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 머신 176화
서부 도시 강남(3)
“여기가 강남……
“……전혀 강남 같지 않은 곳인 데.”
영식의 중얼거림에 유나는 떨떠름 한 표정으로 서부 도시 중 하나인 강남을 바라보았다.
대륙 최고의 도시라는 제국 수도 라무스를 들렸다가 이곳으로 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강남이라는 도시는 그 이름과 전혀 다르게 상당히 낙후 된 것처럼 보였다.
도로는 차라리 산길이 더 깔끔해 보일 정도로 울퉁불퉁했고, 기본적 으로 3~4층짜리 건물이 많았던 라 무스와는 달리 2층짜리 건물도 찾아 보기가 어려웠다.
길가에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볼 것도 없었다. 그들의 얼굴을 초췌했 고, 입고 있는 옷은 허름했다. 삶에 대한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눈빛이었다.
서부에서 원주민들의 처지가 어떤 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강남이면 나름 큰 도시입 니다.”
“이게 큰 도시라고요?”
티리아 또한 어처구니가 없는지 당 황스러운 표정으로 강남을 바라보았 다. 아르난 제국과 비교할 필요도 없이 당장 엘노트 왕국하고만 비교 해도 한참은 낙후된 도시였다.
“……다른 지역하고는 상황이 많이 다르네요.”
“국가가 없으니까요.”
국가란 인간 사회에서 필수불가결 한 존재였다.
지금 서부처럼 정해진 법 없이 강 력한 소환자 한 명에 의해서 다수가 통치되는 부족 형식의 집단에서는 구성원의 평균적인 삶의 질이 극도 로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경우…….
“유독 한 건물만 눈에 띄는군요.”
영식은 가늘게 눈을 뜬 채 강남의 중앙에 있는 건물을 하나 바라보았 다. 2층짜리 건물도 드문 도시에서 무려 5층까지 쌓아 올려진 거대한 저택.
그것이 누구의 집인지 예상하는 것 은 어렵지 않았다.
“……강남을 다스리는 정화영라는 소환자의 저택입니다.”
“여성 소환자가 다스리고 있는 건 가요?”
영식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며 물었다.
소환자들의 경우 여자보다 남자의 숫자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박시 아처럼 한 집단의 수장 역할을 하는 여자 소환자는 드물었다.
소환자 중 남자가 여자보다 많은 이유는 무척 단순하게 ‘적응’을 거 치기 전 튜토리얼에서 남자의 생존 율이 더 높기 때문이었다.
“예, 여성 소환자가 다스리고 있는 곳입니다. 서부에서는…… 나름 강 한 소환자라고 하더군요.”
“레벨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있나요?”
“최소 104레벨 이상이라고 합니다.”
“……104레벨이 서부에서 ‘나름’ 강 한 소환자라고요?”
영식은 다소 어처구니없다는 표정 으로 한성을 바라보았다.
104레벨의 소환자가 나름 강하다, 라는 평가밖에 받지 못하다니.
쭉 동부에서 활동했던 살바토르 길 드의 입장에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 는 일이었다.
한성은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 쓱였다.
“그런 동네니까요.”
“이래서 초인의 땅이라고 불리나 보군.”
유진 또한 허탈하다는 표정으로 중 얼 거렸다.
“흠……
영식은 짧은 침음을 삼키며 강남 중앙에 있는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부정부패의 온상이군요.”
제국 수도 라무스에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게 꾸 며진 저택.
원자재와 기술력, 둘 모두 부족한 서부에서 저런 저택을 만들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의 고혈을 빨 아먹었을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영식은 가볍게 혀를 차며 화려한 저택을 바라보았다.
서부의 정치 구조상 지배층의 부정
부패는 거의 필연에 가까웠다.
독재자가 타락하지 않기란 굉장히 힘든 일이었으니까.
“정지!”
“어느 도시에서 온 놈들이냐?!”
마차를 세워둔 영식 일행이 주변을 살피고 있을 때 일단의 무리가 그들 에게 다가왔다. 남루한 행색의 원주 민들과 달리 번듯한 무장을 한 소환 자들이었다.
딱히 성문도 없는 도시였기 때문에 별다른 검문 없이 도시 안쪽으로 들 어왔지만 영식 일행의 모습이 워낙 눈에 띄기 때문에 경비대가 달려온 것 같았다.
‘아주 개판 오 분 전이구만.’
영식은 눈앞에 나타난 소환자 무리 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해가 중천임에도 불구하고 그 들의 몸에서는 짙은 향수 냄새와 함 께 강렬한 알코올 냄새가 풍겨왔다.
