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자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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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는 대훈을 달래 대리기사를 불러 태워 보낸 후, 단유는 집으로 돌아왔다.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마친 뒤, 책상 앞에 앉은 단유는 컴퓨터가 켜지는 걸 기다리다가 일어섰다.
혼자 살고 있지만, 전과 같이 2층의 방을 사용하던 단유는 아래층으로 내려와, 거실을 지나,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 문을 열자 빛이 어둠을 밝혔다. 거실 불도 켜지 않았었구나, 깨달은 단유. 하지만 굳이 켜야 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생수병을 들고 컵에 따른 뒤, 다시 원래 위치에 병을 놓고 냉장고를 닫고 2층으로 올라가려다 멈칫하며 자리에 섰다. 적막하고 어두운 거실.
단유는 2층으로 올라가는 대신 거실 소파로 향했다. 구겨지는 가죽 소파의 소음 속에 천천히 몸을 묻으며 물로 목을 축였다. 거실 창가 쪽을 바라보니 달빛에 어스름히 드러난 정원이 보인다.
이 시기의 정원은 조금만 소홀하면 인적이 닿지 않는 정글 어딘가의 모습같이 변해버린다. 들쑥날쑥 자란 잔디들과 허락 없이 자라난 잡초들로 인해 엉망이다. 와중에 모란이 하얀 꽃잎을 드러내 화려함을 자랑하지만 그뿐이다. 만약 자연이라는 거대한 배경 속에서 꽃을 피웠다면 아름다웠을 모습이, 좁은 정원 속에서는 그저 애처롭다.
저 꽃에게는 좀 더 어울리는 무대가 있을 터인데, 정원의 주인을 잘못 만나 빛을 보지도 못하고 저렇게 홀로 고군분투하는 모습이랄까. 바빠서 정원 관리할 겨를이 없었다는 핑계는 힘들게 피어난 모란에게 미안할 일이다.
그러나 쉽게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는다. 귀찮아서? 게을러서? 밤이라서? 아니면 이대로도 상관없으니까?
거실이 더럽다면 당장에 청소를 하고 볼 일이다. 시각적으로도 지저분하지만, 위생적으로도 건강에 좋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거실 창을 사이에 둔 정원은 그저 고개만 돌리면 그만이다. 지난 몇 달간 그랬듯, 여유가 없다는 핑계와 암막 커튼 하나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또 몇 달을 보내게 될 터였다.
혹시 엉망으로 자라난 잡초가 더 무성하게 자라서 좁은 정원을 가득 채운다 한들, 단유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만약 정원에 심어둔 꽃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꽃이 시들거나 피지 못한다 한들 암막 커튼 바깥의 일이다. 단유가 식사를 챙기고 회사 일을 보고 방에서 책을 보는 일상에는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
정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두 베어버리면 되지 않을까. 그런 수고로움도 굳이 감수해야 할 필요가 있냐는 의문이 들 정도다.
결론은, 이대로 두어도 상관없다는 뜻.
그렇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단유가 2층의 방을 고집하는 이유와 같다.
만일 하은이 돌아와 저 정원을 보게 된다면? 휴가를 맞이한 명수나 상미가 집에 놀러왔을 때 저 정원을 본다면?
살다 보면 때론 효율적이지 못한 일에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정원을 가꾼다고 해서 삶의 효율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삶의 만족도가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단유에겐 말이다.
정원에 물을 주고, 잡초를 솎아내고, 꽃을 가꾸는 행위가 도시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보람을 준다고 누군가 말했다. 정확히는 ‘하은’이 정원을 보며 한 말이지만, 정원을 가꾸는 일은 전혀 보람과 상관없었다. 단유에게는.
그렇지만 이 집은 단유 혼자만의 집이 아니다. 비록 지금은 단유 혼자 점거하고 있지만, 언제든 돌아올 사람들이 있는 집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항상 최상의 상태를 유지해주고픈 게 단유의 마음이었다.
사실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단유가 자리를 털고 일어서 거실 창을 여는 명분이 된다.
여름이 다가옴을 알리는 선선한 훈풍이 단유의 볼에 닿았다. 그 바람 속에 단유의 손가락이 가볍게 움직였다. 바람이 불고 마치 자로 잰 것처럼 잔디가 잘려나갔다. 줄기에서 떨어져 나온 푸른 잎들이 바람에 뭉쳐 날아다니다가 한곳으로 뭉쳐 정원 구석으로 모인다.
꽃을 심어놓은 화단에도 바람이 분다. 제대로 배운 적은 없지만, 예전 에밀리아가 지하 도시에 꽃밭을 심고 키우던 모습을 지켜본 경험이 있다. 그때 어깨너머로 슬쩍 봤던 걸 흉내 내어 보면,
“···쯧.”
