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25. 큰 그림의 스케치
오스트리아 비엔나 동쪽 도나우강에 자리한 프라터스타디온.
경기장에 모인 8만의 관중들은 1958-59 시즌 유러피언 컵 8강 경기 1차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오늘 상대하는 팀은 이곳 비엔나를 연고로 한 비너 SC.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팀이자, 지난 시즌 오스트리아 리그 우승 팀인 비너 SC는 두클라 프라하를 물리치고 8강에 올라왔다.
그들은 홈팬들의 응원을 등에 업고 과감하게 공세로 나왔다.
「에리히 호프, 하멜에게 공을 받아 상대 진영을 돌파해 들어갑니다. 아, 하지만 태클에 공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라디오 중계 캐스터가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을 때, 태클로 공을 빼낸 레이 윌슨이 박스에서 튀어나온 준영에게 공을 건넸다.
공을 툭툭 치며 센터 서클 부근까지 전진한 준영은 비너 SC의 골대를 응시하다 그대로 슈팅을 때렸다.
‘아니, 거기서 찬다고?’
설마 저게 들어갈까.
관중들은 물론 오늘 경기를 취재하는 기자들도 허공에 궤적을 그으며 떨어지는 공을 좇았다.
다소 전진해 있었던 비너 SC의 골키퍼 루돌프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힘껏 손을 뻗었지만, 손끝에 닿았던 공은 골대 우측 상단으로 빨려 들어갔다.
“우와, 중거리, 아니 장거리 슛!”
“역시 우리 주장은 대단해!”
신이 난 맨유 선수들과 달리 8만 관중들은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설마 이런 식으로 골을 먹을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저 동양인, 월드컵 때 우리나라 상대로 헤딩골 넣은 놈 아냐?”
“맞아. 맨유 소속에 키 큰 동양인이면 저놈밖에 없지.”
“망할, 어떻게 돼먹은 놈이기에 중앙선 너머에서 골을 넣냐고!”
“저놈은 진지하게 신체검사를 해 봐야 한다고 봐.”
분통과 한탄에 관중석이 들끓는 사이, 경기가 재개되었다.
준영의 원더골에 얼이 나갔던지, 비너 SC 선수들의 집중력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여기에 맨유 공격수들의 압박이 들어오자 허둥대다 그만 수비수가 패스 미스까지 저질러 버렸다.
“저런 멍청한! 적군에게 주면 어떡해!”
“아아, 빨리 좀 막아!”
상대 수비수의 실수를 놓치지 않고 가로챈 데니스 바이올렛은 그대로 골문으로 공을 몰고 가서는 팀의 두 번째 득점을 만들어 냈다.
“잘했어. 좀 더 밀어붙여! 흐름을 탔을 때 완전히 주저앉혀야 해!”
머피 코치의 독려에 맨유 선수들은 더욱 맹렬히 비너 SC를 몰아붙였다.
결국 전반 43분, 바비 찰튼의 어시스트를 받은 데니스 바이올렛이 세 번째 골을 터트리며 승부의 추를 완전히 기울여 놓았다.
취재하던 기자들은 압도적인 맨유의 경기력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대로 경기가 끝나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4강 진출은 확정적이군.”
“정말 강하군. 비결이 뭘까?”
“지난 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 이후 엄청난 후원과 투자를 받고 있대요. 현재 선수들의 사기가 무척 높다고…….”
어떤 훈련을 했는지 몰라도 선수들의 몸싸움이나 발재간도 비너 SC보다 우위.
거기다 전술도 볼만했다.
이번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사용한 4-2-4 포메이션처럼 보이지만, 그보다 더 세련되고 과감해 보였다.
“이대로 4강에 올라가면 레알 마드리드와 맞붙겠군요.”
“레알 마드리드가 샬케 04를 꺾으면 그렇겠지. 준결승이 사실상 결승전이 되는 거지.”
지난 대회 결승전에서 맞붙었던 두 팀의 이른 조우.
레알 마드리드는 작년보다 한층 공격력이 더 높아졌다.
바로 악마의 왼발 페렌츠 푸스카스가 이번 시즌부터 정식 합류했기 때문!
푸스카스는 그동안 못 뛴 한을 풀기라도 하겠다는 듯, 엄청난 득점력을 선보였다.
특히 1월 4일 UD 라스팔마스와의 경기에선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함께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무려 10 대 1의 대승을 견인하기도 했다.
“2년 동안 실전에 나가지 못했는데… 매직 마자르의 주포는 전혀 녹슬지 않았구만.”
