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93. 앙숙의 부름
FA의 연락을 받은 준영은 다음 날 약속 시간에 맞춰 웸블리에 도착했다.
그를 맞은 것은 스탠리 루스였다.
“정확히 왔군. 얼마나 늦을까 재 보려고 했더니.”
“무슨 일로 절 부르신 겁니까?”
어지간하면 마주치지 않기로 한 두 사람.
하지만 지난번에는 도핑 금지 규정 제정을 위해 준영이 먼저 그를 찾아갔었다.
그리고 루스도 예상보다 순순히 수락해 줬었고.
하지만 이번엔 루스 쪽에서 먼저 불렀고, 무슨 일 때문인지 짐작을 할 수 없었다.
“FA컵 때 좀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
“그랬죠. 하지만 그 문제는 다 끝난 거 아닙니까?”
일부 일본인들이 준영에게 도핑 혐의를 덮어씌우려 했던 사건.
주동자인 가와부치 사부로는 축구계에서 영구 제명되어 일본으로 추방되었다.
그리고 그의 도핑을 사전에 파악하지 못했던 소속 팀 블랙번은 승점 10점 삭감을 당하며 강등 조치를 받았다.
“궁금증이 약간 생겨서 말이야. 그 일본 녀석이 쓴 스테로이드는 최근에 임상 실험을 진행 중이라고 하더군. 근데 너는 그 유해성을 잘 알고 나에게 정보를 줬지. 의사들보다 더 정확하게 말이야.”
그거야 미래에서 왔으니 알고 있을 수밖에.
물론 그리 대답할 수 없었던 준영은 의심의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루스에게 피식 웃음을 지었다.
“스테로이드는 철의 장벽 너머에서는 먼저 사용하고 있습니다. 동구권은 영국 의학계에서 파악하고 있는 것보다 많은 사실을 알고 있죠.”
“동구권의 정보를 네 녀석이 무슨 수로 알고 있지?”
“그건 말씀드리기 힘들군요. 대영제국의 국가 기밀입니다.”
뻔뻔한 준영의 대꾸에 루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이런저런 인맥을 통해서 준영에 대해 더 파 보기는 했지만, 그 뒷조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녀석이 국가 기관, 그것도 아주 비밀스러운 부서와 연을 맺고 있었음을 파악했기 때문.
‘여왕 폐하께서 이 녀석을 주목하고 있는 게 축구 실력 때문만은 아닐지도…….’
자세한 건 모르지만, 녀석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
종종 외국으로 나가거나, 멀리 한국으로 간 것도 그런 정보 수집의 목적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리 생각하고 있던 루스에게 준영이 다시 말을 건넸다.
“겨우 그걸 묻고자 해서 절 런던까지 부른 건 아니시죠?”
“그래, 다른 일도 있다. 듣자니 네 녀석이 지미 힐 그 녀석을 지지한다면서?”
‘지미 힐이라면…….’
풀럼 소속의 공격수 지미 힐.
현재 프로축구선수협회 회장을 맡은 인물로, 지난번에 자신을 찾아온 일도 있었다.
아무래도 그와 관련된 문제가 자신을 런던으로 부른 주된 이유 같아 보였다.
***
“PFA 회장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맞습니다. 그게 크게 잘못된 겁니까?”
준영의 물음에 루스는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녀석은 임금 상한제를 없애려고 하고 있어. 설마 그걸 알고 놈을 지지하는 거냐?”
“물론입니다. 그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준영이 너무 태연스럽게 대꾸하자 루스는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조금은 주저하지 않을까 생각했건만!
“멍청한 녀석! 그걸 잘못 건드리다간 풋볼 리그 전 구단을 적으로 돌릴 수 있어! 네놈이 몸담은 유나이티드도 예외는 아닐걸!”
임금 상한제가 폐지되면 선수들 몸값은 폭등.
그럼 당장 구단의 부담이 커질 텐데, 어떤 팀이 그런 걸 좋아한단 말인가.
더구나 임금 형평성 문제로 노동청에서도 지적하고 나설 것이다.
“물론 반대하는 이들이 많을 겁니다. 풋볼 리그 출범 때부터 있었던 제도니까요. 하지만 그건 이제 사라져야 합니다.”
어떤 분야든 자신의 실력에 비해 형편없는 대우를 받으면 떠나고 싶은 게 인지상정.
실제 그렇게 영국을 떠난 선수들이 꽤 많다.
