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76화 (176/400)

Round 176. 시장통에서의 만남

서독을 3 대 1로 물리친 다음 날.

잉글랜드 대표팀은 항공편으로 스톡홀름으로 이동했다.

브롬마 공항에 도착하자, 먼저 스톡홀름에 당도해 있던 축구협회의 임원과 기술위원들이 선수들을 맞았다.

“어서들 오게. 결승까지 올라오느라 정말 수고가 많았네.”

얼굴 보기 힘든 축구협회장 글로스터 공작이 친히 왕림하여 선수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공작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다.

주최국을 물리치고 준결승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디펜딩 챔피언인 서독에 역전승을 거두었으니까.

실제 영국에서는 준결승에 오른 것보다 ‘독일 놈들 콧대를 납작하게 해 줬다!’라는 점을 더 통쾌하게 여기고 있었다.

“반드시 쥘리메컵을 웸블리로 가져오겠습니다.”

“하하핫! 기대하고 있겠네.”

주장 빌리 라이트의 호언에 글로스터 공작뿐만 아니라 아서 드루리 의장과 스탠리 루스 총무도 미소를 지었다.

다만 루스 총무의 인자한 미소는 준영의 앞에 선 순간 떨떠름하게 변하고 말았다.

“인상 좀 펴세요. 기자들이 다 보고 있습니다.”

“흥, 나와 네놈의 사이가 나쁘다는 건 세상이 다 알아!”

나지막하게 투덜댄 루스도 형식상의 악수를 거부하진 않았다.

결승까지 오는 데 준영의 공이 컸음을 부정할 수는 없으니까.

“네놈의 입으로 그랬지? 참된 도리를 다하겠다고 말이야. 그 말을 꼭 지키도록 해.”

루스는 노란 원숭이가 대표팀의 핵심 전력이 되었다는 현실이 맘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마당에 마냥 부정하거나 훼방을 놓을 생각은 없었다.

‘일단 우승만 하면 그것은 대영제국의 영광이 될 테니까!’

사실 이번 월드컵은 영국 축구에 있어 상당히 뜻깊은 대회였다.

연합 왕국 소속의 4개 대표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가 모두 본선에 진출한 데다, 스코틀랜드만 빼고 모두 조 예선을 통과했다.

맏형 격인 잉글랜드는 결승까지 올랐고 말이다.

‘만약 우승까지 거둔다면 역사에 길이 남게 되겠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짓던 루스에게 글로스터 공작의 말이 들려왔다.

“총무, 그대가 선수들을 호텔까지 안내해 주도록 하시오.”

“예, 공작 전하.”

루스의 인솔하에 공항에서 나온 선수단은 버스를 타고 호텔로 이동했다.

이미 8강전을 치를 때 묵었던 곳이었기에 낯설지는 않았다.

“각자 방에서 짐을 푼 다음, 호텔 회의실로 모이도록.”

무엇 때문에 집합시키는 건지는 알 만했다.

준영이 선수들과 회의실로 가 보니, 기술위원들과 전력 분석관이 먼저 자리하고 있었다.

“어서들 와. 이미 예상했겠지만, 모두를 소집한 건 결승전 상대인 브라질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알려 주기 위해서야.”

그러면서 기술위원들과 전력 분석관은 미리 준비해 놓은 칠판에다 브라질과 프랑스의 경기 상황을 세세하게 설명했다.

‘마치 온라인 문자 중계를 적어 놓은 걸 듣는 것 같군.’

덕분에 저들이 얼마나 경기를 꼼꼼하게 보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마 우승에 대한 강한 집념이 없었다면 그렇게 애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 여기까지 들었으면 알겠지만, 집중력의 차이가 승패를 갈랐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야.”

프랑스 수비수들은 초반부터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프랑스의 주장 로베르 종케가 태클로 가린샤를 저지했지만, 걷어 낸 볼은 멀리 가지 못했다.

공을 잡아챈 브라질 선수는 박스 중앙으로 크로스를 올렸고, 딱 맞춰 침투하던 바바가 발리슛으로 시원하게 첫 골을 기록했다.

‘그 상황에선 수비수 장 자크 마르셀이 바바를 마크했어야 했는데, 놓쳐 버렸나 보군.’

이후 퐁텐이 침투 패스를 받아 골키퍼까지 제치며 동점 골을 넣지만, 전반 막판에 디디에게 다시 골을 내줬다.

후반전이 시작되자마자 프랑스는 반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흐름은 골키퍼의 실수로 시원하게 날려 버리고 말았다.

측면에서 날아온 손쉬운 크로스를 ‘어이쿠, 손이 미끄러졌네.’로 놓쳐 버리면서 바로 코앞에 있던 펠레가 소위 말하는 ‘땡큐 골’을 넣어 버린 것.

