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90화 (190/400)

Round 190. Brothers

1958년 8월 23일.

맨유의 1958-59 시즌 첫 경기를 보기 위해 올드 트래퍼드로 5만여 명의 관중들이 몰렸다.

“와, 이런 군것질거리도 진화를 하네.”

윌리엄 터너는 스낵바에서 파는 호떡에 선명하게 새겨진 ‘Victory’라는 단어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래, 승리를 맛보고 승리를 위해 응원해 주지.”

게 눈 감추듯 호떡을 뚝딱 먹어 치운 터너는 자신처럼 레플리카 차림을 한 서포터들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12번째 선수들.

그들 중에는 전직 맨유 선수들도 있었다.

“오랜만이야. 잘들 지냈나?”

“따분해 죽는 줄 알았어요. 개막전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몰라요.”

은퇴한 선후배 선수들은 잠시 담소를 나누다, 서포터들을 이끌고 관중석으로 나왔다.

필드를 보니 경기 전 선수들이 가볍게 몸을 풀고 있었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본 관중들이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던컨이다!”

“빅 던크가 돌아왔다!”

“진짜 기다렸다고!”

던컨이 팀 훈련에 합류했다는 소식은 이미 신문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하지만 두 눈으로 직접 그의 건재한 모습을 보자 다들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Big Dunc! Big Dunc!”

던컨을 응원하는 함성과 함께 박수 소리가 한참 동안 울려 퍼졌다.

그런 팬들의 성원에 던컨은 아이처럼 밝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준영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쩝, 나도 뮌헨에서 다쳤다가 오늘 복귀전인데…….”

윙어인 알버트 스캔론은 샘나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준영이 그의 등을 툭 치며 말했다.

“억울하면 출세하랬어.”

“안 그래도 할 거야. 유나이티드에 이 알버트 스캔론이 있다는 걸 보여 줄 거라고.”

스캔론은 의욕에 가득 차 있었다.

오늘 맨유의 공격을 선도할 포지션을 맡았으니까.

“그래, 알. 오늘 경기에선 너의 활약이 중요해. 상대가 만만찮으니까 말이야.”

준영은 반대편 골대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맨유를 잔뜩 경계하고 있는 저들은 첼시 FC.

지난 시즌 맨유는 그들을 이기지 못했다.

12월 홈경기에서 0 대 1로 패하고, 4월 원정에서도 1 대 2로 졌던 것.

‘오늘은 반드시 그 패배를 설욕해 주겠어!’

준영뿐만 아니라 다른 팀원들도 전의를 피워 올렸다.

***

오후 7시.

필드에 나온 맨유와 첼시 양 팀 선수들은 킥오프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계를 보던 심판이 길게 휘슬을 울리자, 필드 외곽에 설치해 놓은 폭죽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팡! 파팡!

선수들뿐만 아니라 관중들도 처음엔 화들짝 놀랐다.

그러다 리그 개막을 알리는 축포라는 것을 알고 이내 환호성과 함께 박수를 터트렸다.

“존, 저거 네가 한 짓이지?”

“개막전인데 아무것도 없으면 심심하잖아요.”

준영의 대꾸에 빌 포크스는 못 말리겠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었다.

“회장님이 쓸데없이 돈 쓴다고 잔소리하지 않았어?”

“내 돈으로 한다니까 아무 말도 안 하던데요.”

준영은 선수일 뿐만 아니라 식품 업체와 광고 회사를 운영하는 잘나가는 사업가.

주머니가 두둑할 뿐만 아니라 구단 주식까지 다량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회장과 이사들도 지나친 요구가 아니면 반대하지 않았다.

“과연, 유럽 챔피언이면 이 정도 거창한 구석은 있어야지.”

“제아무리 유럽 챔피언이라도 우리 첼시에겐 안 된다는 걸 똑똑히 보여 주자고요, 형님!”

첼시의 수비수 피터 실렛과 찰스 실렛 형제는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맨유 공격수들을 막아 세웠다.

‘저 형제들의 실력은 여전하군.’

후방에서 경기를 보던 준영은 실렛 형제의 플레이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지난 시즌 저들의 협력 수비에 철저히 봉쇄당했던 일이 떠올랐기에.

180대의 장신인 실렛 형제는 리그에서 알아주는 콤비였다.

동생 찰스가 투지 있게 상대를 제압한다면, 형 피터는 정확하고 안정적으로 수비를 조율해 나갔다.

서로 다른 플레이와 역할을 하며 부족함을 채워 주다 보니 형제의 케미는 남다를 수밖에.

‘실력으로 따지면 형이 좀 더 뛰어나긴 하지.’

