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머신 210화
북방 정벌(2)
카르가스.
현재 기록으로 남아있는 네 마리의 드래곤 중에 ‘불’을 관장하는 드래 곤이다.
그는 과거 천사, 악마와의 전쟁에서 에르노어 대륙을 지키기 위해 싸웠 다고 알려져 있는 강력한 용이었다.
성격은 불을 관장한다는 특성 때문 인지 꽤나 난폭하다고 알려져 있지 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의 성격이 난폭하건 온순하건 큰 상관없었다.
애초에 모든 드래곤이 천마대전 이 후 그 모습을 감추고 조용히 은거하 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수백 년이 지나자 에르노어 대륙인들에게 드래곤이라는 것은 그 저 신화나 동화에 등장하는 존재로 만 여기게 되었다.
사실 용들은 천마대전 때 입은 상 처로 인해 모두 죽은 것이 아니냐는 가설까지 나올 정도였다.
실제로 용들은 북방에 나타난 괴물 들의 창조주들이 잉그리움 제국을 멸망시키고 대륙 중앙을 점령할 때 도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 그 가설 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그런 가설은 창조주들이 카 르가스를 찾아내어 기계 몬스터로 만 들어버리면서 산산이 깨지게 되었다.
신화 속의 드래곤은 아직 그 명맥 을 유지한 채 에르노어 대륙에 살아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인류의 수호자가 아 닌 창조주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인 류의 적으로 돌아섰다는 점이었다.
“드래곤이라….”
알렉은 무거운 침음을 삼켰다. 드 래곤은 그조차도 기록으로 밖에 접 해보지 못한 존재였다.
“우선 자네가 봤다는 그… 카르가 스는 어떤 존재였나?”
“저도 자세하게 확인한 것은 아닙 니다.”
영식이 카르가스를 본 적이라고는 공장을 빠져 나왔을 때 멀리서 한 번 봤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 카르가스가 가진 힘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 다.
“하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이라 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 루시아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 수 있는 괴물.
루시아가 어지간한 군대 하나와 필 적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카르가스가 가진 강력함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흐음.”
“아마 일반 병력은 있어봤자 방해 만 될 겁니다. 랭커 이상으로 이루 어진 부대를 조직해야 합니다.”
지금 카르가스는 단순한 드래곤도 아니었다.
기계 몬스터로 변해 전신에 수백 개의 무기를 장착하고 있는 공중 요 새나 다름없었다.
카르가스가 가진 거대한 육체만으 로도 재앙이나 다를 바 없는데 거기 에 각종 현대 무기까지 갖춘다면 랭 커가 아닌 존재는 폭발에 휩쓸려 형 체도 없이 조각날 것이다.
“알았네. 부대를 조직한 이후에 랭 커들에게는 내가 따로 통보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영식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알렉 에게서 몸을 돌렸다.
영식은 고개를 돌려 빽빽하게 늘어 선 숲 사이를 바라보았다.
우거진 수풀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가 보였다.
본격적인 북방정벌이 시작되는 순 간이었다.
“…결국 이곳으로 다시 왔네요, 주 인님.”
“그래.”
대륙 연합군이 황무지로 진입하자
영식의 옆에 있던 루시아는 딱딱하 게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영식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1년도 지나지 않은 일인데.’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가 떠올랐다.
어렴풋이 돌아왔던 기억.
단테리온과 자신에 대한 영상.
길수의 각성.
그 이후 루시아와 왔을 때도 여러 일이 있었다.
기계 몬스터와 싸우고 공장의 단서 를 찾은 것, 공장을 찾아 락테온의 반쪽짜리 코어를 다시 되찾은 것.
그리고.
“이브….”
영식은 씁쓸한 표정으로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창세교 사건 이후로 이브가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영식은 알지 못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알고 싶지 않았다.
‘제길.’
영식은 만약 이브를 만난다고 해도 그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에게 꼭두각시로 있지 말라고, 네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감 히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식은 지난 6개월 간 한 번도 이브를 찾아 나서지 못 하고 있었다.
‘차라리.’
앞으로 계속 만나지 않는 것이 좋 겠다는 생각이 영식의 머릿속을 스 쳐 지나갔다.
영식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머릿속 을 스쳐 지나간 생각에 표정을 일그 러뜨렸다.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을 못 찾 을 것 같기 때문에 다시는 이브를 만나고 싶지 않다니.
스스로가 더없이 역겹게 느껴졌다.
“주인님.”
생각에 잠겨 있던 영식을 깨운 것 은 딱딱하게 굳은 루시아의 목소리 였다.
영식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 쪽으 로 고개를 돌렸다.
“왜?”
“오고 있어요.”
그녀가 이런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 서 ‘오고 있다’라고 말할 만한 존재 는 많지 않았다.
영식은 그녀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 선을 옮겼다.
-지이 잉.
시야가 확대되며 황무지 저편의 모 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전신이 기계 장치로 뒤덮인 붉은 드래곤.
100미터라는, 생물인 것조차 의심 스러울 정도로 거대한 크기에 영식 은 숨이 막히는 감각을 느꼈다.
‘카르가스만이 아니야.’
하늘을 날아오고 있는 카르가스의 아래로는 천 단위가 넘어 보이는 기 계 몬스터들이 자로 잰 듯이 도열하 여 진군하고 있었다.
몬스터라기보다는 철저하게 훈련된 정규군을 보는 것과 같은 모습.
“이곳에 올 걸 미리 알고 있었군.”
영식은 다가오는 몬스터 대군을 바 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긴, 무려 5만에 달하는 대군이 경계선 너머로 들어선 것이다.
