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26. 회장님과 스파이
1959년 3월 7일 오후 3시.
올드 트래퍼드에서 시즌 33라운드 시합이 열렸다.
맷 버스비 감독은 이 경기에 주전 중 일부만 출전시켰다.
비엔나 원정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상대는 올 시즌 중하위권인 에버튼이었기 때문.
그래서 준영도 출전하지 않았다.
대신 귀빈석에 있는 헤롤드 하드먼 회장의 옆자리에 앉아, 해설 겸 말동무를 해 주었다.
“승점은 충분하다지만, 덜컥 덜미가 잡히지 않을지 걱정이군.”
“괜찮습니다. 오늘 출전한 선수들도 기량이 충분하니까요.”
기량도 그렇지만, 의욕도 차고 넘쳤다.
준영이 장담한 대로 그들은 이른 시간에 득점을 만들어 냈다.
전반 23분 코너킥 상황에서 프레디 굿윈이 장신을 활용한 헤딩슛으로 에버튼의 골문을 연 것.
이후에도 알버트 퀵솔이나 알버트 스캔론이 에버튼의 좌우 측면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에버튼도 로버트 영 콜린스나 데이브 힉슨 등을 통해 만회 골을 노렸다.
하지만 이안 그리브스와 조 캐롤런이 버티는 맨유의 수비벽은 쉽사리 기회를 내주지 않았다.
덕분에 하드먼 회장도 딴 얘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결 편하게 경기를 지켜볼 수 있었다.
“클럽 하우스 설계가 거의 끝났다고 하던데?”
“안 그래도 건축 설계사가 조감도를 보내 줬습니다.”
준영은 서류 가방에서 조감도를 꺼내 하드먼 회장에게 보여 주었다.
미래에서 온 그에게는 흔한 필로티 구조의 콘크리트 건축물이었지만, 회장에게는 꽤 참신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이거 모더니즘 방식이니 뭐니 요새 한창 유행하는 건축 스타일이구만. 설계사가 누구라고 했더라?”
“르 코르뷔지에라고, 프랑스 사람입니다.”
“그랬지, 참. 보그 백작이라는 귀족 사업가가 소개해 준 사람이라 했었지.”
클럽 하우스에는 훈련용 필드와 선수 숙소, 체력 단련실, 식당, 시청각실에 수영장까지 갖춰져 있었다.
또 재활과 치료를 위한 시설과 카페와 휴게실 등의 편의 시설도 마련되었다.
“난방 설비 쪽으로 제가 제안한 게 있어 약간 수정 중입니다.”
“난방? 그냥 벽난로나 라디에이터를 하면 되지 않나?”
“그보다 좋게 하려고요. 라디에이터의 온수관을 꼬불꼬불하게 바닥에 깔면…….”
준영은 미래의 한국에서는 흔하게 쓰이는 온돌식 보일러, 바닥 난방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설계사인 르 코르뷔지에도 효율적인 이 난방 방식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였다.
“아무튼 이 정도면 상류층의 클럽 하우스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겠군.”
“그만큼 의욕과 사기를 높이기 좋죠. 훈련도 더 열심히 할 거고요.”
“음, 시설이 너무 좋으면 오히려 게으름을 피우지 않을까?”
“시설이 좋은 팀에 계속 있고 싶어서라도 열심히 할 겁니다.”
고기를 맛보지 못한 이는 있어도, 한번 고기를 맛본 자가 고기를 끊지는 못하는 법.
대다수 팀들의 인프라가 어떤지 뻔한 상황에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이는 얼마 없을 것이다.
“앞으로 다른 팀들도 우리를 따라서 선수 지원이나 시설 인프라에 많은 투자를 할 겁니다.”
“하지만 금방 그리되지는 않을 테지.”
“생각하시는 것보다 빠를 수 있습니다. 런던에서 온 사업가에게 들으니 ITV 방송사에서 1~2년 안에 풋볼 리그 TV 중계를 할 거라는 얘기가 있더군요.”
지금까지는 기술이나 자금, 환경적인 한계 때문에 FA컵 결승전이나 월드컵 같은 중요 경기들만 생중계해 왔다.
그리고 녹화 중계의 경우, 경기 하이라이트만 편집해서 보여 주었다.
그랬는데 TV 중계가 시작되면?
경기장 밖에서도 축구를 볼 수 있게 되면 더욱 대중화될 것이고, 팀이나 선수들의 인기도 덩달아 높아진다.
즉, 그만큼 가치가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주급 상한제도 폐지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음, 안 그래도 지금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선수들이 많은데…….”
난감한 기색을 보인 하드먼 회장이 말했다.
