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06. 시대가 시대인 만큼
“이준영이 직접 돌파해 온다!”
동대문 경기장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준영에게 쏠렸다.
그의 움직임에 가장 주목한 것은 그를 막아야 했던 연고대 연합팀 선수들.
제일 먼저 마주친 선수가 태클을 날렸지만, 준영이 재빨리 방향을 전환하면서 제쳐 버렸다.
‘용감하군. 맨땅에서 태클이라니.’
감탄하며 전진하는 사이, 다른 선수가 앞을 가로막았다.
침착하게 길목을 막으려 애썼지만, 그 역시 준영이 펼친 스텝 오버에 중심이 무너지며 주저앉고 말았다.
“제길!”
수비수들이 연거푸 제쳐지자, 골키퍼가 각을 좁히며 뛰어나왔다.
하지만 달려 나온 것이 허무하게도 준영이 가볍게 차올린 로빙슛에 그대로 골이 들어가 버렸다.
그 화려한 개인기와 우아한 슛에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와, 봤어? 방금 그거?”
“저런 드리블 기술은 처음 봐.”
“괜히 축구왕이라 불리는 게 아니구만!”
충격과 감탄이 오가는 가운데, 연고대 연합팀 공격수 차태성은 준영에게 말을 건넸다.
“아니, 대체 그런 기술은 어디서 배운 겁니까?”
“비밀.”
“예?”
“하지만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 가르쳐 줄게요. 습득하는 건 본인 몫입니다.”
한 수 지도해 준다는 말에 차태성과 대학 선수들은 반색을 했다.
이를 본 최정민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봐, 아우님, 우리는?”
“걱정 마세요. 다 같이 가르쳐 드릴 테니.”
최정민의 불만을 지워 버린 준영은 이후에도 여러 가지 테크닉과 뛰어난 패스를 보이며 특무대의 공격을 주도했다.
그렇게 전반전이 끝나고, 이번엔 연고대 연합팀의 유니폼을 입고 특무대와 맞섰다.
“자, 아우님, 세계 수준의 수비가 어느 정도인지 보여 달라고.”
문정식에게 공을 건네받은 최정민이 준영을 상대로 과감하게 돌파를 시도했다.
‘빠르군. 거기다 양발 사용에도 상당히 능숙하고.’
앞서 전반에 상대했던 차태성보다 한 수 위의 실력.
거기다 비록 월드 클래스는 아니지만, 상당히 투지 있는 몸놀림을 보여 주었다.
어깨싸움에서도 쉬 밀리지 않고, 공을 빼앗기자 바로 되찾아 왔다.
‘쉽게 볼 상대는 아니군. 괜히 현재 대한민국 No.1 선수가 아니라는 건가.’
‘빈틈이 없군. 하지만 한 번쯤은 제쳐 주겠어!’
투지를 불태운 최정민은 한차례 페인트 동작을 넣더니 오른발로 공을 치고 나갔다.
하지만 이내 오른발 안쪽으로 잽싸게 공의 방향을 바꿔 놓고 왼발로 툭 치며 돌파를 시도했다.
‘플립 플랩?’
‘어때? 네 경기 영상들을 보고 배운 거다.’
1957-58 시즌 FA컵 우승 경기를 시작으로, 준영이 뛴 경기의 영상들이 영화관에서 곧잘 방영되고 있었다.
최정민은 그 영상들을 빼놓지 않고 보면서 준영을 비롯한 영상에 나오는 선수들의 플레이를 익히려 애썼다.
방금 시전한 ‘발끝 돌리기’도 그렇게 해서 습득한 기술이다.
“우와, 최정민이 이준영을 제쳤어!”
“역시 아시아 최강의 공격수는 다르군.”
관중들이 감탄을 하는 사이, 상대 문전으로 들어간 최정민은 골대 상단 구석을 보며 슈팅을 날렸다.
하지만 다급히 쫓아온 준영이 발을 대면서 그 슈팅은 엉뚱한 방향으로 굴절되었다.
‘이 녀석!’
‘나도 끈기 하나는 누구에게도 안 지거든요!’
연고대 연합팀 선수가 공을 잡은 것을 확인한 준영은 곧장 전방으로 달려갔다.
동료에게 패스를 받은 차태성은 곧장 그에게 공을 건넸다.
특무대 선수 한 명을 제치고 치고 나가던 준영은 곧바로 중거리 슛을 날렸다.
뻐엉-!