그렇게 3 대 1로 스코어가 벌어지자 프랑스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세 번째 골의 타격이 컸군. 나라도 골키퍼가 그딴 실수를 하면 멘탈이 마실 나가 버렸을 거야.’

프랑스가 한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집중력을 강조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분명히 브라질은 강하다. 특히 가린샤와 펠레 두 녀석들은 굉장한 실력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냉정하게 대응하면 결코 못 이길 상대는 아니야.”

첫째는 집중, 둘째는 냉정.

마지막으로 셋째는 끈기였다.

브라질은 웨일스의 조직적인 수비에 상당히 고전했으며, 프랑스의 반격에도 실점을 허용했다.

끈질기게 막아 내고 두들기면 승산이 있는 것이다.

‘하긴 1999년에 선배님들이 브라질을 잡았을 때도 그랬지.’

준영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경기를 떠올렸다.

인터넷 동영상 플랫폼으로 보았던 그 평가전에서 당시 한국은 브라질 정예 멤버를 상대로 끈질긴 수비로 버텨 냈고, 마지막 역습 한 방으로 승리를 따냈다.

브라질 축구 역사상 최초로 아시아 팀에게 패배한 경기였다.

준영이 그 역사적인 경기를 떠올리고 있을 때, 루스 총무가 단상 위로 올라왔다.

“미리 말해 두는데, 우승 시 제군들은 전원 1,000파운드의 추가 보너스를 받게 될 게다.”

“저, 정말입니까?”

반색을 하는 선수들의 물음에 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공작 각하께서 약속하셨다. 그뿐만이 아니지. 연말에 훈장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준영은 상금보다 훈장에 더 솔깃했다.

대영제국 훈장.

레전드 플레이어에게 걸맞은 최고의 명예가 아닌가!

‘이건 반드시 받고 말겠어!’

최고의 동기 부여에 준영의 의욕이 강하게 불타올랐다.

***

6월 26일.

전날과 마찬가지로, 가벼운 훈련으로 오전 일정을 소화한 잉글랜드 대표팀은 오후에 선수들에게 휴식 시간을 주었다.

적당히 풀어 줘야 사기 진작에 좋기 때문.

“어이, 존, 우린 지금 시내 구경을 갈 건데 같이 갈래?”

“고맙지만 같이 갈 사람이 있어.”

준영의 말에 제의를 했던 조니 헤인스는 은근한 웃음을 지었다.

“그 맨체스터에서 찾아온 아가씨 말이야? 스톡홀름까지 따라왔나 봐?”

“내 최고의 서포터니까.”

“크, 복 많은 놈!”

부러운 눈길을 보이는 헤인스를 보낸 후, 준영은 프레드로 일가가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갔다.

그리고 시간에 맞춰 내려온 리즈와 함께 택시에 올랐다.

“별일 없었어요?”

“별일?”

“스탠리 루스 총무가 스톡홀름에 왔다면서요? 그 사람, 준이랑 사이가 나쁘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그 영감님도 우승을 바라고 있어서 말이야.”

정확한 속내는 몰라도 엉뚱한 짓은 못할 것이다.

딱히 부상을 입은 것도 아닌데, 팀의 핵심 전력이나 마찬가지인 선수를 감독에게 압력을 넣어 결승전에서 제외했다가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긴다면 모를까, 패하기라도 하면 후폭풍이 장난이 아닐 것이다.

준영은 루스가 그런 도박을 할 정도로 막 나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심술을 부리기는커녕 동기 부여를 해 주려 애쓰더군.”

그러면서 준영은 훈장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 말에 리즈도 흥미를 보였다.

“훈장이라……. 받을 수만 있다면 반드시 우승해야겠네요.”

“응, 훈장 받고 나중에 기사 작위까지 받으면 나도 ‘Sir’라고 불리게 될 테니까.”

“근데 괜찮을까요, 그거?”

리즈는 약간 걱정스럽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준이 예전에 그랬잖아요. 설레발은 필패라고.”

“그렇긴 한데, 벌써 우승한 것처럼 설치는 건 아니라고. 그리고 플래그는 깨야 재미있는 법이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택시는 목적지인 스톡홀름 시청사에 도착했다.

“여기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청이래.”

“들어 본 적 있어요. 분명히 노벨상 기념 만찬이 열리는 곳이랬어요.”

그렇지 않아도 관광객들이 적지 않았다.

그 행렬에 섞여 내부로 들어간 준영과 리즈는 장엄한 황금 모자이크 장식을 보며 연방 감탄을 터트렸다.

그러곤 약 100미터 높이의 전망대로 올라가 스톡홀름 시내를 내려다보기도 했다.

