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격(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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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가 어렸을 때, 가끔 주변에서 친구들이 하는 말들을 원치 않게 듣던 적이 있었다. 보통 집중을 하면 주위의 소음이 들리지 않는다고들 하는데, 단유는 집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집중을 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거의 대부분은 주변의 상황을 대충이라도 살피며 지내려 했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끼리 잡담을 하는 것도 주워듣게 되었다. 쉬는 시간에 끼리끼리 모여 왁자지껄하게 떠드는데 그걸 못 듣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각설하고, 가끔 친구들은 단유가 책에서 본 적 없는 단어들을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비속어나 신조어 같은 것은 당연히 등재될 리 없는 단어라 하더라도, 저런 단어가 있었나, 궁금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자의식 과잉’이란 단어였다. 두 단어를 떼어놓고 보면 이해가 되는데 붙여놓으니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간 읽은 심리학 관련 서적에서도 자의식 과잉이란 표현은 없었고, 그래서 물어보았다.
“잘난 척하는 거야.”
친구의 심플한 설명에도 단유는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잘난 척 하는 행동을 마치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마냥 병명처럼 만들어 부르다니.
그러나 나중에 자의식 과잉이란 표현에 담긴 여러 뜻을 알게 되면서 나름 이해를 하게 되었다. 그건 일종의 ‘중2병’같은 단어였다.
그리고 현재, 마주 서서 진한 미소를 짓는 울펜을 보며 단유는 그가 ‘자의식 과잉’이란 단어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마치 자랑처럼 늘어놓는 그의 설명은 대단한 사명감에 고취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가 말하는 마법사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단유로서는 그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핑계로만 들렸다.
그런 단유의 생각을 전혀 모르는 울펜은 입꼬리를 올리며 시작하자더니 한 걸음 물러섰다. 동시에 주위의 복면인들이 단유에게로 달려들었다.
‘해체!’
그러나 아무런 변화의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울펜이라는 작자의 말처럼 동판이 마법의 시전을 막고 있음이 분명한데, 도대체 그 작동원리는 파악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것이 영구적인 것인지, 한시적인 것인지도 모르겠고, 단유를 대상으로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일정 범위를 대상으로 하는 것인지도 파악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그 원리를 알아내기 위해 넋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 우선 달려든 복면인을 피해 뒷걸음질 쳤다.
날이 구부러진 장도가 흉흉한 바람을 일으키며 눈 앞에서 휘둘러졌고, 단유는 특유의 반사신경과 운동능력 덕에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격은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연이어 이어지는 공격에 단유는 숨도 제대로 고르기 힘들었고, 이어서 다른 복면인까지 붙자 생각도 길게 이을 틈이 나지 않았다.
“마법사 놈이 제법이구나.”
울펜이 비웃음을 날리자, 오히려 그게 자신들을 향한 질책이라고 여겼는지 복면인들이 더욱 빠르게 칼을 휘둘렀다.
단유는 자신이 안일했음을 깨달아야 했다. 물론 현대에서 몸싸움을 벌일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마는 그래도 레저활동으로 격투기를 배우기도 하는 시대인데, 왜 자신은 그런 걸 배울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물론 마법이라는 절대적이고 사기적인 힘을 가지고 있기도 했거니와 그 시간에 차라리 책 한 권을 더 읽는 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면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를 과거에도 몇 번 겪으면서 최소한의 체술은 배워야지, 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간 꾸준한 운동으로 몸을 관리했기에 생각과 동시에 몸을 움직이는 게 가능했고, 그래서 용케 치명타를 피할 수 있었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피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마치 그 생각을 읽었다는 듯, 눈 앞에서 교묘하게 휘어지는 칼날이 단유의 허벅지를 그어냈고, 적지 않은 피가 튀어 올랐다.
“루치드!”
에밀리아가 사울른의 등을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사울른은 그 무섭던 단유가 저리도 무력하게 당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그를 돕기 위해 나서는 것도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자기가 한 손을 거든다고 해서 저 많은 습격자들을 모두 해치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나선 순간에 무방비 상태가 될 에밀리아 때문에라도 사울른은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거기다 이제는 마법사가 확실히 힘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울펜이 복면인 두 명을 사울른에게로 보냈기에 더욱 여관 밖을 나서기가 어려웠다.
묘하게 생긴 만곡도를 들고 여유롭게 걸어오는 이들의 접근에도 불구하고 에밀리아의 눈에는 오직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하고만 있는 단유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사울른, 루치드를, 루치드를 도와줘요!”
울음이 섞인 에밀리아의 부탁에도 사울른은 루치드에게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에밀리아, 들어가 있어요.”
사울른은 여관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다수를 상대로 넓은 공간에서 싸우는 건 자신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으니, 불에 그을린 여관 입구에서 적들을 맞이하여 상대하다가 틈을 보는 수밖에 없었다. 만약 눈에 보이는 적들이 다라면, 에밀리아에게 뒷문을 찾아서라도 도망가라고 하겠지만, 적이 얼마나 되는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런 주문을 하기도 어렵다.
