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10화 (110/400)

Round 110. 재출격

내가 온 시대가 내가 있던 세계의 과거가 맞을까.

준영의 이런 의문에 세 자매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앤지가 침묵을 깼다.

“평행 우주 같은 게 아닐까?”

“평행 우주?”

“작년에 존이 보여 준 미래 영화 중에 그런 설정을 가진 게 있었잖아.”

평행 우주.

시작점은 같지만, 사건에 따라 갈라지는 다세계.

A가 B를 하면서 C로 나가는 세계가 있는가 하면, A가 D를 하면서 Z로 나가는 세상이 있는 것이다.

“평행 우주라……. 과연, 그럴지도 모르겠군.”

“오빠야, 그거 되게 복잡해 보여. 그냥 외계인의 장난인 걸로 하자.”

리즈는 평행 우주라는 말에 좀 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여름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꿨던 악몽.

전신불수가 되어 꼼짝달싹도 못한 채 세월을 보내다 무덤에 묻히게 되는 그 무서운 일이 평행 우주의 분기된 세계에 있는 또 다른 자신의 삶은 아닌지?

“아무튼 여기가 내가 아는 것과 다른 평행 세계라면 이 세계의 존 레논은 가수가 아닌 축구 선수로 남을지도 모르겠군.”

“안 돼! 그렇게 되어선!”

평소답지 않게 흥분한 앤지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존도 알잖아! 그 사람은 세계적인 가수가 될 거라고! 그러니까 훈련 때문에 음악 활동을 방해하고 그러지 마!”

“아, 알았어. 진정해라.”

극성팬은 무섭구나.

가슴을 쓸어내린 준영에게 앤지가 기타를 내밀었다.

“응? 연주하라고?”

“아니, 내일 가져가서 그 사람한테 사인을 받아 줘.”

준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재테크용이냐.”

“아냐. 대대로 가보로 남길 거야!”

과연 그리될까?

장담컨대 너의 손녀는 그걸 미국의 어떤 머머리 전당포에 비싸게 팔아 버리고, BTS 공연을 보러 쫓아다니게 될 터이다.

준영은 자신의 이 예언을 남겨 두기로 마음먹었다.

***

“시간 이동을 한 미래인이 있다니……. 진짜 놀랄 일이구만.”

콧수염을 기른 대머리 학자는 자신을 초청한 MI6 요원이 건넨 자료를 보며 충격을 금치 못했다.

미래의 자동차라는 사진이야 그럴듯하게 만든 가짜로 치부할 수 있지만, 무시할 수 없는 증거도 있었다.

바로 영사기에서 비춰지는 장면.

미래인이라는 동양인 청년이 시범을 보인답시고 손바닥에서 검은 패널을 펼쳤다.

그러자 패널 위로 입체 영상이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저 입체 영상은 바로 10여 년 전에 자신이 고안했던 홀로그래피, 그것의 완성형이 틀림없었다.

“가보르 박사님,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이건 국가 기밀입니다.”

“알고 있소. 관 속에 들어갈 때까지 비밀을 엄수해야 한다는 걸.”

왕립학회 연구원이자 전자 공학, 물리학 전문가인 데니스 가보르 박사.

그는 제이미 번즈의 주의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기밀을 누설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단지 안위 때문이 아니라 이런 재미난 연구 거리는 독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걸 나에게 보여 준 이유가 뭐요? 미래의 물건이라도 연구하라는 건가?”

“그런 목적도 있긴 합니다. 애S턴 마틴 쪽에서 발버둥 치는 꼴이 안타까워서 말이죠.”

데이비드 브라운 회장도 노력은 하고 있지만, 민간 기업이 홀로 이를 감당하기란 벅찼다.

이에 번즈는 은밀히 브라운 회장 측과 접선, 유능한 학자와 엔지니어들을 소개해 주기로 했다.

물론 공짜는 아니고 연구 성과나 기술을 받기로 협상을 봤다.

그 전에 차주인 준영과도 이야기가 끝났고.

“하지만 단지 그뿐만은 아니죠. 우리가 진짜 알고 싶은 건 따로 있습니다.”

“시간 이동의 원리라도 알고 싶은 건가?”

가보르 박사가 정곡을 찔렀는지, 번즈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브라운 회장이 그러더군요. 존 Y. 리가 역사를 바꿨다고.”

