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자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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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사. 술 한 잔 할까요?”
회의를 마치고 나가던 길에 대훈이 단유를 불러 물었다. ‘웅녀 프로젝트’라는 이름을 발표 한 후부터 대훈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가 거의 없었다. 때문에 혹시 단유가 프로젝트명 발표 때 몰래 웃었던 것을 봤던 게 아닐까 신경이 쓰이기도 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동안 너무 바빴잖아요.”
작년과는 너무나도 달라진 일상을 경험하는 중인 대훈이었다. 오전부터 퇴근 할 때까지 무수히 많은 결제 서류들과 씨름하고 시시각각 올라오는 보고서들을 검토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대훈. 스스로 말한 바와 같이, 파와 마늘만을 먹으며 인고의 나날을 보냈다는 웅녀의 삶을 간접체험이라도 하듯 종이 더미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저는 평소랑 크게 달라진 게 없어서.”
“이런 우리 회사에서 제일 한가한 사람이 김 이사님이었던가 보군요.”
“죄송하네요.”
“농담입니다, 농담. 김 이사가 일을 얼마나 열심히 하고 계시는지 모르지 않아요. 김 이사 덕분에 우리 회사 살림살이가 좋아졌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과찬이시네요.”
“그럼 퇴근할 때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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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근처에 괜찮은 일식 선술집이 있었다. 생긴 지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며 대훈이 말했다. 사실 단유는 그다지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어서 함께 술자리를 마련하면 거의 대훈 혼자 병을 비우는 편이다. 잘 모르긴 해도 자신과 함께 술을 마시면 재미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해봤던 단유였다.
그럼에도 대훈이 단유를 집어 굳이 ‘술’을 마시자고 한 것은 단지 새로 생긴 선술집에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달리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도 보여서 단유는 대훈의 제의를 수락했던 것이고.
“분위기 좋네요.”
선술집 안 따로 방이 있어 그곳에 자리를 잡은 두 사람은 저녁도 겸하기로 했다.
“여기에 간장을 살짝 얹어서 먹으면 맛있어요.”
‘히야얏코’라고 불리는 차가운 두부 위에 간장을 부어 적신 뒤 한입에 넣은 대훈은 단유에게도 먹어보라며 손짓을 했다. 두부의 시원하고 고소한 맛과 대파향, 그리고 간장의 짭조름함이 조화롭게 입안을 굴러다니며 기분을 좋게 해준다는데, 잘 모르겠다. 그냥 단유는 부드럽게 부서지는 두부의 식감을 즐기며 삼켰다.
“김 이사가 빨리 술맛을 알아야 할 텐데.”
서로의 잔을 채우고 건배를 외쳤다. 그동안 술이 고팠던지, 아니면 입가심으로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호기를 부리는지 컵 가득 채웠던 맥주를 한 번에 비우고는 입가를 훔치는 대훈.
단유는 한 모금만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고민이 있습니까?”
“고민이 있어 보이나요?”
“그렇지 않으면 절 여기 부르지 않으셨을 거 같아서요.”
대훈은 낮은 웃음을 흘리곤 티슈를 집어 입가를 훔쳤다. 그리고 긴 한숨을 뱉은 뒤, 얼굴을 굳혔다.
“대표라는 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요즘 많이 듭니다.”
“힘든신가 보네요.”
“힘들죠. 다들 힘든 건 마찬가지라지만, 그래도 힘드네요.”
가오리 등심살이라든가, 하는 안주를 집어 질겅질겅 씹으면서 대훈은 말을 이었다.
“실은 말이죠,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요?”
“단유 씨가 보기에 지금 회사 어떤가요?”
한동안 불리지 않던 이름으로 불리니 또 생소한 느낌이다.
“글쎄요. 어떤 의도로 묻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회사 생활을 해 본 경험이 일천해서 대답을 드리기가 쉽지 않은데요.”
“그러니까 회사 초기에 비해서···하아.”
말을 하다말고 맥주를 다시 빈컵에 채우더니 곧바로 벌컥벌컥 마셔댄다. 속이 탄다는 뜻이겠지.
“그냥 제 생각을 말하자면, 처음 회사를 만들기로 결심했을 때 상상했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 같아서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판단하기엔 너무 이른 시점 아닐까요?”
“물론 그런 면도 있지만, 특히 최근의 회사 내부를 보면 어딘지 모르게 어긋난다는 느낌입니다. 딱히 뭐가 잘못됐다고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느낌이 그렇다는 이야깁니다. 해서 혹시 단유 씨는 뭔가 저랑 다르게 본 것이 있지 않을까 해서요.”
“어떤 느낌이 들었다는 거죠?”
