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75. 우승 후보
“무슨 짓이야!”
이놈이 제정신인가.
준영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유스코비악을 바라보았다.
걷어차인 다리는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불쾌감이 컸기에 저도 모르게 손찌검을 날릴 뻔했다.
다행히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주변에서 동료나 다른 서독 선수들이 몰려와 말리고 나섰다.
“이봐, 존. 참아. 싸우면 너도 퇴장이라고.”
“맞아. 그럼 이 경기를 이겨도 결승전엔 뛸 수 없어.”
잉글랜드 쪽보다 서독 진영이 더욱 심각했다.
유스코비악이 보복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어떤 판정이 내려질지 뻔했기 때문.
바로 앞에서 목격한 선심과 대화를 나누던 졸트 주심은 방금 전 상황에 대한 판정을 내렸다.
“서독 3번 에리히 유스코비악, 퇴장!”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서독 선수들은 한숨을 푹 내쉬었고, 유스코비악은 분통한 표정으로 필드에서 퇴장했다.
“참 나, 에리히 저 자식, 도대체 왜 쓸데없는 짓을 저지른 거야? 머리에 총이라도 맞았나?”
“응. 저 녀석, 머리에 총 맞은 거 맞아.”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너 몰랐구나. 에리히 저놈, 전쟁 때 징집되었다가 머리에 총상을 입었어.”
사정을 잘 아는 이의 설명에 서독 선수들은 할 말이 없어졌다.
아무튼 지금은 유스코비악의 정신 상태나 과거를 논할 때가 아니었다.
그가 퇴장당하면서 생긴 빈자리를 어떻게 메우느냐가 중요했으니까.
“휴, 발터 선배도 정상이 아닌데 이런 악재까지 벌어지다니.”
“어쩔 수 없어. 라인을 내린 다음에 연장전이 끝날 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연장전까지 무승부로 끝나면 재경기를 한다.
서독 선수들은 재경기를 노리는 것으로 결정하고 곧장 수세로 전환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쪽에서 이를 가만히 두고 볼 리 만무했다.
“다들 올라가! 반드시 역전 골을 만들어 내야 한다!”
“가서 크라우트를 끝장내!”
윈터보텀 감독이나 주장 빌리 라이트의 닦달은 필요 없었다.
선수들 역시 승리를 갈구하고 있었으니까.
이는 독일에 대한 감정이나 축구 종가의 자존심 때문은 아니었다.
‘이기면 보너스다!’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지!’
‘반드시 결승전에 갈 테다!’
현재 FIFA에서 지불하는 선수 개인당 국제 경기 참가 수당은 약 400파운드.
여기에 축구협회가 지불하는 출전 보너스와 기여도에 따른 수당이 또 있었다.
선수 주급이 20파운드가 못 되는 상황에서 이는 정말 큰돈이었다.
현재 영국의 평균 주택 가격이 약 2,000파운드인데, 다섯 번째 경기를 치르고 있는 잉글랜드 선수들은 다들 집 한 채는 사고도 남을 정도로 벌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더 벌 수 있는 기회가 코앞까지 왔는데 그 누가 마다하겠는가.
한 가정의 가장인 선수들은 눈이 완전히 뒤집어진 상태로 뛰어다녔다.
“로버트, 리그 득점왕이면 한 골 정도는 넣어 보라고!”
“역전 골 넣는 녀석에겐 내가 따로 20파운드 준다!”
“나도!”
이렇게 승리에 혈안이 되어 전진하다 보니, 거의 반코트 경기로 진행되어 갔다.
잉글랜드의 거센 공세에 시달리는 서독은 위태위태한 상황에서도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젠장, 전쟁 말기에 방공호에 숨어 있던 때가 생각나는군.”
“어떻게든 버텨! 골이 그리 쉽게 들어가는 게 아니야.”
서독의 주장 한스 셰퍼는 수비를 거드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역습할 방법을 찾았다.
‘놈들이 상당히 많이 전진해 있어. 수비수들도 중앙선을 들락거리고 있고…….’
저 느슨한 라인 사이로 한번 제대로 돌파할 수 있다면!
그럼 역전 골에 혈안이 된 저 영국 놈들을 죄다 얼간이로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때, 공을 가로챈 호어스트 에켈이 측면을 달려가는 헬무트 란 쪽으로 패스를 보냈다.
지난 대회 기적을 만들어 낸 란은 단 한 번의 찬스를 성공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하지만 바비 찰튼이 무섭게 추격해 오더니, 태클로 그의 돌파를 저지해 냈다.
‘젠장, 저 금발 애송이 녀석, 이렇게 빠를 줄은……!’
단 한 명의 동료라도 뒤쫓아 왔으면 이렇게 볼을 빼앗기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한스 셰퍼나 우베 젤러는 수비 가담을 하느라 따라오지 못했다.
