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12. 하나의 팀
“조셉, 혹시 이틀 안에 내가 요청하는 물량을 만들 수 있겠냐?”
준영의 물음에 조셉은 곧장 대답했다.
“글쎄요. 그게 얼마만큼인지, 어떤 용품인가에 따라서 가능할 수도, 불가능할 수도 있겠죠.”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건 약 1,000벌 정도야.”
준영은 방금 자신이 생각한 계획에 대해 이야기해 줬다.
조셉은 상당히 긍정적인 기색을 보였고,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알버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보이는군. 그런 방식이면 굳이 유니폼에 상표를 커다랗게 박아 넣을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알버트는 준영의 계획에 있어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점을 지적했다.
“사실 이건 자네가 추진하는 것보다 구단의 허락을 얻어야 하지 않겠나? 결과적으로 구단을 상품화하는 것이니 말이야.”
“물론입니다. 진행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할 겁니다.”
아마 하드먼 회장이라면 그리 큰 반대는 하지 않을 듯싶었다.
일단 구단 재정 확보에 도움이 되는 일인 데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도 유익한 점들이 많으니까.
“쇠뿔도 단김에 뽑으랬다고, 당장 회장님에게 연락해 봐야겠습니다.”
“그렇게 해. 노팅엄전에 맞춰서 진행하자면 시간이 촉박할 테니까.”
“형님, 전 협력 업체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놓을게요.”
준영과 조셉은 서둘러 움직였다.
이번 일이 성공한다면 수익적인 문제를 넘어 유나이티드는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 될 테니까.
***
2월 22일 오후.
올드 트래퍼드로 모여든 사람들은 언제나처럼 군것질거리를 구하기 위해 경기장 구내매점으로 향했다.
“아아, 내가 일주일을 버틸 수 있는 건 주말마다 올드 트래퍼드에서 이 양념 치킨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지.”
“난 탄두리 쪽이 더 낫던데.”
“그냥 프라이드가 바삭하고 맛있어!”
한쪽에서 치킨의 우열 논쟁이 뜨겁게 벌어지고 있을 때, 늦은 점심 대신으로 호떡 하나를 우물거리고 있던 윌리엄 터너는 새로 마련된 매점을 보았다.
“뭐지? 옷 가게?”
사람들이 꽤 웅성이며 모여 있기에 가 봤더니, 거기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니폼을 팔고 있었다.
“자! 선수들과 똑같은 저지를 입고 응원을 해 보세요!”
“이 레플리카를 입는 순간, 당신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12번째 선수가 되는 겁니다!”
레플리카(Replica).
복제품을 가리키는 이 단어는 서포터들이 걸치는 복제 유니폼을 뜻하기도 한다.
21세기에는 각 스포츠 종목에서 흔한 응원 용품이지만, 1958년에는 생소한 개념의 물건.
그렇다 보니 사람들이 많은 흥미를 보였다.
“이걸 입으면 나도 유나이티드의 12번째 선수라…….”
“근데 좀 비싸지 않아?”
“기부하는 셈 치지, 뭐. 얼마나 팀이 힘들면 이러겠어?”
“하긴…….”
팀에 대한 충성심이 남다른 열성 팬들은 망설임 없이 지갑을 열었다.
저도 모르게 그 행렬에 낀 터너는 자신의 사이즈에 맞는 레플리카를 사서 매점 옆에 마련된 간의 탈의실로 들어갔다.
“유니폼이란 게 이런 감촉이구나.”
등에 박힌 12번.
백넘버 위에 박힌 ‘One Team’이라는 글자가 묘하게 마음을 울렸다.
그리고 오른쪽 가슴 부분에 조그맣게 적힌 상표 문구.
“나2키? 요즘 운동화로 유명한 그 회사인가?”
나2키의 운동화는 가격이 좀 비싸긴 해도 그만한 값어치를 한다고 평가받고 있었다.
밑창이 두껍고 푹신해서 발이 편한 데다, 접지력도 좋았기 때문.
그런 품질 좋은 신발을 만드는 회사라면 옷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이보쇼, 언제까지 꾸물거릴 거요?”
“알았어요. 곧 나가요!”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닦달하자, 터너는 얼른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탈의실 옆에 부착된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본 터너는 씩 웃음을 지었다.
말론 브란도 같은, 티셔츠가 잘 어울리는 미국 영화배우들과 비슷한 스타일 같았기 때문.
진한 붉은색이라 너무 튀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뿐.
당당히 걸어가는 다른 레플리카 동지들을 보고 있자니 왠지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우리는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야.’
