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927화 (927/956)

의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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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뉴스에서 잔인무도한 범죄가 보도되는 경우, 사람들은 말한다.

“세상이 거꾸로 가는 거 아냐?”

강력범죄와 패륜, 반복되는 후진적 참사들이 벌어질 때마다 사람들은 말한다.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그러나?”

반면 온정이 깃든 감동 사연으로 감화를 일으키는 사례도 종종 보도된다. 소리소문없이 수년간 불우한 이웃을 위해 엄청난 금액의 후원을 지속해온 스타의 이야기부터 자신을 희생하여 타인을 살려 주변을 눈물짓게 하는 사연까지.

사람들은 말한다.

“저런 사람들이 있으니까 아직 미래가 밝다.”

온갖 흉악 범죄와 후진적 참사들이 벌어질 때마다 이 사회가, 이 나라의 번영이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수 있을지 회의감에 젖다가 가끔 나오는 따뜻한 뉴스들을 보며 이 사회에 필요한 것은 바로 저것, 이라고 한 목소리로 말한다.

인류애적 사랑과 봉사, 자기 희생을 담보로 하는 헌신을 미덕으로 생각하며 사람들은 기대한다. 부디 내 주위에 그런 사람들이 많기를.

****

“김 이사님?”

단유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박 팀장님.”

A&R 팀장이 허허 웃으며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요즘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한 건물 안에서 얼굴 보기가 통 어렵네요.”

식사는 잘 하셨어요, 라고 덧붙이는 팀장의 말에 단유가 고개를 끄덧이며 대꾸했다.

“팀장님이 바쁘신 때문이겠죠. 제가 바쁠 일이 뭐 있나요.”

“그런 말씀 마세요. 요즘 들어보니까 신인개발팀이랑 연습실도 자주 방문하고 오디션도 보셨다면서요? 재무팀 일도 바쁘실 텐데 여기저기 신경 쓰시느라 눈코 뜰 새 없으시겠습니다.”

말 속에 뼈가 있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모른 체했다.

“어쩌다보니 그랬습니다만, 그렇다고 제 일을 등한시한 건 아니니 부디 너그럽게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무슨 말씀을. 김 이사님 일 열심히 하시는 건 우리 회사 직원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덕분에 많은 부서에서 앓는 소리가 나더군요. 재무팀에게 돈 타기 힘들다고요. 사실 재무팀에서 허리를 바짝 조여줘야 회사가 잘 돌아가는 법이잖아요? 금전출납이 엄격하다는 건 그만큼 헛돈나갈 일 없다는 소리니까 늘 든든합니다.”

“감사합니다.”

“하하. ···그래도 이왕에 말이 나온 김에 겸사겸사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너무 허릴 조르다가는 질식할 수도 있잖아요? 게다가 지금 한창 프로젝트 건으로 들어가는 비용이 많으니까요.”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난 2/4분기 법인카드 사용 내역만 봐도 A&R팀이 압도적으로 많더군요.”

“···그런가요? 하하, 벌써 정리가 끝났습니까? 역시 빠르시네요.”

“컴퓨터가 정리해주는 건데 그리 오래 걸릴 일도 없었습니다.”

기찬은 헛기침으로 당혹스러움을 감추고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우리 김 이사님은 연애 안 하십니까?”

“연애요?”

“아직 젊으시잖아요? 물론 일이 많아서 바쁘신 건 이해하지만, 한창 좋을 나이에 너무 일에만 매달려 있는 건 좋지 않습니다. 인생의 선배로서 감히 조언을 하자면, 아무리 요즘 시대가 만혼(晩婚)이 유행이라 해도 결혼은 일찍 하는 게 좋다는 생각이거든요. 특히 김 이사처럼 중책을 맡은 이라면 스트레스도 이만저만 아닐 텐데, 그럴 때 가정에서 외조를 맡아줄 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게다가 우리 김 이사님은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잖아요? 요즘 젊은 사람들, 집 사기 힘들다, 차 사기 힘들다 그러면서 결혼식도 늦게 한다지만 김 이사는 그럴 필요 없잖아요. 안 그래요? 그러니까 빨리 가정을 꾸려서 안정적인 베이스를 마련하는 게 앞으로 더 큰 성공을 노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겁니다.”

느닷없이 결혼 이야기가 나오니 단유로서는 조금 황당하다는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와 개인적 친분이 거의 없던 김 이사의 입에서 듣는 결혼이니, 연애니 하는 이야기가 이렇게 어색할 수 없었다. 이야기가 나오게 된 근거를 알 수 없으니 단유로서도 그의 진의를 파악하기 어려웠고, 그래서 단유는 보편적이며 무난한 대처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해 보겠습니다.”