오히려 침입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더 말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기습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없었으니까.’
5만의 대군으로 기습을 한다는 것 은 머저리 같은 짓이었다.
이미 대륙 연합군을 조직했을 때부 터 기계 몬스터와의 정면 대결은 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잘 됐다고 해야 하나.’
다른 자잘한 습격으로 전력이 손상 되지 않은 상태에서 카르가스와 싸 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 운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루시아.”
“예, 주인님.”
“길드원들을 불러서 전투를 준비해 줘. 난 알렉 장군에게 다녀올 테니 까.”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루시아는 평소와는 달리 절도 있는 동작으로 깊게 허리를 숙였다.
영식은 그녀에게서 몸을 돌려 알렉 에게 향했다.
“무슨 일인가?”
“카르가스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영식의 말에 알렉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그의 감각으로는 다 른 무언가가 접근하고 있는 것을 느 낄 수 없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네.”
“올드 원….”
영식의 뒤를 이어 나타난 서강준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황무지를 노려보았다.
“아주 강대한 존재가 이쪽으로 향 하고 있어. 게다가 혼자도 아닌 것 같군.”
“예. 천 마리가 넘는 기계 몬스터 를 이끌고 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군.”
알렉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 누고 있는 영식과 서강준을 보며 고 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편성해 둔 ‘드래곤 슬레이 어’ 부대를 소집하도록 하지.”
드래곤 슬레이어.
알렉이 영식의 요청으로 조직한 대 카르가스 부대의 이름이었다.
모두 랭커 이상으로 구성된 조직이 며 서강준, 루시아, 영식을 비롯한 고레벨 랭커들은 모두 편성되어 있 었다.
드래곤 슬레이어 부대의 숫자는 천 명.
100레벨을 넘은 랭커가 얼마나 드 문가를 생각한다면 정말 대륙 내에 존재하는 모든 랭커가 모였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닌 숫자였다.
물론, 그중에는 박철태 파티나 채 린처럼 100레벨에는 도달하지 못했 지만 조건만 갖춰지면 랭커와 비슷 한 위력의 공격을 할 수 있는 소환 자들도 섞여 있었다.
“전군! 전투 준비!”
알렉은 마력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포효했다.
그의 외침에 따라 5만에 달하는 대군이 일사불란하게 진형을 짜기 시작했다.
“그럼, 저도 진형으로 돌아가 보겠 습니다.”
“알겠네.”
영식은 이제까지 함께 손발을 맞춰 온 살바토르 길드와 같은 진형에 배 정되어 있었다.
그는 알렉을 뒤로 하고 길드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저희는 준비 끝났어요, 영식 씨.”
길드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자 티리 아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에 게 다가왔다.
영식은 고개를 돌려 길드원들의 얼 굴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그들 모두 영식이 무언가 한마디를 해주기를 바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런 건 원래 길드장이 해야겠지만.’
정작 길드장인 티리아조차 영식이 말해주는 것을 바라고 있는 눈치였다.
영식은 길드원들을 바라보며 나지 막이 말했다.
“뭐… 이제 와서 따로 할 말이 많 지는 않네요.”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까지 그와 살바토르 길드원들 은 손으로 꼽을 수 없는 숫자의 전 장을 헤쳐 나왔다.
그때마다 영식이 그들에게 바라는 것은 언제나 한 가지뿐이었다.
“살바토르 길드는 기억을 잃은 제 게 있어서 안식처가 되어준 장소입 니다.”
영식은 티리아와, 루시아 그리고 아라의 얼굴을 한 번씩 돌아보았다.
“그리고 제게 평생을 함께 하고 싶 은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게 해준 곳 이죠.”
“읏….”
“하앙 주인님도 참. 남들 앞에서 부끄럽게?”
영식의 낯간지러운 말에 루시아는 양볼에 손을 올리며 몸을 배배 꼬았 다.
그녀의 말과 달리 전혀 부끄럽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어느 날 영문을 모르고 안식처를 잃 은 것은 여러분도 마찬가지니까요.”
그의 말에 길드원들은 무거운 표정 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모두 이 안식처를 지 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살아남아 주세요. 여러분이 하나라도 빠진다 면 그 빈자리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영식 씨….”
영식의 말에 감명을 받았는지 티리 아는 글썽거리는 눈빛으로 그를 끌 어안았다.
영식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영식 오빠라면 좀 다를 줄 알았는 데 역시 저 자리에 서게 되면 어떻 게 해도 사망 플래그 같은 말을 내 뱉을 수밖에 없구나.”
감동에 젖은 분위기가 채린의 말에 의해 단번에 박살 났다.
“오빠라면 ‘그깟 드래곤 따위 내 전동 드릴로 한 번에 절정으로 보내 주겠어!’ 같은 말은 해줄 거라고 기 대하고 있었는데! 실망이야!”
“난 네 머리가 더 실망스럽다.”
영식은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채 린을 바라보았다.
“과, 과연. 주인님의 전동 드릴이라 면 드래곤이라고 할지라도….”
“루시아 네 머리도 좀 의심스럽고.”
영식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루시아 의 머리에 가볍게 주먹을 쥐어박았 다.
기껏 분위기를 잡고 말한 것이 모 두 수포로 돌아갔다.
길드원들은 그런 영식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뭐... 이게 살바토르 길드답지.’
격식과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가족 같은 분위기. 살바토르 길드에서만 느낄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였다.
“그럼, 모두 준비해 주세요.”
영식은 그렇게 말하며 황무지 쪽으
로 시선을 옮겼다.
카르가스의 모습은 이미 다른 사람 들의 눈으로도 보일 정도로 가까워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