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11. 숨겨진 인연
오랜만에 덕수궁을 둘러보고 나온 황후 윤씨는 거처로 돌아가던 중에 아는 사람을 만났다.
“자네는 이 소사(小使)가 아닌가. 오랜만이구나.”
“어이쿠, 마마.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요.”
예전에 황후 윤씨가 머물던 창덕궁 낙선재 관리원으로 일했던 이 씨는 꾸벅 허리를 굽혔다.
그러고는 곁에 있는 아들이 멀뚱히 서 있는 것을 보곤 냉큼 머리를 잡아서 허리를 굽히게 했다.
“야 이놈아, 황후마마시다. 인사드려야지!”
“됐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아닌가. 그보다 자네는 고향으로 내려갔다고 들었는데 언제 돌아온 겐가?”
“몇 달 되었습니다요. 흉년에 소출도 나지 않아서……. 마침 서울에 사는 지인이 일자리를 마련해 주겠다기에 상경했습지요.”
이 씨의 사정에 혀를 차던 황후 윤씨는 자신을 말똥말똥하게 바라보던 아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이 아이는 자네 아들인가?”
“예, 강윤이라 하옵니다요.”
가만히 강윤을 바라보던 윤씨가 물음을 건넸다.
“자네, 혹시 친척 중에 공 차기를 잘하는 사람이 있는가? 이 아이가 좀 전에 본 이준영이란 젊은이랑 많이 닮았네만…….”
이준영이란 말에 강윤은 깜짝 놀랐다.
“어, 이준영 선수를 보셨어요?”
“그래, 좀 전에 만났다. 덕수궁 구경을 하고 있더구나.”
“와, 지금 가도 있을까? 아버지, 나 덕수궁에 갔다 오면 안 돼요?”
강윤은 요청을 했다가 바로 부친에게 머리를 쥐어박혔다.
“이놈이 어딜 또 쏘다니려고!”
“지난번에 동대문에서 경기하는 것도 못 봤다고요! 거기다 꼭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단 말이에요.”
황후라는 할머니도 그랬지만, 평소에 친구들이나 주변 이웃 사람들에게서도 이준영이랑 많이 닮았다고, 혹시 친척이냐는 말을 곧잘 듣곤 했다.
그래서 확인하고 싶었다.
이준영이 진짜 친척인지 아닌지 말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그랬잖아요. 할아버지 동생이 독립운동 하러 중국에 가서 행방불명되었다고요.”
“그래? 그럼 이준영은 너와 재종형제일 수도 있겠구나.”
황후와 아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 씨는 말없이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사실 그의 삼촌은 독립운동 한다고 중국에 간 게 아니다.
그냥 취중에 동네 순사를 쥐어패 버리고 만주로 도망간 걸 미화했을 뿐.
“마마, 저희는 약속이 있어 먼저 가 보겠습니다요.”
“그래, 살펴 가게나.”
이 소사와 그의 아들이 떠난 후, 늙은 상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시절이 이렇다고 하나 너무하옵니다. 어찌 국모인 황후마마보다 일개 공 차는 재주꾼을 더 잘 알고 있는지…….”
그 말에 황후 윤씨는 고개를 저었다.
“그 재주꾼이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지 않았더냐.”
그녀는 축구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 이준영이라는 젊은이가 공을 잘 차서 구라파에서 이름을 드날렸다는 건 알고 있다.
과거 손기정처럼 대한의 기상을 천하에 드날리며,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신바람 나게 해 주었다.
‘그에 비하면 이 나라 왕실은 무엇을 했던고. 망국을 막지 못하고 구차하게 왜놈들이 주는 돈을 받아 연명했을 뿐…….’
의친왕이나 그의 아들 흥영군 이우가 반일 감정을 가졌고, 자신은 오라비를 통해 임정에 몰래 자금을 보낸 일이 있긴 했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생사를 넘나든 애국지사들과 비교가 되겠는가.
이런 대접을 받아도, 아니 이보다 못한 취급을 당해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다들 명심하게. 이미 시절은 바뀌었어. 달리기를 잘하든 공을 잘 차든, 백성들을 살맛 나게 해 주면 왕후장상처럼 공경받기 마련인 게야.”
윤씨의 말에 가장 젊은 성 상궁이 여쭈었다.
“마마, 사동궁 도련님이 지난번에 가수가 되고 싶다고 한 적이 있사온데 그런 이유이옵니까?”
