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928화 (928/956)

의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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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을 여러 번 만나면서 알게 된 사실은 그녀가 생각보다 표정이 풍부하다는 것이다. 첫 만남 때는 긴장과 호기심을 오가는 와중에 경계심을 쉬이 풀지 않던 얼굴이었고, 두 번째 만났을 때는 톡 쏘아붙이는 말투만큼이나 다부진 얼굴로 속내를 감출 줄 아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단유에게서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몰라 전전긍긍하면서도 의젓한 꾸밈새로 단유와 마주 앉은 현진이었다.

현진의 뒤를 바라보니 조그만 책상 위에 문제집과 교과서가 널브러져 있었다. 책상 아래로 지퍼가 열린 베이지색 가방이 힘없이 벽에 기대어져 있었는데 열린 틈으로 몇 권의 노트와 책이 삐져나와 있었다.

하긴 개인 연습실로 사용하도록 만들어둔 이 공간이 어지간한 독서실보다 좋긴 할 테다.

단유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현진이 슬그머니 발로 가방을 밀었다.

“공부 중이었어요?”

“숙제가 있어서요. 다음 레슨 때까지 시간이 조금 남길래···.”

“뭐라 할 생각은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연예인이 목표라고 해서 학업을 도외시하는 것은 좋지 않다. 회사에서는, 설령 대학을 갈 생각이 없더라도 고등학교는 졸업하는 걸 권장하는 편이었다. 아직은 학교를 자퇴하고 연습에 올인하고 싶어하는 연습생이 없었기에 별다른 충돌이 없었지만, 되도록 학업과 회사 생활을 함께 하기를 바라는 게 회사의 기본적인 입장이었다. 그래서 소위 급식라인, 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종종 레슨 시간이 빌 때 개인 연습실에 들어가 과제를 하기도 했다.

“학원에서 하는 것보단 좋지 않겠지만, 어지간한 독서실보다는 좋을 거예요. 방음도 잘 되니까.”

“네.”

단유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본론을 꺼냈다.

“생각은 해 봤어요?”

“···네.”

현진의 대답에 침묵으로 다음 말을 기다리니 현진이 호흡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그게요. 많이 생각해 봤는데요,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아니 모르겠다기보다는, 그냥 자신이 없다고 해야 할지···. 제가 연예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가수가 돼서 무대에 서는 것도 상상이 잘 안 되고요. 그런데 제 나이에 제가 뭘 잘하는지, 뭘 잘할 수 있는지 알기가 어렵잖아요? 여태까지는 제가 잘하는 게 별로 없기도 하고, 특별히 미치도록 좋아한 것도 없었고. 그런데 공부는 특별히 좋아하지 않아도, 특별히 잘하지 않아도 중간만 해도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별로 부담 없이 할 수 있으니까 했던 거거든요.”

이제껏 단유가 알던 사람 중에 ‘공부가 부담이 없어서 괜찮다’고 표현한 사람이 있었던가? 공부가 미치도록 좋아서 하는 사람도 있었고, 공부가 미치게 만들어서 싫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부담이 없다, 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현진이 얼마나 독특한 캐릭터인지 설명이 된다. 다만 그것을 현진 자신만 모를 뿐이다.

“사실 제가 머리도 별로 좋은 편은 아닌 거 같거든요? 그런데 운이 좋아서, 우리 동네에 있는 학원에 장학생으로 들어갈 수 있어서 돈 안내고 수업을 받을 수 있다보니 성적도 괜찮게 나오는 거 같고, 그래서 그렇게 쭉 공부하면 무난하게 대학도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만약 대학을 못 가면요?”

“대학 못 가도 설마 입에 풀칠이나 못할까요? 뭐라도 하면 되겠죠. 딱히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겠다는 욕심은 없었어요. 제 분수를 아는 편이니까요. 좋은 데 들어가려면 좋은 대학에 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공부를 엄청 잘해야 하거나 아니면 돈이 많아야 하잖아요? 근데 저희 집은 돈도 많지 않고, 저도 별로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니까.”

“그래서 그 대안으로 연예인을 선택하겠다?”

“아뇨, 그런 뜻은 아니고요. 그러니까 여태까지는 제가 재능이란 게 있다고 생각을 안 했었는데, 이사님이 그러셨잖아요. 제가 재능이 있다고. 다른 분들도 그렇게 말씀하시고. 만약 저한테 제가 몰랐던 재능이 있고, 그걸로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걸 살리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나름 생각을 하긴 했네요.”

“저 잠도 못 자고 고민했어요.”

“할머니는요?”

“···저희 할머니는 제가 뭘 해도 괜찮다고 하셔요.”

