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69화 (369/400)

Round 369. 축구왕과 철강왕

1965년 8월 21일.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이 메르데카 컵에 출전하고 있을 즈음, 준영은 맨유 팀원들과 함께 새 시즌 개막전을 뛰고 있었다.

“망설이지 말고 때려! 슛!”

“아아, 빗나갔다!”

개막전 상대인 셰필드 웬즈데이.

지난 시즌 8위라는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던 그들은 라인을 내리고 방어에 치중했다.

간간이 역습 시도를 하기도 했지만, 준영과 던컨, 노비 스타일스는 미드필드 지역에서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상대 공격수들을 완전히 봉쇄했다.

「거의 반코트 상태로 경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제프 마이어 골키퍼는 오늘 경기 끝난 후에 샤워할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경기가 너무 맨유 쪽의 일방적인 공세로 진행된 탓일까.

파울이나 공이 라인 아웃되어 경기가 잠시 중단될 때마다 중계 카메라가 관중석을 비췄다.

빨리 맨유가 선제골을 터트리기를 기대하고 있는 홈팬들.

그중에 조지 베스트를 열성적으로 응원하는 소녀 팬들의 모습이 렌즈에 포착되었다.

“쯧쯧, 촬영 기사 녀석, 어디를 비추고 있는 거야?”

“아니, 좋지 않은가.”

레플리카에 미니스커트를 걸친 늘씬한 소녀들의 자태는 TV로 경기를 보는 팬들의 따분한 심정을 약간이나마 풀어 주었다.

그런데 카메라가 한눈팔고 있는 사이, 맨유 선수들이 재빨리 드로잉으로 경기를 전개해 갔다.

조지 코헨이 던진 공을 알렉스가 헤딩으로 돌려놓았고, 이것을 게르트 뮐러가 달려들며 골대 안에 밀어 넣은 것이다.

「골! 유나이티드의 시즌 첫 골은 뮐러의 발끝에서 터졌습니다!」

뒤늦게 카메라가 필드 쪽으로 방향을 돌렸지만, 잡힌 것은 낙담한 셰필드 웬즈데이 선수들과 골대 안에 구르고 있는 공뿐.

“뭐야, 어떻게 들어간 건데?”

“내 이럴 줄 알았지. 딴 데 한눈팔고 있더니만!”

“이래서 직관을 해야 한다니까. 한 자도 안 되는 바보상자를 우두커니 바라보는 걸로는 성이 안 찬다고!”

다행히 경기장에 있는 중계팀에서 다른 카메라가 찍은 영상을 편집해서 송출했다.

하지만 생생한 상황을 놓쳐 버린 팬들의 불만을 완전히 씻을 순 없었다.

“쩝, 비시즌 중에 경기장을 손봤다고 하던데, 왜 자꾸 객석이 야금야금 줄어드나 몰라.”

“입석을 자꾸 줄이니까 그렇지. 안정상 위험하다나 어떻다나.”

“하긴 사고가 없진 않았으니까…….”

올드 트래퍼드에서 벌어지진 않았지만, 작년에 몇몇 경기장에서 흥분한 관중들의 충돌과 경기장 난입 사건들이 있었다.

특히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벌어진 콥스의 난동은 뉴스에서도 대서특필될 정도였다.

당시 리버풀과 토트넘은 1위 맨유를 추격하면서 서로 다투고 있었다.

토트넘 홈에서 열린 경기에서 펠레가 거친 태클에 걸려 쓰러지자, 격분한 리버풀 팬 몇 명이 필드로 난입했다.

그들은 경기장 보안 요원들에게 바로 잡혔지만, 다소 거칠게 제압되는 광경을 본 콥스는 격분해서 뛰쳐나왔다.

그렇게 수백 명이 필드에서 날뛰고, 관중석에 남은 이들은 토트넘 팬들과 드잡이를 벌이기도 했다.

이 난동꾼들을 해산시키기 위해서 기마경찰까지 투입되었다.

중단된 경기가 재개된 것은 약 30분이 지난 후였다.

“듣자니 그때 난입한 주동자들이 모드족인데, 암페타민에 취해 있었다고 하더군.”

“쯧쯧, 캡틴 리 말이 맞아. 각성제 따위는 쓸데없…….”

잡담을 나누던 팬들은 맨유가 또 한 번 득점 찬스를 잡는 것을 보고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특유의 드리블로 셰필드 웬즈데이 측면을 허물어 버린 조지 베스트가 낮게 크로스를 띄워 보냈다.

셰필드 선수들은 데니스 로와 게르트 뮐러 쪽을 마크했지만, 정작 공을 잡은 건 귀신같이 쇄도해 들어온 이준영.

그가 때린 발리슛이 골망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그렇지! 역시 우리 주장이 한 건을 또 해 주는군!”