대낮부터 일은 뒷전으로 하고 여자 를 낀 채 술을 퍼마시다가 헐레벌떡 달려왔다는 것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소환자가 특권을 누리는 도시인 가.’
영식은 쯧, 하고 혀를 차며 그들에
게 다가갔다.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깊 게 허리를 숙였다.
“저희는 동부에서 온 골드런 길드 라고 합니다. 혹시 들어보셨습니 까‘?”
영식의 말에 소환자들은 고개를 두 리번거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골드런 길드라면……
“그 냉장고랑 에어컨 팔고 있다는 길드 아냐?”
이미 남부에도 진출하여 크게 성공 한 덕분인지 골드런 길드의 이름은 서부에도 퍼져 있었다.
영식은 방긋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예. 맞습니다. 이번에 서부에도 상 품을 유통하자는 얘기가 있어서 이 렇게 직접 찾아왔습니다. 혹시 정화 영 님에게 안내해 주실 수 있으십니 까?”
영식은 그렇게 말하며 골드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슬쩍 그들에게 건넸 다.
주머니 가득 들은 골드를 본 소환 자들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지어졌 다.
“헤헤. 뭘 좀 아는 사람이구만, 형
씨.”
“안 그래도 에어컨이 있으면 기가 막히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영식이 찔러준 골드에 실실 웃음을 홀리며 몸을 돌렸다.
“우릴 따라와라. 여왕님이 계신 곳 으로 안내해 드릴 테니까.”
“?아, 예.”
순간적으로 ‘여왕’이라는 거창한 칭호에 당황했지만 영식은 사람 좋 은 미소를 잃지 않고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살바토르 길드원들이 그의 뒤를 따 랐다.
“여왕이라니, 설마 그 정화영이라 는 소환자 머리가 좀 이상한 건 아 니겠죠?”
영식은 발걸음을 늦추며 작은 목소 리로 한성에게 물었다.
강남이 서부 기준에서는 나름 큰 도시라고 한다지만 객관적으로 보더 라도 ‘왕’이라는 거창한 칭호를 사 용할 정도로 번성한 도시는 절대 아 니었다.
“……저도 이런 곳에서 자신을 여 왕이라고 칭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요.”
한성 또한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헛
웃음을 흘렸다.
“그보다 정화영에게 직접 창세교에 대해서 물으실 생각이십니까, 영식 씨?”
“ 예.”
한성의 물음에 영식은 고개를 끄덕 였다.
지금 당장 살바토르 길드가 해야 할 것은 창세교에 대한 정보를 수집 하는 것. 귀찮게 이곳저곳을 다니며 시간 낭비를 할 필요는 없었다.
‘보통 이런 경우 권력자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드물 지.’
한 점으로 집중된 권력은 단순히 재화와 권위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 니었다. 정보의 독점 또한 권력자의 가장 큰 특권 중 하나였다.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텐데요.”
한성은 가늘게 눈을 뜨며 말했다.
딱히 정화영의 힘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살바토르 길드에는 루시아라는 강 력한, 사기적이라고 표현해도 과언 이 아닌 아군이 있었다.
아니, 그녀를 굳이 전력에 포함시 키지 않더라도 살바토르 길드 자체 가 가진 전력이 정화영 개인의 힘으 로는 손도 써보지 못할 정도로 강력 했다.
문제는 이번 일로 인하여 창세교와 다른 세력에게 그들의 존재가 알려 지는 것이었다.
서부는 도시와 도시 간의 정보 교 류가 활발하지 않기 때문에 소란이 일어나더라도 정보가 빠르게 퍼질 일은 없었지만 주의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영식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돈 좀 쥐여 주면 별일 없겠
죠.”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는 건 대 륙 어디를 가나 똑같았다.
게다가 서부의 경우 하도 경제 자 체가 낙후된 지역이라 물가도 낮았 기 때문에 골드의 힘이 가장 크게 발휘되는 장소였다.
이쪽에서 굳이 시비를 걸지 않은 이상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날 일은 없을 것이다.
“하긴. 그것도 그렇군요.”
한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경비병들 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흐응? 골드런 길드라고?”
화려한 방 안. 붉은색 비단으로 이 루어진 기다란 소파 위에 한 여인이 옆으로 누워 있었다. 서부 도시 ‘강 남’을 다스리고 있는 소환자 정화영 이었다.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온 영식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루시아, 티리아, 아라 등에는 비할 수 없는 외모였지만 충분히 미녀의 반열에 드는 그녀는 묘한 색기를 풍 기며 영식을 바라보았다.
‘분장을 하고 들어오길 잘했군.’
