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12.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다음 날, 서울로 돌아온 준영은 깜짝 놀랄 소식을 들었다.
“뭐라고? 청계천에서 화재가 났다고?”
“호텔 직원 말로는 터너 씨가 그쪽으로 갔다는데 아직 연락이 없어.”
앤지의 말을 들은 준영은 곧장 불이 난 청계천 판자촌으로 향했다.
“제길, 하필이면……!”
과연 터너는 괜찮은 걸까.
어찌나 판자촌 사람들을 딱하게 여겼던지 자신에게 부탁해서 도와줄 것을 요청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해서 구호품을 건네줄 때는 또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런데 그런 보람이 순식간에 재가 되어 버렸으니!
아마 터너 성격이면 물불 안 가리고 불을 끈다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이런, 전부 다 타 버렸네.’
화재 현장에 온 준영은 까맣게 재가 되어 무너져 버린 현장을 보고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터너를 찾았다.
“터너 씨! 윌리엄 터너!”
혹시 화마에 휩쓸려 잘못된 게 아닐까?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터너를 찾아다니던 준영.
그는 마침내 터너를 발견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재와 그을음을 덮어쓴 그는 망연자실하게 화재 현장에 주저앉아 있었다.
“하아… 무사했군요. 걱정했다고요.”
“사장?”
“행색이 말이 아니네요, 일단 호텔로 돌아갑시다.”
준영의 권유에 터너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다가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여기… 여기서 제일 먼저 불이 났대. 아이들만 살던 집이었는데… 꼬마들끼리 구호품으로 준 라면을 끓여 먹으려다…….”
“그런……!”
안타까운 마음에 준영은 가슴이 쓰렸다.
하지만 터너는 그보다 더 괴로웠던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난 도대체… 뭘 우쭐거리고 있었던 걸까? 그냥 먹을 거나 대충 던져 주고……. 바보같이 그걸로 뿌듯해하고 있었어.”
“터너 씨 잘못이 아니에요. 이건 그냥 불운한 사고일 뿐이니까요.”
누가 불이 날 걸 생각이나 했을까.
하지만 밤새 울부짖는 아이들과 화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았던 터너는 자책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내가 준 건 도움이 아니었어. 그저 값싼 동정일 뿐…….”
자신의 경솔하고 안이한 호의가 이곳 사람들을 더한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말았다.
“도울 거면 제대로 도왔어야 했는데… 좀 더 제대로…….”
“맞아요. 제대로 돕지 못했죠. 그래도 누구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요.”
터너가 원망을 받거나 비난을 받을 이유가 없다.
비난을 받을 자들은 따로 있었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을 마냥 방치했던 이들, 이 지경이 된 상황에서도 어떤 도움도 주지 않은 작자들.
이 재난은 그들의 방관과 무관심으로 인해 벌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만 갑시다. 여기서 자책하고 있다고 해서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고, 다친 사람은 낫지 않아요.”
“…….”
“제대로 도왔어야 한다고 했죠? 지금이 그래요. 이재민들을 도울 방법을 마련해야 돼요.”
준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터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무거운 마음은 쉬 떨쳐 내지 못한 듯, 그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무거워 보였다.
***
통금을 앞둔 야심한 시각.
준영은 높으신 분의 부름을 받고 대원각으로 왔다.
그는 전각 곳곳에서 들리는 풍악과 웃음소리에 인상을 구겼다.
‘아주 잘들 노시는구만. 불이라도 확 질러 버릴까?’
서울 중심부에서 큰 화재가 났고 수백 명의 이재민이 나왔는데, 정부의 고관이라는 사람들은 흥청망청하고 있으니!
준영이 내심 분통을 터트리고 있을 때, 그를 이곳으로 데려온 안내인이 재촉했다.
“이준영 선수, 이쪽입니다.”
준영은 안내인이 인도한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경무대 경무관 곽영주를 비롯해 자유당 정부의 고관들이 기생을 끼고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여, 왔구만.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지.”
곽영주가 준영을 반갑게 맞았다.
하지만 오늘 술자리의 상석에 앉은 사람은 그가 아니라 이마가 넓고 왜소한 체격의 노인이었다.
“인사드려. 만송 선생이시네.”
‘이 사람이 이기붕이구나.’
자유당의 실세이자, 대통령의 양자 이강석의 친부.
이기붕은 자신에게 꾸벅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준영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소문대로 덩치는 꽤 크구만. 거기다 꽤 반항기가 있어 보이기도 하고…….’
이기붕은 준영을 볼 생각이 별로 없었다.
