었다.

상대 측면 지역에서 쿠르트실라바를 제쳐 냈던 이희택은 셰스테르네프의 마크에 페널티 아크 쪽으로 쇄도하던 준영에게로 패스를 보냈다.

뻐엉-!

폭음과 함께 지면에 낮게 깔린 논스톱 슈팅이 소련 골대로 날아갔다.

야신의 손끝에 스친 슈팅은 골대를 맞고 튕겨 나왔다.

“내가 넣는……!”

이희택이 리바운드 볼을 향해 뛰어들었지만, 셰스테르네프가 황급히 공을 멀리 걷어 냈다.

삐익-! 삑!

경기 종료를 알리는 심판의 휘슬.

정신없이 뛰던 한국 선수들은 뒤늦게 스코어보드를 보았다.

“0 대 0… 비겼구나!”

“첫 골을 넣기도 전에 승점부터 딸 줄이야.”

“이길 수도 있었는데…….”

한국 선수들의 아쉬움이 컸다면, 관중과 기자들은 놀라움이 컸다.

명백한 운명.

유럽에서도 축구 강국으로 꼽히는 소련에게 분명히 패할 거라 예상했건만, 결과는 빗나가 버렸으니까.

「예상 이상의 선전을 펼친 한국. 관중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내 주고 있습니다.」

관중들의 갈채와 환호성에 손을 흔들며 답례한 한국 선수단은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치며 응원한 교민들에게도 허리를 숙였다.

‘첫 승점… 예상외의 성과이긴 한데 손실이 많군.’

정병탁이 부상으로 실려 나왔고, 팀의 핵심인 이준영도 코뼈 골절 부상을 입었다.

이들 외에도 소련의 거친 플레이에 자질구레한 부상을 안고 뛴 선수들도 많았다.

당장 사흘 후의 칠레전은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상처투성이의 성과에 윈터보텀 감독과 한국 코칭스태프들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

1. 알베르트 셰스테르네프는 소련 축구 역대 최고의 수비수로 손꼽히는 선수입니다.

CSKA 모스크바에서 역대 최연소인 17살 때 데뷔해서 21살에 주장이 되어 은퇴까지 팀을 이끌었습니다.

체격도 좋고 엄청나게 터프한 선수로 공격수들에게 악몽과 같은 존재였다고 합니다.

모스크바에서는 278경기, 국가대표로는 90경기를 뛰었는데 은퇴는 30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했습니다.

소련을 나와 해외 리그에서 뛰었다면 훨씬 더 좋은 평가를 받았을 거라고 하지요.

2. 토요일 새벽에 이번 월드컵 본선 조 추첨 결과가 나왔습니다.

뭐 최악은 아니라고 하는데, 우리 입장에선 빡센 조인 건 틀림없습니다.

특히 K리그 뛰는 국대 선수들 입장에선 우려스럽다고 할 만합니다. 시즌 거의 다 끝나서 체력 다 떨어졌을 때 치르는 월드컵인지라…….

안 그래도 국내 리그 일정도 무척 빡빡한데, 11월 말에 시작되는 월드컵에서 좋은 모습들을 보여 줄 수 있을지 걱정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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