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85화 (385/400)

Round 385. 야신이 야신했다

미들즈브러 아이레섬 파크.

이곳으로 붉은 레플리카를 입은 수백의 동양인들이 몰려들었다.

“대- 한민국!”

북과 장구, 꽹과리와 징을 두들기며 응원의 함성을 지르는 이들은 바로 재영 한국인들.

토목 건설 노동자, 광부, 간호사, 유학생 등 다양한 직종에 몸담으며 머나먼 서쪽 섬나라에 모여 살던 이들은 오늘 함께 모여 함성을 높였다.

한국인 관중들 앞쪽에 자리 잡은 신중현과 이석 등 ADD4 멤버들은 응원가를 부르면서 흥을 보탰다.

“뜨거운 젊음이여~ 대한의 영혼이여…….”

미들즈브러 지역 주민들은 경기 전부터 분위기를 뜨겁게 달구는 한국인들을 신기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기운도 좋구만. 벌써부터 열심이라니.”

“응원으로 조금이나마 힘을 실어 주고 싶은 거겠지.”

“쩝, 그 심정 잘 알 것 같아.”

미들즈브러는 이번에 3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약팀의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자신들의 팀 유니폼과 같은 색의 붉은 레플리카를 입은 한국인들이 남 같지 않았다.

“De- Hanmink!”

“Come on Korea, Come on Korea!”

한국인들 주변에 있는 영국인들도 응원에 합세했다.

어설프게 대한민국 함성까지 외치지는 않더라도 다섯 번 박수 치기를 따라 하는 이들은 상당히 많았다.

「경기 전부터 열띤 응원이 펼쳐지고 있는 가운데, 필드로 양국의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습니다.」

하얀 상의에 하늘색 하의를 걸친 소련 선수들과 함께 새로운 붉은 유니폼을 걸친 한국 선수들의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비쳤다.

한국 팀의 붉은 유니폼에는 태극기와 함께 새로운 호랑이 엠블럼이 박혀 있었다.

21세기의 포워드 애로우 방식의 디자인과 사뭇 다른 1960년대 감성이 물씬 풍겼다.

‘아무리 봐도 월남전 맹호 부대 마크랑 비슷해 보인단 말이지.’

준영은 너무 레트로하지 않나 생각했지만, 김홍일 대통령이나 축구인들은 좋아했다.

대다수 국민들도 용맹무쌍한 도안이라며 호감을 보였다.

이렇게 다들 좋아하니, 혼자서 반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경기 전 국가가 제창되자, 선수들뿐만 아니라 한국 응원단까지 기립해서 힘차게 애국가를 불렀다.

이어서 소련 국가가 연주된 다음, 양국 선수들은 선전과 페어플레이를 당부하며 악수했다.

“2년 만에 보는군요. 멋진 경기를 해 봅시다.”

“OK, Good luck.”

준영과 악수를 나눈 야신은 짤막한 영어로 대답하며 미소를 지었다.

과거에 그와 한 번 겨뤄 보고 골까지 넣었던 준영은 여유만만이었지만, 다른 한국 선수들은 그렇지 않았다.

“저 작자가 거미손 야신…….”

“실물로 보니 진짜 강해 보이네. 흥철이 형님이 순한 양처럼 보일 정도야.”

말로페예프나 치슬렌코 등 요주의 선수들이 많다는 걸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지만, 야신이 유독 크게 눈에 들어왔다.

영상 분석에서 보았던 엄청난 선방 능력이 인상적이었기 때문.

“쳇, 거미손이든 문어발이든 내가 다 뚫어 주겠어.”

“잘 말했다, 희택아. 그런 정신으로 싸우는 거야.”

준영은 선수들이 기죽지 않게 전의를 고양시켰다.

그사이 양 팀의 포진이 끝나고, 주심이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을 불었다.

‘드디어 시작이다.’

다시 한번 발을 디딘 월드컵 무대.

8년 전과 다르게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로 출전한 준영은 힘차게 필드를 달려갔다.

***

“대- 한민국! 대- 한민국!”

아이레섬 파크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응원 구호.

한국 선수들이 공을 잡을 때마다 박수와 함께 환호성이 쏟아졌다.

거의 홈 수준에 준하는 분위기 때문일까.

주춤하는 소련 선수들을 상대로 한국 선수들은 활발하게 뛰어다니며 경기를 주도해 나갔다.

「측면에서 한국이 공을 가로챕니다. Jung이 중앙에 있는 Lim에게 패스. Lim, 요제프 사보를 따돌리고 슛-! 골대 옆을 지나갑니다.」

임국천이 찬 슈팅은 그리 위협적이진 않았지만, 양 팀을 통틀어 첫 번째 슈팅이었다.

약체에게 먼저 슈팅을 허용했다는 게 자존심이 상했던 것인지, 바로 소련 대표팀이 반격을 시작했다.

