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머신-209화 (209/284)

레벨업 머신 209화

북방 정벌(1)

-치익.

고장 난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법한 잡음이 흘러나왔다.

진홍색 머리칼을 가진 장신의 여인 하나가 잡음으로 가득한 공간을 걸 어갔다.

“쯧, 역시 그놈의 코어를 대체할 만한 물건은 없나.”

진홍색 머리칼의 여인은 거친 공격 으로 박살 나 있는 유리관을 바라보 며 쯧 하고 혀를 찼다.

동력원이 사라지면서 기능이 정지 한 ‘공장’을 다시 가동시키기 위해 서 다른 대체 동력을 찾아봤지만 만 족스러운 것이 나오지는 않았다.

-치익. 치익.

“웅?”

죽음과도 같은 적막에 쌓여 있는 공장을 바라보던 그녀는 한 손을 들 어 귀에 가져다 대었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어떤 마약보다 달콤한 목소리가 통신기를 넘어 그 녀의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그녀의 눈이 순 식간에 몽롱하게 변했다.

“후훗. 오랜만이에요, 대장님.”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의 말을 들은 진홍색 머리칼의 여인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가 자신을 ‘대장’이라고 부르지 말라는 이유.

그녀는 그 이유를 질릴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그 배신자에 대한 건 잊어버 리세요, 단테리온 님.”

그녀는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이 흉포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말하면서도 그에게서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그녀는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이 대화는 이미 수십 번은 넘도록 반복된 대화였으니까.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단테리온은 약에 취한 듯이 몽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는 제 모든 것입니다. 그는 제

형제이자, 스승이자, 어버이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천천히 광기에 젖어 갔다.

-우리를 이끌어 줄 수 있는 존재 는 그 이외에는 없습니다.

진홍색 머리칼의 여인은 예상대로 의 대답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대한 단테리온의 태도는 여 느 때와 같이 변함이 없었다.

‘어째서.’

그녀는 거칠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납득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들을 배신했다.

믿고 따르던 이들을 처참하게 짓밟 았다.

단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완성 될 계획을 모조리 망가뜨려 버렸다.

“젠장. 그딴 배신자 새끼가 뭐라 고...”

그가 자신들을 배신한 이유를 그녀 는 알지 못했다.

단테리온은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그에 대해 끓어오르는

분노를 마음 속 깊이 억누르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엘리아, 당신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예.”

통신기 너머에서 단테리온의 목소 리가 흘러들어왔다.

진홍색 머리칼의 여인, 엘리아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 덕였다.

-저희들의 대장님을 설득하는데 도움을 주세요.

단테리온은 가벼운 웃음소리가 섞 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엘리아는 한쪽 귀에 손을 올린 채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모습은 신에게 기도를 올리 는 사제처럼 경건해 보였다.

“엘리아 4식.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치이이익.

전력이 끊인 공장에 다시 한번 잡 음이 울려 퍼졌다.

시간이 흘렀다.

영식을 비롯한 그의 길드원들은 정 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살바토르 길드만이 아니었다. ‘군 대’라는 개념에 대해서 가장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알렉 장군은 각 길드와 끝임 없는 상의 끝에 총 5 개의 정규군으로 대륙 연합군을 편 성했다.

하지만 대륙 연합군은 동부, 서부, 남부의 병력이 섞여 있는 장소.

필연적으로 사건과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 알렉 이 사용한 방법은 서로에 대한 경계 심을 한 번에 날려 버릴 정도로 강 도 높은 훈련이었다.

연합군의 병사들은 말 그래도 생사 를 넘나드는 훈련 속에서 강제적으 로 서로에 대한 전우애를 키웠다.

애초에 다른 사람과 협력하지 않는 순간, 바로 팔다리 한쪽이 박살 나 거나 반 병신이 되는 일이 허다했으 니 억지로라도 협력하지 않을 수 없 었던 것이다.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다.

극한의 상황에 내몰린 상태에서 억 지로 조성된 전우애라고 하더라도 어느새 병사들은 그 상황에 서서히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개월이 흐른 후.

대륙 연합군의 기틀이 완성될 무 렵, 창조주들이 에르노어 대륙에 등 장한 이후 처음으로 인류가 대대적 으로 반격을 시작했다.

-부우우우우우!

“전군 진군하라!”

웅장한 나팔음과 함께 알렉이 검을 뻬들며 소리쳤다.

그의 명령에 5만에 달하는 대륙 연합군이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한 걸음 발을 옮길 때마다

마치 땅 전체가 진동하는 듯이 묵직 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작됐군요.”

연합군의 선두, 살바토르 길드원들 이 모인 곳에서 한성의 낮은 목소리 가 흘러나왔다.

“예. 정말… 오래 걸렸네요.”

영식은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륙 연합 자체를 계획한 것이 영 식이다 보니 그는 북방 정벌이 시작 되기 전날까지도 철야로 서류를 정 리해야 했다.

“전... 사실 실감이 잘 가지 않아 요, 영식 씨.”

영식의 옆에 선 티리아는 살바토르 길드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대군을 돌아보며 말했다.

고작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엘 노트 왕국군을 피해 허름한 저택에 숨어 살았던 자신들이, 이렇게 대륙 연합군을 조직하여 창조주를 향해 칼을 들이밀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이게 모두 영식 씨 덕분이야.’

