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07. 나쁜 놈들 전성시대
‘전쟁을 치른 가난한 나라라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터너는 골목에서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아이들을 보았다.
꼬질꼬질하고 깡마른 게 영양 상태가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어른들이라고 별 차이는 없었다.
어둡고 주름진 얼굴에 고단함과 우울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두리번거리며 걸어가던 터너는 광주리를 든 중년 여성과 부딪쳤다.
“Oh, Sorry.”
그는 아주머니가 광주리에서 흘린 채소들을 줍는 것을 거들었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리고 말았다.
‘이거 상한 거 아닌가?’
채소는 너덜너덜하게 시들었을 뿐만 아니라, 뭉그러져 이상한 냄새까지 났다.
그런데도 아주머니는 버리기는커녕 서둘러 주워 담아서 가 버렸다.
‘설마 그 음식 쓰레기를 먹진 않겠지?’
닭이나 염소 같은 가축에게 주려는 게 틀림없다.
그러나 가축을 본 적이 없다는 점이 신경 쓰였다.
“윽, 여기는……?”
판자촌을 계속 둘러보며 가던 터너는 엄청난 악취에 코와 입을 가렸다.
제방에 나무와 넝마 조각으로 만든 움집 같은 것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아까 본 판자촌도 심한 수준이었는데, 여기를 보고 있자니 오히려 그곳이 사람 사는 곳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정말 이런 데도 사람이 사나?’
짐승 우리 같은 곳인데 진짜 사람이 살았다.
이곳에 사는 이들은 눈에 생기가 없었다.
그나마 젊고 힘 좀 있다 싶은 사람들은 불만과 울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터너는 그 눈빛이 익숙했다.
바로 부랑자로 뒷골목을 전전하던 시절의 자신과 닮아 있었으므로.
하지만…….
‘내가 품은 불만은 이들의 현실에 비하면 사치스러운 수준이겠군.’
사람이 이렇게 살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나락 밑의 나락.
그 참혹한 풍경에 멍하니 넋이 나가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건네 왔다.
“누구십니까? 선교회 쪽 분입니까?”
고개를 돌리자, 상자를 든 흑인 군인이 있었다.
“아뇨. 그게, 지갑을 찾으러 왔는데…….”
“자선 활동 하러 온 건 아니신 모양이군요. 얼른 가세요. 이 개미굴에는 딱히 볼만한 건 없으니까.”
“개미굴이요?”
“그래요. 저기 판잣집에서도 살기 힘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죠.”
그리 충고한 흑인 군인은 자신과 함께 온 미군 병사들이나 자선 단체 사람들과 함께 빈민들에게 구호품을 전달했다.
구호품을 받기 위해 와르르 몰려나온 사람들을 보자니, 정말 개미 떼 같았다.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터너는 발걸음을 돌려 동대문 운동장으로 되돌아왔다.
“이봐, 어딜 갔었어? 한참 기다렸다고.”
경기장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던 경호원 하나가 터너에게 투덜댔다.
“다른 사람들은요?”
“다들 호텔로 돌아갔어. 난 네가 오길 기다리느라 남았던 거고. 근데 리즈 아가씨의 지갑은 찾았나?”
“예.”
터너는 소매치기에게서 되찾은 지갑을 경호원에게 건넸다.
“용케도 찾아왔군. 표정만 보면 못 찾은 것 같아 보였는데.”
“차라리 못 찾은 편이 낫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터너는 경호원과 함께 호텔로 돌아갔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좀 전에 보았던 암울한 풍경들이 쉬 지워지지 않았다.
***
“허, 자네가 이준영이군. 실물로 보니 훨씬 잘생겼는걸.”
저녁에 준영은 약속한 대로 대한축구협회장 김윤기와 김용식, 김화집 선생을 만났다.
김용식 선생은 이 만남을 꽤 고대했던지 상당히 흥분한 기색을 보였다.
“완전히 장군감이야. 서양 선수들이 괜히 막 튕겨 나가는 게 아니구만!”
“장군이라니, 이 사람아. 이 친구는 왕이야! 축구왕!”
10,000일 훈련 계획을 세우고 현역 은퇴 후에도, 아니 노년에도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을 정도로 축구에 강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대한민국 축구의 어버이 김용식.
그는 준영에게 연방 질문을 건넸다.
“이번 월드컵에서 새로운 전술이 나왔다면서? 브라질이 4백 수비를 썼다던데?”