영식은 소파에 누운 채 옆에서 찍 어주는 과일을 먹고 있는 정화영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영식은 도시로 들어가기 전에 티리 아와 루시아, 아라에게 분장을 할 것을 요청했다. 따로 속일 사람이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단순히 그녀들의 외모가 너무 눈에 띄기 때문이었다.
예로부터 절세 미녀는 나라를 흔들 리게 만들 정도로 분쟁의 씨앗이 되 곤 했다.
살바토르에는 그런 여인이 셋이나
있으니 그냥 대책 없이 도시로 들어 간다면 온갖 시비에 시달릴 것이 분 명했다.
지금 그녀들의 외모는 평범함에서 살짝 위 정도로 너프(?)당한 상태였 다.
‘오히려 추녀보다 이런 어중간한 미녀가 질투심이 더 심한 법이니 까.’
외모에 자부심이 어느 정도 있는 미녀일수록 그 질투심은 상상을 초 월했다.
영식은 분장을 한 것이 현명한 선 택이었다고 생각하며 정중하게 허리 를 숙였다.
“예. 골드런 길드 엘노트 지부장인 영식이라고 합니다.”
“엘노트? 아아, 분명 동부에 그런 국가가 있다고 들은 적이 있어.”
그녀는 기억을 더듬듯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서부 자체가 너무 폐쇄적인 지역이 기 때문에 동부에 있는 세 왕국 중 하나의 이름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하하. 별로 이름 있는 왕국은 아 닙니다.”
영식은 가볍게 웃음을 홀리며 답했
다.
“흐음. 그래? 일단 앉아.”
정화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영 식에게 말했다. 그녀의 거만하기 짝 이 없는 태도에 루시아의 표정이 살 짝 일그러졌다.
“우리 쪽에 물건을 팔고 싶다고?”
“예. 저희 길드 주력 상품인 에어 컨과 냉장고를 유통하고 싶습니다.”
“흐응. 그래봤자 살 사람도 별로 없을 텐데?”
그녀 또한 이 도시 원주민들의 처 지를 잘 알고 있었다. 실제 판매를 시작한다고 해도 살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원주민들을 대상으로가 아니라 소 환자들을 대상으로 판매할 계획입니 다.”
“다른 도시에도 판매하고?”
“예. 그렇죠. 남부에서 가장 가까운 강남에 지점을 만들어서 서부 전체 에 판매할 생각입니다.”
“흐응. 좋아.”
정화영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고개 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한 손을 뻗어 영식의 허벅지 를 살살 쓰다듬으며 물었다.
“직설적으로 물을게. 이거, 얼마 정
도 줄 수 있어?”
“이 정도는 충분히 드릴 수 있죠.”
영식은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삼천 골드?”
“아뇨. 삼만 골드입니다.”
한화로 따지면 3백억에 달하는 거 금. 과장이 아니라 강남이라는 도시 전체를 살 수도 있는 금액이었다.
“허업?!”
“사, 삼만 골드?!”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네 명의 호 위병은 경악에 찬 표정으로 두 눈을 부릅떴다.
“..정말이야?”
“그렇습니다.”
“하, 하하! 생각보다 통이 크네!”
정화영은 땡잡았다는 표정으로 활 짝 미소를 지었다. 3만 골드라니! 이 도시 전체를 털어도 그 정도 돈 은 나오지 않을 정도로 큰 거금이었 다.
“후훗. 이거 좀 짜릿짜릿한데?”
그녀는 요염하게 입술을 핥으며 그 렇게 중얼거렸다. 영식은 이때다 싶 어 입을 열었다.
“그밖에 몇 가지 질문드릴 것
이...
“아아, 잠깐만 조용히 있어봐.”
그녀는 영식의 말을 끊으며 영식에 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3만 골드라는 거금 때문에 꽤나 흥분했는지 살짝 붉어진 얼굴 로 영식의 뺨을 쓰다듬었다.
“내가 지금 좀 기분이 좋거든? 좀 풀어야겠으니까 내 방으로 따라와. 너 처음 봤을 때부터 좀 마음에 들 었거든.”
“?예?”
“이 누나랑 좋은 일 좀 하러 가자 고.”
그녀는 농염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 를 기울여 영식의 입술을 야릇하게 핥았다.
-쿵!
-쩌적!
그때, 묵직한 폭음과 함께 단단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바닥이 갈라졌 다.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루시아 가 끔찍한 살기를 내뿜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치워.”
“……뭐?”
“주인님한테서 그 족발 치우라고, 이년아.”
루시아는 씹어 뱉듯이 흉포한 목소 리로 말했다.
방 안에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내 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