“진짜 캡틴 리 없는 유나이티드는 상상할 수가 없어.”

“스탠리 매튜스만큼 오래오래 뛰어 줬으면…….”

전설이 된 사나이가 신화의 영웅이 되기를.

그리 소망하는 팬들은 계속 성원하며 경기를 지켜보았다.

***

개막전을 2 대 0으로 승리한 맨유는 21일 노팅엄 포레스트 원정에서도 우세한 경기력을 보였다.

「던컨이 껑충 뛰어올라 노팅엄의 패스를 끊어 냅니다. 떨어진 공을 캡틴 리가 확보, 바비 찰튼에게 패스, 곧바로 조지 베스트 쪽으로 흘러갑니다! 노팅엄, 위기!」

바비 찰튼의 논스톱 패스를 받은 조지 베스트는 뛰쳐나온 수비수를 가볍게 제치고 슛, 노팅엄의 골대를 흔들었다.

“꺄아아악! 조지, 사랑해!”

“My Best! My Hero!”

준영이 ‘Pasony’라 부르는 조지의 극성팬들은 오늘 경기에도 따라와서 환호성을 터트렸다.

「전반 13분 만에 유나이티드가 리드를 잡습니다. 초반부터 난관에 봉착했지만, 아직 노팅엄에겐 적잖은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중계 캐스터처럼 생각했던지, 노팅엄 선수들은 실점 이후 적극적으로 공세를 시도했다.

상대가 챔피언이고 뭐고 홈에서 패할 순 없었으니까.

이에 유나이티드 진영으로 여러 차례 위협적인 돌파와 패스들이 들어왔다.

하지만 준영과 던컨 하프백 콤비, 그리고 윌슨, 맥닐, 베켄바워, 코헨 4백이 침착하게 상대의 공격을 막아 냈다.

경기를 관람하는 잉글랜드 축구인들은 탄탄한 수비를 보며 연방 감탄했다.

“던컨은 지난 경기에서도 하프백으로 뛰더니, 오늘도 그렇군.”

“뭐, 어디에 박아 놔도 잘 뛰는 녀석이니까요.”

“풀백에서 조지 코헨의 기량도 상당하니…….”

하지만 던컨의 하프백 기용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11월에 준영이 월드컵 예선 때문에 대표팀에 차출되기에 버스비 감독이 미리 대비하는 것이다.

‘굳이 차출 때문이 아니라도 부상이라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는 거니까…….’

그 예상치 못한 상황이 후반전에 일어났다.

전진해 온 준영의 패스를 받은 데니스 로가 수비수의 백태클을 맞고 쓰러진 것이다.

“괜찮냐, 데니?”

“큭, 뭐 심각한 것 같진 않네요.”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지만 불편한 기색은 역력했다.

혹시나 억지로 뛰다 부상이 커질까 우려한 준영은 곧장 감독에게 사인을 보냈다.

“데니가 뛰기 힘든 모양인데?”

“그럼 바꾸죠.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교체 카드를 활용하겠습니까.”

머피 코치는 곧장 후보 공격수인 존 애스턴 주니어에게 출전 준비를 시켰다.

“존의 말대로 교체 규정은 진작 있었어야 했는데…….”

올 시즌 리그에 새로운 교체 규정이 도입되었다.

지금까지는 골키퍼만 부상당했을 때 교체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필드 플레이어의 부상에도 교체가 가능해졌다.

해마다 악질적인 반칙과 이로 인한 부상자들이 늘면서 대책을 마련하라는 요구가 빗발쳤기 때문.

‘근데 달랑 한 명이 뭐야. 기왕이면 3~4명쯤 바꾸게 해 줄 것이지.’

준영도 이와 관련해 언론 등에서 여러 번 아쉬움을 나타낸 적이 있었다.

굳이 부상이 아니더라도 친선전을 치를 때처럼 자유롭게 여러 선수를 교체하면 전술이나 흐름을 바꾸면서 더 재미있는 경기를 할 수 있을 거라고.

더구나 선수 혹사도 막고, 선발에서 제외된 후보 선수들도 뛸 기회를 얻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 할 만했다.

「유나이티드 쪽에서 존 애스턴 주니어를 투입합니다. 데니스 로는 더 이상 뛸 수 없는 모양인데요. 이게 노팅엄에게 기회가 될까요?」

노팅엄도 그리 보았던지 적극적으로 라인을 올렸다.

하지만 후보 공격수를 얕본 대가는 컸다.

영리하게 노팅엄 수비진의 오프사이드 라인을 뚫어 낸 존 애스턴이 골키퍼와의 일대일 찬스를 놓치지 않고 득점에 성공한 것.

한참 공세에 열을 올리던 과정에서 맞은 카운터펀치의 충격은 상당했다.