「주장 알베르트 셰스테르네프가 이고르 치슬렌코에게 길게 패스. 바로 에두아르드 말로페예프에게 넘겨주지만, 캡틴 리가 헤딩으로 끊어 냅니다.」

「한국 진영 측면에서 갈림쟌 쿠사이노프가 손을 듭니다. 하지만 공을 주지 못한 채 뒤로 공을 돌리는 소련 팀…….」

「또 패스가 끊기는 소련. 한국 중원이 너무 두껍습니다.」

오늘 한국 대표팀은 미드필드에 숫자를 늘린 포메이션으로 나왔다.

중앙의 이준영을 중심으로 임국천과 박승옥, 그리고 좌우 측면에는 공격수인 정병탁과 이희택이 내려와 부지런히 소련 선수들을 견제하고 압박했다.

취재원들의 카메라는 그런 한국 선수들의 플레이를 필름에 담았다.

“기본적으로 수비 넷에 미드필드에 다섯… 실질적인 공격수는 달랑 하나로군.”

“한국 팀은 공격할 맘이 없는 건가?”

“아니, 그런 것 같진 않아. 전반적으로 다들 상당히 많이 움직이고 있어.”

중원에서 수적 우위로 공을 탈취, 그 뒤에는 최전방에 홀로 있던 조윤옥이 잽싸게 빈 공간으로 이동해서 패스를 받아 주었다.

그런 다음에 정병탁, 이희택뿐만 아니라 미드필더들도 재빠르게 전진해서 공격에 가세했다.

이런 움직임에 소련 선수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놈들, 상당히 빨라!’

‘기동력에서 오히려 우리가 뒤처지고 있어.’

유럽에서 명성이 자자한 캡틴 리를 빼면, 한국 선수들의 체구는 대개 170대 초중반 정도로 고만고만했다.

하지만 기동력이 뛰어나고, 패스도 꽤 정교한 편.

그렇다 보니 금방 공을 빼앗고, 금방 소련 진영으로 공격하러 들어왔다.

“확실히 오래 합숙 훈련한 효과가 있네요. 프로팀 같은 수준의 조직력이 나오고 있으니.”

톰 피니 코치의 말에 월터 윈터보텀 감독은 고개를 저었다.

“조직력으로 모든 게 해결되진 않아. 지금 실질적으로 우리 팀 공격을 만들고 있는 선수들이 누군지 잘 보라고.”

“아, 그러고 보니 전부 박 코치 제자들이군요.”

지금 이준영은 주로 수비 안정에 치중하고 있었다.

그를 대신해 한국 팀의 공격을 만들어 가는 선수들은 박승옥과 임국천, 조윤옥.

이들은 동북고 시절부터 박병석 코치의 수제자들이었다.

박병석은 기술과 패스를 중시했고, 그 때문에 그의 제자들은 기본기가 탄탄했다.

그런 바탕이 있기에 소련을 상대로 역습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까진 소련 수비수들이 잘 차단하고 있긴 한데, 과연 계속 그럴지?”

소련 선수들이 조바심을 내는 게 월터의 눈에 훤히 보였다.

아마 그들은 일찍 선제골을 넣고, 1차전을 가볍게 낙승할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이 만만찮은 저항과 반격을 펼치고 있으니 동요할 수밖에.

「소련 18번 아나톨리 바니셰프스키 쪽으로 패스가 전달됩니다. 페널티 아크 앞쪽에서 바니셰프스키의 슛! 한국 수비수를 맞고 나옵니다.」

뒤이어 리바운드 볼을 치슬렌코가 잡아서 중거리 슛을 날렸지만, 위력이 없는 소녀슛이라 함흥철에게 간단히 잡혔다.

이후에도 소련은 두세 차례 슛을 시도했지만, 전혀 위협적이지 못했다.

이준영이 조율하는 한국 중원과 수비진이 너무 끈끈했기 때문.

“이쪽으로 공 달라고. 이쪽에 공간 나온 거 안 보이냐?”

“그쪽은 오프사이드야, 등신아!”

소련 공격수들 사이에서 말다툼이 일어나는 가운데, 또다시 한국의 역습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꽤 과감하고 빨랐다.

한국 진영 우측면에서 공을 빼앗은 차태성이 직접 치고 올라갔기 때문.

“Грязнуля!”

“짖지 말고 꺼져, 이 빨갱이 새꺄!”

거칠게 밀어붙이는 상대 풀백의 마크를 뿌리친 차태성은 재빠르게 소련 페널티 박스로 쇄도하는 이희택의 앞쪽으로 낮게 크로스를 보냈다.

뛰어 들어가던 이희택의 오른발 논스톱 슈팅.

파 포스트 하단 구석으로 매섭게 날아드는 슈팅에 한국 선수들은 반색을 했다.

‘들어갔다!’

경기장에 있는 선수들과 기자, 관중들까지.

