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머신 237화
게임을 제안하지(3)
“그건...”
루크델라의 얼굴에 동요가 퍼져 나 갔다. 그는 영식을 바라보며 가늘게 몸을 떨었다.
“복수, 라고…?”
더듬거리며 묻는 그의 말에 영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루크델라 씨의 입장 에서 본다면 나쁘지 않은 제안 아닙 니까? 당신이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 건, 이제까지의 결과만 놓고 본다면 인간들은 드래곤에게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성과를 이뤘습니다.”
영식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루크델라의 몸이 흠칫 떨렸다.
인간들이 이룬 업적.
그것이 얼마나 경이로운가에 대해 서는 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시다시피 창조주의 손에 넘어간
카르가스를 처치한 것도 인간이죠. 수십 년 만에 대륙 중앙 지역을 탈 환한 것도 인간입니다. 그리고 저희 는….”
“?창조주를 죽였지.”
루크델라는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
마음속 깊이 뿌리 내린 인식 때문 에 그를 비롯한 드래곤들은 인간들 을 ‘노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천마대전 이후 인간들은 꾸준히, 멈추지 않고 성장했다.
더 이상 드래곤이 노예처럼 다룰 수 있었던 나약한 존재가 아니게 된 것이다.
드래곤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가 진 8영웅들이 나타났고 강력한 힘을 가진 군대가 만들어졌다.
찬란한 문명과 문화를 만들어내며 폭발적인 속도로 발전해 나갔다.
하나하나의 힘이 강하다고 해도 고 작 넷에 불과한 숫자를 가진 드래곤 으로는 범접하기 힘든 전력을 쌓아 올린 것이다.
실제 그 이후에 이루어진 대전쟁에 서도 인간들은 일방적으로 창조주에 게 패배한 드래곤들보다 훨씬 더 많 은 성과를 이뤄냈다.
비록 결과적으로는 전쟁에서 패배 했을지라도.
“그렇습니다. 저희는 당신이 그렇 게 두려워하는 창조주를 죽였죠.”
영식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 었다.
“창조주는 범접할 수 없는 상대가 아닙니다. 절대적인 강자가 아닙니다. 싸울 수 있고, 죽일 수 있는 존재입 니다. 자,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딱딱히 표정을 굳히고 있는 루크델 라를 향해 영식의 손이 내밀어졌다.
“저희에게 힘을 빌려주지 않겠습니 까?”
루크델라의 얼굴에 퍼지고 있는 동 요가 한층 더 심해졌다.
영식은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거의 넘어왔네.’
지금 루크델라의 갈등하는 모습을 보면 거의 그의 말에 넘어왔다는 것 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진실을 알면 기겁할 테지만.’
영식은 갈등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만약 영식이 그에게 트라우마를 안 겨준 장본인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이 런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포에 질려 도망치거나, 그에게 공격을 퍼부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건 그가 골치 아파진다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니까.’
드래곤이라는 강력한 전력을 간단 하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에게 진실을 알려줄 이유가 없었다.
“…지금 판단할 수는 없는 문제인
것 같군.”
‘응…?’
영식은 루크델라의 입에서 흘러나 온 말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가 예상하고 있던 말이 아니었다.
“그건 무슨 뜻입니까?”
“아직 그 제안에 답을 줄 수 없다 는 말이다.”
루크델라는 당황하는 듯한 눈빛으 로 영식의 시선을 피했다.
영식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루크델 라를 노려보았다.
그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
이 보였다.
‘ 설마.’
“계속 숨어 지내겠다는 의미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다. 북방의 악마들 은 불가해(不可解)의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 그들의 힘에 대해서 명 확하게 파악되기 전에 함부로 움직 이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말은 거창하게 했지만 그냥 창조주 들과 싸우기 무서우니 숨어 지내겠 다는 말과 같은 말이었다.
영식은 다소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루크델라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로 한심한 놈이었어?’