“푸스카스와 존 Y. 리가 맞붙으면 과연 누가 이길지……?”
아마 유러피언 컵 준결승은 올 시즌 가장 볼만한 경기가 되지 않을까?
아직 8강 경기가 끝나지 않았지만, 기자들은 이미 다음 달에 열리는 4강 경기에 기대감을 부풀리고 있었다.
***
비엔나 원정은 3 대 0의 깔끔한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비너 SC와의 경기가 끝난 후, 준영에게 전화가 왔다.
연락한 사람은 애S턴 마틴의 회장 데이비드 브라운.
승리를 축하해 준 브라운 회장은 보여 줄 것이 있다며 귀국하면 찾아오라고 일렀다.
“뭘 보여 주시려나. 벌써 DB6를 만든 건 아닐 테고…….”
궁금했던 준영은 귀국한 다음 날 허더스필드에 있는 애S턴 마틴 공장을 찾아갔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오! 어서 오게, 존.”
반갑게 준영을 맞은 데이비드 브라운은 공장 안쪽으로 그를 데려갔다.
“지난번에 자네가 그랬지? 너무 고사양 자동차만 만들지 말고 대중적인 차량을 만들라고 말이야.”
“예, 그 뒤로 회장님이 새로운 자동차 브랜드를 만들었단 이야기를 들었죠.”
‘스마트’라고 이름 지어진 그 브랜드는 애S턴 마틴이 수십 년간 쌓은 기술력을 발판으로 하여, 보다 대중적인 차량을 만들 것을 천명했다.
이에 대해 언론이나 대중은 반신반의했다.
고성능의 고급 차량만 만들던 이들이 과연 대중적인 자동차를 만들 수 있겠냐고.
“그 스마트의 첫 작품이 나왔지.”
브라운 회장은 공장 안쪽 차고에 보관된 차량을 준영에게 보여 주었다.
“이건……!”
“아직 목업 수준이지만, 구조 설계나 탑재할 엔진도 결정을 해 놓았어.”
준영은 눈앞에 나타난 경차를 보고 얼이 빠졌다.
어찌 된 것인지 너무나 낯익은 모양이었기 때문.
‘이거 구형 마T즈잖아!’
실제 마T즈보다 약간 더 크고, 범퍼나 차체 라인도 일부 차이는 있지만, 앞모습은 바로 마T즈가 연상될 정도로 많이 닮아 있었다.
“혹시 타임머신 개발에 성공하셨습니까? 아니면 저 말고 미래에서 온 사람이 또 있어요?”
“왜? 미래의 차랑 많이 닮아서 그런가?”
“예, 마T즈라고 제 고국에서 만든 거죠. 이건 대체 어떻게 만든 겁니까?”
“뭐, 대단한 건 아니야. 몇몇 업체들의 소형차 디자인을 참고했지.”
보다 소형화, 축약시키고 연비를 줄일 수 있게 21세기풍의 공기 역학적인 디자인을 적용하다 보니 이런 모양이 나왔다고.
“음, 일종의 수렴진화라고 할 수 있겠군요.”
“비슷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닮아 간다는 거 말인가?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군.”
아무튼 이 짝퉁 마T즈는 철저히 대중적인 취향에 맞춰 단순하면서도 최대한 저렴하게 설계되었다.
특히 전후 영국군이 관리 감독해서 생산했던 폭S바겐 B틀을 많이 참고했다고.
“원래는 삼발차로 만들 생각이었지만, 그건 안정성도 떨어지고 탑재 중량도 적어서 철회했지.”
“잘하셨습니다.”
준영이 알기로도 삼발차는 일부 소상인이면 모를까, 서민 가정이 쓰는 용도론 적합하지 않았다.
“아직 개선할 부분도 있고, 안전 검사도 통과해야 하지만, 난 이 녀석이 마음에 들어. 완성 차가 나오면 상당히 인기를 얻을 것 같은데,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이 녀석을 닮은 마T즈가 꽤 히트를 쳤으니, 이놈도 잘 팔릴 거라 봅니다.”
준영의 말에 브라운 회장은 반색을 했다.
“그래? 그럼 이 녀석도 그 미래의 차 이름을 따서 말티즈라고 하자고.”
“저기, 말티즈가 아니라 마T즈인데요.”
“그래, 말티즈.”
준영은 다시 수정해 주려다가 그냥 포기했다.
