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704화 (704/956)

통과의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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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의 선언 이후 광장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말없이 눈치를 보는 이들을 바라보던 단유가 가볍게 허리를 숙여 보인 뒤 돌아섰다.

“그냥···!”

단유가 고개를 돌리니 바이언이었다.

“그냥 자네가 우리를 이끌면 되지 않나? 자네가 이 마을을 지켜준다면, 다들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지 않겠나? 그러면 다들 자네가 말한 것처럼 행복할걸세. 그렇지 않나?”

마지막 말은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며 동조를 구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고나 호응하는 목소리를 냈다.

“전 안 됩니다.”

“왜? 자네가 우리 마을의 지도자라면 다들 자네를 전심(全心)으로 따를걸세. 스토보,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스토보는 부지불식간에 자신에게로 날아온 질문에 잠시 당황한 듯 보였으나 단유와 잠시 시선을 마주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자네라면···.”

단유가 손을 들었다. 다시 조용해진 광장에 단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는 떠납니다.”

“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떠난다 말인가?

“지금 바로 떠난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전 가야할 곳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오?”

“우선 서로 대화를 나누세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여러분들끼리 대화를 나눠보세요. 어쩌면 그 속에서 여러분은 스스로가 놀랄 정도의 방법을 찾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찾지 못할지도. 하지만 뒷말을 꺼내진 않았다.

짧은 기간이긴 했으나 폐쇄된 공간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평소에는 그저 수동적이었던 이들도 일어나서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문제를 인식하게 하였고, 그들이 지향해야 할 목표도 간접적으로 알려주었다. 남은 것은 이제 그들의 몫이었다.

여기에서 희망과 미래의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단유로서도 그들을 도울 방법이 없다고 여겼다. 자신이 평생을 두고 그들을 이끌 것이 아닌 이상, 이제 이곳의 미래는 그들에게 달렸다. 그것을 그들이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며 단유는 집으로 돌아갔다.

문득, 녹스가 생각났다. 그가 이곳으로 올 때마다 보았던 녹스 성은 매번 다른 모습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세월의 흐름을 느꼈던 단유는, 다음에 다시 이 마을에 오게 되었을 때 과연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지 궁금해졌다.

‘다시 오겠다고?’

단유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부디 다시 올 일이 없기를.

단유는 그의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가족이 아니라, 함께 자라며 기쁨과 슬픔을 공유했던 가족이 있는 곳으로.

****

마을에 ‘집회소’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의견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호기심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대단위 의견 교환이 벌어졌다. 그리고 단유는 그 대화에 전혀 끼어들지 않았고, 찾아가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대화가 중구난방으로 흐르더라고 피비 아주머니가 알려주었다. 하지만 점차 몇몇 사람들―특히 스토보와 바이언―이 주도하면서 토의의 흐름이 잡혔고 서로 다른 의견들을 내놓고 그 의견들에 대한 동의와 반박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그리고 점차 대화에 참여하는 인원이 줄어들었다.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

바이언이 찾아와 하소연했다.

“그 시간에 밖에 나가서 밭을 갈구든, 나무를 하든 하는 게 좋다는 거지.”

“봄이니까요.”

“그래요. 하지만 그래서는 아무것도 안 되잖소? 또다시 앞서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면, 우린 또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허덕이게 될 거요.”

스토보도 푸념을 늘어놓았다. 두 사람은 지혜를 빌려달라며 단유를 찾아왔다. 정확히는 단유가 집회소로 와서 도움을 달라는 것이었지만, 그 제의에 대해서는 거절 의사를 분명히 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모두 다 드렸습니다.”

“무책임한 것 아니오? 사실 따지면 이 모든 일은 당신이 벌인 거 아니오? 이 마을을 만든 것도, 저 입구를 막은 것도, 그래서 마을 사람들을 당황시킨 것까지. 그 일로 당신을 탓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이왕 시작한 일이면 끝을 봐야 하지 않소?”

“두 사람이 잘 하고 있잖아요?”

“그렇지 않소. 바이언이야···.”

스토보는 바이언을 흘깃 바라보았다.

“솔직히 지난번 일로 서로 충돌하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바이언은 충분히 존경할만한 부분이 있소.”

바이언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만큼 마을 사람들도 바이언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소. 그렇기에 바이언의 말에 대해서는 다들 들어줄 생각을 하지만, 난 그렇지 않소. 난 피난민이고 이 마을에 대해서도, 이 마을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직 잘 알지 못하오. 하물며 마을 사람들은 날 얼마나 알겠소? 사람들은 내가 주제넘다 생각할 거요.”