위험한 일 안 하고 손녀가 즐겁기만 하다면야 뭘 해도 이해하고 응원해주겠다, 는 입장이리라.

“그래서 결론은 데뷔를 목표로 해 보겠다는 건가요?”

“네.”

“각오는 되신 건가요?”

“···네.”

“다행이네요. 사실 지금부터 연습생 생활을 시작해서 언제 데뷔가 가능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긴 합니다. 빠르면 좋겠지만, 2년 이상, 어쩌면 성인이 될 때까지도 연습만 하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어요. 그 사이 지금의 각오가 흔들리는 일이 있을 수도 있겠죠. 후회할 수도 있어요. 그 시간에 차라리 공부에 매진했더라면 좋았을 걸, 하고요.”

“이사님은 제가 그만두길 바라시는 건가요?”

“아니요. 앞으로 많은 유혹이 있을 거란 이야깁니다. 보기보다 화려하지 않습니다. 연예인이란 거. 힘든 일 많아요. 하지만 그것도 아주 미래의 이야기. 지금부터가 당장 힘들 거예요. 그걸 잘 이겨내란 충고입니다.”

“알고 있어요.”

“아는 것보다 더 힘들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으란 이야깁니다. 아무튼, 그동안 공부도 열심히 하시고.”

현진의 각오도 확인했으니, 이제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단유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현진도 덩달아 일어섰다.

“그런데요.”

“네?”

“지금 풀고 있는 거 숙제라고 하셨죠?”

“네.”

“3번 문제의 이차방정식이 잘못됐네요.”

“네?”

“이차함수 그래프의 기울기를 다시 계산해 보세요.”

현진은 동그란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한 번 쓱 보면 그냥 알 수 있어요?”

“간단한 문제니까요. 그리고 지금 손가락이 짚고 있는 문제, 6번 문제네요? 그것도 답 틀렸어요. 사칙 연산 실수가 잦은 거 같은데, 문제를 많이 푸는 연습을 하셔야겠네요. 그럼 수고해요.”

단유가 나간 뒤, 현진은 책상 위에 펼쳐뒀던 문제로 시선을 돌렸다. 문제 풀이는 자신의 노트에서 써내려가고 있었는데, 자신이 막 휘갈겨썼던 것을 흘깃 바라본 것만으로 틀린 부분을 찾아내는 단유의 기막힌 능력에 입이 벌어졌다.

“···중학교 수준의 수학이 어른들한테는 되게 쉬운 거였구나.”

자신도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이 정도 문제는 쉽게 풀 수 있는 정도가 되려나? 이 정도(?) 문제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자신이 한심하게 보였을까, 싶었다.

****

이따금씩 귀신(?)을 영접한 아이들이 신들린 성장세를 보이기도 하는 등의 소란이 있었고, 자신도 경험했다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하는 A&R 팀장만의 요란한 경험담을 미심쩍게 바라보는 직원들의 시선이 잦아들 무렵, 단유는 모처럼 퇴근 후 차를 몰고 집 대신 다른 곳으로 향했다.

퇴근 시간 꽉 막힌 도로를 자주 경험한 적은 없었지만, 달리 약속을 하고 가는 것도 아니어서 단유는 느긋한 마음으로 차를 운전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리 느긋한 마음은 아니었다. 보다는 두근거림이 더 컸다. 이렇게 두근거릴 일일까 싶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다고 생각하니 절로 가슴이 뛰었다. 그래서 차라리 이렇게 느리게 가는 편이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데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차 안이 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에 음악이라도 들어볼까 싶어 카오디오를 켰다. 이전에 세팅된 대로 음악이 흘러나오는데 예전에 한 번 들어본 적 있는 클래식 연주곡이었다. 지금 만나러 가는 사람의 취향이 이랬었지, 라는 기분에 끄지 않고 계속 켜놓았다. 현악기의 현란한 연주가 귀를 즐겁게 했다.

“어쩐 일이야? 연락도 없이?”

하은의 놀란 얼굴을 보며 연락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유는 결코 다른 곳에서는 보여주지 않을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하은과 포옹했다.

“갑자기 찾아와야 더 감격스러울 거 같아서요.”

“감격 같은 소리하고 있네. 우리가 어디 감격하고 그럴 사이니?”

“제가 먼저 찾아왔다는 게 놀랍지 않으세요?”

“놀랍긴 한데, 이렇게 놀래기 전에 자주 전화나 하고 그래라. 넌 폰을 장식으로 들고 다니니?”

“연락은 받아야죠.”

“어유, 너 이기적인 거 다른 사람들이 알아줘야 하는데.”

“퇴근 안 하세요?”

