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92화 (292/400)

Round 292. 빨리빨리

맨체스터 시내는 축제 때처럼 떠들썩했다.

글래스고에서 맨유가 우승컵을 들고 당당히 귀환했기 때문.

도로에 새까맣게 모여 카퍼레이드를 구경했던 맨체스터 시민들은 말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꼈다.

“파산해도 좋아. 오늘 맥주는 내가 다 쏜다!”

“와하핫! 챔피언 유나이티드를 위해 건배!”

“야 인마, 넌 맨시티 팬이라며?”

“오늘부터 나도 붉은 악마의 12번째 전사가 될 거다!”

이 승리의 기쁨을 마음껏 즐기자!

올드 트래퍼드에서 열린 우승 축하 행사에 참여했던 맨유 팬들은 레플리카를 걸친 상태로 시내 곳곳의 클럽과 펍에서 뒤풀이를 즐겼다.

자리 잡고 맥주잔을 높이 들고 응원가를 불러 댔다.

“거치른 벌판으로∼ 달려가자!”

“사랑스런 젊은 그대!”

우승의 열기는 그 후 일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흥겨운 시민들과 달리 선수들은 의외로 빠르게 우승의 열기에서 빠져나왔다.

7월에 있을 인터콘티넨털 컵 때문만은 아니었다.

“리그 컵? 그거 정말 내년부터 하는 겁니까?”

“그런 모양이래.”

사실 시즌 내 대회가 하나 더 생길 거라는 소문은 예전부터 돌고 있었다.

과거보다 프로 축구의 규모도 커졌는데, 우승컵을 딸 기회는 리그 우승과 FA컵 우승밖에 없었으므로.

물론 유러피언 컵도 있지만, 이건 리즈 챔피언이나 경험할 수 있는 무대였다.

그래서 우승을 노릴 또 다른 기회로서 리그 컵 대회를 1960-61 시즌부터 치를 거라고.

“일정이 빡빡한데 리그 컵까지 뛰어야 한다니……. 우승 상금이 얼마죠?”

클러프의 물음에 머피 코치는 그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냉큼 대답했다.

“우승 팀은 10만 파운드, 준우승 팀은 5만 파운드를 받지.”

“와, 너무 적잖아요!”

“왜 나한테 그래? FA에서 정한 건데.”

FA컵 우승 상금 200만 파운드에 비하면 리그 컵 상금은 너무 적었다.

주전급 선수들이 흥미를 잃게 되는 건 당연했다.

“진짜 경기 못 나오는 선수들, 우승 못하는 팀에게 기회가 되는 대회겠군.”

“남 얘기하듯이 말하지 말라고. 본인이 그 대회에 뛸 수 있으니까.”

“뭐, 인마? 확 그냥…….”

머피 코치는 시끄럽게 떠드는 선수들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아무튼 다음 시즌은 더 힘들고 바쁠 거야. 듣자니 런던 쪽 클럽들이 이 악물고 전력을 강화할 거라는 소문이야.”

1954-55 시즌 첼시가 우승한 이후로, 런던 클럽들은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FA컵은 더욱 심해서 근 10년간 우승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음 시즌은 반드시 우승을 하겠다며 선수 영입뿐만 아니라 벌써 훈련까지 진행하는 팀도 있다고.

“설마 휴가 안 주는 건 아니겠죠?”

“내가 엘레니오 에레라 같은 인간인 줄 아냐? 지나치게 무리해서 좋을 건 없지. 쉴 땐 쉬어야지.”

다만 머피 코치는 언제나처럼 경고를 해 뒀다.

재소집했을 때 몸이 퍼진 녀석은 각오하라면서.

그렇게 통보가 끝난 후, 선수들이 흩어졌다.

남아 있던 준영은 머피 코치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코치님, 지난번처럼 더 클리프를 빌릴 수 있겠습니까?”

“왜? 네 조국 대표팀이 또 훈련하러 오는 거야?”

“예, 이번에 로마 올림픽 본선 진출을 확정 지었거든요.”

자유중국이 끝내 서울 원정을 포기하면서 실격패를 당했고, 이미 1차전에 승리했던 한국이 본선 티켓을 쥐었다.

“어려울 건 없지. 근데 맨체스터랑 로마는 기후도 다른데 괜찮은 거야?”

“기후 적응보다 중요한 게 경험이라고 보고 있어서요.”

“뭐, 그렇다면야……. 근데 혁명을 치른 나라치곤 행동이 빠르군. 국내 정치 혼란 때문에 대회를 포기하는 나라도 있는데 말이야.”

머피의 말에 준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제 조국 사람들은 빨리빨리 하는 게 특기거든요.”

“빨리빨리……. 그렇군. 네 입버릇이기도 하지.”