“예, 4-2-4 전술이죠. 저희 팀이나 영국의 여러 구단들도 도입해서 응용하고 있습니다.”
“그 전술을 상대해 보거나 뛰어 보니 어떻던가?”
“기존의 WM이나 MM 전술보다 진일보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대로 운용하기 위해선…….”
김용식은 차려진 술이나 안주도 마다한 채 수첩까지 꺼내 놓으며 준영과 한 이야기들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창의성 있는 선수, 특히 공수 양쪽 측면에서 활발히 움직일 윙어나 풀백이 필요하다는 건가?”
“네, 체력도 강하고 기술적으로도 뛰어나야 합니다.”
김용식에 이어 이번에는 김화집 선생이 질문을 건넸다.
“난 예전에 여자 선수들을 지도해서 여자 축구에 관심이 많아. 그래서 묻는데, 영국 쪽 사정은 어떤가?”
“여자 축구요? FA에서 금지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축구에 적합하지 않다면서 말입니다.”
그 문제는 영국 신문에서 계속 언급되고 있었다.
1890년대엔 여자 축구팀도 많이 있었고, 인기도 많았다.
그러나 보수적인 FA가 1921년 여자 축구를 금지하면서 리그가 중단되었다.
물론 이에 반발하는 여성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팀을 꾸려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여성 인권 활동가들이 이를 지원하고 있다고 들었다.
“거참, 서양 사회는 꽤 진보적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구먼.”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많이 달라질 거라고 봅니다.”
그리 말하던 준영은 약간 의아함을 느꼈다.
이들은 모두 현재 대한민국 축구계에서 가장 높으신 분들이다.
그런데 분명히 언급할 거라 예상했던 이야기를 안 하고 있었다.
이에 준영이 먼저 운을 뗐다.
“신문을 보니까 절 국가대표팀에 발탁하는 것에 대해서 국민적인 기대가 높은 모양이던데, 협회장님이나 두 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아, 그거……. 하긴 이제 절차상 문제가 없지.”
준영은 이번에 문화 훈장과 함께 대한민국 국적을 받았다.
그러므로 대한민국 대표팀에서 뛰어도 절차상 문제가 없다.
본의 아니지만, 여기에 영국 왕실이 협력을 했다.
원래 영국 법률에는 본토 시민권자 외에는 이중 국적이 안 된다.
즉, 원래 준영이 가진 홍콩 국적으로는 불가능했던 것.
하지만 지난 월드컵이 끝나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로열 빅토리아 훈장과 더불어 영국 본토 시민권을 하사하면서 이중 국적 보유가 가능해졌다.
당연히 양국 대표팀에서 뛰는 것도 현행 규정상 문제가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윤기 협회장이나 김용식, 김화집 선생은 크게 기대감이 없어 보였다.
“높으신 양반들이나 국민들이 기대감을 갖고 있긴 한데, 현실적으로 힘들잖나. 일본이나 중국도 아니고, 머나먼 영국에서 선수를 차출하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하긴, 왕래가 쉽지 않으니까요.”
당장 남미나 유럽 국가들조차도 해외 리그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은 대표팀에 잘 부르지 않았다.
21세기에도 한국의 유럽파 선수들이 이 문제로 곤란을 겪고 있는데, 하물며 지금은 말할 것도 없다.
“무엇보다 자네 입장이나 의사가 정확히 어떤지 알 수 없고 말이야.”
“저는…….”
준영이 이 문제에 대해서 대답하려는 순간, 갑자기 웬 경찰들이 식당 안으로 들이닥쳤다.
“무슨 일입니까?”
“이준영 선수, 곽영주 경무관님이 찾으십니다.”
“갑자기 무슨 일로?”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빨리 모셔 오란 얘기만 들었습니다.”
가기 싫은데.
준영은 무시해 버리고 싶었지만, 마음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야 영국 시민권도 있으니 함부로 건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곽영주라면 ‘너희가 뭔데 이준영이를 붙잡고 있냐.’라면서 이곳에 있던 분들에게 분풀이를 하려 들지 모른다.
“죄송합니다, 선생님들. 아무래도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지. 다음에 또 만나세나.”
준영은 다음을 기약하며 세 사람과 헤어졌다.
***
준영이 경찰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대원각이라는 요정(料亭)이었다.
가야금 소리가 울리는 화려한 전각의 방 안으로 들어서니, 곽영주가 두 남자와 술잔을 주고받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엥? 유지광?’
2명 중 한 명은 낮에 봤던 유지광.
