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토신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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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를 빤히 바라보던 울스프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편에 있던 책장 쪽으로 걸어갔다. 허리를 숙이고 책장 가장 아래 어두운 곳에 비치되어 있던 낡은 양피지 한 장을 꺼내 든 울스프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책상 위에 그것을 올려놓았다.
“아직 아직 어렸을 때, 학자라는 게 뭔지도 몰랐고 글을 읽을 줄도 몰랐던 때였지.”
양피지 가운데에는 붉은 실이 여러 겹으로 둘둘 말려 있었고 작은 리본으로 매듭이 지어져 있었다. 울스프는 조심스럽게 매듭을 풀고 실을 풀어냈다.
“아버지는 오블라텐을 만들어 밤마다 거리로 나섰지. 난 그게 굉장히 먹고 싶었지만 아버진 나에게 단 한 조각도 허락하지 않았어. 그래서 아버지가 일을 나가고 난 뒤, 빵 굽던 아궁이 아래 떨어져 있는 부스러기들을 주워 맛을 보곤 했었더랬지.”
양피지의 매인 실을 풀어내듯 추억을 천천히 풀어내던 울스프는 양피지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부스러기만으로는 감질나서 참을 수가 없더군. 그래서 아버지께 부탁을 했었지. 아버지의 일을 도와드릴 테니 온전한 한 조각을 먹을 수 있게 해주면 안 되겠냐고.”
양피지를 모두 펼치니, 그곳에는 깨알같이 작은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단유의 위치에선 반대로 뒤집혀 있어 수월하게 읽기 힘들었지만, 양피지의 첫 문장은 더듬거리며 읽어낼 수 있었다.
―참으로 기이한 우연의 일치였다.
‘무슨 말이지?’
단유의 호기심과 별개로 울스프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솔직히 아버지가 허락해주실지 어쩔지 반신반의했던 게 사실이라네. 하지만 아버지는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주셨지. 다만 한 달이 지나도록 꾸준히 도와준다는 조건에서 말이야. 난 그것도 감지덕지였기에 아버지의 조건을 수용했어.”
울스프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손으로 글을 짚으며 특정 부분을 찾는 시늉을 했다. 아니면 그저 손가락 끝으로 양피지의 낡은 질감을 느끼고 싶었던가.
“오블라텐을 만드는 걸 본 적 있는가?”
“아니요.”
유사한 형태의 쿠키는 TV에서 만드는 걸 본 적이 있지만, 이곳에서는 만드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그건 꽤 손이 많이 가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체력적으로도 무척 힘든 일이었어. 물론 성인이 된 뒤에는 그저 귀찮은 과정들에 불과하겠지만, 어린 나에겐 조금 버거운 일이었지.”
울스프는 이마를 좁히며 단유가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있는지 한 번 살피고는 다시 눈을 아래로 깔았다.
“포대를 짊어 나르고, 장작을 떼고, 불을 지피는 일은 어린 나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온전한 오블라텐 한 조각을 먹을 수만 있다면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지.”
그나마 다행인 건 쿠키를 만드는 과정을 모두 소개하지 않는다는 점이었고, 불행인 건 여전히 이야기가 어디로 흐르고 있는 것인지 몰라 조금 답답하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단유는 어떤 이야기든 진지하게 경청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울스프가 자신의 이야기를 부담 없이 마무리 지을 수 있게 해 주었다.
“반죽을 하고 굽는 과정은 아버지가 했지만, 그 외엔 전부 내가 맡아서 했지. 쉽게 말하면 요리 전 과정을 내가 다한 셈이었지. 아버지는 굽기 전까지의 과정은 보지 못하게 날 주방에서 내쫓으셨고, 난 창가에 기대어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며 코를 킁킁거렸지. 그 영향 때문인지 요즘도 석양을 보면 괜히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나는 것 같단 말이지.”
고등학교 때 배웠던 용어 중 하나가 떠올랐다. 공감각적 심상이라던가?
“그렇게 아버지를 도운 지 한 달이 되었어. 난 과연 오블라텐을 먹을 수 있었을까?”
“드셨습니까?”
“먹긴 먹었어. 하지만 아버지가 만들던 오블라텐은 아니었지.”
듣는 동안 양피지 위에 적힌 거꾸로 보이는 글자들을 읽어나가던 단유는 고개를 들며 바라보는 울스프와 시선을 마주했다. 단유는 아무렇지 않게 질문을 던졌다.
“아버지께서 약속을 어기신 건가요?”
울스프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평소 만들던 것과 다른 오블라텐을 구워서 주셨지. 그건 평소 보던 것과 색도 다르고 식감도 다른 것이었지.”
“왜 그렇죠?”
“아버지가 만든 오블라텐은 내가 먹을 수 없는, 아니 내가 먹으면 안 되는 오블라텐이거든.”