피터 실렛은 공격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패스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프리킥도 잘 차서 수비수임에도 득점도 심심찮게 터트리곤 했다.

그래서 스웨덴 월드컵 때 국가대표로 선발되었고, 빌리 라이트는 그를 잉글랜드의 차기 주장감이라고 호평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불쌍한 우리 형, 실력이 있는데도 빛을 못 보고 있으니!’

월드컵 기간 동안 윈터보텀 감독은 수비진에 변화를 주지 않았다.

덕분에 피터 실렛은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하지만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겸손했던 피터는 이에 불만을 품지 않았다.

세계적인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고 배운 것, 그리고 조국이 우승한 것에 만족했다.

하지만 동생인 찰스 실렛의 생각은 달랐다.

‘형이 출전하지 못한 건 존 Y. 리 저놈 때문이야. 수비수로서의 기량은 형이 더 나은데…….’

찰스는 이를 알아주지 않는 윈터보텀 감독도, 언론이나 축구인들도 불만스러웠다.

그래서 오늘 경기에서 저 동양인 녀석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주리라 마음먹었다.

“덤벼! 유럽 챔피언 팀의 공격력이 고작 이 정도냐?”

전의를 활활 불태운 찰스 실렛은 과감한 차징과 태클로 맨유 공격수들을 저지했다.

피터는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았지만, 한편으로 우려하는 마음도 있었다.

“찰스야, 조심해. 너무 앞으로 나가면 공간을 내주게 돼.”

“걱정 마, 형님!”

몇 차례 공격이 막히자, 후방에 있던 존 Y. 리가 움직였다.

그가 첼시 페널티 박스까지 올라오자, 찰스가 곧장 앞을 가로막았다.

유나이티드의 주장.

뛰어난 개인기와 강력한 슈팅 능력을 가진 다재다능한 플레이어.

‘득점에 자신이 있겠지? 어디 올 테면 와 봐!’

개인기가 좋은 놈이니 패스를 받으면 분명 일대일 돌파를 시도하려 할 것이다.

찰스는 그렇게 판단하고 마크를 걸었으나…….

‘아니!’

알버트 스캔론에게 패스가 오자 준영은 곧장 발끝으로 툭 쳐올려 공을 찰스의 머리 위로 넘겼다.

그와 동시에 귀신같이 측면에서 파고든 바비 찰튼이 그 공을 잡아챘다.

“앗! 아앗!”

황급히 돌아선 찰스의 낯빛이 하얗게 변했다.

바비 찰튼이 골키퍼 레지날드와 일대일 기회를 잡았기 때문.

피터 실렛이 황급히 가세했지만, 이미 바비의 발끝에서 공은 떠나고 없었다.

파앙- 철썩!

빠르고 날카로운 슈팅은 레지날드의 손끝을 스치며 골대에 박혔다.

목을 빼며 선제골을 기다리던 관중들은 일제히 열광의 함성을 터트렸다.

“골! 바비 찰튼이 넣었다!”

“역시 새로운 희망!”

팀의 시즌 첫 골, 자신의 첫 골을 의미하듯 바비 찰튼은 기자들의 카메라를 향해 검지를 올려 보였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동료들이 달려와서 얼싸안고 기쁨을 함께했다.

이렇게 신나는 분위기의 맨유와 달리 첼시 측은 깊은 침묵에 빠졌다.

가장 인상이 구겨진 건 찰스 실렛이었다.

‘이런 젠장! 분명히 돌파를 할 줄 알았는데!’

비겁하게(?) 어시스트를 할 줄이야!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던 찰스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자괴감에 빠질 필요는 없다.

아직 경기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그러니 역전도, 존 Y. 리의 콧대를 눌러 주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할 거라 믿었다.

그러나 찰스의 기대 어린 예상은 경기가 재개되고 1분도 안 되어 무너지고 말았다.

***

공이 중앙선에 놓이고 첼시의 킥으로 다시 경기가 이어졌다.

공을 잡은 첼시의 미드필더 멜 스콧에게 바비 찰튼이 달려들었다.

갑작스런 압박에 당황한 멜 스콧은 동료 존 모티모어 쪽으로 패스를 보냈다.

하지만 모티모어는 패스가 올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패스 미스잖아!”

모티모어가 잡지 못한 공은 맨유의 공격수 알렉스 퍼거슨이 잡았다.

‘크로스를…….’

힐끔 중앙에 있는 데니스 바이올렛 쪽을 바라보던 알렉스는 모티모어가 황급히 마크에 나서자 냉큼 서둘러 공을 후려 찼다.

‘앗, 너무 깊이 찼다!’