티리아는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영 식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물론 다른 길드원들도 많은 노력을 했다. 그 결과로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길드원이 성장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것 또한 결국 영식이 없 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왕국의 눈을 피해 숨어살고 있는 살바토르 길드를 이 위치까지 이끌 어 준 것은 어디까지나 영식의 공이 었다.

‘고마운 사람.’

그녀는 손을 통해 느껴지는 그의 온기에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의 과거가 창조주를 이끌던 존재 였다는 사실도, 그의 몸이 혈육이 아닌 금속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도 그녀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앞으로 평생을 갚는다고 해도 부족 할 도움을 그에게 받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영식은 그 어떤 사람보다 더욱 인간적이고, 따듯한 남자였다.

티리아는 살짝 뺨을 붉히며 영식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영식 씨.”

“ 응?”

“사랑해요.”

티리아는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쑥 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영식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뭐 라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읏! 잠시 한눈 판 사이에 뭐 하는 짓인가요?”

둘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순식간에 눈치챈 루시아가 도 끼눈을 뜨며 달려왔다.

그녀는 티리아에게서 영식을 뺏듯 이 잡아당기며 말했다.

“어디까지나 본처는 저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시면 곤란해요! 알겠죠, 티 리아 씨?”

“그건 아직 정해지지 않은 일 아닌 가요?”

티리아는 방긋 미소를 지으며 루시 아의 말에 반박했다.

루시아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맞아. 아직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아라 또한 뒤늦게 그들의 사이에 끼어들며 히죽 미소를 지었다.

분위기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흘러 간다는 것을 느낀 루시아는 영식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이익! 어서 한 마디 해주세요. 주 인님의 본처가 될 사람은 바로 저라 고!”

“일단… 좀 조용히 하고 있어봐.”

영식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지는 주변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들을 바라보는 주변 병사들의 눈빛에 심상치 않은 살기가 서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여기 어딘가에 분명 죽창이….”

“죽창, 죽창이 필요하다!”

영식은 병사들 사이에서 흘러나오 는 섬뜩한 말들을 애써 외면했다.

진군은 순조로웠다.

애초에 동부, 남부, 서부의 힘이 하나로 합쳐진 연합군이니 순조롭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중저렙 소환자들과 원주민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곤 했던 경계선 너 머로 펼쳐진 숲은 5만이라는 대군에 의해서 쑥대밭이 되고 있었다.

“크아아아앙!”

“몬스터 무리가 후퇴한다!”

“근접 클래스는 진형을 유지하고 원거리 클래스만 공격해!”

수십에서 수백에 달하는 몬스터 무

리도 연합군 앞에서는 상대조차 되 지 않았다.

워낙 병력 자체가 넓게 펼쳐져 있 는 탓에 몬스터의 기습으로 사상자 가 발생하기는 했지만 이곳이 북방 경계선 너머의 숲이라는 것을 고려 한다면 피해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 언이 아닌 수준이었다.

“피해는?”

한 무리의 몬스터들을 혼자서 전멸 시킨 알렉은 낮은 목소리로 부관에 게 고개를 돌렸다.

“처음 기습 때 사망한 24명, 교전 중에 부상당한 82명을 제외하고는 없습니다.”

“경계를 어떻게 하고 있기에 이 대 군을 상대로 기습이 가능한 거지? 몬스터가 꽁무니를 빼고 도망치는 모습을 보니 긴장이 풀려 버렸나?”

“죄송합니다!”

“경계 근무자의 숫자를 두 배로 늘 려라. 한 번이라도 더 기습을 당하 면 책임자의 머리부터 몬스터들의 뱃속에 쑤셔 넣어주지.”

“아, 알겠습니다!”

알렉의 딱딱한 명령을 들은 부관은 바짝 긴장에 찬 목소리로 경례했다.

사실 대군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습

을 당할 만한 구멍이 많은 거지만 그런 변명은 알렉에게 통하지 않았 다.

“역시 알렉 장군님에게 통솔을 맡 긴 건 좋은 선택이었군요.”

날카로운 눈빛으로 병사들에게 호 통을 이어가던 알렉을 향해 영식이 다가왔다.

알렉은 호통을 멈추고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니, 역시 급조된 군대라 그런지 내 마음에 들지 않아. 조금 더 시간 이 있었으면 확실하게 훈련할 수 있 었을 텐데….”

“하하. 그 정도로 시간적 여유가 있지는 않아서요.”

영식은 가볍게 웃음을 흘리며 깊게 가라앉는 눈빛을 알렉에게 향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중앙 지역으 로 진입하게 됩니다.”

“알고 있네.”

알렉 또한 북방 경계선을 너머로 수차례 원정을 간 경험이 있는 경력 자였다.

숲이 끝나고 황무지가 시작되는 지 점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그곳부터는 신종 몬스터가 등장할

겁니다.”

“바이올렛 같은 괴물들 말이군.”

심각한 목소리로 표정을 굳히는 알 렉의 말에 영식은 흠칫 몸을 떨었다.

그가 말하는 바이올렛의 정체는 사 실 변장한 루시아였다.

‘뭐… 굳이 진실을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여기서 진실을 알려줬다가는 기껏 완성된 대륙 연합이 삐걱일 수도 있 었다.

그리고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착각 은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다.

신종 몬스터들이 괴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영식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중앙 지역에 들어서기에 앞서, 한 가지 제안드릴 것이 있습니다.”

“제안?”

“예.”

영식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드래곤과 싸울 부대를 따로 편성 해 주셨으면 합니다.”

드래곤.

신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그 경이로 운 생물과 격전을 준비할 때가 다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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