“자네 말대로라면 사람들이 축구장에 안 오고 TV로 볼 수도 있겠군.”
“축구장에 못 오니 TV로 보는 거지요. 현재 TV의 작은 화면으론 직관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물론 직관이 재미있게 느껴지도록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준영은 그것과 관련해 하드먼 회장에게 조언을 했다.
“지난 2월에 잭 롤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최초로 200골을 달성한 1940~50년대 레전드 공격수) 선배님이 찾아왔을 때 이런 말을 하더군요. 요즘 올드 트래퍼드에는 자기 현역 시절보다 여성 팬이 줄었다고요.”
“맞아. 안 그래도 이사들 사이에서도 그런 얘기가 나왔어.”
‘버스비의 아이들’이라 불리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영국 축구의 아이돌 그룹이나 마찬가지.
그만큼 여성 팬도 많지만, 정작 축구장을 찾아오는 여성들은 별로 없었다.
이런 여성 팬 감소는 뮌헨 비행기 사고 이전부터 계속되고 있었다.
준영은 이에 대한 원인이라 할 만한 점을 지적했다.
“제가 볼 땐 여성 팬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고 봅니다.”
“배려? 치한이나 무뢰한들에게서 보호받도록 지정석이라도 만들어야 할까?”
“그것도 좋지만, 생리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게 절실하다고 봅니다.”
현재 올드 트래퍼드에는 여성 전용 화장실이 드물다.
대다수 축구팬이 남자들이기 때문이라지만, 계속 이래서는 남아 있는 여성 팬들도 떠나고 말 것이다.
“음, 그건 확실히 고치지 않으면 안 되겠군. 이번 시즌이 끝나면 당장 공사를 하라고 해야겠어.”
하드먼 회장은 준영의 조언을 흘려듣지 않았다.
단지 옳은 말이라 여겨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미 구단의 대주주이자, 투자와 후원을 끌어오는 큰손이다 보니 함부로 무시할 수 없었던 것.
‘다른 임원들도 슬슬 존의 눈치를 볼 정도이니 말이야.’
하지만 하드먼 회장 입장에서 거슬릴 수준은 아니었다.
선수로 활동하는 준영은 딱히 구단 운영에 크게 간섭하진 않았으니까.
다만 클럽 하우스나 화장실 문제같이 분명히 개선해야 할 점들에 대해 거론하는 건 게을리하지 않았다.
“존, 앞으로도 지적할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 주게.”
“알겠습니다, 회장님.”
두 사람이 대화를 마쳤을 즈음, 관중석에서 크게 환호성이 일어났다.
알버트 스캔론이 에버튼 수비수 2명을 연달아 제쳐 버리곤 팀의 두 번째 골을 박아 넣은 것.
나란히 자리에서 일어난 준영과 하드먼 회장은 선수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
에버튼은 후반전 막판에 자책골을 유도하며 한 점 따라갔지만, 경기를 뒤집지는 못했다.
2 대 1로 33라운드를 마친 맨유는 일주일 후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 원정을 떠났다.
홈경기 필승을 위해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은 바비 롭슨과 데릭 케반, 도날드 하우 등 주전 전원을 총출동시켰다.
“다들 오랜만이네. 잘 지냈습니까?”
“하하핫, 네 녀석들을 쓰러트리면 일주일은 평안할 것 같군.”
준영과 바비 찰튼은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동료들과 반갑게 악수를 나눴다.
웃고는 있지만, 알비온 측의 사정은 썩 좋지 못했다. 벌써 6경기째 승리가 없었으니까.
거기다 다음 주 상대는 2위인 울버햄프턴 원더러스.
그들 역시 역전 우승을 노리고 있기 때문에 총력전으로 나설 게 틀림없다.
즉, 자칫하면 8경기 무승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버스비의 악마 자식들, 반드시 잡아 주마.’
‘크크, 꿈 깨시죠.’
눈빛으로 대화를 나눈 양 팀 선수들은 얼마 후 필드로 나가 경기를 시작했다.
“뒤져라, 붉은 악마!”
“West Brom! West Brom!”
맨유나 리버풀처럼, 알비온에도 레플리카를 걸친 서포터 조직이 있었다.
비록 수십 명 정도밖에 되진 않았지만, 북을 치며 열심히 팀의 응원을 선도해 나갔다.
그러나 그들의 뜨거운 열정에는 초반부터 찬물이 쏟아졌다.
데릭 케반의 돌파를 저지한 준영이 곧장 길게 패스를 날렸고, 이것이 최전방의 데니스 바이올렛의 발 앞에 제대로 전달되었다.
오프사이드를 피해 적절히 침투하며 롱 패스를 받은 데니스는 상대 페널티 박스 오른쪽에서 절묘한 감아 차기로 선제골을 만들어 냈다.