“너 그새 내가 무슨 일 하는지 까먹기라도 한 거야? 나 퇴근하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 너처럼 직장생활하는 애들이랑 다르다고.”

“저녁은요? 드셨어요?”

“좀만 기다려. 이거만 정리하고 나가자.”

오랜만에 만난 하은은 전에 비해 많이 핼쑥해졌다는 느낌이었다. 끼니는 제대로 챙겨 먹는 건지 궁금했다.

“내 걱정하기 전에 네 걱정부터 해라.”

“전 밥 잘 챙겨 먹고 있어요. 점심, 저녁은 거의 빼놓지 않고 먹고 있거든요.”

“집에서는 밥 안 해 먹지?”

“잘 안 해 먹게 되죠.”

“그러지 말고 그냥 사람 불러.”

“혼자 사는데 뭘 그래요.”

“청소는? 아니다, 네가 청소를 안 할 리가 없지.”

“선생님이야말로 청소는 제대로 하고 사시는지 모르겠네요.”

“돼지우리까지는 아니니까 걱정 마라.”

단유는 하은을 데리고 고깃집에라도 갈까 했는데, 냄새도 배는 데다, 너무 많이 먹으면 일할 때 힘들다는 하은의 말에 결국 적당한 스페인 요리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메뉴를 주문하고 기다리며 그간의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하은은 단유의 이야기에 깜짝 놀라며 손뼉을 쳤다.

“우리 학원 학생이었네?”

“네. 들어보니까 저소득층 지원 장학생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찾아온 거구나?”

“네.”

“그전에는 까맣게 잊고 살다가 학원 이름이 나오니까 그제야 하은이란 사람이 있었구나, 생각나서 찾아온 거구나?”

“그건 아니고요.”

“그냥 찾아오기 뭣하니까 서프라이즈 흉내라도 내면서? 그럴거면 근사하게 꽃이나 케익이나 뭐라도 사 들고 오지 그랬어? 그럼 좀 더 감동이었을 텐데?”

“어차피 같이 저녁 먹을 생각으로 온 건데, 케익은 무슨. 그리고 선생님 꽃 별로 안 좋아하시잖아요.”

“일부러 빈정대는 건데 그냥 싹 무시하네? 단유, 너 많이 컸다?”

“전부터 말씀드렸지만 저 원래 컸어요.”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마칠 즈음, 단유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

“응?”

“안 들어오실 거예요?”

“그 말 언제 하나 했다.”

미리 짐작했다는 듯 하은은 당황하지 않고 물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희미하게나마 웃던 표정을 싹 지우고 진지한 표정이 되어 단유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독립해야지.”

“독립, 이라고 말씀하시기엔 선생님 나이가···.”

“나 말고 너 말야, 너.”

단유의 농담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다시 표정을 고치며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오래 생각했던 건데, 이제 너나 명수나 더는 내가 필요 없잖아? 보호받을 나이도 아니고. 이미 그 순간에 내 역할은 없는 거라고 봐야지. 사실 더 일찍 내가 나왔어야 했는데, 그때는 나도 마음이 제대로 정리가 안 돼서 그랬었어.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석은 선택이었어.”

“선생님···.”

“나 말 안 끝났다. ···다행히 명수는 결혼도 하고 자기 가정을 꾸렸는데, 넌 여전히 그대로잖아? 머리만 굵어졌지, 여전히 같은 패턴, 같은 생활 속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잖아? 물론 다른 사람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재산도 쌓았고, 직장도 가졌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지금 이대로일 순 없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든 생각이 너한테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거였어. 사실 직장도 그런 이유였지만, 좀 더 획기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내가 집에서 나오는 게 답이었다고 생각해.”

“전 지금에 만족하는데요?”

“만족하지마. 넌 더 클 수 있는 사람인데, 계속 널 가두고 있어. 일부러 널 보이지 않는 울타리 속에 가두고 있잖아, 지금.”

“···저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닌데요.”

“이 세상에 특별하지 않은 사람 없다지만, 내가 아는 한에서 너만큼 특별한 사람은 없어. 그런데 넌 계속 너 자신을 감추잖아? 주변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건 너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좋지 않다고 봐.”

“전 잘 모르겠는데요. 그리고 선생님. 만약 선생님 말씀대로 되려면, 제가 어디 정치권에 출마라도 해야 하는 건가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제 이름을 알 정도로? 그렇게 되는 게 성장이고 독립인가요?”

“그런 뜻 아니란 거 알잖니? 그럼 반대로 물어볼게. 내가 한 말, 니가 너 스스로를 가두고 있다는 말, 틀렸어?”

“······.”

단유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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