이 작고 깔끔한 외견의 경차가 조그만 강아지와 이미지가 비슷해 보이니, 나쁘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
공장에서 마T즈, 아니 말티즈를 보고 나온 준영은 브라운의 집무실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나누었다.
“아까 자네가 말했었지. 미래에는 한국도 자동차를 만든다고 말이야.”
“예, 한국 자동차 회사들이 썩 좋은 평가는 못 듣습니다만, 그래도 생산과 판매 순위는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죠.”
“가성비는 괜찮은 모양이군. 그럼 지금은?”
“아직은 불모지나 마찬가지죠.”
한국에 갔을 때 신문을 보니, 시발(始發)이라는 국산차가 있긴 했다.
일부 소규모 차량 제작소에서 버스를 만들기도 하고.
하지만 그것도 미군 부대에서 나온 폐차를 재생하거나 불법 복제 생산을 하는 정도였다.
“제가 알기로 한국에서 제대로 자동차를 만들어 수출한 건 70년대 들어서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것도 외국의 기술 지원을 받아서 만든 거죠.”
“음, 앞으로 10여 년 정도 뒤란 건가? 그리 먼 미래는 아니군.”
“혹시 투자해 보시게요?”
“자네가 그랬잖아. 생산과 판매 순위가 세계에서 손꼽히는 수준이 된다고.”
될 성싶은 떡잎이라는 걸 알았으니, 거기다 미리 물과 거름을 주면 많은 열매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해외 수출을 생각하면 인건비가 싼 나라에 생산 공장을 짓는 것도 나쁘지 않다.
“지난번에 조셉 포스터가 그러더군. 자네 나라 사람들, 손재주가 제법 좋다고 말이야.”
“네, 그 점에 있어서는 저도 꽤 놀랐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이라고 알고 있고, 실제로 가서 본 것도 그랬다.
하지만 그런 환경에서도 공군과 해군에서는 뜻있는 군인들이 국산 비행기를 만들기도 했고, 학생과 교수들이 국산 로켓 개발을 해내기도 하였다.
준영은 한국에 갔을 때 그런 뉴스들이 실린 신문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때 벌써 이런 연구와 개발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으니까.
“손재주 좋은 사람들이야 어딜 가나 있어. 중요한 건 맨땅에 머리를 박으면 어찌 될지 알면서도 시도하는 배짱과 하고자 하는 의욕이지.”
“네, 한국에서 기업 하는 사람들이 그런 면이 좀 있습니다.”
“나는 그 배짱과 의욕을 믿고 투자해 보고 싶어. 돈이든 기술이든 말이야.”
미래를 몰랐다면 엄두조차 못 냈을 일.
아니, 알고 있다 해도 당장 불모지를 개발하는 건 그리 쉽지는 않다.
그럼에도 데이비드 브라운은 불모지에 물과 거름을 뿌리고 싶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자동차 생산 회사를 손에 넣거나, 같은 편으로 만들 기회가 될 테니까.
“그러니 미래에 자동차 사업에 성공하는 사람을 소개해 주게.”
“근데 그 사람은 지금 한창 토목건축 사업을 하고 있을 겁니다.”
훗날 세간에서 왕회장이라 불리는 사람.
왕회장 본인은 아니지만, 그의 회사에서 일하는 임원이 준영을 찾아온 적은 있었다.
현재 영국에서 고속도로 건설 사업을 각지에서 진행하고 있고, 준영이 여기에 투자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그 고속도로 건설 사업에 자신들도 끼고 싶다고 했었지? 하청이라도 하겠다고 말이야.’
기술과 장비는 부족해도 값싼 인력은 얼마든지 제공할 수 있다고 했던가.
아무튼 그때 준영은 영국에 돌아가서 알아보고 가능하면 연락해 주겠다고 일러두고 돌려보냈다.
“제가 그 사람은 잘 모르지만, 일단 연결해 달라고 부탁할 사람은 있으니 연락해 보겠습니다.”
준영은 한국 사람들이 원래 역사보다 빨리 가난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단지 그들이 딱해서만은 아니다.
살림이 좋아져야 집집마다 마이카를 굴리고, 그만큼 석유를 소비할 테니까.
현역 은퇴 후 석유 재벌 구단주가 목표인 준영은 큰 그림의 스케치 정도는 해 두고 싶었다.
***
지금의 나로호 같은 것에 비하면 정말 보잘것없지만, 1958년 10월에 한국 최초 로켓 발사 실험이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열악해도 뜻을 모아 꿈을 향해 달려간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남겨 놓은 발자취를 따라 현재의 주역들이 신천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