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340화 (340/400)

Round 340. 가장 뜻깊은 순간

7월 중순.

밝은 햇살이 비추는 가운데, 깔끔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맨체스터 대학 캠퍼스로 찾아갔다.

오늘 몇몇 학과에서 졸업식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오빠가 없어!”

가족들과 함께 리즈의 졸업식을 보러 온 카린은 초조한 마음에 연방 같은 자리를 왔다 갔다 했다.

“분명히 온다고 그랬는데! 미리 와 있겠다고 했는데!”

“비행기가 연착한 걸까?”

앤지와 알버트도 초조하게 여기던 그때, 대학 정문 앞에 택시 한 대가 섰다.

택시에서 내리는 사람을 본 카린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와, 오빠다!”

커다란 꽃다발을 든 준영은 프레드로 일가 앞으로 다가왔다.

“늦었구만.”

“죄송해요. 뭐 때문인지 공항 검색이 지체되어서…….”

구단 전용기를 타고 왔으면 덜했을 텐데, 혼자 먼저 귀국하느라 일반 여객기를 타면서 빚어진 결과였다.

다행히 너무 늦지는 않았다.

“얼른 가세. 졸업식이 시작되고 있을 테니까.”

“예… 아차, 무비 카메라!”

“걱정 마, 오빠. 내가 챙겨 왔어.”

카린이 8밀리미터 무비 카메라를 꺼내 보이자, 준영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마터면 중요한 순간을 남기지 못한 채 지나칠 뻔했으니까.

강당으로 이동한 준영 일행은 제법 거창하게 진행되는 졸업식을 구경했다.

“다 똑같은 옷을 입고 있으니까 언니를 찾을 수가 없어.”

“난 찾았지. 저기 있는걸.”

준영이 가리킨 자리에 정말 리즈가 있었다.

리즈도 알아봤던지 가족들 쪽으로 눈을 돌리며 손을 흔들었다.

“오늘부터 여러분의 앞으로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습니다. 험난할 수도, 흥미로울 수도 있는 인생을 살게 되겠지요. 그것을 선택하는 건 바로…….”

컴퓨터 개발과 연구를 하고 있다는 톰 킬번이라는 학자의 축사는 상당히 길었다.

알버트는 그러려니 하는 모양이지만, 카린과 앤지는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준영도 터져 나오는 하품을 참으려 애썼다.

“실패해도 체념하지 말고 다음을 믿고 일어서십시오. 포기하지 않고 나아간 길 끝에는 분명히 여러분이 꿈꾸던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이상입니다.”

꿈은 이루어진다.

이렇게 요약할 수 있는 축사가 끝나자 장내에 있는 졸업생과 학부모, 가족과 친지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들었던 준영도 자리에서 일어나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

축사 이후, 리즈가 졸업생 대표로 단상으로 나와 학위를 수여받았다.

가족들은 뿌듯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고, 준영은 이 장면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무비 카메라에 담았다.

“언니가 공부 잘한 건 알았지만, 대표까지 맡을 줄은 몰랐어.”

“안 맡는 게 이상하지. 런던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러브콜이 날아드는 인재인걸.”

리즈는 벤처 기업 넥스트의 창립자로, 혁신적인 프로그래밍 언어 BASE의 개발을 주도했다.

그렇다 보니 IBM에서 사람이 찾아와 미국행을 제의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리즈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대신 협력 관계를 맺었다.

준영이나 가족들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준비는 다 해 놨으려나?”

전지훈련 가기 전에 미리 준비해 둔 일이 있었다.

슬슬 시작할 때가 되었기에 준영이 궁금해할 때, 차지철이 다가왔다.

“어떻게 됐어?”

“오는 중이래. 근데 바람이 좋지 않아서 시간을 잘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군.”

이미 준영의 계획을 알고 있던 차지철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근데 너무 거창한 거 아닌가?”

“인생에서 가장 뜻깊은 순간이잖아. 기왕이면 거창하게 하고 싶어.”

힐끔 시계를 본 준영은 가족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위 수여가 끝나고 졸업식도 마무리되고 있으니 이제 슬슬 시작할 때가 되었다.

“졸업 축하해요, 선배.”

“흐아앙, 선배, 가지 마세요!”

“울지 마, 바보야. 영영 못 볼 것도 아니잖아.”