프리츠 발터의 경우엔 뛸 수 없게 되자, 아예 페널티 박스를 서성이며 장애물 역할이나 하는 상황이었다.
‘절대 질 수 없어! 우린 월드컵 챔피언이다! 다시 왕좌에 오를 거라고!’
10명의 서독 선수들은 똘똘 뭉쳐 버티고 또 버텼다.
페널티 박스에 두 줄로 모여서 돌파를 저지하고 크로스를 걷어 냈다.
그리고 슈팅이 날아오면 몸을 날려 저지해 냈다.
“완전 베를린 공방전이구만.”
“가서 보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하는군요.”
“가 봤거든. 난 주코프 장군 휘하 부대의 IS-2 전차병이었다고.”
소련에서 온 외신 기자가 브란덴부르크 문 앞으로 진격했던 썰을 풀고 있을 때였다.
서독 수비수가 걷어 낸 공을 잡은 준영이 전진해서 스치마니악을 제쳐 내고 슈팅을 날렸다.
“들어가게 둘 것 같냐!”
서독 수비수 헤르베르트 에르하르트가 발을 뻗어 준영의 슛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워낙에 강했던 슛은 굴절이 되어 골키퍼가 움직이는 쪽과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위, 위험해!”
당황한 헤르켄라스 골키퍼가 황급히 발을 뻗어 공을 걷어 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그 공이 굴러간 곳은 페널티 박스 중앙에 있던 로버트 A. 스미스의 코앞.
리그 득점왕인 스미스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골! 골인! 후반 36분, 잉글랜드 19번 공격수 스미스가 키퍼가 쳐 낸 공을 밀어 넣어 마침내 경기를 역전시켰습니다!」
은근히 잉글랜드를 응원하던 라디오 중계 캐스터는 흥분해서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가장 흥분한 건 잉글랜드 선수들, 특히 골을 넣은 스미스였다.
공원에 나온 강아지처럼 신나게 내달리던 그는 도중에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쓰러진 그에게로 동료들이 달려들었다.
“하하핫! 해냈어! 드디어 해냈… 아아악! 그만! 아프다고!”
준영은 스미스가 죽기(?) 전에 구조해 냈다.
그러곤 서독 진영으로 눈을 돌렸다.
‘끝났군.’
끈질기게 버티던 그들도 역전 골이 터지자 너 나 할 것 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아직 10분가량의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디펜딩 챔피언의 운명은 이미 패배로 결정 나 버렸다.
***
또 다른 준결승 경기가 치러지고 있는 스톡홀롬 교외의 로순다 경기장.
이곳에서 레몽 코파가 이끄는 프랑스 축구대표팀이 남미의 강호 브라질과 격돌했다.
“이번 대회, 프랑스가 우승을 하겠지?
“조 예선에서 유고슬라비아에 분패하긴 했지만, 워낙 전력이 막강하니 말이지.”
레알 마드리드의 한 축인 레몽 코파, 이번 대회 득점왕 레이스 1위를 달리고 있는 쥐스트 퐁텐, 유럽 최고의 수비수로 꼽히는 로베르 종케 등등.
모두 유럽 최고 수준의 일류 플레이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에 비하면 브라질은 웨일스를 상대로 연장전까지 가서 빌빌거릴 정도니…….”
“웨일스도 무시할 만한 팀은 아니던데? 헝가리를 잡고 8강에 올랐잖아.”
“매직 마자르의 시대는 끝났어. 이젠 레 블뢰(Les Bleus) 군단의 시대야.”
프랑스 기자들, 그리고 원정 응원을 온 프랑스의 축구 팬들은 낙승을 확신했다.
하지만 오후 7시에 휘슬이 울린 후,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경기가 펼쳐졌다.
경기 시작 겨우 2분 만에 브라질의 바바가 선제골을 넣었던 것!
7분 후 퐁텐이 동점 골을 넣으며 대등하게 경기가 진행되는가 했는데, 39분 디디가 골대 상단 구석으로 엄청난 중거리 슛을 때려 넣으며 다시 앞서 나갔다.
“브라질이 잘하는 건가? 프랑스가 못하는 건가?”
“하하핫, 걱정 마시오. 후반전에 멋지게 역전을 할 테니.”
고국의 팀을 응원하러 온 제라르 드 보그 백작은 친우들 앞에서 큰소리를 탕탕 쳤다.
하지만 그들이 후반에 본 것은 충격과 공포.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 낸 괴물이었다.
“뭐, 뭐야, 저 애송이는……!”
보그 백작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후반 7분의 실점이야 골키퍼 클로드 아베스의 멍청한 실책 때문이라 할 만했다.
하지만 후반 19분과 30분의 실점은 애송이가 박스 안에서 수비수들을 양파 까듯 손쉽게 벗겨 내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애송이의 해트트릭으로 스코어는 순식간에 5 대 1.