선명한 궤적을 그으며 날아간 무회전의 슛은 특무대 골키퍼 함흥철의 펀칭에도 불구하고 골대 안으로 떨어졌다.
“와아아아!”
관중들의 함성과 박수가 터지는 상황에서 함흥철은 넋을 잃은 채 준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 무슨 슈팅이…….’
공을 막았던 양손이 아파서 얼얼했다.
그 통증을 느끼고 있자니, 선배 홍덕영이 푸스카스에 대해서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찌나 슛이 강한지 포탄이 날아오는 것 같았어. 정면으로 날아오는 공을 받아 냈을 땐 갈비뼈가 부러지는 줄 알았다니까.’
방금 전 이준영의 슈팅도 그 정도 위력은 되어 보였다.
‘정말 터무니없는 녀석이다.’
여전히 찌릿찌릿한 양 손목을 매만지던 함흥철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세계 최고 선수의 플레이를 보고, 그 슈팅을 받아 내는 게 흔한 기회겠는가.
이 소중하고 흥미진진한 기회를 마음껏 맛보리라 마음먹었다.
***
특무대와 연고대 연합팀의 경기는 5 대 4 특무대의 승리로 끝났다.
양 팀을 번갈아 뛰었던 준영은 총 4골을 넣으며 여러 가지 기막힌 테크닉들을 보여 주었다.
그렇게 경기를 마쳤지만, 그는 쉬이 경기장을 떠날 수 없었다.
“이준영! 이준영!”
“사인 좀 해 줘요!”
준영은 몰려오는 팬들에게 사인과 악수를 해 주었다.
악수와 사인을 받지 못한 이들 중에서는 옷깃이라도 만져 보고 싶었던지 양복 소매를 붙잡기도 했다.
그 바람에 단추가 떨어지고, 심지어 소매가 찢어지는 일까지 벌어졌다.
“헉! 미, 미안합니다. 나도 모르게 그만…….”
“하하, 괜찮아요.”
준영이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팬 서비스를 계속하고 있을 때였다.
가만히 그 광경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던 중절모의 남자가 손짓으로 건달들을 불러들였다.
그렇게 몰려온 건달들은 준영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에게 발길질을 하고 각목을 휘둘러 댔다.
“아악! 무, 무슨 짓이오?”
“닥치고 꺼져!”
“뭘 거지새끼들처럼 몰려와서 GR이야!”
느닷없이 벌어진 상황에 준영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러다 어린 학생이 더벅머리 건달의 발길질에 채여 쓰러지는 광경을 보고 곧장 달려들었다.
“야 인마! 무슨 짓이야!”
발끈한 준영이 확 떠밀어 버리자, 건달이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아야야…….”
“괜찮니? 안 다쳤어?”
아이의 안부를 살피던 준영.
부축해 주려고 아이에게 손을 내밀던 그의 뒤로 아까 떠밀려 쓰러졌던 건달이 각목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이 새끼, 공 좀 찬다고 까불지 마!”
하지만 그가 내리친 각목은 준영의 경호를 맡은 로베르트의 팔에 막혔다.
로베르트는 곧장 건달을 후려쳐서 쓰러트렸다.
“아앗, 정식이 형님!”
“큭, 이 코쟁이 새끼가!”
정식이라 불린 더벅머리 건달과 그의 부하들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으르렁댔다.
그러자 한쪽에서 지켜보던 특무대와 연고대 선수들이 우르르 달려와 준영과 로베르트를 둘러쌌다.
금방이라도 충돌할 듯한 상황에서 건달들을 불러들였던 중절모가 나섰다.
“야, 돼지! 너 뭘 하고 있는 거야?”
“크, 큰형님, 그게…….”
“군중들을 해산시켜야지, 왜 선수에게 손을 대려고 해!”
그 선수 놈이 군중 해산을 방해했는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은 돼지 신정식이 물러나자, 큰형님이란 작자가 준영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이준영 선수. 배운 게 없는 애들이라 실수를 했습니다.”
“사과는 내가 아니라 저분들에게 해야죠.”
준영의 말에 건달들의 대장은 자신들을 쏘아보는 군중들을 쓱 둘러보다가 이내 무시해 버렸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귀한 손님을 모셔 가야 하는데 말로 해서는 영 듣지 않으니…….”
“말로 하려고 노력은 했습니까? 그리고 날 데려가겠다고?”
“네, 이 선수와 만나기를 바라는 분이 있습니다.”