다만 곽영주나 그를 따르는 고관들은 녀석을 좋아했다.
나중에 적당한 때 써먹기 위해서도 안면을 틀 필요가 있었기에 오늘 이 자리에 부르게 되었다.
“한 잔 받게.”
“예, 감사합니다.”
이기붕은 준영에게 술을 따라 주며 물었다.
“모처럼 고국에 돌아와서 둘러본 소감이 어떤가?”
“여러모로 느낀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 대표적으로 어떤 것 말인가?”
그 물음에 준영은 주변의 권세가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사람의 앞날은 정말 알 수 없다는 거였죠. 오늘의 행복을 누리다가도 한순간 무너져 버리는 모습이 참으로 허무하고 딱하기 짝이 없더군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건가…….”
이기붕은 준영의 말이 약간 거슬렸다.
하지만 정말 녀석이 의도적으로 이야기한 것인지 알 수 없었기에 잠자코 넘겼다.
그의 심정도 모르고 곽영주나 다른 권세가들은 껄껄 웃음을 토했다.
“거, 젊은 친구가 노인네 같은 소리를 하는구만.”
“공만 차다 보니 풍류를 몰라서 그런 모양입니다.”
“그럼 오늘 제대로 가르쳐 줘야겠구만. 예향아, 네가 오늘 이 선수를 잘 모셔야겠다.”
곽영주의 말에 준영의 곁에 앉은 예향이라는 기생이 눈웃음을 지으며 준영에게 추파를 던졌다.
그러나 준영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술잔을 비울 뿐이었다.
그 모습이 영 재미가 없었던지, 곽영주가 말을 건넸다.
“듣자니 준영이 자네, 노래도 잘한다면서? 한 곡 불러 보지 그러나?”
“글쎄요. 제가 곧잘 부르는 노래가 여기 계신 분들의 취향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괜찮으니까 뭐라도 불러 보라고!”
기타도 없이 무슨 노래를 부르라는 건지.
진짜 아무거나 막 불러 볼까?
욕설과 음담패설로 뒤섞인 하드코어 갱스터 랩이라도 불러서 컬처 쇼크를 느끼게 해 줄까?
그러다 적당한 곡이 생각났다.
이 한심한 인간 군상들이 출연했던 드라마에도 나온 노래였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희망가’라는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는 우울한 음색의 곡.
하지만 준영의 노래에는 우울함보다 빈정거리는 뉘앙스가 진하게 묻어 있었다.
그 뉘앙스를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은 이기붕이었다.
“거참, 불러도 왜 그런 곡을 부르나? 젊은 친구가 신나는 노래를 불러도 시원찮을 판에…….”
“마음이 답답해서 그렇습니다. 만송 선생님이나 여기 계신 분들은 안 그러신가 봅니다?”
준영의 대꾸에 이기붕의 표정이 굳었다.
갑작스러운 두 사람의 대치에 곽영주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준영은 왜 만송에게 덤벼들려고 하는 건지?
***
“어젯밤에 청계천 판자촌에서 불이 나서 5명이 죽고 20명이 넘게 다쳤다고 합니다. 그 몇 배나 되는 사람들이 이재민이 되었고요.”
준영이 민감한 이야기를 들먹이자, 곽영주가 눈치를 주었다.
하지만 그의 눈치 정도로 이미 열려 버린 준영의 말문을 막지는 못했다.
“수도 한가운데서 불이 나고 수백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는데, 아주 여유롭게 술판이라니……. 진짜 클래스가 남다르십니다.”
“뭐, 뭐가 어째?”
격분한 건 이기붕이 아니라, 그의 측근들이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준영을 끌어내 손봐 줄 것처럼 눈을 부라렸다.
그들과 달리 이기붕은 분한 마음을 애써 억누른 채 웃음을 지었다.
“젊은 친구가 외국에 오래 살아서 그런지 나라 사정을 잘 모르는 모양이군.”
“제가 모른다고요?”
“그래,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청계천에 모여 사는 그 빈민들은 불법 거주자들이야. 범법자들이라는 게지. 나라에서 범법자를 보살펴 줘야 하나?”
“당연히 살펴 줘야죠. 그 사람들이 괜히 거기 모여 살게 된 건 아닙니다만?”
경기가 나쁘고, 지방에는 변변한 일자리가 없기에 사람들은 서울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인구가 급증하는데 머물 만한 장소가 없으니 만들어진 게 판자촌이다.