레 블뢰 최고의 황금 세대는 카나리아 군단의 괴물에게 무참하게 갈려 나가고 있었다.
“11번의 가린샤가 측면을 잘 흔들어 준 덕분이지만… 기회를 놓치지 않는 저 펠레라는 꼬마의 기량도 굉장하군요.”
“펠레?”
보그 백작의 물음에 그의 친우가 대회 팸플릿을 보며 대답했다.
“별명입니다. 본명은 이드송 아란치스 두나시멘투라고 하는군요.”
그 말에 보그 백작의 머리에 번쩍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굉장한 선수가 있습니다. 현재 브라질 명문 산토스 FC에서 뛰고 있죠.’
‘그래? 이름이 뭔가?’
‘이드송 아란치스 두나시멘투입니다.’
‘으음… 들어 본 적이 없군. 그렇게 대단한가?’
‘충격과 공포죠.’
작년 맨체스터의 사교계에서 만났던 동양인 선수 존 Y. 리와의 대화.
그가 해 준 말이 맞았다.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정말 저런 괴물일 줄이야!
‘쩝, 프랑스와 영국의 결승전을 기대했는데……. 이래서는 프레드로 남작과 내기는 못하겠군.’
보그 백작이 시무룩해하고 있는 사이, 로제르 피아토니가 만회 골을 넣었다.
하지만 경기는 끝나 가고 있었고, 전세를 되돌리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삐익-!
10분 후, 종료 휘슬과 함께 레 블뢰 군단의 진군은 막을 내렸다.
그리고 천재 스트라이커 펠레의 이름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
잉글랜드와 서독의 경기는 종료 직전 스미스가 한 골을 더 추가하면서 3 대 1로 마무리되었다.
8강 스웨덴전에 이어 이번에도 역전승을 일궈 낸 잉글랜드 선수들은 경기가 끝난 후에도 쉬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결승이야! 우리가 결승에 올랐다고!”
“이제 축구 종가 간판에 부끄럽지 않겠군.”
“무슨 소리! 우승을 해야죠!”
“그래, 내친김에 우승 한번 해 보자!”
클럽팀도 유럽 정상에 올랐는데, 국가대표팀이 세계 정상에 오르지 못할 까닭이 무엇인가.
자신감이 폭발해 있는 선수들 앞으로 윈터보텀 감독이 나타났다.
그 역시 좀 전까지 승전으로 들떠 있다가 지금은 어느 정도 진정한 상태였다.
마치 찬물을 끼얹는 듯한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모두들 잘 들어. 방금 전 스톡홀름에 파견 나가 있는 협회 임원에게서 전화가 왔어.”
“결승 상대 때문입니까?”
“그래, 브라질이 프랑스를 5 대 2로 대파했다고 하는군.”
역시나.
준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른 선수들은 아니었다.
다들 둥그레진 눈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 예선에서 자신들의 맹공에 쩔쩔매다가 겨우 무승부를 거둔 팀.
그런 팀이 유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던 프랑스를 대파했다니!
“그럴 수가……. 프랑스가 그렇게 박살 날 팀이 아닐 텐데요?”
“그렇게 되었다는군. 우리와의 경기에 나오지 않았던 브라질 선수 둘이 맹활약을 한 모양이야.”
윈터보텀 감독은 덤덤한 기색을 보이는 준영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존, 자네는 알고 있었나? 출전하지 않았다며 아쉬워했던 가린샤와 펠레 그 둘이 엄청난 선수들이었다는 거 말이야.”
“물론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준영은 환호와 흥분이 사그라든 선수들을 쓸어 보며 말했다.
“확실히 말해 두죠. 결승전에서 만날 브라질은 조 예선에서 봤던 허당들이 아닙니다.”
역대급 라인업을 구축한 명실상부한 우승 후보.
정상에 오르기 위한 마지막 관문에 최강으로 진화한 상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
당시 프랑스 주장이자 수비의 핵심은 위의 사진의 선수 로베르 종케(1925~2008)입니다.
리베로로 상당히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던 종케는 레몽 코파와 로제르 피아토니 등 유럽 최고의 선수들을 배출한 스타드 드 랭스에서 뛰고 있는 일급 수비수였습니다.
그런 그가 1958년 월드컵 준결승 경기에서는 완전히 펠레의 들러리가 되어 버렸죠.
당시 전반부터 프랑스 수비수들이 실수를 연발하며 삽질을 한 것도 있지만, 종케는 전반 35분에 바바와의 충돌로 부상을 당했습니다.
통증이 심했지만, 당시에는 선수 교체를 할 수 없었기에 종케는 팀 닥터에게 진통제를 맞고 후반전에도 뛰었습니다.
당연히 제대로 뛸 수 있을 리 만무했고, 가린샤와 펠레에게 탈탈 털리는 결과로 나왔습니다.
그때 종케의 부상은 종아리뼈 골절(…)이었습니다.
당시 선수 보호가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