“그런 게 있습니까?”
울스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지. 아버지가 만들던 오블라텐에는 사실 마약이 들어 있었어. 마약, 이라기보단 최음제랄까? 그걸 만들어서 집창촌에 납품하는 중이었던 거지.”
최음제가 든 오블라텐을 손님들에게 제공하고 서비스를 받게 하는 것이었던 것. 어린 울스프는 당연히 먹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당시엔 그런 게 흔했어.”
“그것과 마법사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그 약을 공급하는 이가 마법사였네.”
“네?”
울스프는 양피지의 중간을 짚었다.
“‘신의 원리와 악의 원리를 섞어내 하나로 모으면 진리의 눈물이 될지니, 그것이 쾌락의 원천이고 인간의 본성이다.’”
“무슨 뜻인가요?”
울스프가 고개를 들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나도 아직 그 의미를 다 해석하진 못했네. 아마도 그가 만든 최음제의 원리에 대한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겠지만 말일세.”
“그가 스스로 마법사라고 밝혔나요?”
“처음으로 온전한 오블라텐을 먹은 날, 나는 그것이 부스러기로 맛보던 것과 다르다는 걸 알고 아버지께 물었네. 아버지는 내가 부스러기를 맛보았다는 걸 알고 엄청나게 화가 나셨어. 아버지는 부지깽이를 들고 위협하셨지. 만약 또 부스러기를 주워 먹거나 혹은 훔쳐 먹는다면 혓바닥에 구멍을 뚫어버리겠다고 말이야. 난 펑펑 울면서 사죄했었지. 한참을 그렇게 혼이 난 뒤, 아버지는 앞으로 자신을 지금과 같이 돕는다면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먹을 수 있는 오블라텐을 만들어주겠노라 하셨고, 그래서 난 아버지를 계속 도우며 오블라텐을 먹을 수 있었어.”
다시 그의 손가락이 양피지를 훑어 내려갔다.
“그렇게 아버지를 도우며 일을 시작했어. 그러다 아버지가 매일 저녁 오블라텐을 팔고 난 뒤, 집으로 돌아와 방에서 무언가를 쓰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어. 솔직히 말하면, 그 전에도 알고는 있었지만 별로 궁금해하진 않았어. 그 시간은 모두가 깊은 잠에 들 시간이었고, 어린 아이에겐 뜬눈으로 버티기 힘든 시간이었으니까. 그래서 아버지가 촛불을 켜고 무언가를 하고 있더라도 그것이 딱히 나에게 유익한 면이 없다고 생각되면 별로 호기심도 생기지 않았었지. 하지만 오블라텐에 비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에는 그 비밀이 궁금해졌고, 덩달아 아버지가 밤마다 쓰고 계신 것에도 호기심이 생겼지. 하지만 그것을 물어보기엔 아버지가 너무 무서웠고, 공포와 호기심 사이에서 벌어지는 줄다리기에 나의 신경은 늘 팽팽하게 곤두서있었지.”
그의 주름진 손가락이 천천히 양피지의 글자들을 짚어나갔다. 마치 눈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글자들을 읽는 것처럼 보였다.
“어린 아이의 호기심은 때때로 충동적이고 파괴적이라고들 하지. 내 호기심도 그랬어. 이성을 파괴하고 충동적으로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지. 아버지가 나가고 난 뒤, 들어가선 안 되는 곳에 들어간 거야. 아버지의 방이라고 해서 특별히 문이 무거울 턱도 없는데, 난 그 방문을 열기 위해 땀을 한 바가지나 쏟아내야 했었다네. 등 뒤가 푹 젖는 줄도 모른 채 난 방으로 들어갔어. 그리고 아버지의 책상에 쌓여있는 수많은 양피지와 종이들을 발견했지. 아버지가 글을 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아버지가 글을 쓴다는 사실에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그 사실을 안다는 걸 들키면 혼이 날까 두렵기도 했었어.”
천천히 훑던 손가락이 특정 지점에서 멈췄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든 울스프가 단유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난 마침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양피지를 집어 들었어. 앞서도 말했지만, 그때의 난 글자를 몰랐고, 그래서 그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했네. 하지만 나의 충동적인 호기심은 그 의미를 이해하고 싶어 했고, 그래서 그 양피지를 몰래 집어 들고 달아나게 만들었지.”
“혼날 게 두려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러니 아이의 호기심은 때로 자기파괴적이라고 하지 않았나? 혼날 줄 알면서도 그런 짓을 한 게 아니라, 혼날 거란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게 막은 걸세, 호기심이란 것이.”
“가끔은 어른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죠.”