겨우 전반 4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런 멍청한! 수비를 어떻게 하는 거야!”
“정신 차려! 오늘도 질 거냐?”
홈팬들의 질책을 받으며 알비온이 다시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선제골의 영향 탓인지 선수들의 마음은 조급했고, 이는 패스 미스로 나타났다.
미드필더 모리스 세터스의 패스 역시 그랬다.
측면의 바비 롭슨을 보고 패스를 넣어 줬지만, 도중에 레이 윌슨에게 차단당해 버렸다.
레이는 곧장 바비 찰튼에게로 공을 넘겼고, 이것은 측면을 내달리는 워렌 브래들리에게 전달되었다.
“아니, 뭐가 이렇게 빨라?”
“마치 토트넘의 푸시 앤 런을 보는 것 같군.”
알비온 팬들이 혀를 내두르는 사이, 공은 워렌의 발에서 데니스 바이올렛에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데니스는 도날드 하우를 비롯한 알비온의 수비수들을 끌어내면서 공을 슬쩍 옆으로 흘렸다.
그리고 그 공을 받은 작은 데니스, 데니스 로는 논스톱 슛으로 골대 그물을 흔들었다.
2 대 0.
겨우 10분 만에 또다시 실점을 하게 되자, 알비온 선수들은 물론 관중들까지 아연실색했다.
아무리 상대가 강하다 해도 그렇지, 전반전의 3분의 1이 지나기도 전에 2골이나 먹을 수 있는가!
“젠장, 오늘도 글렀구만.”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분통을 터트리는 관중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알비온 선수들은 만회 골을 넣으려 애를 썼다.
바비 롭슨이 몇 차례 기회를 만들어 냈지만, 그의 슈팅은 골대를 지나치거나 해리 그렉 골키퍼의 선방에 막혔다.
탱크 같은 돌파력을 자랑하는 데릭 케반도 이준영에게 막혀 제대로 슈팅을 날리지 못했다.
이렇게 알비온이 고전하는 사이, 또다시 맨유의 역습이 펼쳐졌다.
던컨이 프레디 굿윈, 바비 찰튼과 패스를 주고받으며 알비온 진영으로 무섭게 돌진해 왔다.
“막아! 빅 던크가 슛을 쏠 거다!”
알비온 수비수들이 몸을 날리는 동시에 던컨의 발끝에서 강력한 무회전 슛이 터졌다.
포터 골키퍼가 아슬아슬하게 쳐 냈지만, 워렌 브래들리가 달려들며 리바운드 골을 골대 안으로 차 넣었다.
스코어는 3 대 0.
전반 30분이 지나기 전에 벌어진 점수 차에 관중들은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믿을 수 없군. 우리 팀이 무슨 포츠머스 같은 강등권 하위 팀도 아닌데…….”
“쳇, 요새 하는 꼴을 보면 강등권이라고!”
이렇게 울분을 터트리는 관중들 사이에서 진지하게 경기를 살펴보는 이들이 있었다.
기자들처럼 사진기와 소형 무비 카메라를 들고 있는 그들의 입에선 영어가 아닌 스페인어가 흘러나왔다.
“확실히 작년보다 더 강해졌군.”
“역습 속도가 굉장히 빨라졌고, 좌우 풀백의 수비력과 공격 가담도 좋아.”
“비너 SC와의 경기까지 마저 보고 평가할 생각이었는데……. 그 경기는 볼 필요도 없을지 모르겠어.”
“그래도 기왕 영국까지 왔으니 볼 건 봐야지.”
사내들은 계속 맨유의 플레이를 카메라에 담았다.
그들의 눈빛은 적진을 정찰하는 스파이들만큼이나 날카로웠다.
***
역사상 최초의 TV 축구 경기 중계는 1937년 하이버리에서 있었던 아스날 1군과 2군의 친선 경기였다고 합니다.
다음 해 4월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시합이 첫 국제 경기로 중계가 되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아직 기술적인 어려움이 많다 보니 방송국이 있는 런던에서 치러지는 경기만 중계를 했습니다.
월드컵 TV 중계는 1954년 스위스 월드컵부터였는데, 아직 통신 위성 같은 게 없다 보니 생중계 도중에 방송이 뚝뚝 끊기는 일이 잦아서 시청자들이 불만을 터트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시절은 생중계보다 녹화 중계가 더 많았다지요.
이런 문제는 1962년에 최초의 통신 위성 텔스타 1호가 발사되고, 1965년 상업용 통신 위성인 인텔셋 1호가 발사되면서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은 여러 나라에 생중계가 가능했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