우리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일원!
필드에 있는 선수들의 승리를 위해 지원하고 힘껏 응원하는 12번째 선수인 것이다!
“레플리카를 구매하셨군요. 웨스트 스탠드 아래쪽으로 가세요.”
터너가 표를 사러 오자, 티켓 판매원이 그가 자리할 곳을 알려 주었다.
‘웨스트 스탠드 아래쪽이면 골대 바로 뒤쪽이잖아?’
딱히 손해 될 것은 없었다.
필드에서 그만큼 가까워서 지켜보기 좋으니까.
그런데…….
‘헉! 여긴 완전 빨간색뿐이잖아!’
어른이고 애들이고 자신처럼 레플리카를 입은 이들로만 득실득실.
하지만 불쾌감은커녕 친밀함이 느껴졌다.
“자넨 어디서 왔나?”
“저요? 이 옆의 트래퍼드 파크요. 아저씨는요?”
“스트렛퍼드에서.”
처음 보는 사람임에 불구하고, 금세 말문을 트며 맥주와 군것질거리를 나눠 먹었다.
그렇게 열성 팬들끼리 친목을 다지고 있을 때, 메가폰을 든 건장한 노인이 치어리더들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우와아∼”
레플리카 상의에 종아리가 다 드러나는 짧은 치마를 입은 아가씨들의 등장에 터너는 물론이고 다들 환호를 지르며 휘파람을 불었다.
“조용! 조용히! 제군들, 지금 아가씨들 다리 구경하러 경기장에 온 건가?”
메가폰을 든 노인의 호통에 금방 분위기가 진지해졌다.
“잘 들어라. 난 조셉 워터스 스펜스다. 1919년부터 축구를 본 녀석들이라면 날 똑똑히 기억할 거다.”
올드팬들 사이에서 경탄과 반가움이 뒤섞인 환호성이 일었다.
조셉 워터스 스펜스.
1919년부터 14년 동안 유나이티드에서 500경기 이상 출전하며 150골이 넘는 골을 넣은 레전드 선수!
그가 20여 년 전의 유니폼을 다시 꺼내 입고서 열성 팬들 앞에 섰다.
“명심해라, 제군들! 오늘 우린 단지 멀뚱히 구경하러 온 게 아니다! 팀의 12번째 선수로서, 승리를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이다!”
“옳소!”
터너를 비롯한 열성 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쳤다.
단합된 열성 팬들의 반응에 스펜스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곧 있으면 경기가 시작된다. 죽기 살기로 함성을 지를 준비는 되었나?”
“Yes, Sir!”
“목소리가 작다! 더 크게!”
“Sir Yes Sir!”
천지를 뒤흔드는 커다란 함성.
있는 힘껏 함성을 지른 터너는 기분이 한껏 고양됨을 느꼈다.
마치 이야기로 듣던 고대의 전장에 선 듯한 느낌에 그는 저도 모르게 번쩍 주먹을 치켜 올리며 외쳤다.
“유나이티드의 승리를 위하여!”
“승리를 위하여!”
누구보다 열성적이라고 자부하는 수백여 명의 함성이 하늘에 메아리쳤다.
그들이 입고 있는 붉은 레플리카만큼이나 경기 분위기는 이미 붉게, 그리고 뜨겁게 달아올랐다.
***
관중들의 함성이 울려 퍼지는 필드로 양 팀 선수들이 입장했다.
노란 원정 저지를 입고 있던 노팅엄 포레스트 선수들은 벌겋게 물든 골대 뒤편 관중석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저, 저게 뭐야?”
“어쩐지 무서운걸.”
이상한 붉은 셔츠를 입은 관중들이 많다는 건 좀 전에 몸을 풀러 나왔을 때 보았다.
하지만 그때보다 규모가 더 늘어나 있었고, 풍기는 분위기도 장난이 아니었다.
마치 전투를 앞둔 군대 같아 보였다.
이를 낯설게 여기는 건 맨유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딱 한 사람만 빼고.
“후후후, 이제 좀 경기장 같아졌구만.”
진작 이렇게 할 것을.
오랜만에 느껴 보는 21세기의 정취에 준영은 한껏 흥이 올랐다.
삐익-
오후 3시 정각.
시계를 본 심판이 휘슬을 불면서 경기는 시작되었다.
경기 초반 흐름은 유나이티드 쪽으로 기울었다.
홈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에 힘입은 젊은 선수들이 패기만만하게 노팅엄 진영을 쑤시면서 슈팅을 날린 것.