“좋아서 거기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죠. 내년에 선거가 있다는데, 민심을 저버려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정치인이 걱정할 문제이지, 공놀이나 하는 자네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야. 당돌한 건 좋지만 방자해서 좋을 건 없어.”
선을 넘으면 죽는 수가 있다.
이러한 이기붕의 경고에 준영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방자하게 굴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죠. 만송 선생님도 이 점에 유의하시고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뭐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이 풍진 세상, 어디 부귀영화를 신나게 누려 보시길 바랍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준영은 곧장 전각에서 나왔다.
뒤에서 고성과 욕설이 들렸지만, 준영에겐 개 짖는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이봐, 자네, 미쳤나? 죽고 싶어 환장한 거냐고?”
뒤따라 나온 곽영주가 준영의 팔을 잡아챘다.
한국의 록펠러가 될 꿈을 부풀리고 있던 그였기에, 자신의 꿈을 이뤄 줘야 할 준영이 자유당 수뇌들의 눈 밖에 나는 걸 원치 않았다.
“당장 들어가서 사과드려. 만송 선생이 누군지 알기나 하나? 내년 선거에서 부통령으로 당선될 분이란 말이야.”
어디 부통령에 그치겠는가.
고령인 이승만 대통령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당장 부통령이 승계받게 될 것이다.
이런 설명에 준영은 더욱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아직 선거도 하지 않았는데 당선이 확실한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그거야…….”
“외국에 있다고 보고 듣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제가 특별히 서비스로 한 가지만 알려 드리죠. 만송 선생의 욕심은 틀림없이 큰 화를 부를 겁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준영은 꾸벅 하직 인사를 건네고 대원각을 떠났다.
멀어져 가는 준영의 모습을 보며 곽영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틀린 소리는 아니야.’
곽영주는 이기붕과 그의 처 박마리아의 권세욕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다.
고향 선배 이정재가 공들여 가꿔 놓은 이천 선거구를 강탈한 것만 봐도 알 만하지 않은가.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곽영주는 이기붕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자유당 정권이라는 한배에 탄 입장이다 보니 드러낼 수 없을 뿐.
‘그래, 확실히 일을 저지를 작자인 건 틀림없지.’
하지만 그 화가 자신에게까지 번지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잘 이용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지금은 저 노인네를 진정시켜야겠군.”
이준영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자신의 꿈도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어떻게든 해가 되지 않도록 수습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
“태성아, 너 정말 갈 거냐?”
축구 선수 최강석은 연세대 후배 차태성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지난번 특무대와 경기를 치르고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갑자기 영국으로 가겠다며 휴학계를 냈다.
“혹시 이준영이 영국 프로팀에 입단 추천을 해 준다고 했냐?”
“흥,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없지만, 들어도 신세 질 생각은 없어요.”
분명히 자신의 실력은 이준영에 못 미친다.
그렇다고 수긍하고 주저앉아 있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난 내 힘으로 세계 무대에 도전할 겁니다. 어느 정도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해 보지 않곤 못 견디겠어요.”
“자식, 성질하곤……. 너 그러다 타향에서 거지꼴 된다?”
“흥, 언제는 안 그랬답니까.”
평양 출신인 차태성은 1.4후퇴 당시 가족과 헤어져 혈혈단신으로 남쪽에 왔다.
손에 든 건 축구화뿐이었지만, 그래도 홀로 서서 명문인 연세대까지 들어왔다.
그렇기에 지구 반대편 외국이라고 해도 딱히 무섭지는 않았다.
“두고 보십쇼. 2~3년 안에 내 이름을 한국, 아니 아시아 전체에 알릴 테니까.”
선배에게 자신만만하게 장담한 차태성은 영국으로 떠나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렇게 조윤옥에 이어 또 다른 한국인 선수가 해외 무대를 향해 용감하게 발을 내디뎠다.
***
차태성(1934~2006) 선수는 최전방 공격수에 풀백, 하프백 등 여러 포지션을 두루두루 소화하던 당대의 멀티 플레이어로 유명했습니다.
부친이 1930년대 평양 축구단에서 뛰었던 차관영 선수인데, 그 영향으로 축구를 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전쟁통에 홀로 월남해서 고생을 많이 하고 한때 축구를 접기도 했지만, 그래도 재기해서 국가대표팀에 발탁까지 되었지요.
제일모직과 서울시경 팀에서 뛰었는데, 도중에 은퇴했다 다시 복귀하는 일도 몇 번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35살까지 선수 생활을 했는데, 당시 기준으로 꽤 오래 뛴 거라 ‘강철 노장’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