마치 K.O를 당한 것처럼 노팅엄은 추격의 의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

맨유는 노팅엄 원정에 이어, 3차전 노스햄튼 타운 원정 경기에서도 무난한 승리를 거두었다.

라이벌인 리버풀 FC도 질 수 없다는 듯 3연승을 거두며 공동 1위로 올라섰다.

그 소식을 접한 준영은 가늘게 웃음을 지었다.

“이번 시즌도 올레드 놈들과 신나게 치고받겠군. 리그와 FA컵뿐만 아니라 유러피언 컵에서도…….”

리버풀은 지난 시즌 유러피언 컵에서 우승했다.

1963-64시즌 챔피언 인터밀란을 준결승에서 물리친 후, 밀라노 산시로에서 열린 결승에서도 벤피카를 1 대 0으로 격파한 것.

10골을 넣은 펠레는 벤피카의 주제 아우구스투를 따돌리고 득점왕에 올랐다.

자랑스럽게 개선한 섕클리 감독은 환영하는 군중들에게 양팔을 좍 펼치며 답례를 보냈다.

‘21세기에 동상으로 봤던 포즈랑 똑같았지. 그건 그렇고, 벤피카는 앞으로 어떻게 되려나…….’

실제 역사에선 두 차례 우승을 거두었던 명장 벨라 구트만.

역사가 달라져서 그런지 몰라도, 그는 자신의 급료를 인상해 달라는 요구 대신 선수들의 급료를 올려 줄 것을 부탁했다.

그래야 팀의 사기가 진작되고 우승의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

하지만 구단 프런트의 반응은 냉담했고, 구트만은 분통을 터트리며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벤피카는 앞으로 100년은 유럽 대회에서 우승을 거두지 못할 것이다!’

과연 달라진 역사에선 벤피카가 이 구트만의 저주를 타개할 수 있을까.

리버풀을 상대로 콩라인에 그친 점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요원해 보였다.

더구나 간판 공격수가 되어야 할 에우제비우마저도 토트넘에 눌러앉아 버린 상태가 아닌가.

“작은 나리, 한 시간 후에 Mr. Park이 찾아올 거라고 연락을 보내왔습니다.”

“그래요?”

고용인의 보고에 준영은 바로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잠시 후, 프레드로 저택에 정장을 걸친 한국인 사내가 차를 몰고 나타났다.

넓은 이마에 숯덩이처럼 짙은 눈썹을 가진 사내에게 준영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태준 형님.”

“잘 지냈나? 딸아이는 잘 크고 있고?”

“하하하, 너무 건강해서 애를 먹고 있죠. 얼마나 장난꾸러기인지…….”

준영을 찾아온 사람은 박태준.

군인으로 박정희의 부관을 지냈던 그는 영국에서 대한중석 중개인으로 활동하는 한편 경영학과 토목 건설, 제철 산업과 관련된 공부를 하고 있었다.

훗날의 포철 회장, 거기다 포항 스틸러스의 창단주로 한국 축구계에 적잖은 기여를 한 사람이다 보니 준영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를 친근하게 대했다.

이런 호의에 태준도 기뻐하며 준영과 형제처럼 지내고 있었다.

“듣자니 얼마 전에 제철소 설비를 구입하셨다면서요?”

“응, 부도난 중소 업체 소유였는데, 건설부 쪽에서 의뢰를 받았지.”

매입한 고로와 기자재는 분해해서 한국에서 재조립하고 기술자들도 고용해서 보낼 거라고.

현재 한국에는 삼척에 월 3,000여 톤을 생산하는 제철소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이 세운 설비였는데, 생산량도 적고 설비 자체도 구닥다리에 많이 낡은 상태라고.

“국내에서 이리저리 재건 사업을 하고, 공장과 주택도 새로 짓고 있는데 철강 공급이 부족한 실정이라서 말이지.”

“확실히 도움이 되겠군요.”

“일단 급한 불만 끄는 거지. 중소 업체 시설 수준으론 어림도 없어. 대형 종합 제철소 정도로 마련하지 않으면…….”

미래에 지을 거대 제철소를 머릿속에 그리던 박태준.

그는 잊은 것이 있다는 듯, 준영에게 신문 하나를 건넸다.

“아 참, 이걸 동생에게 보여 주려고 했는데.”

“어떤 건데요?”

태준에게 받은 신문을 본 준영은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충분히 기뻐할 만한 소식이 실려 있었으므로.

***

존 애스턴 Jr.는 맨유와 루턴 타운 등에서 활약한 공격수입니다.

맨유의 1967-68 유러피언 컵 우승에 공헌했으며, 벤피카와의 결승전에서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죠.

그의 아버지인 존 애스턴 시니어도 맨유에서 선수로 뛴 적이 있고, 1950년 브라질 월드컵 대표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부자가 같은 클럽에서 활약한 흔치 않은 케이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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