“혹시 만나는 사람은 있으십니까?”

“······.”

“하하,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사실 제가 나름 인맥이 좀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괜찮으시면 제가 괜찮은 자리 하나 소개해드릴까 하고요.”

“왜요?”

“왜긴요. 이사님이 잘 되셔야 우리 회사 일도 더욱 잘 하실 거고, 회사가 잘 되야 저도 잘 되는 길 아닙니까? 너무 이기적이었나요? 게다가 일단은 제가 이사님보다 어른이기도 하고, 어른으로서 젊은 인재의 성장을 바라는 순수한 마음에서 그럽니다.”

“감사합니다만, 제가 아직 뜻이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혹시 만나는 분이 있었다면 죄송합니다. 괜한 말로 심기를 불편하게 한 건, 아니죠?”

“아닙니다.”

“···그렇네요. 아무튼 만약 생각있으시면 언제든 귀뜸 해주세요. 이러니까 제가 마치 중매쟁이라도 된 거 같은데, 제 주위에 정말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겁니다. 착하고 여성미 넘치는 아이들이 정말 많거든요. 좋은 가정 환경에서 좋은 교육 받고 자란 엘리트들 말입니다. 김 이사님한테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때였다. 갑자기 건물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 있기 힘들 정도의 진동이 발밑에서부터 올라와 온 몸을 뒤흔들었다. 벽이 흔들리고 깨지며 석회가루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주변에서 비명소리가 들리고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울려퍼졌다.

“이게 무슨!”

기찬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엎어졌다. 천장이 부서지며 마감재로 사용했던 텍스가 부서져 얼굴 주위로 떨어지기까지 했다.

‘지진?’

몇 해 전, 대한민국은 지진에서 안전하지 않다, 는 주제의 다큐멘터리를 봤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한 때 대한민국 전체를 공포에 떨게 했을 정도로 심각했던 뉴스 장면도 눈 앞에서 지나갔다.

기찬은 머리를 감싼 채로 흔들림이 조금이라도 잦길 바랐지만 이 정도로 흔들리니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차라리 사무실이었다면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기라도 할 텐데, 긴 복도 중간에는 어디에도 몸을 숨길 곳이 없었다. 가까운 사무실의 문이라도 열려 있으면 기어서라도 가볼 요량으로 고개를 겨우 치켜들었는데.

“팀장님?”

덤덤하기 짝이 없는 단유의 목소리에 기찬은 찬물을 끼얹은 것 마냥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들었다. 단유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나마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긴 나 살기 바쁜데 누굴 챙기랴, 그런 마음이 불쑥 들었다가 곧 그의 표정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왜···그러십니까?”

“왜라뇨? 지금 지진이···.”

다급하게 말을 잇는 기찬의 말에도 단유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좌우를 살피는 모습에서 기찬은 또 한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발밑을 흔들던 진동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멈춘건가?

“아, 끝난건가요?”

“네?”

“방금 그거, 거의 진도 9는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는데, 그쵸?”

“네?”

단유의 되물음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숨을 헐떡이며 몸을 일으키는 기찬. 너무 놀랐던 탓일까, 급하게 바닥에 드러눕느라 그랬을까 허리가 욱신거렸다.

무릎을 세우고 일어서려던 기찬이 고개를 들었을 때,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단유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그리고 복도 중간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몇몇 직원들의 시선, 그리고 그들과 자신이 함께하는 복도라는 공간의 무결함이 위화감의 정체였다.

벽이 갈라지고 석고가루가 날리고 천장마감재가 얼굴 옆에 떨어졌었는데, 지금 그것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비명을 지르던 사람들과 분주하게 달아나던 이들은 어디가고 멀뚱멀뚱 기찬을 바라보는 사람들 뿐이었다.

“무슨···.”

“제가 도리어 묻고 싶네요. 왜 그러시는지.”

뭔가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조금 전에 그 진동 못 느끼셨습니까?”

“무슨 진동이요?”

“그러니까, 방금, 조금 전에 지진이···.”

“지진이요?”

단유의 되물음과 사람들의 수근거림 속에서 기찬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민감하신가 봅니다.”

“···못 느꼈어요?”

“네.”

“그렇게 흔들렸···.”

말을 할수록 바보가 된다는 느낌.

기찬은 뽀얀 먼지로 뒤덮인 옷을 털 생각도 못하고 다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직원들이 쭈뼛대며 인사를 해도 받아줄 생각도 못한 채로 자신의 사무실을 찾아가는 모습을 단유는 조용히 지켜보았다. 귀신에라도 씌었다며 굿판을 벌이진 않을까 싶었다.