멋대로 팀을 이탈해서 다른 나라에서 불법 계약을 맺은 사례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과거 맨유의 스타플레이어였던 찰리 미튼이다.
“다음 시즌부터는 풋볼 리그가 TV 생중계를 한다죠? 더 많은 국민들이 축구를 접하게 될 텐데, 뛰어난 기량을 가진 선수들이 점점 떠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보지 않게 되겠지.”
“네. 시청률이 떨어지고 광고를 통한 수익도, 축구에 대한 인지도도 하락하겠죠.”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 하지만 당장 폐지하게 되면… 힘들어할 구단들이 많아.”
자칫하면 운영난으로 도산하는 팀들이 나타날 수 있다.
실제 21세기 중국 슈퍼리그처럼 천문학적인 선수 연봉을 지급하다 운영이 부실해져 팀이 사라지는 사례도 있다.
하지만 준영은 현재 풋볼 리그가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보았다.
아니, 이참에 망할 팀은 망하는 게 맞는다고 여겼다.
“힘든 이유가 뭘까요? 임원들이 경기장 인프라나 선수 급료를 신경 쓰지 않고 자신들 배불리는 데 쓰기 때문 아닙니까?”
“그건…….”
“뉴캐슬을 비롯해서 몇몇 구단들의 실상이 언론에도 나타난 걸로 압니다.”
준영의 팩트 폭력에 루스는 반박할 수 없었다.
선수들이 고물 버스를 타고 다니고 허름한 숙소에서 새우잠을 청하는 사이, 임원들은 새 차를 타고 다니고 고급 호텔에 묵는 일이 실제로 있었으니까.
언론에 나올 정도면 안 보이는 곳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뻔했다.
“그런 팀에 머물고 싶어 하는 선수는 없죠. 하지만 영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이적할 권리를 선수 본인이 오롯이 갖고 있지 못한 게 현실입니다.”
심지어 계약 기간이 끝나도 팀에서 허락하지 않으면 이적이 불가능하다.
이런 축구계 전반의 문제들을 준영이 조목조목 지적하자, 루스도 반박하지 못한 채 깊은 침묵을 지켰다.
“예전에는 이런 문제들이 불거지지 않았는데…….”
“예전에는 월드컵도 없었고, 있어도 인지도도 낮았죠. 하지만 지금은 축구 하는 나라도 많고, 세계적인 관심도 증가했습니다.”
앞으로 그 규모는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언제까지 예전 방식을 고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갑자기 한꺼번에 바꾸는 건 힘들어.”
“저도 모든 걸 한꺼번에 바꾸자고 하는 건 아닙니다. 하나씩 개선해 나가는 게 중요하죠.”
“그러니까 임금 상한제를 폐지하라?”
“네. 당장은 아니지만, 구단이 준비할 시간을 주고 폐지하면 될 겁니다. 어쩌면 우려했던 것보다 문제는 안 될지 모르죠.”
폐지한다고 갑자기 선수 급료가 10배, 20배로 오르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현재도 팀 내 주전과 에이스들에게 이런저런 명목으로 보너스를 지급해 주고 있다 보니 임금 상한제라는 게 무색하기도 했다.
“알았다. 그 문제는 그만 얘기하기로 하고……. 한 가지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만?”
“말씀하십시오.”
잠시 머뭇거리던 루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은 더 이상 잉글랜드 대표팀에 생각이 없는 거냐? 월터 녀석은 널 뽑지 못해 계속 아쉬워하는 형편이다만.”
현재 잉글랜드 대표팀의 성적은 썩 좋지 않았다.
작년 이맘때 망신살이 제대로 뻗쳤던 아메리카 투어 이후, 8월 웸블리에서 스웨덴과 친선전을 했지만 2 대 3으로 패했다.
거기다 브리티시 챔피언십에서도 북아일랜드에 2 대 1 신승을 거뒀을 뿐,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와는 무승부를 거뒀다.
올해 5월은 더 상황이 나빠졌다.
웸블리에서 유고슬라비아와 3 대 3으로 비겼고, 스페인과 헝가리 원정 친선전에서는 0 대 3, 0 대 2 완패를 당했다.
월드컵 이후 세대교체와 체질 개선 중이라 하지만, 성적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니 대표팀에 대한 팬들의 눈길이 고울 리 없었다.
아니, 그 세대교체와 체질 개선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지적받고 있었다.