후배들에게 축하받으며 석별의 정을 나누고 있던 리즈에게 가족들이 찾아왔다.

“고생 많았다. 정말 대견스럽구나.”

“축하해, 언니.”

“큰언니 정말 멋져!”

“다들 고마워요.”

가족들의 축하에 미소 짓는 리즈의 앞으로 준영이 다가왔다.

“우리 아가씨의 입학식을 봤을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졸업이라니…….”

“아쉬워요?”

“아쉽지. 이제 여대생이랑 데이트할 일이 없어졌잖아.”

“후후후, 엉큼해요.”

“더 엉큼한 일도 꾸미고 있는걸. 그나저나 올 때가 되었는데…….”

“네? 오다뇨?”

리즈가 고개를 갸웃할 때, 갑자기 하늘에서 요란한 선풍기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니, 저게 뭐야?”

“비행선?”

“졸업 축하 이벤트인가?”

길쭉한 기낭을 가진 비행선.

분홍색 바탕으로 칠해진 선체에는 ‘How wonderful life is, you’re in the world.’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그대가 있어 세상은 아름다워라.”

준영이 비행선에 적힌 문구를 말한 순간, 비행선에서 떨어트린 꽃잎이 눈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준영은 연인의 앞에 정중히 무릎을 굽히고 그녀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사랑하는 여왕님, 당신 덕에 이 낯선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어요. 항상 지탱해 줘서 고마워요. 앞으로 내 심장이 멈출 때까지 함께해 주세요.”

리즈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졸업식 날 준영이 청혼하지 않을까 기대하긴 했지만, 이렇게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벤트는 정말 예상 밖이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거절할 마음은 전혀 없었던 그녀는 준영이 건넨 꽃다발을 받아 들고 미소 지었다.

“나에게 너무나 특별한 기사님, 제게 미래를 열어 줘서 감사해요. 앞으로도 항상 당신의 손을 놓지 않을게요.”

기대했던 답신이 나온 순간, 준영은 리즈를 안고 키스를 나누었다.

주변에서 아낌없이 쏟아지는 환호와 박수.

지인들이 터트리는 폭죽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가장 뜻깊은 순간.

두 사람의 인생에 영원히 기억될 아름다운 시간이 무비 카메라에 차곡차곡 찍혔다.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

쇠뿔도 단숨에 빼라는 속담이 있다.

청혼까지 했으니 미룰 생각이 조금도 없었던 준영은 팀원들이 영국으로 돌아오는 때에 맞춰 결혼식 날짜를 잡았다.

“캡틴 리가 결혼한다고?”

“비시즌에 눈에 띌 만한 특종이군.”

“어이, 당장 모즐리로 가 봐!”

결혼식 당일.

소식을 듣고 모즐리의 성당을 찾은 기자들은 하객들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들은 물론, 유명인들이 잔뜩 와 있었으니까.

“와, 스탠리 매튜스잖아!”

“버트 트라우트만에 톰 피니, 빌리 라이트도 있군.”

“월터 윈터보텀 감독에… 축구협회 회장인 글로스터 공작도 왔군!”

데이비드 브라운이나 조셉 포스터 등, 축구와는 그리 관련이 없는 이들도 많았다.

마거릿 대처, 처칠 전 총리 같은 전현직 정치가들도 찾아와 준영을 축하해 주고 피로연을 즐기는 것을 보고 기자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축하한다, 존. 앞으로 행복하게 잘 살거라.”

“감사합니다, 섕클리 감독님.”

“고마운 줄 알면 우리 팀 좀 그만 괴롭히고.”

빌 섕클리 감독의 항의(?)에 준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섕클리 감독과 함께 온 펠레를 보게 되었다.

“너도 축하하러 와 준 거냐?”

“참 나, 그럼 저주라도 하러 온 줄 알았어?”

펠레는 축하 선물까지 들고 왔다.

캐러멜과 커스터드로 만든 베마카사도스라는 브라질의 과자였다.

“우리나라의 결혼 선물이지. 과자처럼 달콤한 결혼 생활을 하기를 빌어 주며 만드는 거야.”

“고마워. 잘 먹을게.”

“댁이 먹는 건 아니야. 이건 하객들에게 나눠 주는 거라고.”

“하, 이 자식, 뒤끝은…….”