‘귀신?’

고금을 막론하고 귀신은 증명된 적없고, 증명되지 않으며, 증명될 리 없는 초자연적 현상이다.

‘괜찮은 변명거리.’

단유는 침음을 삼키며 조용히 사무실로 돌아갔다.

찾아보니 이쪽 업계에서 귀신 이야기는 생가보다 많았다. 학교 전설만큼이나 다양한 귀신과 스토리가 생산되고 배포되고 있었다. 녹음실 귀신은 가장 흔한 사례고 연예인이 되지 못해 한이 서린 귀신이나 오랜 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원을 쌓은 귀신이야기도 많았다. 그들이 출몰하는 장소도 다양했으니, 단유는 꽤 적당한 핑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종 그런 경우가 있지만,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어떻게든 설명하고 이해하고 싶어한다. 만약 자신의 지식과 논리에서 해명되기 어려운 결과나 현상을 보게되면 비논리적인 추론도 서슴없이 자행(?)하고 마는 게 본성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게 만약 사람들의 일반적인 습성이라면 그 습성을 이용하는 것도 한 방법일 테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건, 회사가 너무 새건물이라는 것이지만 새 건물이라 귀신이 없다는 논리도 다른 식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여기 터가 안 좋은 거 아냐?”

“터?”

“건물은 지은 지 얼마되지 않은 거니까, 땅이 문제인 거 아닐까?”

“이를 테면 건물 짓기 전에 여기가 무덤이었다거나?”

“아니면 일제 시대에 독립 운동하던 사람이 억울하게 죽은 곳일 수도 있고.”

“야, 그건 너무 구체적인 거 아냐?”

“내가 생각을 해 봤거든? 근데 이거 귀신은 아냐.”

“왜?”

“귀신이면 귀신의 모습이 보여야 하는데, 우리 중에 한 명도 귀신 본 사람이 없잖아? 본 사람 있어?”

“···없지.”

“그치? 그런데 봐봐. 다들 비슷한 경험들을 했잖아? 근데 그게 자기한테 불리하게 작용했던 사람 있어? 없지?”

“불리하긴. 나는 한 번 더 당해보고 싶은데.”

“내 말이. 재만이 봐봐. 우리 중에 제일 먼저 귀신에 홀렸는데, 지금 걔 춤 봐라. 난 보고도 안 믿긴다.”

“걔만 그래? 너도 그렇지. 솔직히 난 네가 박치가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거든. 맨날 반박자 빠르게 들어가니까. 그런데 지금은 안 그러잖아.”

“야, 콘서트 무대에서 박자 틀릴 때마다 노래 멈추고 관중들이 야유하는 상황을 수백 번 겪어봐. 틀릴 수가 없어요. 무대 공포증이 생길 정도라니까.”

“넌 콘서트지? 난 집엘 못 가고 여기 갇혀서 며칠이나 춤을 췄는지 모른다. 그게 진짜 무서운 거야.”

“무섭긴 무서운데, 그래도 덕분에 다들 실력이 늘었잖아?”

“그거 때문에 여자 애들도 요즘 1연습실 쓰고 싶어하는 거 아냐? 이상하게 2연습실에서는 귀신이 안나오는데, 1연습실에서는 자주 귀신이 나온다 이거야.”

“이상한 건 1연습실이 이상한 거지.”

“그거나 그거나.”

“아무튼 실력이 늘어서 좋긴 한데, 그렇다고 마냥 좋지는 않아. 괜히 무섭고.”

아이들의 잡담은 곧 연습실로 들어온 트레이너에 의해 멈췄다.

“잡담 그만하고.”

“네.”

“귀신 타령 그만하고.”

“진짠데요.”

“그래, 나도 이제는 진짜라고 믿을 거 같다. 어떻게 한 두놈 씩 얼타고 나면 사람이 바뀌는데 안 믿을 도리가 없다야. 그렇다고 니들 무대 위에서도 그렇게 얼탈래? 무대 위에서 얼타면 실력이고 뭐고 그냥 쫑인 거 알지? 정신 바짝 차리고 집중하자. 알겠지?”

“네!”

복도를 지나가며 잠시 그 모습을 본 단유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곧 한 개인 연습실 앞에 섰다.

똑똑, 문을 두드리니 안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고 곧 문이 열렸다.

“어, 이사님.”

빼꼼 고개를 내밀었던 현진이 단유를 보고 허리를 숙였다.

“이야기 좀 할까요?”

단유의 물음에 현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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