“뭬야! 사동궁 아이가 무엇이 되려 한다고?”
황후 윤씨가 눈을 치켜뜨자, 성 상궁은 진땀을 뻘뻘 흘렸다.
“그러니까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되겠다고…….”
“이런 고얀! 경을 쳐도 단단히 칠 놈이 아니냐! 황손이라는 놈이 근학(勤學)에 힘쓰지 않고 광대놀음을 하겠다니!”
윤씨는 당장이라도 황손을 찾아가 회초리를 휘두를 기세였다.
성 상궁은 진노한 황후를 만류하며 말했다.
“마마, 방금 시절은 바뀌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무엇을 하든 백성들 살맛 나게 해 주면…….”
“시절이 바뀌어도 황손이라면 지켜야 하는 것이 있음이야! 어허, 큰일이구나. 그 아이가 대체 뭐가 되려는 건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 윤씨.
그녀도 이 땅의 흔한 어머니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
흙먼지가 날리는 비포장도로.
울퉁불퉁한 국도 위로 승용차와 트럭들이 달려가고 있었다.
“여긴가요?”
“응, 그런 모양이야.”
준영의 애매모호한 답변에 리즈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모양이라니? 그럼 아닐 수도 있다는 거예요?”
“행정 구역상으론 여기가 맞아. 근데… 달라도 너무 다르네.”
차창 밖의 고향 풍경은 21세기와 딴판.
심지어 멀리 보이는 산들조차도 민둥산이라 그런지 준영이 기억하는 것과 달랐다.
‘설마 이 정도로 다를 줄이야.’
마치 딴 동네에 와 있는 듯한 느낌.
준영이 내심 한숨을 내쉬고 있는 사이, 차량 행렬은 낡은 적산가옥의 정문 앞에 멈춰 섰다.
정문에는 ‘한마음 보육원’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마침내 돌아왔구나.’
준영은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요람 앞에 섰다.
비록 21세기와 다르긴 했지만, 분위기는 비슷했다.
“어서 오세요!”
“축구왕 이준영 선수, 환영합니다!”
미리 연락을 받았던지 보육원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정문으로 나와서 열광적으로 맞아 주었다.
준영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환영에 답례했다.
보육원 안으로 걸어 들어간 그는 천천히 둘러보았다. 혹시나 낯익은 광경을 볼 수 있을까 기대하고 있었던 것.
그러다 눈에 띈 것이 있었다.
“이거 호두나무 맞죠?”
“네, 보육원 설립 때 애써 주신 UN군 장교분이 심으신 거예요.”
보육원 뜰 중앙에 심어진 호두나무.
21세기의 이 나무는 지금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컸다.
나무 위에 아이들이 놀 수 있게 집을 지어 놓기도 하고, 굵은 가지에 그네를 달아 놓기도 했다.
‘아직 한참 자라야겠구나.’
잠시 추억의 나무를 바라보던 준영은 이후 트럭에 싣고 온 구호품을 보육원에 전달했다.
이에 현재 원장을 맡고 있던 신부가 감사의 뜻을 전했다.
“고맙습니다, 형제님. 오늘 건네주신 도움의 손길로 아이들이 보다 밝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후원해 드릴 테니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 주세요.”
원장 신부와 대화를 나눈 준영은 이후 사진을 찍었다.
후원자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21세기에도 이런 의례는 남아 있었다.
“현상되면 제 사진도 보육원 기록관에 걸리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근데 기록관이 있는 건 어떻게 아셨는지?”
“그게… 그냥 아는 분에게 들었습니다.”
대충 둘러댄 준영은 원장 신부와 함께 기록관을 둘러보았다.
기록관에 걸려 있는 몇몇 사진들은 준영도 21세기에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그다지 눈여겨보지 못했던 부분이 눈에 확 들어왔다.
“이 사람, 혹시…….”
“맞아요. 틀림없어요!”
리즈도 알아보고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손으로 가렸다.
보육원 설립에 힘써 주었다는 UN군 장병들의 사진.
그 사진 한쪽에 루이스 대령이 서 있었다.
“혹시 아는 분이라도 찾으셨습니까?”
원장 신부의 물음에 리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아버지세요.”
“허! 이런 인연이…….”
감탄하던 원장 신부는 루이스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정말 여러모로 애써 주신 분이지요. 1.4후퇴 당시엔 다들 피난 갈 수 있게 트럭을 구해 주기도 하셨고요.”