“그래. 덜 자란 어른들이 그런 법이지. 이성을 통제하지 못하는 어른들, 사실 나이만 먹었지 여기는 아직 어린 아이인 채로 자란 셈이야. 아무튼, 그 양피지를 들고 난 내 방으로 들어갔네. 그리고 벽난로에서 부서진 목탄을 들고 와서 그 글자들을 바닥에 옮겨 적었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똑같이 흉내를 내본 거지. 그리고 아버지가 오시기 전에 다시 양피지를 가져다놓는 거야. 다행인 건 아버지는 내가 그랬다는 걸 몰랐던 거고, 덕분에 난 매일 저녁 그 짓을 반복할 수 있었다는 거야.”
“그렇게 해도 글을 읽을 줄 모르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 아닌가요?”
“내가 했던 건, 양피지를 보지 않고도 똑같이 쓸 수 있는 법을 익히는 거였어. 어디서든 이렇게 쓰면 글을 쓸 줄 안다는 소리를 들을 테니까. 그리고 운이 좋으면 글을 아는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수도 있고.”
“아버지께 솔직히 말하고 배울 생각은 안 하셨나요?”
“아, 그 이야기가 빠졌군. 아버지는 나에게 그 무엇도 가르쳐주지 않았었네. 아니 배울 생각을 하지 않게 하려고 했었던 건지도 모르고. 내가 아버지의 일을 돕겠다고 나서기 전까지의 난 그저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고 있다가 저녁이 되면 눈을 감는 게 일상이었어.”
별생각 없이 듣던 단유는 그 부분에서 뭔가 특이한 게 감지되었다. 일상의 이야기로만 생각했는데, 일상적이지 않는 무언가.
“몰래 글을 베껴 쓰고 난 뒤,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글을 지우고 양피지를 돌려놓는 일은 계속되었네. 그건 어린 나에겐 일종의 놀이같이 느껴지기도 했었지. 아슬아슬한 경주랄까? 들키면 어떻게 될지 감히 상상도 가지 않지만, 들키지만 않는다면 지루한 일상에 이런 재미있는 놀이는 또 없었던 셈이지.”
“그렇군요.”
“몇 년? 모르겠군. 아무튼 오랜 시간을 그렇게 보냈어. 난 꽤 많은 양피지의 글들을 옮겨 적었고, 보지 않고도 그 글들을 똑같이 따라 쓸 수 있게 되었어. 하지만 여전히 그 글을 읽을 수는 없었지. 그리고 어느 날, 아버지가 죽었네.”
울스프의 손가락은 양피지의 가장 끝줄에 매달려있었다.
“‘진리를 찾는 이에게 가장 큰 원수는 건망이리라.’”
그 줄을 읽은 뒤, 울스프는 부쩍 초췌해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시선은 단유를 넘어 어딘가를 바라보는 듯 했다.
“아버지는 방에 불을 지르고 돌아가셨네. 자신이 남긴 모든 것을 불태우고 자신까지 태우셨지.”
“···많이 슬프셨겠군요.”
“아니, 그다지 슬프진 않았네. 사실 ‘아버지’라고 불렀지만 진짜 ‘아버지’와 ‘아들’로서 정을 교감한 적은 별로 없었으니까. ···아니, 조금은 슬펐던가? 그것도 오래된 일이라 조금은 헷갈리는군. 아무튼 난 그 이후 온 나라를 돌아다녔고 밥도 빌어먹으면서 살아남았네. 그러다 우연히, 혹은 필연인지도 모를 운명과 마주하게 되었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건 단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있다면 아마도 밤마다 필사한 양피지의 글이 아니겠는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도 틈만 나면 바닥에 그 글들을 옮겨썼네. 잊지 않기 위함이기도 했고, 그저 시간이 남아 돌아 바닥에 낙서를 한 것이기도 했지. 그리고 그 모습을 한 사람이 발견했고, 나에게 물었어. 글을 아냐고. 쓸 줄만 안다고 했더니 읽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하더군. 그리고 난 학자가 되었지.”
마법사에 대해 물었더니 어느새 자신의 과거를 줄줄 읊어댄 울스프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나는가 싶었다.
“그럼 그 양피지의 글은 당신이 쓴 건가요?”
울스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읽는 법을 배우면서 썼던 첫 번째 글이네.”
“그럼 그것은 동시에 아버지께서 쓰신 글이기도 하군요.”
“그렇지.”
“그럼 당신에게 읽는 법을 가르쳐주신 분이 마법사였던 건가요?”
울스프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사람은 학자였어. 고서를 구하러 지방으로 가다가 날 만난 거지.”
“그럼 마법사는 언제 봤던 겁니까?”
울스프는 양피지를 툭툭 건드렸다.
“이게 마법사가 남긴 글이라네.”
단유의 시선이 양피지로 향했다.
“나의 아버지, 어린 시절 나를 키웠던 그 사람이 바로 마법사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