“스토보도 이제는 이 마을의 일원이에요. 더 이상 피난민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지 않아요. 다른 마을 사람들도 당신을 그렇게 생각할 거고요. 그렇죠?”

“그럼. 다들 자네의 식견에 놀라워하네. 그리고 어떤 이들을 자네를 존경하기도 하지. 나도 그 중 한 명이고.”

“···부끄럽습니다.”

단유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해보시죠.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심을 드러내는 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모습에 사람들은 신뢰를 보낼 겁니다.”

“그 문제는 그렇다 쳐도, 제대로 대화를 나누는 문제는 확실히 문제가 있어. 나도 그렇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논의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네.”

“주제를 확실하게 정하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한 번 주제를 정하고 대화를 나눠보시죠.”

“그러니까 그 주제란 게 어렵다는 말이지. 당장 자네가 말했던 내용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지만 솔직히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도 있으니 쉽지가 않아.”

“처음에는 가벼운 문제부터 해보시죠.”

“가벼운 문제?”

“지금 당장 이 마을에서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가부터 해보세요.”

“다들 이 마을에 만족하고 살고 있는데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

“모두가 그 생각에 동의하는지 물어보세요.”

“···알겠네.”

“아, 그리고 매일 대화를 나누는 건 쉽지 않은 문제예요. 다 같이 모일 수 있는 시간을 정해서 대화를 나누세요.”

“그러면 너무 오래 걸리지 않을까?”

“급한 문제이긴 하지만 서두르기만 해서 좋을 건 없으니까요. 다 함께 모이지 않는 시간에도 각자 자신의 일을 하면서 주어진 주제에 대해 생각을 할 수 있고, 그 생각들이 정리될 때쯤 모여서 대화를 나누면 지금보다 훨씬 생산적인 토론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네요.”

“시간을 정한다라.”

“마침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린 시계도 있잖아요?”

“흠.”

바이언은 물론이고 스토보가 살고 있는 집에도 단유가 만들어 제공한 시계가 벽에 걸려 있었다. 아직 시계가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시계를 그저 하루의 시작과 마무리를 알려주는 용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삶을 시계가 알려주는 시간에 맞춰 나누는 방식이 몸에 익지 않은 탓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점점 바뀌어야 할 것이다. 정확한 시각에 정해진 활동을 함으로서 효율을 올리는 방식이 몸에 익는다면 자신의 삶을 통제하는 능력도 올라가리라 생각하며 이를 두 사람에게 알려주는 단유였다.

그 뒤로도 좀 더 이야기를 나누다, 두 사람이 집을 나간 뒤 잠시 자리를 비켜주었던 에밀리아가 다가왔다.

“저기에 맞춰 생활하는 게 효율성을 높이는 일인가요?”

에밀리아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던 단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계에 맞춰 활동을 하게 되면 쓸데없이 버려지는 시간을 줄일 수 있죠. 그리고 사람은 필요할 때 쉬어야 하죠. 시간에 맞춰 쉬거나 잠을 자거나 음식을 먹음으로써 에너지를 보존하고, 그 에너지를 일에 쏟아냄으로서 생산성을 높이는 거죠. 에밀리아에게 정해진 시간 동안 공부를 하도록 한 것도 그런 이유에요. 쉴 때 쉬지 않으면 오히려 피곤 때문에 공부의 효율이 떨어지거든요.”

“그렇군요.”

“그런데 공부는 다 끝냈어요?”

“아니요. 물어볼 게 있어서요.”

“효율성이요?”

“아뇨, 그거 말고요.”

잠시 망설이던 모습을 보이던 에밀리아가 겨우 입을 뗐다.

“루치드, 떠나신다면서요?”

“아, 네. 언젠가는 떠나야죠.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그럼 저도 같이 가나요?”

단유는 몸을 틀어 에밀리아를 향했다.

“음, 여기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틈이 없었던 것 같네요.”

단유는 진지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요약하면, 단유는 이곳이 에밀리아에게 약속한 그 삶을 실현시키 주기에 충분한 땅이라고 생각한다는 이야기였고, 그래서 에밀리아가 이곳에서 머물길 바란다는 이야기였다. 에밀리아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동의했다. 지하도시가 아니더라도 이 마을 주변은 아름답고 살기 좋은 동네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곳이었다. 마을 사람들도 자신에게 친절했고, 특히 피비 아주머니는 마치 엄마처럼 사소한 것 하나하나 챙겨주기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이 많이 들었다.