여러 기록상에 남아 있는 경외해야 마땅한 절대자로서의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드래곤이라는 거창한 이름보다는 겁에 질린 도마뱀이라는 표현이 어 울릴 수준.
영식은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루크델라를 한심하다는 눈빛으 로 바라보았다.
‘곤란하게 됐네.’
이 정도로 자존심을 건들면 자연스 럽게 루크델라의 입에서 협력한다는 말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
카르가스의 시체를 추출하여 얻은 재료들로 슈트 제조 및 연구를 이어 나가면 됐다.
거기에 루크델라의 전력이 더해진 다면 금상첨화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인간들이 창조주 중 하나를 죽였 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 은 검은색 갑주를 입은 존재였다고 하더군. 우리들이 상대한 은회색 악 마와는 다른 존재다. 너희는 그 악 마가 가진 힘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지 못한다. 그는”.”
“하0}….”
영식은 공포에 질린 채 말을 이어 가고 있는 루크델라를 바라보여 깊 은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 영식이 루크델라에게 새겨 넣 은 공포와 트라우마는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드래곤이라는 강력한 존재를 저 정 도로 몰아붙이기 위해서는 대체 무 슨 짓을 해야 하는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기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야.’
가해자의 입장에서 할 생각은 아니 었지만 기억이 없는 이상 의문이 드 는 것도 사실이었다.
루크델라는 드래곤이라는 이름값이 안타깝게 느껴질 정도로 비참한 모 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건 협력을 하는 것 자체가 의미 가 없겠군.’
지금 루크델라는 도저히 싸울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이 상태로 창조주와의 싸움에 끌어 들여봤자 방해만 될 것이 분명했다.
가진 바 힘이 강하면 뭐하겠는가. 적을 눈앞에 두고 벌벌 떨기만 하는 겁쟁이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협력할 생각이 없다면 됐습니다. 방해되니 이만 꺼져주시죠.”
루크델라에 대해서 크게 실망한 영 식은 다소 공격적인 말투로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루크델라는 흠칫 몸을 떨더니 이내 고개를 숙였다.
“…기다려라.”
“또 뭡니까?”
“카르가스는 내 오랜 친우였다. 부 디...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시 간을 주지 않겠나.”
“뭐라고요?”
영식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루크델라를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감성팔이라니?
추잡한 것도 정도가 있었다.
영식의 눈빛에 명백한 분노?가 서렸다.
‘이런 쓰레기 자식이.’
협박이 먹히지 않으니 감성팔이로 태세를 바꾸는 그의 모습이 역겹게 까지 느껴졌다.
영식은 답답한 감정이 몸 전체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거칠게 표 정을 일그러뜨렸다.
‘이런 놈을 발암이라고 부르던가.’
무능력한 주제에 요구하는 건 많다.
이름값만 믿고 협박을 하더니, 논 리에서 밀리니 감정에 기대어 구걸 하려고 한다.
온갖 폼이란 폼은 다잡으면서 정작 자신이 두려워하는 일에는 손을 뻗 을 생각조차 없다.
혐오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치졸한 성격이었다.
‘이게 드래곤이라고?’
그들이 겁에 질린 원인이 과거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영식은 조금이나마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만약 그가 협력을 해준다면 좋은 대우를 해주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런 생각이 말끔하게 사라져 버렸다.
루크델라라는 존재는 그냥 한심한 쓰레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드래곤에 대해서 얼마나 미화가 들어갔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군.’
영식은 이제까지 그가 읽은 기록들 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홀렸다.
기본적으로 에르노어 대륙에 전해 지는 드래곤에 대한 기록들은 경외 와 찬양으로 가득 차 있었다.
태생적으로 강력한 힘을 타고나는 것은 물론 과거 오랜 시간 동안 인 간들을 지배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 문이었다.
그들은 가진 바 힘은 물론 인격적 으로 군주에 어울리는 카리스마를 지닌 존재로 전해졌다.