“저쪽에 큰 건물은 궁전인가?”

“맞아요. 감라스탄이라고, 스톡홀름 구시가지가 있는 지역이라고 들었어요.”

전망대에서 내려온 두 사람은 시청 앞쪽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감라스탄으로 향했다.

고풍스러운 가옥들이 즐비한 거리에서 둘은 궁전과 대성당을 둘러보았다.

‘오래된 거리라 그런가? 좀 쇠퇴한 느낌도 드는군.’

인파도 제법 북적이기에 준영은 팔짱을 끼고 있는 리즈가 부딪치지 않게 보호했다.

그런데 그때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키 큰 동양인?”

“독일을 격파했던 선수 아냐?”

“어이, 사인 좀 해 줘!”

거리에서 준영을 알아본 사람들이 악수와 사인을 요청했다.

덕분에 잠시 발이 묶이는 신세가 되었다.

“준도 이제 월드 스타네요.”

“진짜 월드 스타면 꼼짝달싹도 못할걸.”

인파를 헤치고 나온 두 사람은 분수가 있는 공원에 도착했다.

그곳에선 사람들이 좌판을 세워 두고 온갖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벼룩시장인가?”

“우와, 준! 저것 봐요!”

기념품이나 골동품, 자질구레한 일상의 생필품 등등.

그뿐만 아니라 차를 비롯한 음료, 과자, 과일 같은 먹거리도 팔았다.

돌아다니느라 약간 출출했던 준영과 리즈는 군것질로 배를 채우며 시장 구경을 계속했다.

“꽃 사라. 장미 좋다. 아가씨 줘라.”

꽃을 파는 아저씨가 떠듬떠듬 영어로 건넨 말에 준영은 환전해 둔 돈으로 꽃다발 하나를 샀다.

그리고 리즈에게 건넸다.

“여왕님, 변변찮지만 선물입니다.”

“와, 고마워요!”

“근데 뭘 보고 있었어? 촛대?”

“이런 거 장식용으로 멋져 보이지 않아요?”

리즈와 함께 좌판의 상품들을 둘러보던 준영은 한쪽에서 시네마 카메라를 발견했다.

“오, 들고 다니기 딱 좋네.”

“그거 8밀리미터, 볼렉스, 메이드 인 스위스! 좋다! 거의 새것! 사라! 필름도 준다!”

앤티크한 아날로그 소형 시네마 카메라에 딱 꽂힌 준영은 곧장 구매했다.

그러고는 판매자에게서 곧장 필름 넣는 법이나 사용법 등을 배웠다.

그리고 시범 삼아 리즈를 주인공으로 촬영을 해 보았다.

“그거 왜 산 거예요? 준은 훨씬 좋은 게 있으면서.”

미래의 스마트폰을 쓰면 되지 않느냐는 리즈의 말에 준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전자 장비라는 게 언제 고장 날지 모르거든. 고칠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거고.”

더구나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같은 건 함부로 내놓고 쓸 수도 없다.

그러니 이런 물건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근데 그거 촬영한 거 나중에 보려면 영사기가 따로 필요할 거예요.”

“영사기? 둥그런 바퀴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기계 말이지? 저택 도서관에 있던 것 같은데?”

“그건 16밀리미터 전용이에요. 준이 산 건 8밀리미터니까 거기에 맞는 영사기를 써야 해요.”

“그렇구나.”

준영은 생각난 김에 영사기를 사러 가기로 했다.

벼룩시장 외곽에 가전제품 상가가 하나 있는 게 보였기에 곧장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가게에는 선객이 있었다.

“아, 달러로 지불할 거면 100달러 내쇼, 100달러!”

“Quantos?”

라디오를 고른 손님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던지 고개만 갸웃할 뿐.

주인은 답답해서 가슴을 치다 준영을 보고 반색을 했다.

“당신, 외국인이군. 혹시 이 사람이 뭐라고 하는지 알겠소?”

주인이 영어로 건넨 말에 준영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도 모르는 말이니까.

하지만 손님이 어째 낯설지 않았다.

그래서 가만히 봤더니…….

‘가린샤?’

악마의 드리블러 가린샤.

브라질 최고의 공격수를 이런 가게에서 만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

1999년 나이키 친선 경기 때 김도훈 선수(현재는 감독님^^)가 결승 골을 넣었죠.

히바우두를 필두로 한 브라질의 파상 공세를 김병지 선수가 엄청난 선방으로 막아 내고, 경기 종료 직전에 홍명보의 커트 앤 빌드업, 최성용의 측면 돌파, 김도훈의 마무리로 끝난 명승부였죠.

물론 패배한 브라질은 흑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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