하지만 에밀리아는 단유가 떠난다는 사실이 안타깝고 불안했다. 아니, 그보다는···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속에서 치미는 기분이었지만 에밀리아는 그 감정의 실체를 정확하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

며칠 후, 사울른이 몸을 일으켰다.

“가만히 누워있기가 너무 힘드네요.”

“그동안 많이 움직였잖아요.”

사울른은 입꼬리를 올리며 단유와 함께 집을 나섰다.

“뭔가 바뀐 기분이 드네요. 마을은 그대론데.”

“확실히 그렇죠?”

마을에 달리 세워진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천장의 빛도 그대로지만 이전과 달라진 기분이 든다면 그건 아마도 마을 사람들 때문이리라. 거리를 걷는 단유와 사울른을 향해 환한 웃음으로 손을 드는 마을 사람들에게 마주 인사한다.

지상으로 나오니 마침 지하도시 입구로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오, 사울른. 일어났군.”

“코스타바. 안녕하세요.”

“몸은 괜찮나?”

“네.”

“다행이군. 그리고 고맙네. 자네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 들었네. 하긴 그 몸을 보면 이렇게 말로만 때울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들지만. 혹시 술은 마실 수 있나? 그렇다면 나중에 같이 한 잔 하는 게 어떤가? 내가 살 테니까.”

“고맙습니다.”

사울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 다음을 기약하며 지하 도시로 들어가는 사내의 뒤를 잠시 바라보다 사울른이 말했다.

“뭔가 괜히 뿌듯한 기분이 드네요.”

사람들의 표정에서 여유와 평화로움이 느껴지기 때문일까? 사울른도 그들과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언덕을 하나 넘어가니 사람들이 일구던 밭이 드러났다. 지형의 특성상 넓진 않지만 이곳에서 작물을 키워 최소한의 식량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단유와 사울른을 발견하고 손을 들었다. 특히 사울른이 회복한 모습을 보고 이를 환영하는 사람들의 인사가 이어졌다. 날이 좋아서 그런지 더욱 환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에 단유와 사울른도 흐뭇했다.

두 사람은 계속 걸어 멀리까지 나왔다. 이윽고 북쪽 숲 인근까지 걸어 온 두 사람은 나무를 잘라서 숯을 만들고 있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어이, 사울른. 이제 몸은 괜찮나?”

다들 비슷한 인사로 사울른을 반겼고, 사울른도 기분 좋게 인사에 화답했다. 단유는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가벼운 대화를 방해하지 않고 기다렸다가 잠시 틈이 날 때 물었다.

“혹시 여기 근처에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나요?”

“그저께 몇 사람이 지나가긴 했어. 국경 쪽에서 온 사람들이었지.”

“뭐라고 하던가요?”

“아니. 그냥 눈인사만 하고 지나갔어. 꽤나 고생한 모습이 역력하더군.”

“그렇군요. 그 외에 혹시 다른 이야기는 없나요?”

“별로.”

“알겠어요. 수고하세요.”

숯검댕이 묻은 얼굴의 사내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 역시도 사울른에게 다음에 술 한 잔 같이 하자고 말을 건네고는 다시 작업장으로 몸을 돌렸다.

“인기가 좋네요.”

“인기는 무슨···. 헤이튼은 전에 저랑 같이 정찰 활동을 한 적이 있어서 그래요. 아까 코스타바도 그렇고.”

“사울른도 이 마을에 인연이 많이 생겼네요.”

“인연이라···그렇죠. 인연이죠.”

사울른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마을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후, 단유에게 말을 걸었다.

“루치드는 이제 떠날 건가요?”

“네.”

“우리 여행도 여기까지가 되겠네요.”

“네.”

“에밀리아는요?”

“이 마을이라면 에밀리아가 정을 붙이고 살기 좋지 않을까요?”

“···그렇죠.”

“그리고 사울른도요.”

“나?”

“사울른도 이 마을에서 정착하는 게 어때요?”

“···나쁘진 않을 거 같네요.”

하늘 높이 떠오른 태양과 햇볕에 반짝이는 언덕들을 보고 있자니 한적한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비단보다 더 부드러운 봄바람을 몸에 감싸고 언덕 위를 천천히 거닐며 휘파람이라도 불어야 어울릴지도.

“루치드는 어디로 갈 건가요?”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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