“그냥 뭐랄까, 하, 참. 이게 말로 표현하기가 되게 어렵네요. 그런데 그냥 제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간다는 느낌인데, 이걸 콕 집어서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회사의 운영적인 측면에서 말인가요?”
“그것도 그렇지만, 굳이 말하면 분위기 자체가 어딘지 모르게 바뀌었다는 느낌입니다.”
마치 음모론마냥,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슬금슬금 내부로 들어와 인지가능한 범위의 경계선에서 깔짝댄다는 느낌. 실재하는지도 불분명해서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데, 괜히 신경을 쓰면 어딘가 모르게 걸리적거리는 느낌.
모호하기만한 대훈의 설명을 들으며 단유는 맥주 대신 물을 한 잔 마시며 입을 축였다.
“아니, 신경쓰지 마세요. 제가 요즘 신경이 곤두서서 그런가 봅니다. 대형 프로젝트를 처음 진행하는거다 보니 괜히 예민해졌던 모양이에요.”
방금 들은 말은 모두 잊으라는 듯 손을 흔들고는 잔을 들어 보였다. 단유는 거기에 맞춰주는 대신 자세를 고쳐 앉으며 대훈과 시선을 맞췄다.
“제 추측일 뿐입니다만, 어쩌면 대표님이 그런 느낌을 받는 이유는···.”
대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통제력을 잃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통제력이요?”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 초기의 상황과 지금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에 소속된 아티스트 수만 해도 그렇고, 그 아티스트들을 지원하기 위해 최근 새로 모집한 인원도 있으니 회사 전체 구성원도 대폭 늘어난 상황입니다. 연습생도 마찬가지고요. 제가 매일 검토하는 자금 현황만 봐도 작년과는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단순히 수입이 생겼다는 게 아니라, 수입과 지출의 규모 자체가 1년 만에 달라진 상황입니다. 그러니 ‘다르다’고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단유는 맥주 병을 들어 반쯤 비워져 있는 대훈의 잔을 채워주었다.
“하지만 단지 다르다는 이유만이라면 대표님이 지금 혼란스러워할 이유가 안 되겠죠. 또 하나 더 달라진 점을 꼽자면···.”
****
같은 시간, A&R 팀장은 신인개발팀장, 홍보팀장과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자, 일단 건배부터 합시다.”
길고 넓은 테이블 위, 어둑한 조명 아래 각종 안주들과 값비싼 양주들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다. 흔들리는 노란 위스키가 세 사람의 손에서 입으로 넘어가고 독한 술기운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팀장님 축하드립니다.”
“축하는 무슨. 축하하기엔 아직 이르지.”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 바닥에선 어울리지 않는 말이야. 결승선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절대 긴장을 늦춰선 안된다고.”
짐짓 준엄한 목소리로 후배 팀장들을 가르치는 듯 하지만, 이미 입꼬리가 위로 칫솟고 있다.
“이번 일만 잘 끝내면 적어도 사내에서 팀장님의 입지는 누구보다 강해질 겁니다.”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 이야기 아닌가? 만에 하나라도 대박이 난다면, 연습생들을 혹독하게 가르쳤던 자네의 공이 크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에이, 제가 뭘요. 팀장님이야말로 진정한 기획자이자 감독님이신 걸요. 영화도 그렇잖습니까? 대박이 나면 감독이 잘한 탓이지, 스탭이 잘난 탓이라는 사람이 있나요?”
“그런데 말입니다. 오늘 발표하셨던 그 컨셉은 가능하겠습니까?”
홍보팀장이 염려스럽다는 듯 조심스럽게 묻자 A&R팀장은 혀를 차며 양주병을 집어들었다.
“불가능은 없다, 라는 말은 나폴레옹만 쓰는 게 아냐. 이 바닥에 안 되는 게 어딨어? 특히 우리 회사처럼 돈을 펑펑 써대도 아무 말 안하는 곳이라면 더더욱 불가능은 없어. 돈으로 안되는 게 있던가?”
과연 그렇다. 돈이 없어서 못하지, 돈만 있으면 뭐든 가능하다. 돈으로 안 되는 것도 있다는 말은,
“돈을 제대로 쓰지 못한 거지.”
두 후배들의 잔을 채워주며 자문자답하는 팀장.
“그리고 애초에 완벽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어. 이 세상에 완벽한 인간이 어디 있나? 단지 완벽한 인간이라는 이미지만 있을 뿐이지. 이미지? 그거 어떻게 만드나? 자네랑 자네가 만드는 거야. 완벽해보이게끔 훈련시키고, 완벽하게 생각들게끔 자네가 말을 만들어 퍼뜨리는거야. 대중들은 전문가가 아니야. 소수의 전문가는 있을지라도 다수의 대중들은 결국 아마추어에 불과해.”
“맞습니다.”