쇄도하는 데니스의 머리에 맞혀야 하는데 너무 깊숙이, 그리고 빠르게 날아갔다.

거의 슈팅에 가까운 크로스.

애매하다 보니 데니스는 그 공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런데 헷갈린 건 첼시 골키퍼 레지날드도 마찬가지.

처음에 크로스라 보고 전진했던 그는 공의 궤적을 보고 황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설마, 그럴 리가……!’

그냥 골대를 지나치겠지.

레지날드의 기대는 공이 포스트 상단 구석으로 들어가면서 처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뭐, 뭐야!”

“추가 골이다!”

“뭐라고? 벌써?”

너무나 이르게 터진 추가 골.

황당해하던 관중들은 이내 신나게 모자를 집어 던지고 머플러를 흔들어 댔다.

잔치 분위기인 맨유 쪽과 달리 첼시 선수들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귀신에 홀린 것 같군.”

알렉스 퍼거슨이 터트린 행운의 추가 골은 전세를 완전히 맨유 쪽으로 돌려 버렸다.

순식간에 2 대 0으로 스코어가 벌어지자, 첼시 선수들은 찬물을 덮어쓴 것처럼 전의가 식어 버렸다.

‘이때는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는 상황이로군.’

첼시 선수들이 넋 나간 채 허둥대는 모습을 본 준영은 21세기에서 본 만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어째 좀 불쌍했지만, 봐줄 생각은 없었다.

승부는 냉정한 것이니까.

“Go! Go, United!”

“이참에 쐐기 골을 박아!”

추가 골이 터지고 20분 동안 계속 맨유가 우세한 상태로 경기를 이어 갔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만족스럽지 않다는 듯, 관중들은 계속 열광적으로 응원을 보냈다.

붉은 레플리카를 입은 서포터들은 단체로 ‘젊은 그대’를 열창하며 전의를 북돋워 주었다.

“젊은 그대~ 잠 깨어 오라, 아아~”

흥얼흥얼 응원곡을 따라 부르던 던컨.

그는 첼시 공격수 지미 그리브스에게서 공을 가로채고 그대로 측면으로 달려 나갔다.

시원하게 쭉쭉 달려 나가는 그의 모습에 관중들의 환호성도 덩달아 높아졌다.

“와, 던컨 녀석, 완전 불도저 같잖아!”

“마크하는 상대 선수들을 다 튕겨 내고 있어!”

재활하는 동안 꾸준히 했던 웨이트 트레이닝은 던컨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거침없이 측면을 내달린 던컨은 마크하는 수비를 단 상태에서 첼시 문전으로 크로스를 날려 보냈다.

빠르고 날카로운 크로스는 쇄도하는 데니스 쪽으로 제대로 떨어졌다.

‘위험해!’

피터 실렛은 데니스에게 바싹 붙어 마크했다.

그 바람에 데니스는 헤딩슛을 하지 못한 채 공이 흘러 나갔다.

이렇게 반대편으로 나간 공을 알버트 스캔론이 잡아서 문전으로 돌파해 들어왔다.

“쳇! 얕보지 말라고!”

찰스 실렛이 태클로 스캔론이 몰고 오던 공을 밀어냈다.

그러나 멀리 가지 못했던 공은 문전으로 달려 들어온 바비 찰튼의 발끝에 걸렸다.

“슛- 고오오오올!”

“역시 월드 클래스 플레이어라니까!”

두 골째라는 듯 손가락 2개를 들어 보인 바비 찰튼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스코어 3 대 0.

맹렬히 몰아치는 맨유의 공격에 첼시 선수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또다시 눈앞에서 실점을 허용한 찰스 실렛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젠장, 내 탓이야. 내가 멍청하게 구는 바람에…….’

존 Y. 리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겠다고 했지만, 정작 진짜 막아야 할 상대를 놓쳐 버렸다.

안이했던 대가를 뼈아픈 실점으로 받은 찰스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전반 30분이 지났을 뿐이다.

경기를 뒤집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더 망신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신 차리고 뛰어야 했다.

***

피터 실렛과 찰스 실렛 형제의 부친 토머스 실렛도 사우스햄튼 FC에서 뛴 축구 선수라는군요.

본문에서 언급했듯이 피터 실렛의 실력은 빌리 라이트가 인정했을 정도로 뛰어나서 유벤투스의 오퍼를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이탈리아는 축구하기 더운 나라’(…)라면서 거절했다고 하네요.

동생 찰스 실렛은 형이 방출된 1962년 첼시에서 나와 코벤트리 시티로 이적하는데, 나중에 코벤트리의 감독을 맡아 팀에 FA컵 우승을 안겨 주기도 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