“윈터보텀 감독님에게 듣기로 저를 선발하는 것에 대해 기술위원회가 탐탁지 않아 한다던데요?”
“그건 사실이다.”
“총무님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요.”
“그래, 난 네놈이 싫다. 하지만 집구석이 무너지고 있으면 뭐라도 해야 하는 입장이라서 말이야.”
루스조차도 지금의 기술위원회의 행태는 아니라고 보고 있는 걸까.
이 사람도 조금은 달라지고 있긴 하구나 싶은 생각에 준영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지금 성적이 좋지 않더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잉글랜드엔 저 못지않은 좋은 선수들이 많으니까요.”
웨스트햄의 바비 무어나 리즈 유나이티드의 잭 찰튼은 매우 뛰어난 기량을 가진 수비수들이다.
거기다 준영과 한솥밥을 먹고 있는 바비 찰튼과 던컨 에드워즈도 말할 필요도 없는 걸출한 수준.
이들이 앞으로 잉글랜드 축구를 잘 짊어지고 나갈 것이다.
“그래서 잉글랜드 대표팀은 생각이 없다는 건가?”
“지난 월드컵 우승으로 제가 할 도리는 충분히 했다고 생각하니까요.”
이미 정상에 한 번 올랐으니, 이제는 새로운 도전을 해 볼 계획이었다.
이런 준영의 의사에 루스는 맘에 안 든다는 듯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멍청한 결정을 하는군.”
“누려 본 자만이 할 수 있는 멍청한 결정이지요. 이야기도 끝난 것 같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준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루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곤 떠났다.
그가 사라질 때까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루스.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그는 잠시 투덜거리다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놈 같으니…….”
떠나는 녀석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본인도 알 수 없었다.
***
인터콘티넨털 컵을 준비하는 맨유 구단은 남미 쪽에서 들어오는 정보에 귀를 기울였다.
“저쪽은 아직 우승 팀이 결정 나지 않았다고?”
맷 버스비의 물음에 전력 분석팀을 총괄하고 있던 로저 바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준결승 경기도 치르지 않은 팀들이 있더군요.”
“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일정은 우리 쪽하곤 다른 모양이군그래.”
“저쪽에는 남미 클럽 대항전이 이번이 처음이라니까요.”
과거에도 있었지만, 대개 친선전 수준으로 치러지거나 교통이나 각국의 정치적인 문제로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래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라는 정식 대회로 출범한 건 이번이 처음.
초대 대회 준결승에 오른 팀은 우루과이 챔피언 CA 페냐롤, 아르헨티나의 산 로렌조, 파라과이의 클럽 올림피아, 그리고 콜롬비아의 미요나리오스 FC였다.
“미요나리오스라면 디 스테파노가 임대로 뛰었다는 팀이지?”
“예. 준결승 상대는 올림피아인데, 아직 1, 2차전 모두 치르지 않았습니다.”
그에 반해 페냐롤과 산 로렌조는 경기를 마쳤지만, 두 경기 모두 무승부라 칠레에서 재경기를 치러야 했다.
그런데 대회 중에 칠레에서 엄청난 대지진이 일어나는 바람에 장소를 이전하게 되었다고.
“그래서 파라과이 아순시온을 중립 경기장으로 정했는데, 페냐롤 쪽에서 반대했다고 합니다. 아르헨티나와 가까운 도시라서 중립적이지 않다고 말이죠.”
“거참, 첫 대회라 그런지 참 어수선하구만.”
“아무튼 이 페냐롤의 전력이 굉장하더군요. 우루과이에서 최고 플레이어로 손꼽히는 페드로 로차가 뛰고 있고, 쿠비야라는 윙어와 하프백 곤살베스의 기량도 대단하다는군요.”
하지만 이들보다 더 주목해야 할 선수는 따로 있었다.
바로 에콰도르 출신의 공격수 알베르토 스펜서였다.
***
알베르토 페드로 스펜서 헤레라는 당시 모든 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가진 공격수였습니다.
수비를 찢어발긴다고 할 정도로 굉장한 결정력을 갖고 있었다고 하는데, 특히 헤딩에 뛰어나서 ‘마법의 머리’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에콰도르와 우루과이 국가대표 모두 뛰었고, 우루과이리그 득점왕 네 번,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득점왕 두 번에 역대 최다 득점자(54골)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당시 남미에서 펠레와 대적할 수 있는 라이벌로 여겨질 정도의 선수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