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703화 (703/956)

통과의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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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마을을 떠나기 전 바이언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마을 사람들에게 반복했다. 그가 꿈꾸는 이상적인 공동체와 그 공동체를 위한 사람들의 각성에 대해 둘러 표현하지 않고 이야기했다.

“이 마을은 저의 것이 아닙니다. 이 마을은 이 마을에서 살고 있는, 그리고 살아갈 여러분들의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지키고 발전시켜야 하는 겁니다.”

단유의 이야기는 마을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것은 꿈같은 이야기였다. 아니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 없는 마을이었다.

“그것은 불가능하오. 나라에 국왕이 있고, 영지를 다스리는 군주가 있소. 그리고 수많은 귀족들까지. 비록 그들이 별 볼 일 없는 이런 작은 마을에 올 리는 없겠지만, 그들의 말 한마디면 수십, 수백의 군대가 움직이오. 우리는 그들에 대항할 힘이 없소.”

“충돌이 벌어지지 않도록 대화를 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대화? 그거야말로 말이 되지 않는 방책이오. 어느 군주가 우리같이 천한 이들과 대화를 한단 말이오? 있을 수도 없는 일이오.”

“여러분은 천하지 않습니다.”

단유의 말에 항변하던 스토보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단유는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러분은 천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나, 수도에 사는 왕이나, 귀족이나, 영주나 모두 똑같은 인간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권력과 직위는 그저 이 사회가 만들어낸 제도에 불과할 뿐, 그들과 여러분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단유의 말에 두려움을 느낀 탓이었다. 그러나 단유는 꿋꿋이 말을 이어나갔다.

“어느 학자가 말하길,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며 행복을 추구하며 살 권리를 가진다고 했습니다. 차별받지 않으며 무시당하지 않으면 행복한 삶을 살 권리가 있다고 말입니다.”

“그게 가능한 소리요?”

“지난 며칠간 이 마을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보세요. 그리고 스스로를 돌아보세요. 과연 자신은 어떤 행동을 했었는지,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어느 편에 섰든지, 여러분은 공통적으로 하나의 생각을 했을 겁니다. 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당연한 거 아니오? 누가 죽고 싶어 한단 말이오?”

“같은 말입니다. 살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스스로 움직이고 스스로 입을 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차별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 움직이고 스스로 입을 열어야 합니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 스스로 움직이고 스스로 입을 열어야 합니다.”

“말은 좋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요. 만약 여기에 영주가 있었다면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난 못했을 것이라 보오.”

스토보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가정해보죠. 만약 여기에 왕이 있다고 치죠. 만약 왕이 있었다면 여러분은 그렇게 행동하지 못했을까요?”

단유의 물음에 스토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않소? 누가 왕 앞에서 그렇게 말을 할 수 있겠소?”

“왜요?”

“왜긴? ···왕 앞에서 그런 소리했다간 금방 끌려가서 참수당할 것 아니오?”

“왕에게 군대가 없다면?”

“응?”

“만약 왕이 홀로 여기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했을까요?”

당황한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 와중에 스토보가 또 나서서 되물었다.

“···왜 왕이 혼자 여기 있단 말이오?”

“가정입니다.”

“현실성이 없는 가정이오.”

왕이 혼자 이 마을에 있다. 자신들과 함께 여기? 자기들처럼 여기 갇혀 있다면?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 이상으로 상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난감한 표정을 짓는 이는 비단 스토보 뿐만이 아니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으니 바라보던 단유로서도 조금은 실망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아직은 무리일까?’

수십 년간 왕권 통치하에 살았던 이들에게 단유의 단순한 가정은 그들의 가치관을 단번에 바꾸라는 말처럼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왕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임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이들에겐 그런 가정마저 힘겨워 보였다.

그때 바이언이 대답했다.

“만약 왕이 이 마을에 있었다면, 난 그 왕에게 무릎을 꿇었을 것이오.”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바이언에게로 향했다.

“우리를 이끌어달라고. 우리가 분열되지 않고 모두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을 것이오. 왕에게 지혜를 부탁했을 것이오.”

바이언의 대답이 어떤 사고를 거쳐 나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이언이 생각하는 대표의 역할임을 알 수 있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단유가 돌아보자 다들 바이언을 바라보며 바이언의 생각에 동조한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단유는 스토보를 바라보았다.