준영과 리즈는 연회장을 돌아다니며 하객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특히 멀리서 온 손님들에겐 더욱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형님, 정말 축하드려요!”

“그래, 고맙다, 필립아. 아저씨는 건강하시지?”

“예, 아버지가 무척 아쉬워하셨어요. 대신 축하한다고 전해 달래요.”

이억관은 법적으론 수감 중인 죄수.

MI6의 도움으로 빼돌려져 한국으로 떠난 그는 영국에 들어올 수 없었다.

그래서 필립이만 준영의 친척들과 함께 보냈다.

“이건 낙선재의 황후마마께서 너희 부부에게 전해 달라고 건네신 선물이다.”

종숙, 아니 증조부 이 씨가 나무를 깎아 만든 원앙 인형을 건넸다.

그는 따로 리즈에게 족두리와 한복을 선물해 주기도 했다.

안사람이 직접 한 땀, 한 땀 바느질해서 만든 거라고.

“와, 정말 예뻐요!”

기뻐하는 리즈를 보며 이 씨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모두가 축하하며 피로연을 즐기고 있을 때, 흥겨운 음악이 들려왔다.

앤지가 치는 피아노에 맞춰 비틀즈 멤버들이 연주를 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

“Desmond has a barrow in the market place~ Molly is the singer in a band~”

흥겨운 음악에 다들 박수 치며 어깨를 들썩였다.

폴 매카트니가 부르는 낯익은 노래에 준영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리즈의 손을 잡았다.

자신에게 정말 낯설었던 시대.

하지만 소중한 사람을 만나서 여기까지 왔다.

노래 가사처럼 인생은 앞으로도 계속 흘러갈 것이다.

***

결혼식 피로연이 끝난 후, 준영과 리즈는 모두의 배웅을 받으며 지중해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나폴리와 아테네, 이스탄불을 여행하며 여러 관광지와 문화재, 유적들을 구경했다.

그리고 일주일의 신혼여행을 만끽한 후, 맨체스터로 돌아왔다.

“주장, 어서 와요… 헉!”

클럽 하우스로 온 준영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던 알렉스 퍼거슨은 화들짝 놀랐다.

다른 팀원들도 놀란 건 마찬가지.

“얼굴이 반쪽이 됐잖아.”

“꼭 공사판에서 혹사당하고 온 것 같네요.”

“혹사라면 혹사지.”

“아이고, 주장, 어쩌다가…….”

뜻밖의 심각한(?) 상황에 팀원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억지로 웃음을 참으려니, 압박이 들어간 안면 근육이 눈물샘을 자극했던 것.

“존, 고생이 많았구나.”

던컨의 말에 준영은 옅은 웃음을 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우리 여왕님을 잘 모실 걸 그랬다 싶더군.”

그동안은 알버트의 당부도 있었고, 경기도 해야 하기에 되도록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엉뚱하게 힘을 뺐다간 정작 경기에서 힘을 쓰지 못하게 되니까.

그래서 사랑을 나눈다고 해도 항상 지나치진 않는 수준이었다.

이렇다 보니 준영도 아쉬움이 있었고, 리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신혼여행에서 제대로 터진 거구만.”

“훗, 그래도 행복했다.”

“쓸데없이 하얗게 불태운 표정 짓지 마. 리그 개막도 얼마 안 남았는데…….”

이번 시즌은 전반기부터 만만찮은 팀들과 일정이 있었다.

8월 말에 첼시와 2연전, 9월 초에는 지난 시즌 우승 팀 토트넘과 맞붙는다.

“올 시즌은 반드시 리그 우승을 해야 해. 그래야 녹슨 챔피언 소리를 듣지 않는다고.”

“그래, 무시하게 둘 순 없지.”

서둘러 컨디션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시즌 다시 한번 챔피언으로 호령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월드컵으로 가는 길도 열어야지!’

월드컵 플레이오프 상대는 결국 유고슬라비아로 확정되었다.

현재 한국의 전력으로는 버겁기 짝이 없는 그들.

난적을 누르고 월드컵에 가기 위해서는 더욱 분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현역 시절에 우리에게 호쾌한 모습을 많이 보여 줬던 김남일 현 성남 감독이 뜻밖의 고난(…)을 당하고 돌아왔을 당시의 사진입니다.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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