저것까지는 마법으로 되지 않나 보다. 잘려나간 꽃봉오리 하나가 바람에 실려 날아가다 바닥에 툭 떨어지고 말았다. 에밀리아가 봤다면 소매를 걷고 달려와 한소리라도 했을 것이다.
“······.”
생각해보니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것 같다. 에밀리아는 단유가 무슨 짓을 해도 단유 앞에서 화를 내거나 큰 소리를 치는 법이 없었으니까. 대신 떨어진 꽃을 보며 슬퍼하긴 했을 것 같다.
단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청명한 빛을 사방에 뿌리며 고고하게 떠 있는 달을 보니, 괜히 겸연쩍은 기분이다. 밤이 되면 감상에 젖는다던데, 자신도 이런 감정에 물들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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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에밀리아와 다르다. 그녀처럼 열정적으로 꽃을 사랑하지도 않을뿐더러, 꽃이 피어나는 순간을 함께하기 위해 새벽부터 지켜보는 열정도 없다.
그런데 반대로 대훈은 그런 에밀리아를 닮은 면이 있다. 자기 손으로 꽃이 필 때까지 돌보고 가꾸며 꽃이 피어나는 순간을 지켜보고픈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욕심’이라고 표현하면 대훈이나 에밀리아나 모두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대신 ‘열정’, 혹은 ‘책임감’이라 불러 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대훈은 그런 열정으로 회사를 만들었고, 프로젝트의 시작을 선언했다.
그가 느낀 불안은 잡초가 자란 정원을 보는 정원사의 그것과 비슷하다. 차라리 잡초가 자란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정원사의 처지가 훨씬 낫다. 잡초와 잔디, 화단에 심어둔 꽃의 잎들이 뒤섞이며 어느 것이 잡초이고 잔디이고 잎인지 구분하지 못하니 마음이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에게 ‘이건 2월에 심은 꽃이고, 이건 잡초다’라고 명쾌하게 알려주면 고마워하겠지만, 단유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단지 불안의 근본적인 원인을 두루뭉술하게 설명했다.
단유가 본 대훈은 여유가 없기도 했거니와, 여전히 자신의 위치에 갈팡질팡하는 것처럼 보였다.
대훈은 여전히 매니저로 활동했던 긴 시간을 잊지 않고 있어서 실무에도 자신이 있다고 장담하지만, 한 회사의 대표라는 직위에서 실무보다는 경영 쪽으로 좀 더 많은 비중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꽃을 너무 사랑한 정원사가 꽃을 피우는 것에만 집중한다면, 그래서 자신의 발밑에서 잡초가 자라는지 잔디가 자라는지 제대로 보지 않는다면, 정원이 망가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 된다.
때문에 단유는 그가 플로리스트가 아닌 정원사가 되기를 바랬다. 숨을 돌리고 여유를 가지며 주위를 살핀다면 충분히 자신을 불안케 한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불안의 원인을 찾는다면, 자연히 그 불안을 제거할 방법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 이사님, 좋은 아침입니다.”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A&R 팀장을 만날 때도 단유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네. 그런데 어제 약주를 좀 하셨나 보네요.”
“어? 설마 냄새가 납니까?”
당황해하며 코를 킁킁대는 팀장의 모습에 단유가 고개를 저었다.
“눈 밑이 검고 코끝이 불그스름한 데다, 전체적으로 숙취가 덜 가신 모습처럼 보여서요.”
“하하, 이것 참 부끄럽습니다. 사실 어제 부하 직원들과 소소하게 한잔한다고 했던 게 조금 과했던 모양입니다.”
“괜찮습니다. 단지 피곤해 보이시는 것 같아서 말씀을 드린 것뿐인데요, 뭘. 피곤하시면 좀 쉬시는 게 어떨까 해서요.”
“제가 쉬고 싶다고 쉴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서요.”
“그렇군요.”
숙취를 들킨 부끄러움은 별로 없는 듯 보였다. 오히려 숙취에도 늦지 않게 출근했다는 당당함이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자니 출근한 직원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팀장은 뒷짐을 진 채 턱을 끄덕여 인사를 받고 단유는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받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팀장이 먼저 단유에게 손짓했다.
“먼저 타시죠?”
굳이 이게 순서를 정할 일인가 싶지만 단유는 사양하지 않았다. 단유와 팀장의 뒤에 서 있는 직원들을 기다리게 해선 안 되니까.
****
이사실에 들어가기 전 단유는 먼저 휴게실로 향했다. 부지런히 마셔줘야 할 음료수들이 있는지 확인 후, 언제나처럼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오렌지 주스 한 병을 꺼내 들었다. 오전 업무를 보면서 마시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돌아서는데 앞에 나윤이 싱긋 웃으며 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
“···응.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나윤이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여기 D&D 엔터테인먼트 아냐?”