머피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생각해 보면 준영의 ‘빨리빨리’에 자신들도 길들여진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정말 언제 팀이 비행기 사고로 파탄이 났냐는 듯이 유럽 정상에 올라 있으니까.

‘우리가 정상에 있는 걸 두고 보고 있을 팀은 없을 거야. 그러니…….’

미리미리 대비해 둬야 한다. 팀 전술이나 새로운 선수들이나.

그렇게 스스로 재촉하며 머피 코치는 다음 시즌을 구상해 나갔다.

***

“빨리빨리 움직여!”

“머리에 손 안 올리냐?”

“눈 깔아, 새끼들아!”

서울의 한 상가 건물.

지프와 트럭을 타고 온 무장 군인들이 안에 있는 건달들을 끌어내고 있었다.

저항하다 얻어터져 끌려 나온 건달 두목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우린 동대문이랑 상관없다니까 그러네!”

“주변 상인들한테 보호비 명목으로 갈취한 거 사실 아닌가?”

“이보쇼, 군인 양반. 그건 어디까지 관행으로…….”

“더 이상 위법은 용납되지 않는다! 혁명 임시 내각 특별령에 의거하여 금품 갈취에 무전취식, 폭행 혐의로 전원 체포한다!”

건달들은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조리돌림당하는 건 이들만이 아니었다.

현재 전국의 건달과 깡패들에게 날벼락이 떨어지고 있었다.

일명 ‘살충 작전’을 진행하고 있는 건 계엄군으로, 최정민이 몸담은 특무대 역시 이 작전에 투입되어 있었다.

“멍청한 놈들, 몸을 사려도 시원찮을 판에 몰려다니다니.”

“동대문파라는 호랑이가 사라졌으니 서울의 노른자위가 이제 자기네 것이 될 거라 생각한 거겠지.”

자신의 말에 대꾸하는 함흥철에게 최정민이 물었다.

“근데 전국의 깡패들 다 잡아들이면 어디에 두려나? 교도소로 감당이 다 되나?”

“듣자니 황무지나 공사판 같은 데 보내서 강제 노역 시킨다고 하던데.”

함흥철은 슬쩍 길거리에서 구경하는 시민들의 반응을 보았다.

깡패들이 다 끌려간다고 속 시원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우려하는 눈길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다.

“행정이고 치안이고 군인들이 전면에 나서는 일이 많으니까 왠지 쿠데타 같다는 사람들도 있어.”

“쩝, 계엄이 진짜 언제 끝날지 모르는 형편이니…….”

이승만 정권 12년 동안 쌓인 부정과 부패가 너무 많았다.

일선 행정력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난장판에, 폭력 조직을 묵인하거나 결탁한 경찰 때문에 치안 또한 엉망.

임시 내각도 처음에 이 문제에 대해서 골머리를 앓았다.

계속 군의 힘을 빌리다가 자칫 뜻하지 않은 사태가 벌어지는 게 아닌가 우려해서 꾸물대고 있었다.

그러다 김홍일과 이범석 등의 질책을 받고, 계엄 연장과 강도 높은 특별법을 통과시켜 시행해 나갔다.

“듣자니 오성 장군은 정권 잡으면 아예 장성이나 장교들 일부를 퇴역시켜 행정부로 보낼 생각을 하고 있다던데?”

“그럼 빈자리는?”

“그거야 걱정할 필요 없지. 너도 알다시피 우리나라 군대, 특히 육군은 인사 적체가 심하잖아.”

전쟁이 끝나고 군의 규모가 지나치게 비대해진 것이 원인.

그렇다 보니 중견 장교들은 진급도 막히고, 급료 역시 박봉을 받으며 고생하는 중이었다.

김홍일은 이를 적절히 줄여 가며 인재들을 필요한 각 부처에 투입할 계획이라고 했다.

특히 그가 관심을 쏟는 부처는 부흥부라고.

재계 인사나 경제 쪽 전직 관료들을 모아 경제 개발 계획을 짜고 있단 얘기도 있었다.

“아무튼 빨리 훈련을 해야 하는데 큰일이다. 이러다 올림픽 출전하기 전까지 깡패 잡는다고 쫓아다니는 건 아닌지…….”

“설마 그러기야 하겠냐.”

함흥철의 걱정을 웃어넘기는 최정민도 사실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위혜덕 감독과 민병대 코치는 올림픽 전에 영국 전지훈련을 잡아 놨다고 하는데, 자칫 취소되는 건 아닌가 하고서.

다행히 이런 우려는 저녁에 부대에 복귀하면서 깔끔히 사라졌다.