“···스토보요.”

“스토보의 말처럼, 왕이 혼자 있을 가능성은 없겠죠. 바꿔말하면 왕이란 그런 위치입니다. 그를 따르는 수명의 신하들과 수백의 군대가 있어야 왕은 비로소 자신의 권위를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권위를 배제한 왕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거겠죠. 이를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왕이란 권위가 보장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왕만 그럴까요? 귀족이든, 영주든 비슷합니다. 그들에게서 권위를 제거하면 무엇이 남을까요?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보죠. 여기 계신 분들 중에 몇몇 분들은 마을을 이끌 촌장의 필요성을 절감하셨을 겁니다.”

단유의 말에 몇몇 사람들의 낯빛이 변하는 게 보였다.

“촌장은 태어나면서부터 촌장으로서 마을을 이끌 권위를 지닌 이였을까요?”

“그건 비교가 되지 않잖나?”

단유는 머리를 흔들었다.

“모든 인간은 같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똑같고, 왕이나 귀족들도 여러분과 같은 인간입니다. 다만 사회적 지위가 조금 다를 뿐이지요.”

“설령 자네 말이 맞다고 해도, 그게 크지 않은가? 왕과 귀족, 영주에겐 칼과 창을 지닌 군대가 있네. 그리고 우린 그런 군대와 맞설 힘이 없고. 그 차이는 극복할 수 없는 문제이네. 무엇보다 왕이고 영주님 아닌가? 우리가 어떻게 그들에게 맞선단 말인가?”

현실적으로도 이상적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신분 격차에 대한 문제에 단유는 잠시 입을 닫았다.

가끔 현대에서도 이와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동년배의 세대들에게는 자신들이나 대통령이나 별 다를 바 없는 사람으로 인식된다. 사실 대통령이 별건가? 대통령이란 그저 제도적으로 지위를 보장받는 선출직이다. 지위를 보장 받는다해서 뭇 시민들의 위에 선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일부 노령의 세대들에겐 대통령을 나라님이라 부르며 마치 전근대에나 존재했던 왕에 버금가는 직위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그 중에도 몇몇은 대통령을 아버지, 어머니의 격으로 보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부모에게 욕하는 수준의 패륜과 동급으로 보기도 한다는데, 이해는 잘 가지 않지만 그런 경우가 있다 하니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젊은 사람들은 그런 노령 세대와 대화가 잘되지 않는다며 불평했지만, 평소의 삶에서 그런 세대와 시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일이 별로 없어서 체감을 못하던 단유였다.

하지만 이들을 보니, 과연 막막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현대에서 배우고 학습 받으며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이곳에서는 전혀 설득력을 가지지 못했다. 이들이 무지해서만은 아니리라.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스토보만 해도 무식한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으니까. 다만 그들의 의식 깊이 뿌리박혀 있는 신분제와 전근대적 사고방식은 몇 마디 말로 계몽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닌 듯 했다.

단유는 호흡을 가다듬고 방향을 바꾸었다.

“앞서 이야기한 것들 중 하나로 저는 여러분이 행복해져야 할 권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권리란 누구에게도 자신의 행복을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는 이야깁니다.”

단유의 이야기에 다들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러분은 언제 행복한가요?”

“행복이 뭐 별 거 있나? 끼니 잘 챙겨 먹고, 자식들 잘 크는 모습을 보면 그게 행복이지.”

“난 잠 잘 때가 좋은데?”

“마누라랑?”

“마누라 없이 자는 게 더 좋을 때도 있지.”

“지프!”

주변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금방 얼굴을 굳히고 웃음을 거두는 사람들. 그래도 덕분에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계속되는 진지한 대화로 인해 엄숙한 분위기는 유지되지만, 그들이 처음 생각했던 마법사의 단죄는 없을 듯 보이니 조금 여유가 생긴 모양이었다. 단유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다른 분들도 비슷한가요?”

“그렇지 않나?”

“그런데 누군가가 여러분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그 순간을 방해한다면 어떨까요?”

“그럼 뭐 짜증나겠지.”