원래는 죽을 운명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들을 살려 냈다.

물론 상당수가 선수 인생이 끝나긴 했지만 말이다.

“존 Y. 리처럼 시간을 이동할 수 있다면 우리도 역사를 바꿀 수 있겠죠. 가령 교수님을 고국 헝가리에서 떠나게 만든 나치당의 수괴 히틀러를 제거한다거나.”

“조지 워싱턴을 암살해서 미국을 영국의 식민지로 남길 수도 있겠구먼.”

“뭐, 그렇게까지 역사를 바꿀 필요는 있을까 싶긴 합니다만…….”

아무튼 핵심은 과거로 가서 잘못과 실수를 저지르지 않게 막는 것.

그러면 황혼이 지고 있는 제국을 다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유지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짓은 관두라고 하고 싶소. 시간 이동의 원리를 알게 된다고 해도 말이지.”

“어째서입니까?”

쉽게 설명할 것이 아니었기에, 가보르 박사는 잠시 홍차로 목을 축인 후 말을 이어 나갔다.

“미래의 존재가 과거로 오다니, 이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보통 일은 아니오.”

“당연하지요. 미래인이 가진 정보나 기술 지식을 생각하면…….”

“내가 우려하는 건 그런 문제가 아니오, 번즈 요원.”

찻잔을 내려놓은 가보르 박사는 슬쩍 주먹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여기서 탁자를 주먹으로 세게 내리치면 이 앞에 있는 찻잔이 흔들리면서 조금 움직이게 되지. 다시 말해 위치가 바뀐다는 거요.”

잘 이해되지 않았던 번즈는 계속 귀를 기울였다.

“미래인이 이 시대에 떨어졌소. 탁자 위에 주먹이 떨어지는 것처럼. 그때 미래에서 과거로 통로가 열린 순간, 우리가 상상도 못할 에너지와 충격이 발생하며 전달됐겠지.”

단지 찻잔이 조금 움직이는 수준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수준의 변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직접 개입해서 역사를 바꾸지 않더라도 말이다.

“죄송하지만 좀 더 쉽게 설명해 주시죠.”

“알았소. 뭐 이런 거요. 당신네가 히틀러 머리에 총알구멍을 내 주러 간다고 과거로 갔다 칩시다. 그런데 정작 히틀러는 나치당 수괴가 아니라 평범한 화가로 살고 있더란 거지.”

“그러니까… 시공을 건드린 충격으로 과거의 인물이나 사건이 바뀐다는 겁니까?”

“상상을 뛰어넘는 에너지와 충격이 예상 밖의 변동을 발생하게 만들 테니 말이오.”

그제야 이해가 된 번즈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지금 세계도 시간 이동의 충격으로 뭔가가 바뀌었을 수 있으니까.

그것도 원래 세계를 살던 자신들이 모르고 있는 사이에.

“다행히 나치가 승리했다는 식으로 변동이 오진 않았군.”

“그, 그런…….”

“어쨌거나 과거를 고치려고 애쓰지 마시오. 오히려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질 수 있으니.”

번즈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심각한 표정만 봐도 속내를 알 수 있었기에 가보르 박사도 더 이상의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

어느새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결코 길지 않았던 10여 일이 지나고 2월 19일이 되었다.

“휴, 올 것이 온 건가.”

윌리엄 터너는 올드 트래퍼드 경기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코흘리개 시절, 동네 형님들을 따라 구경 간 이후로 줄곧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응원해 왔다.

영국 최강의 축구팀.

그들의 경기를, 승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지고 자부심이 절로 차오르곤 했다.

“그랬는데…….”

오늘처럼 응원 가기 싫은 적은 없었다.

그건 수십 년간 유나이티드 경기를 챙겨 본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자신들의 자랑이었던 버스비의 아이들.

더 이상 그들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재키 블란치플라워도, 토미 테일러도, 던컨 에드워즈도.

이젠 최강이란 간판을 내려야 한다.

내년 시즌엔 강등을 각오해야 할 거라는 비관적인 전망까지 나왔다.

“젠장! 왜 이런 심술을 부리냐고!”

터너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부짖었다.

정말 신이 미켈란젤로 성화에 나오는 것처럼 손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다면.

그랬다면 당장 한 대 갈겨 줬을 텐데.