“맞아.”
“나 여기 회사 소속인데?”
“···스케줄은?”
“내가 조만간 내 스케줄 한 달 치를 정리해서 너한테 보내라고 매니저한테 시켜둘게.”
“···아니, 괜찮아.”
“그럼 내가 직접 가져다줄까?”
“미안해. 오늘은 오전 스케줄이 없나보지?”
나윤은 단유의 손에 든 오렌지 주스를 붙잡았다. 단유가 순순히 힘을 풀자 나윤은 오렌지 주스의 뚜껑을 열고 한 모금을 마셨다.
“오랜만에 오전이 비었네.”
“그럼 집에서 쉬지 그랬어.”
나윤은 입가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닦아내며 다시 주스를 건넸다.
“그럴까 했는데, 그래도 혼자 집에 있느니 밖에 나와서 사람들도 좀 만나고 하면 좋을 거 같아서.”
단유는 개봉된 주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나윤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주스를 바라보았다. 마시기 싫어? 라고 묻는 나윤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는 스케줄 없을 때 그냥 집에서 쉬는 게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다보니까 너무 집에만 처박히게 되더라고. 그게 편할 때도 있는데, 그게 반복되면 나도 모르게 분위기가 다운되는거지. 사람이 음침해진달까? 밖에 나가는 게 싫어지고 매사가 귀찮아지고 게을러지는 기분도 들고. 이러다가 나중에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싫어지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후로는 쉬는 날에도 밖에 나오려고 노력 중이야.”
“노력인건가?”
“노력이지. 야, 나도 사람인데 아무래도 편한 게 좋지. 혼자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는 게 얼마나 편한데. 몰라?”
“알 거 같아.”
“아무튼 여유 있을 때 편하게 사람도 만나고 개인적인 일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정서적으로 좋다고 생각해서 이러는 거야.”
“그러면 왜 굳이 회사를 왔어?”
“정확히는 회사를 온 게 아니라 널 보려고 왔지.”
매번 이런 식으로 직구를 날리는 나윤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다보니 나윤이 본인의 말처럼 ‘정서적’으로 ‘음침’했었다는 말은 솔직히 잘 믿기지 않는다. 그녀는 언제나 밝고 긍정적이었으니까.
“또 저 눈빛.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론내리지, 지금?.”
단유는 머쓱해져 들고 있던 주스를 들이켰다.
“반은 농담이고 반은 진담이야.”
다시 나윤을 바라보니, 그 틈에 나윤이 다시 주스를 뺏았다.
“싫어?”
“그럴거면 냉장고에서 하나 꺼내 마셔.”
“다 마실 생각 없으니까.”
둘이서 주고받으며 마셨더니 한 병이 금방 동이 났다.
“사실 스케줄 조정이 좀 필요할 거 같아서 매니저랑 회사에서 보기로 한 거야. 회사에서 열심히 스케줄 잡아주는 건 좋은데, 좀 힘에 부치네? 내가 이렇게 인기가 많았나 착각할 정도로. 계속 지방으로 스케줄 잡히는 것도 좀 그렇고. 그래서 일단 그거 조정도 할 겸해서 온 거야. 일찍 나와서 이야기 끝낸 뒤에 오후에는 쇼핑이나 하면서 쉴까 생각도 했고.”
“그렇구나.”
“그리고 우리 얼굴 이렇게 본 것도 꽤 오랜만인데, 넌 반갑지도 않아?”
“반갑지. 반갑지만, 이렇게 예고없이 불쑥 나타나면 놀라는게 당연하잖아?”
“단지 그 이유?”
“오렌지 주스 더 마실래?”
“난 됐어. 아무튼, 얼굴 봤으니 됐다. 별일 없어 보이네.”
“별일?”
“나야 너한테 미주알고주알 다 일러바치는 중이지만, 넌 니 이야기 거의 하지 않잖아? 전화로든, 문자로든. 이렇게 만나서 얼굴 마주해야 조금 들을까말까 한데, 지금 얼굴 보니까 별로 들을 것도 없겠다 싶어서.”
단유는 볼을 긁적였다.
“혹시 안 바쁘면 같이 쇼핑하러 안 갈래?”
“미안.”
단유는 즉시 답했다.
“무슨 이사가 그러냐? 다른 사람들은 업무 시간에 골프도 치러 나가고 그러던데.”
그렇게 골프치러 나갔던 사람이 한 달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기도 했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나윤이 알 필요는 없는 이야기일 테다.
“그럼 퇴근하고 나서는?”
“그래.”
그것까지는 차마 거절을 못하겠다. 단유의 수락에 나윤은 생글 웃으며 팔을 툭툭 쳤다.
“나중에 봐.”
손을 흔들며 돌아서는 나윤을 단유는 가만히 바라보다가,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하나 더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