인간들 스스로가 드래곤에 대한 각 종 망상과 상상을 덧붙여 미화시킨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들 중 하나를 직접 대면하고 느껴지는 것은 처절한 실 망감뿐이었다.
‘기록이랑 전혀 다르잖아.’
영식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에 손을 올렸다.
이건 트라우마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정도로 한심한 모습을 보여준다 는 것은 그냥 원래부터 저런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았다.
사실 드래곤이 기록처럼 카리스마 있는 군주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냥 인간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일 종의 편견에 불과했다.
인간들도 사람마다 다른 성격을 가 지고 있는데 드래곤이라고 해서 다 를 것이 무엇인가.
‘근데 하필이면 이런 중요할 때 이 런 놈을 만나서….’
영식은 찌질하다는 말이 이 이상 어울릴 수 없는 루크델라를 바라보 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까지 한 거라고는 쥐새끼처럼 숨어산 것뿐이 없는데 저런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가소 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5일… 아니, 3일만 시간을 다오. 친우가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길 기 도하고 싶다.”
“못 드립니다. 그런 저열한 감성팔 이에 시간을 허비할 여유는 없으니 까요.”
“?3일은 짧은 시간이다.”
“그럼 그 짧은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맞아보시겠습니까? 3일 이면 카르가스 옆에 당신의 시체 하 나를 만들기 충분한 시간일 것 같은 데 말이죠.”
루크델라는 거칠게 주먹을 움켜쥐 며 분노에 찬 듯 몸을 떨었다.
“더 이상 당신과 말을 섞는 것도 시간 낭비일 것 같군요. 비키지 않 으면 힘으로라도 하겠습니다.”
영식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어떻게라도 전력을 보존해야 하는 영식의 입장에서 루크델라와 싸우는 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리 멍청하다고 하더라도 드래 곤은 드래곤.
성격이 어떻고 간에 그들이 가진 힘은 8영웅 이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어리광 에 가까운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암 덩어리는 빨리 제거하는 게 좋 지.’
영식은 그렇게 생각하며 멀리 있는 드래곤 슬레이어 부대를 호출할 준 비를 마쳤다.
“자, 잠깐.”
그때, 루크델라는 한 손을 들어 올 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폭력을 좋아하지 않아. 다른 방법을 제안하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허공을 내리긋 듯 손을 움직였다. 공간이 갈라지며 네모난 판 하나가 나타났다.
가로, 세로 19줄. 총 361개의 착점 을 가지고 있는 판.
“블랙 보드라는 게임이다. 이걸로 날 이길 수 있다면 자네의 말에 순순 히 따르도록 하지. 아니, 단순히 따 르는 것이 아니라 자네에게 할 수 있 는 한 모든 협력을 하도록 하겠다.”
“룰은 간단하다. 흑돌과 백돌을 번 갈아가며 두며 더 많은 영역을 차지 한 쪽이 승리를 가져가는 형식이지.”
루크델라는 판에 이어 흑돌과 백돌 을 아공간에서 꺼내었다.
소환자들에게도 굉장히 익숙한 형 태를 가진 돌들이었다.
“영식아 저거….”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유 나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 었다.
“바둑... 맞죠?”
박시아 또한 익숙한 모양의 판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흠. 이계에서 유명한 게임이라는 그자의 말이 맞았군.”
“?무슨 소리입니까?”
“이 게임을 내게 알려준 것은 우연 히 내 레어에 들어온 소환자였다.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아름다운 게 임이더군. 자네도 소환자라면 이 게 임에 대해서 알고 있지 않나?”
루크델라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 으며 영식에게 물었다.
영식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루크델라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저랑 바둑으로 승부를 내자 이겁니까?”
“그렇다. 네가 이긴다면 어떤 말이 라도 따르도록 하지. 용의 명예를 걸고 약속해도 좋다.”
영식은 갑작스러운 그의 제안에 자 기도 모르게 폭소를 터뜨리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감히 나한테….’
바둑으로 비벼보려고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