“최정민, 함흥철, 김찬기, 문정식, 이순명, 정순천 이 6인은 내일부터 국가대표팀에 합류하여 합숙 훈련을 하도록.”

“정말입니까?”

상부의 명령에 최정민과 국가대표로 뽑힌 선수들은 반색을 했다.

명령을 통보한 장교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귀관들의 적성으로 볼 때 깡패나 잡으러 돌아다니느니 세계 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국민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낫다는 게 상부의 판단이다.”

그리 말한 장교는 한편으로 딱한 눈길을 보였다.

“그런데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군.”

“예? 모르겠다니, 어째서입니까?”

“저런, 아직 조 편성 결과를 못 본 모양이군. 우리나라는 올림픽 본선 B조로 이탈리아, 브라질, 영국과 한 조다.”

“에엑?”

올림픽 주최국에 월드컵 2회 연속 우승국 이탈리아, 남미의 강호 브라질, 거기다 축구 종가 영국이라니!

농담이 너무 지나친 게 아닌가.

설마 하는 마음에 신문을 본 선수들은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했다.

진짜 이탈리아, 브라질, 영국과 한 조였던 것이다!

“와, 이런 게 어딨어!”

“꿈도, 희망도 없네.”

사실상 3패가 확정 난 성적 아닌가.

다들 한숨을 내쉬었지만, 최정민은 오히려 웃음을 지었다.

“그래, 기왕에 나가는 세계 대회라면 센 놈하고 붙어야지!”

최고의 팀들이 상대라면 어차피 져서 손해 볼 건 전혀 없다.

빨리빨리 준비해서 본선에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

아시아의 황금발은 8월 말에 열릴 본선을 향해 뜨겁게 투혼을 불태웠다.

***

준영은 5월 말 휴가 기간을 개인 훈련을 하거나 사업체 관리, 그리고 6월에 치를 대입 시험 대비 공부를 하며 보냈다.

“꼴찌라도 좋으니 올해는 어떻게든 붙었으면 좋겠는데…….”

“올해는 될 거예요. 준은 열심히 했으니까.”

준영을 응원하는 리즈도 시험공부에 한창이었다. 지금이 대학에서 봄 학기 시험 기간이었기 때문.

그 때문에 둘 다 저택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펜을 놀리고만 있었다.

“좋았어. 다 풀었다!”

“어디 봐요.”

리즈는 준영이 푼 모의시험 답안지를 채점했다.

그리고 나온 점수를 본 리즈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잘했어요. 이대로면 충분히 합격점을 받을 수 있겠어요.”

“좋았어!”

대입에 성공하면 리즈와의 관계도 알버트에게서 더 이상 묵인이 아닌, 승인을 받을 수 있다.

거기다 학력까지 쌓게 되면 유명 축구 선수 이상의 명성과 인맥도 얻게 될 터!

“근데 괜찮겠어요?”

“뭐가 말이야?”

“맨체스터 대학교를 지망하면 제가 준의 선배가 되는데요?”

“뭐, 까짓것……. 얼마든지 불러 드리지요, 선배님.”

“음, 그 호칭, 확실히 신선한걸요.”

매번 여왕님 소릴 듣다가 선배님 소릴 들으니,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자, 계속 분발해 주세요, 후배님.”

“매정하십니다, 선배님. 모의시험 잘 쳤는데 아무런 포상도 없습니까?”

일부러 투정 어린 표정을 지은 준영은 리즈를 슬쩍 끌어안았다.

발그레하게 낯을 붉힌 리즈는 곤란한 기색을 보였다.

“후배님은 욕심쟁이네요. 어젯밤에도 많은 포상을 받았으면서.”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못 이기는 척 리즈가 승낙해 주려던 그때, 도서관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훼방꾼이 왔구나.

이미 비슷한 상황을 몇 차례 겪어 봤던 준영은 먼저 나서서 도서관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죠?”

준영이 먼저 나올 줄 몰랐던 저택 고용인은 화들짝 놀라 용건을 밝혔다.

“그게, 전보가 왔는데… FA에서 보냈습니다.”

“축구협회에서요?”

내용을 보니, 내일 오후 3시까지 웸블리로 오라고 적혀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로……. 혹시 루스 총무가 무슨 일을 꾸민 걸까?’

한동안은 조용해서 그럴 리 없다고 생각되었지만, 알 수 없는 노릇.

준영은 일단 내일 웸블리를 방문하기로 마음먹었다.

***

코로나 2차 백신을 맞았는데, 장난이 아니군요……;;;

타자 치는 것도 힘들 정도로 온 전신이 쑤시고 열나고 난리가 났습니다. 더구나 개인적으로 타이레놀은 잘 안 받는 체질이라……;;;

소설 보는 독자분들 모두 다 건강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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