거기다 뜰에 심은 호두나무도 그가 심은 것이라고 했다.
이야기를 들은 준영은 새삼 자신이 루이스의 선택을 받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신은 그가 세워 준 터전에서 자라고, 그의 생가를 샀으며,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선수가 되었으니까.
‘대령님, 당신의 바람은 반드시 이뤄 드리겠습니다.’
리즈의 손을 잡은 준영은 사진 속에서 미소 짓고 있는 루이스에게 다짐했다.
끝까지 모두를 구하고, 모두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
해가 진 저녁.
호텔에 남아 있던 앤지와 카린은 준영과 리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리 안 오는 걸까?”
“오빠야 고향에 갔으니 아는 사람이라도 만난 게 아닐까?”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잖아. 존은 67년 후의 미래에서 왔는걸.”
어쩌면 21세기와 사뭇 다른 고향 풍경에 마음이 우울해져 있을지 모른다.
언니는 그걸 위로해 주느라 여념이 없을지도?
“그러다 감정이 고조되어 또 사고를 친 거면…….”
“사고? 교통사고?”
“어린이는 몰라도 된단다.”
대학 진학 후, 언니와 존의 연애는 급가속을 탔다.
둘이 꽁냥대는 모습을 보는 건 이제 그리 어렵지 않을 정도.
데이트를 가서 늦은 시간에, 그리고 외박까지 하고 돌아온 일도 있었다.
당연히 할아버지의 심기는 몹시 불편해졌고, 존은 저택에서 쫓겨날 것에 대비해서 따로 집까지 구해 두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결국 존을 내치지 못했다.
그랬다간 언니도 존을 따라서 나가 버릴 게 틀림없었으니까.
‘아무튼 큰일은 없어야 하는데…….’
앤지가 염려하고 있을 때, 터너가 찾아와서 보고를 올렸다.
“아가씨들, 방금 전화가 왔는데 사장이랑 리즈 양은 내일 오전에 올 거래.”
그 말에 앤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머물 만한 곳은 있대요?”
“그게, 오늘 찾아간 보육원에서 하룻밤 신세 질 거래.”
“그게 뭐야. 무드 없게…….”
투덜거리며 고개를 내젓던 앤지는 창문에 비치는 벌건 불빛을 보았다.
주변 거리를 밝힌 전등과는 사뭇 다르게 불길해 보였다.
“어디 불이라도 난 건가?”
“그러고 보니 타는 냄새가 나는걸.”
혹시 호텔 부근에서 불이 난 거라면 큰일이다.
냉큼 로비로 내려간 터너는 직원에게 어디에 화재가 났는지 물어보았다.
“그렇잖아도 소방서에 연락해 봤습니다. 청계천 판자촌에서 불이 났다고 하네요.”
“뭐라고요? 판자촌에요?”
“네, 거기 종종 실화로 불이 납니다. 겨울철에는 특히… 앗! 어디 가십니까?”
직원이 만류하기도 전에 터너는 청계천 쪽으로 달려갔다.
얼마 전에 구호품을 나누어 주었던 판자촌의 아이들.
부디 그 아이들에게 별일이 없기를 바랐지만…….
“불이야! 불!”
“얼른 물 가지고 와!”
“이거 놔요. 우리 애들이 아직 못 나왔다고!”
불을 끄느라 정신없이 쫓아다니는 사람들, 곁에 없는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하는 사람들과 화상을 입고 고통스러워하는 부상자들 등등.
붉은 화마가 집어삼킨 판자촌과 그 주변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마치 어린 시절에 보았던, 독일군의 공습을 당했을 때 광경이랑 비슷했다.
터너는 왠지 모르게 분한 마음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 자신이 도움을 준 사람들이 이런 재난과 고통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웃옷을 집어 던진 그는 곧장 화마를 향해 달려갔다.
***
1. 의친왕의 10남인 이석 씨가 가수가 되었을 때 순정효황후에게 크게 혼이 났다고 합니다.
그래도 TV에 나온 이석 씨를 보고 노래 참 잘한다고 칭찬해 줬다고 하네요.
2. 당시 판자촌에는 화재가 빈번했습니다. 밀집한 거주지에 실화가 빈번했기 때문인데, 소방로가 없어서 제대로 진화도 못했다고 합니다.
특히 화재가 났을 때만 사후 대책을 논의하고, 실질적인 대책을 내놓진 않았기 때문에 이후에도 화재 사고는 빈번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