모두가 득점을 확신했다.

하지만 짐승같이 몸을 날린 올 블랙의 골키퍼는 손바닥으로 그 슈팅을 쳐 냈다!

「레프 야신의 놀라운 선방! 이거 한국 팀 입장에선 정말 두고두고 아쉬울 것 같은데요.」

중계 캐스터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한국 선수들은 충격과 전율을 느꼈다.

분명히 골이라고 생각했는데, 상대가 막아 버렸으니까.

“저 자식, 진짜 괴물 아냐?”

“어떻게 그걸 막지?”

야신이 야신을 해 버린 이 상황에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건 준영도 마찬가지.

아무리 천하의 야신이라도 37살쯤 되었으니 전성기의 실력은 나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 칠레 월드컵 때도 부진하기도 했으니까.

‘거참, 진짜 쉽지가 않구만.’

첫 골, 첫 승점, 첫 승리.

가장 첫 번째 목표인 골부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 더욱 오기가 들었기에 아쉬움을 털어 내고 다시 경기에 집중했다.

***

야신의 대선방 이후, 경기장 분위기가 바뀌었다.

다름이 아닌 야신 본인에 의해서.

“정신 차려, 레오니드! 지금 놀러 온 줄 알아? 굴라그로 끌려가고 싶냐?”

“알베르트 이 자식아, 주장 완장 찼으면 폼 잡지 말고 수비 조율 좀 확실히 하라고!”

“야야! 요제프! 파울하지 마! 파울하면 안 된다고!”

“수비해, 이 반동 새끼들아!”

경기 초반과 다르게 야신은 연방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팀원들을 닦달했다.

그 바람에 소련 선수들뿐만 아니라 한국 선수들도 귀에서 피가 난다 싶을 정도였다.

“저 빨갱이 골키퍼, 말 많네요.”

“소련에서 수다쟁이라고 유명한가 보더라.”

전반 종료 직전, 조윤옥이 얻어 낸 프리킥을 처리하기 위해 공 앞에 선 준영과 임국천.

호흡을 가다듬다 돌진한 준영은 임국천이 살짝 밀어 준 공을 강하게 후려 찼다.

뻐엉-!

소련 수비벽을 스치며 떨어지는 무회전 슛.

눈을 부릅뜨고 있던 야신은 한순간 궤적이 달라지는 슈팅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막았……!’

가까스로 슛을 쳐 냈던 야신의 눈에 리바운드 볼을 향해 달려드는 정병탁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쭉 뻗은 발끝에 공이 걸렸다.

야신이 몸을 날렸지만, 공은 옆구리를 스치며 골망을 흔들었다.

「고올… 아니, 옆 그물입니다, 옆 그물! 또 한 번 아깝게 찬스를 놓치는 한국!」

정병탁이 땅을 치며 아쉬워하는 가운데, 심판이 전반 종료를 알리는 휘슬을 불었다.

“잘했다, 한국!”

“후반전에도 소련 놈들 콧대를 납작하게 해 줘!”

라커룸으로 돌아가는 한국 선수들을 향해 관중들의 갈채가 쏟아졌다.

최정민 코치는 그 광경을 뿌듯하게 바라보다 살짝 눈시울을 붉혔다.

12년 전의 첫 월드컵 출전.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그저 한 줌의 희망과 의지를 품고 싸웠던 그때가 생각났던 것.

그때 감독이었던 김용식도 그런 최정민의 마음을 읽었는지 등을 두들겨 주었다.

“후배들이 참 잘 싸워 주고 있어. 그렇지 않나?”

“예, 다들 우리 경기를 보고 깜짝 놀란 것 같습니다.”

그런 반응은 취재 기자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소련의 다득점을 예상하고 한국 골대에 모여 있던 그들은 후반전엔 어느 쪽에 자리를 잡아야 하나 싶어 갈팡질팡했다.

“하지만 아직 경기가 끝난 건 아니지.”

“후반전도 잘해야죠.”

두 사람은 후배들을 격려해 주기 위해 라커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자리를 뜬 후, 싸늘하고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그와 함께 몰려온 먹구름은 경기장 상공을 무겁게 뒤덮었다.

***

1. 실제로 야신은 잉글랜드 월드컵 1차전 북한전에 출전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출전한 골키퍼는 조지아 출신의 안조르 카바자슈빌리였는데, 이 선수도 당시 소련에서 올해의 골키퍼로 선정될 정도로 잘했습니다. 문제는 같은 시대에 야신이 있어서 빛을 못 봤죠.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고 할까요.

2. 잉글랜드 월드컵 당시 북한이 선전할 수 있었던 데는 미들즈브러 지역 주민들의 성원도 한몫했습니다.

당시 조직위는 북한이 적성국이라 꽤 냉대했지만, 주민들은 자신들의 지역 팀 미들즈브러 FC가 연상되어 열심히 응원해 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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