“그러니 계획을 잘 세워야 해. 어떻게 이미지를 구축해 나갈 것인가. 완벽한 군무, 완벽한 가창, 완벽한 외모. 돈으로 다 가능해. 입담? 재능? 굴리면 돼. 될 때까지 굴리면 다들 하게 돼 있어.”
“불가능은 없으니까요.”
“그렇지. 거기에 약간의 팁만 얹어주는 거지. 어차피 방송이잖아? 데이비드 카퍼필드가 정말로 자유의 여신상을 없앴나? 아니잖아? 간단한 눈속임이었지?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방송이니까 가능한 거야. 아이돌도 마찬가지라고. 아니, 아이돌 뿐만 아니라 연예인들 대부분이 비슷해. 키가 작아? 키가 커보이게 화면을 잡으면 그만이야. 말을 못해? 철저하게 대본을 암기시켜서 풀어내면 돼. 흠이 잡힌다? 언플하면 돼. 뭐가 문제야?”
팀장은 다들 알잖아, 라는 눈짓으로 두 후배를 바라보았다.
물론 알고 있다. 그렇게 굴러간 바닥이다.
“성공은 운이야, 운. 진짜 실력으로 성공한다는 말은 신화에 불과하다고. 다들 경험해봤잖아.”
“그럼요.”
한때는 쟤가 왜 안 뜰까, 고민한 적도 있었다. 안 뜨는 건, 단지 대중의 변덕, 혹은 아티스트의 노력 부족 같은 게 아니었다.
쟤는 어떻게 뜬 거지, 라고 의문을 품은 적도 있었다. 그가 성공한 이유는 그저 실력이 좋아서만도 아니고, 대중의 기호에 정확히 부합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냥 운이 잘 맞아 떨어졌을 뿐.
“그렇다고 운이 좋기만을 바라는 건 바보지.”
“운을 잡아챌 수 있어야겠죠.”
“그건 두 번째로 바보인거고.”
신인개발팀장을 면박준 후, A&R팀장의 다음 가르침이 이어졌다.
“운도 돈으로 살 수 있어.”
팀장이 테이블 위를 가볍게 내려치며 두 사람의 주목을 유도했다.
“언론사들, 방송사들, 돈으로 움직이는 곳이야. SNS? 돈으로 여론도 움직일 수 있는 세상이야. 대형 기획사도 다 그렇게 하는데, 우리가 왜 못해? 그렇지?”
“맞습니다.”
단지 중소 기획사들만 못한다. 돈이 없으니까.
“우리는 운이 좋은거야. 마음씨 좋은 쩐주를 모시고 있으니까.”
지금 재무이사 코스프레를 한다고 헛돈 못쓰게 재무, 출납, 결산을 철저히 하고 있으나 투자에는 넉넉한 단유를 보며 A&R팀장은 확신했다. 성공할 수 있다고.
성공이 반 이상 보장된 이 프로젝트에서 자신이 얻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A&R팀장의 고민이었다. 그리고 그의 답은 발언권이었다. 누구보다 강한 발언권. 그것은 지금 당장에도 중요하지만, 향후 이사회 진입 시 더 큰 도움이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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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을 감수하고 혁신적인 모험에 도전할 수 있지만, 그럴수록 실패의 확률은 커지죠. 실패를 두려워하는 이들은 혁신을 꺼릴 수밖에 없고, 그러니 도전하는 자세로 임했던 초심이 변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대표님은 지킬 것이 많으시니까요.”
“지킬 것이 많다라···. 확실히 그런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전 도전하고픈 마음이 있습니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고, 오늘 회의 때 잠깐 언급됐었죠? 분명 그런 면이 있네요. 이상 속의 자신은 언제까지나 젊고 도전적이지만, 현실에선 많은 것들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제가 늙었다고 타박하는 것 같습니다?”
“···농담이시죠?”
“농담인 걸 알면 웃어주시는 게 저로서도 편합니다만.”
“그건 다음으로 미루죠. 아무튼, 지금 대표님은 이상과 현실의 충돌을 겪으며 두 노선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가요.”
“그래서 처음에 말씀드렸던 통제력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처음에는 이상과 현실이 같은 노선을 걷고 있었기에 대표님은 단호하게 회사 내부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하며 장악하고 있었습니다만, 어느 순간 현실과 이상이 분리되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여 통제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런 문제인가요. 그럼 단유 씨가 보기에 전 어떤 선택을 해야 합니까?”
“우선은, 여유를 되찾으세요.”
“여유가 없어 보입니까?”
“최근에는 재미없는 농담도 잘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시니까요.”
“충고입니까, 디스입니까?”
“둘 다입니다.”
“냉정하시네요, 여전히.”
머쓱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는 대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