가장 의욕을 불태운 선수는 콜린 웹스터였다.
그는 이미 지난 경기도 열심히 뛰었지만, 오늘 경기에서 더 활발한 모습을 보여 줬다.
‘만만찮은 상대야. 전방에서 내가 뭔가를 해야 돼.’
콜린은 고향 팀인 카디프 시티에서 프로 커리어를 시작했지만, 2년간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그러다 같은 웨일즈 출신인 지미 머피 코치의 눈에 띄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왔다.
이곳에서도 제대로 자리를 잡지는 못했다.
그러기엔 경쟁자들이 너무 쟁쟁했으니까.
토미 테일러에 데니스 바이올렛, 리암 휄란…….
심지어 올 시즌에는 공격수 포지션이 소화 가능한 바비 찰튼, 던컨 에드워즈, 이준영과도 경쟁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유나이티드를 떠나고 싶어 한다거나, 동료들을 시기하지 않았다.
정말 대단한 녀석들이었으니까.
그리고 한 형제처럼 여겨질 정도로 멋진 놈들이니까.
그랬던 녀석들이, 끔찍한 사고로 다시 필드에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아마 나도 독감에 걸려 베오그라드 원정에 빠지지 않았다면 같은 운명을 맞았을 테지.’
어찌 되었든 자신은 사고를 모면했다.
후보에서 단숨에 팀의 고참 선수가 되었다.
고참이라면 고참다운 활약을 해 줘야 한다.
‘입단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리틀 존에게 죄다 맡겨선 안 돼. 공격에선 내가 짐을 덜어 줘야 해!’
그리 결심한 콜린은 패스를 받자마자 속도를 붙이며 노팅엄 진영 우측면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쳇, 까불고 있군. 만년 후보 놈이!”
“조심해! 저 자식, 웨일즈 대표에 뽑혔을 정도로 실력은 있는 놈이야!”
실제 대표급 기량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콜린은 연달아 수비수들을 제쳐 내며 골대 구석을 노리고 슛을 찼다.
하지만 덜 감겼던 슈팅은 아쉽게도 골대를 넘어가고 말았다.
“아깝네!”
“그래도 노팅엄 놈들, 간담이 서늘했을 거야.”
관중들의 예상대로 확실히 위협적인 슈팅이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노팅엄 포레스트는 겁먹고 움츠리지 않았다.
“쫄지 마. 어차피 저쪽은 애송이들이다.”
“앞으로 나가! 공격하지 못하면 공격당한다!”
조니 퀴글리, 스튜어트 임라흐, 토미 윌슨 등등.
프로에서 잔뼈가 굵은 노팅엄의 선수들은 맨유 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차츰차츰 전진해 골 점유율을 높여 갔다.
특히 그들은 유나이티드의 미드필드 진영을 집요하게 두들겨 댔다.
프레디 굿윈과 로니 코프.
현재 이들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중원을 맡기엔 부족한 실력임을 눈치챈 것.
이에 끊임없이 그들이 있는 쪽으로 공격 패스를 밀어 넣고, 거친 몸싸움으로 견제하고 나섰다.
‘안 돼. 저러다 자칫하면 한 번에 무너진다.’
오늘 경기 센터백으로 출전한 준영은 중원 싸움에서 밀리는 것을 보고 과감하게 앞으로 나왔다.
이대로 중원 싸움에서 밀리게 되면 경기 흐름은 노팅엄 쪽으로 넘어가게 되니까.
그러므로 여기서 확실히 끊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리틀 존이 앞으로 나왔다.”
“우와, 나이스 컷!”
“한 방에 끊어 버리는구만!”
인터셉트에 성공한 준영은 최전방에 있는 숀과 알렉스를 바라보며 롱 패스를 날렸다.
아니, 날리려 했다.
‘백태클?’
노팅엄의 조니 퀴글리가 그의 뒤쪽에서 태클을 날렸다.
간발의 차이로 피하는 데 성공했지만, 도끼날처럼 날아든 태클에 간담이 서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망할 놈, 위험하잖아!’
위험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
태클을 날린 퀴글리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던 노팅엄 선수들도 마크를 붙었다.
그 모습은 마치 호랑이를 잡으려고 몰려드는 승냥이 무리와 같았다.
***
서포터즈의 레플리카 착용은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사진에 찍힌 저 2명의 뉴캐슬 팬이 최초의 레플리카 착용자라고 전해집니다.
물론 그 전에도 짝퉁 유니폼이 아예 없진 않았지만, 그냥 아이들 아동복 수준에 그쳐 그다지 주목받진 못했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