“누군데요? 이 경기 끝나고 만날 분들은 따로 있는데?”
이따 저녁에 현 대한축구협회 회장 김윤기와 훗날 한국 축구의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김용식, 김화집 선생과 만날 예정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자신을 데려가겠다는 이는 누구란 말인가?
“혹시 축구계에 종사하는 분입니까?”
“아뇨. 그렇진 않지만…….”
“만나고 싶으면 사전에 연락하라고 하십쇼.”
준영이 딱 잘라 거절하자, 건달 대장은 무섭게 째려보다가 부하들을 데리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상황이 종료되자, 최정민이 다가와서 준영을 툭 쳤다.
“어이, 아우님, 저치가 누군지 알기나 해?”
“누군데요? 척 봐도 깡패 같은데, 조심해야 할 사람입니까?”
전혀 모르겠다는 준영의 기색에 최정민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깡패 맞아. 유지광이란 작자인데, 서울 시내에서 아주 유명해. 권력자들하고도 친한 모양이던데…….”
‘유지광? 저 인간이?’
드라마에 나온 적이 있는 옛날 정치 깡패를 만날 줄이야.
생각해 보니 만날 만했다.
지금이 드라마 배경 시대인 데다, 장소도 유지광이 몸담은 동대문파의 관리 구역이니까.
‘실물은 배우보다 못생겼네.’
체격도 왜소한 게 싸움도 잘할 것 같지 않았다.
다만 눈빛을 보면 꽤 독한 기질이 있어 보였다.
‘형님 말대로 조심하는 게 좋겠다.’
여긴 자신이 아는 대한민국이 아니다.
아무리 국민적인 스타에 대통령에게 호의를 받고 있다 해도 어디에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른다.
고국으로 돌아와도 마음 놓을 수 없다는 현실이 준영의 입장에선 씁쓸하기만 했다.
***
준영이 경기를 마쳤을 즈음.
리즈와 그녀의 동생들은 다른 출구로 나와 준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야는 언제 오는 거지?”
“조금만 기다려, 카린. 준은 인기가 많으니까 좀 기다려야 할 거야.”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리즈에게로 웬 거지 같은 행색의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한 푼만 줘요!”
“원 딸라 플리즈!”
거지 같은 행색이 아니라 진짜 거지 애들.
윌리엄 터너를 비롯해 자매들의 경호를 맡고 있는 경호원들이 아이들을 밀어냈다.
“저기, 너무 야박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요. 불쌍해 보이니까 적선해 주죠.”
“아가씨, 이런 애들 얕보다간 큰코다칠 수 있어요.”
뒷골목 생태가 어떤지 잘 아는 터너는 경고했지만, 리즈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갑을 꺼내 아이들에게 동전을 쥐여 줬다.
그런데 그때, 뒤쪽에 있던 짱구 머리 녀석이 번개같이 리즈의 지갑을 낚아채서 도망쳤다.
“어머!”
“쳇, 내 이럴 줄 알았지.”
터너는 곧장 짱구 머리를 쫓아갔다.
금방 잡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소매치기 녀석은 무척이나 재빨랐다.
전차와 자동차가 달리는 찻길을 가로지른 녀석은 청계천 다리를 건너 쭉 늘어선 판자촌으로 내뺐다.
“이 자식, 내가 놓칠 줄 알고!”
점점 거리를 좁힌 터너는 마침내 소매치기를 잡는 데 성공했다.
“Damn Thief!”
“자, 잘못했어요. 한 번만 봐주세요.”
덜미를 잡힌 짱구 머리는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빌었다.
배가 고파 그랬다는 둥, 경찰은 부르지 말라는 둥 떠들어 댔지만, 터너가 알아들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꺼져, 인마. 한 번만 더 그러면 손목이 부러질 줄 알아.”
지갑만 회수하고 소매치기를 쫓아 버린 터너.
동대문 경기장 쪽으로 돌아가던 그는 뒤늦게 추레한 판자촌을 보게 되었다.
‘하아, 뭐 이런 데가 다 있지?’
곳곳에 나뒹구는 쓰레기와 분뇨, 여기저기 고인 진흙탕.
자신이 살았던 맨체스터 뒷골목은 이 누더기 같은 판자촌에 비하면 정말 양호하다 싶은 수준이었다.
***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1950년대 청계천의 모습입니다.
모 방송사 뉴스에서 이때 사진을 보여 주면서 가난해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고 하는데, 전 그 말을 별로 믿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