“밥 먹는데 갑자기 들어와서 그릇과 수저를 뺏어가면? 곤히 잠든 밤에 누가 들어와서 여러분의 잠을 깨우면 어떨까요? 아무런 이유 없이 여러분의 것을 도둑질한다면 어떨까요?”

“그런 놈이 있으면 멱살 잡고 정신 차릴 때까지 때려야지. 그런 놈을 가만 둘 수 있나?”

“그 사람이 만약 귀족이라면요?”

“응?”

“그 사람이 영주라면요? 그 사람이 영주가 부리는 군사들이라면요?”

“······.”

“제가 말했던 행복을 추구하는 권리란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지켜져야 할 권리라는 겁니다. 영주든, 귀족이든 누구든 간에 여러분의 행복을 방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앞서 예를 든 상황을 확장해서 말해보죠. 여러분은 여러분의 것을 불합리하게 뺏긴 적은 없습니까? 여러분의 삶이 불합리하게 방해받은 적은 없습니까?”

두루뭉술한 의미의 질문이었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그 순간들을 되뇔 수 있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행복을 방해하는 요소는 굉장히 많습니다. 권력자들의 변덕과 욕심도 여러분의 삶을 힘들게 하지만, 때로는 자연이 여러분의 행복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겠죠. 가령 밤중에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서 집에 비가 샌다면 아마 여러분은 잠을 자기 힘들 겁니다.”

단유의 예시에 몇몇이 깊이 공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행복을 추구할 권리라는 게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권리는 이런 경우도 포함합니다.”

“뭐 하늘에 대고 비를 그만 내려달라고 소리라도 지르란 말인가?”

“아니요.”

“그럼 어떡하란 말인가?”

“여러분은 그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야.”

쏟아지는 빗줄기에 후드려 맞으면서도 지붕 위에 올라가 판자를 덧대는 보수공사를 해야 했다. 진흙을 만들어 지붕 속을 채우고 아래에 물통을 받치는 등의 수고를 해야만 했다.

“자연과 그렇게 맞섰듯이, 여러분은 여러분의 행복을 방해하는 이들과 맞서야 합니다.”

“하지만 그건 안 될 말이야. 비 좀 맞는다고 죽지는 않지만, 영주와 맞섰다간 그대로 죽을 뿐이잖나?”

“그렇다고 그저 당하기만 한다면 그 또한 방법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들과 맞서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겠죠.”

“무슨 묘책이라도 있는가?”

“여러분이 며칠간 겪었던 일을 떠올려 보세요.”

다시 굳어지는 얼굴들.

“듣기로는 여기 계신 분들은 두 무리로 나뉘어서 대립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

“살기 위해서 아닌가요? 다만 그 목적을 추구하는 방향이 조금 달랐을 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쨌든 각자가 생각하는 방향이 다르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었다고 보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분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어떻게 하셨나요? 서로 무리를 지었죠? 한 명의 목소리는 약하지만 뭉치면 강해지니까요. 그럼 다시 가정해보죠. 영주든 귀족이든, 여러분의 삶과 생존, 행복을 위협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봅시다.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맞설 수 있을까요?”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아무리 우리가 뭉친다 한들 그들의 힘에는 대적할 수 없소.”

“백 명이 어렵다면, 천 명, 만 명은 어떨까요? 그래도 맞서기 힘들까요? 이만 명, 삼만 명, ···십만 명, 백만 명이 모여도 힘들까요?”

“그 또한 무의미한 가정이요. 누가 그렇게 모일 수 있단 말이오?”

“예, 그건 힘들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요는 이겁니다. 뭉치면 권력자들도 쉽게 보지 않을 겁니다. 한 명의 다른 목소리는 이탈 정도로 무시할 수 있지만, 수십 수백 명의 목소리가 모이면 그들도 여러분을 쉽게 보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어떻게 하란 말이요?”

“여러분이 겪은 바와 같이 목소리를 내세요. 자신의 이야기를 당당하게 하세요. 여러분과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뭉치세요. 이 마을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좀 더 넓게 보세요. 여러분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세요. 그들은 적이 아닙니다. 그리고 혹시 뜻이 다른 이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을 무작정 배척하지 마세요. 결국 이렇게 모여서 대화를 나누면 모두가 같은 행복을 바라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뜻을 모으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강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행복을 지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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