그렇다면 남은 한 명은 악명 높은 동대문의 보스 이정재일까?
“여, 이제 왔구만. 한참 기다리고 있었어.”
준영에게 자리를 권한 곽영주는 곧장 그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늦은 시간에 갑자기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거참, 사람도……. 꼭 일이 있어야 부르나?”
일이 없어도 부를 수는 있지만, 그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준영이 고개를 돌려 따라 준 술을 홀짝일 때, 곽영주가 말했다.
“여기 지광이한테 들으니까, 임 회장이 만나고 싶어 하는데 준영이 자네가 거절했다며?”
“임 회장?”
준영은 자신이 이정재로 착각했던 인물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30대 중반의 사내는 날카롭게 준영을 째려보며 자신을 소개했다.
“동대문의 임화수요.”
‘헐, 또 드라마에 나온 사람이네.’
이러다가 김두한이나 시라소니도 만나게 되는 건 아닐까?
아무튼 소문이 썩 좋지 않은 인물이니 주의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제가 알기로 임 회장님은 문화계… 그러니까 영화 쪽으로 일하신다고 들었는데, 저는 왜 찾으신 건지?”
준영이 아는 척을 하자, 임화수의 표정도 조금 부드럽게 풀렸다.
그러곤 바로 용건을 이야기했다.
“내가 올해 대통령 각하의 일대기를 소재로 대작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데, 이 선수의 도움이 필요해서 말이오.”
“제 도움? 혹시 제작비 지원을 바라시는 겁니까?”
“아니. 돈은 필요 없고, 배우가 필요하오.”
임화수는 술로 입을 축인 뒤 말을 이어 나갔다.
“작년에 오드리 헵번이 한국에 갑자기 찾아온 일이 있었소. 자선 사업 때문이라고 하던데, 이 선수와 관련 있다면서?”
“예, 헵번 씨가 저희 상품 모델을 해 주셨고, 상품 수익의 일부를 전쟁 난민 구호에 쓰기로 계약을 했었죠.”
“그래, 그럼 오드리 헵번하고도 꽤 친하겠구만.”
임화수의 기대 어린 반응을 본 준영은 그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눈치챘다.
자신이 만드는 관제 영화에 오드리 헵번을 출연시켜 볼 생각인 모양이었다.
“헵번 씨를 영부인 여사 역으로 출연시켜 보려고요?”
“하하하, 맞아! 잘 아는구만!”
준영은 내심 어이가 없었다.
김칫국을 들이켜도 정도가 있지.
광고 계약 이후로 헵번과 몇 번 더 만나고 연락을 주고받으며 친분을 쌓은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할리우드 대스타가 한국의 관제 영화 따위에 나오려 하겠는가.
혹시나 헵번이 관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만류할 생각이었다.
임화수는 영화계에서 꽤 악명 높은 인간이니까.
“생각하시는 것만큼 전 헵번 씨와 친한 건 아닙니다. 거기다 그쪽도 신작 촬영 때문에 바쁘고요. 하지만 일단 얘기는 해 보겠습니다.”
“꼭 설득해 주게. 나라의 위상이 달린 일이야.”
‘나라의 위상이 달렸으니, 거절하도록 설득할 거다, 인마.’
참으로 빌어먹을 녀석들.
자기네 위신이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사람을 멋대로 이용하려 들다니.
마음 같아서는 술상 확 엎어 버리고 머리통에 사커킥을 먹여 주고 싶었다.
물론 그랬다간 뒷일이 너무나 귀찮아지니 참아야 했다.
‘아니지, 억관 아저씨 말대로 이용해 먹어야지. 어차피 1~2년 뒤에 쫄딱 망하고 개털 될 놈들이니까.’
그러니 그 전에 쪽쪽 빨아먹자.
그리 마음먹은 준영은 이 탐욕스러운 놈들이 덥석 물 만한 대형 떡밥을 뿌렸다.
***
실제 영국에서 여자 축구 리그가 창설되었을 때, 그 인기는 남자 축구 못지않았답니다.
관중 수도 많았고, 박싱데이 같은 때는 수천 명이 표를 구하지 못해 아우성을 칠 정도였다고 하지요.
FA가 보수적인 사상으로 탄압한 이면에는 여자 축구의 인기가 남자 축구를 뛰어넘을까 우려해서 그랬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아무튼 1921년 영국에서 금지된 여자 축구는 1969년 여자축구협회가 결성되면서 해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