“여, 잘 지냈어요, 터너 씨?”

“으와앗!”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터너는 화들짝 놀랐다.

“사, 사장?”

“네, 접니다. 존이에요. 뭘 그리 놀랍니까?”

길 가다 터너와 마주친 준영은 도깨비라도 본 듯한 그의 반응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상한 머리를 하고 있으니 그렇지!”

“아, 이거… 심기일전하자는 마음에 깎았죠.”

영국에, 이 시대에 처음 왔을 때처럼 앞머리를 살짝 세워 올린 소프트 모히칸 컷.

이발관에서 설명해 주고 깎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그래도 그럭저럭 괜찮은 모양이 나와서 만족하고 있었다.

“공장 일을 열심히 해 주고 있다고 들었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흥, 공장이 망하면 숨어 있을 데가 없으니까 돕는 것뿐이야. 그보다 댁도 오늘 경기 나가는 거야?”

“당연히 나가죠. 뛰어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준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팀을 다시 일으켜 달라며 힘을 모아 준 친구들.

여전히 병상에 있는 그들은 몹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승리를.

유나이티드가 여전히 강하다는 증명을 해 주기를.

“터너 씨도 응원하러 오는 길이죠? 열심히 해 줘요. 필드에 있지 않아도 한 팀이니까.”

“잔소리하지 마! 내 할 일은 내가 정해!”

투덜대는 터너에게 손을 흔든 준영은 먼저 경기장으로 향했다.

우두커니 서 있던 터너는 아까 준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필드에 있지 않아도 한 팀이라…….”

팀원이 시합에서 빠질 수 있을까.

그는 올드 트래퍼드를 향해 걸어갔다.

조금 전까지 느끼던 망설임과 거부감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

관중석에서 들리는 소음이 라커룸까지 전해졌다.

지난 10여 일 동안 연마된 풋내기와 애송이들은 이제 제법 프로 선수다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아직은 부족해. 하지만…….’

준영은 곧 그 부족함이 채워질 거라 믿었다.

앞으로 계속 실전이니까.

계속 뛰고 부딪치다 보면 좀 더 윤이 나고 빛이 나게 될 것이다.

“존, 네 앞으로 전보가 왔다.”

머피 코치가 라커룸으로 들어와서 준영에게 전보를 건넸다.

발신자는 윈스턴 처칠.

내용을 본 준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왜? 뭐라고 적힌 거야?”

숀의 물음에 준영이 대답했다.

“남의 연설문까지 도용해서 큰소리를 뻥뻥 쳤으니까 반드시 이기랍니다.”

“훗, 이거 이기지 않으면 정말 곤란하겠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준영은 유니폼을 입었다.

이 시대에 왔을 때는 거칠고 답답했던 유니폼이 이제는 편안하게 느껴졌다.

한동안 입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월의 볼턴전 이후로 계속 경기에 나가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유니폼을 입고, 로저에게 넘겨받은 주장 완장까지 찼다.

“주장! 한마디 해 주십쇼!”

잔뜩 상기된 표정의 알렉스 퍼거슨이 외쳤다.

오늘 데뷔전을 갖게 된 그는 씹고 있던 껌만으로는 뛰는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실 그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준영은 선수들을 둘러 모이게 했다.

그렇게 모여 어깨동무를 한 상태로 말했다.

“이제 곧 있으면 시합이 시작된다. 저기 모인 사람들에게 똑똑히 보여 줘라. 유나이티드가 약해지지 않았다는 걸. 너희가 지옥에서 기어오른 독종이라는 걸.”

지옥이라는 말에 알렉스를 비롯한 신참들은 치를 떨었다.

지난 10여 일.

체력적, 정신적으로 굉장히 혹독한 훈련을 치렀으니까.

쉴 새 없이 뛰고 부딪치고, 먹거나 마시는 것도 마음대로 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우리가 누구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그래, 끝까지 싸운다! 절대 포기하지 마라!”

“Yes, We shall never give up!”

라커룸이 떠나가게 외친 11명의 전사들은 필드를 향해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무너진 폐허 속에 아직 빛나는 희망이 남아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하여.

***

데니스 가보르 박사는 헝가리 출신의 과학자로 1971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미래는 예측할 수 없지만 미래는 발명할 수 있다.’라는 말로 기술 혁신을 낙관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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