여러모로 속수무책인 상황. 사울른은 차가운 바람에도 턱밑으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친 뒤 손에 든 단검을 치켜들었다. 에밀리아의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며 사울른은 입술을 깨물었다.
단유는 허벅지의 통증에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깊이 숙여 머리 위로 흘러가는 칼날을 피하고, 곧바로 바닥을 박차며 아래로 찔러 들어오는 공격에 당하지 않게 바닥을 굴렀다. 재빨리 일어서려는 순간에 두 곳에서 찔러 들어오는 만곡도 때문에 여의치 않자 다시 한번 바닥을 굴렀더니 울펜의 비웃음이 들려왔다.
“역시 벌레는 다르구나. 온몸에 진흙을 덕지덕지 발라서 숨기라도 해볼 참이냐?”
보기에도 여유롭지 않은 상황이지만, 사실 보이는 것 이상으로 단유는 필사적이었다. 치명상을 피하려 몸을 굴리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되든 안 되든 말이다.
몇 가지 가정이 있었다. 만약 저 동판이 범위를 대상으로 한다면, 동판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까지 이동해서 마법을 사용해 보는 것이다.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모르니 계속 물러나면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미지화를 위해서 손을 써 왔지만, 머리로 이미지를 떠올리고 사용하는 것도 어려운 것은 아니니까.
또 한 가지는 아까 여관 안에서 마법이 적용되던 대상물에 관한 것이었다. 분명 사람에게는 마법이 적용되지 않았지만, 사람이 들고 있는 것, 입고 있는 것에는 마법의 영향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적들이 들이밀던 단도를 ‘해체’시켰던 것처럼, 눈에 보이는 대상을 향해 마구잡이로 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단유는 솔직히 머리가 팽팽 돌 지경이었다.
해체는 대상물을 정확히 인지해야만 한다. 보통 바닥을 이리저리 구른 상황에서는 사물을 정확히 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단유는 자신의 설명하기 어려운 동체 시력 덕에 그 어려운 걸 해냈다. 공격을 피하는 와중에도 상대의 칼을 상대로, 혹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돌멩이나 무릎께에 이르는 작은 울타리들을 ‘해체’시키려 했지만 아직까지는 마법이 적용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범위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렇게 구르며 도망가는 게 소용없다. 사울른과 에밀리아에게 적들의 시선이 뺏기지 않도록 주의를 다하며 피하던 와중이었지만, 이미 사울른에게도 두 사람이 붙어버린 것을 확인했다. 그나마도 자신에게 6명이나 붙었으니 사울른도 덜 부담이 되겠지만, 사울른은 에밀리아를 지키며 싸워야 하니 그에게도 쉬운 상황은 아닐 터다.
‘제길.’
이런 상황에선 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동판을 들고 여유롭게 단유의 발악을 지켜보는 울펜과 눈이 마주쳤다. 보려고 본 건 아닌데, 우연히 시선이 닿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손에 들린 동판에도 눈이 갔다.
단유는 이를 악물었다.
‘해보자.’
진짜 시작해보자, 단유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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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였나?’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이유로 명수와 같은 반 아이가 시비가 붙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단유는 더 큰 싸움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직접 나섰더랬다. 그때, 상대는 나름 무술이라고 할 만한 걸 배웠던 모양인지 주먹을 내지르거나 몸을 쓰는 방식이 이전에 봤던 아이들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단유는 그런 격투술을 배운 적은 없었지만, 눈짐작으로, 그리고 평소 몸 쓰는 걸 단련해왔던 몸이 저절로 움직이며 상대의 동작을 따라한 적이 있었다.
상대가 사용한 체술의 난이도가 낮아서 초심자가 따라하기 쉬웠던 면도 있을 테지만, 싸우는 와중에도 상대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동작의 구현 원리를 머리로 이해하며 이를 자신에게 적용해낸 단유의 신체 컨트럴이 빛을 발했던 까닭이다.
물론 지금 눈앞에서 흉폭한 기세로 칼을 휘두르는 저들을 중학생 레벨로 보는 것은 아니지만, 이대로 물러나는 것만은 길이 아니니 한 번 도전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정확히 단유의 심장을 노리고 찔러 드는 칼날이 보이는 순간, 단유는 웅크리고 있던 다리를 박차며 마주 달려들었다. 금방이라도 칼에 꿰일 것 같은 순간이었지만, 그 동작으로 왼쪽에서 베어오던 공격은 피할 수 있었다.
단유는 아주 미세하게 몸을 틀어 칼끝이 겨드랑이 부근을 스치게 만든 후, 오른손으로 칼을 든 상대의 손목을 누르고 몸을 돌려 왼쪽 팔꿈치로 상대의 가슴팍을 찍어갔다. 명치를 노린 그 공격은 상대가 놀라는 와중에도 급급히 피해버린 탓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대신 상대를 물러서게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
단유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돌아서는 힘을 그대로 이용하여 다리를 차올렸다. 어디든 맞으라고 휘두른 다리에 복면인은 팔을 들어 막아냈다. 나름 무게를 실은 발차기에 상대는 욱신거리는 팔뚝을 보호하며 뒤로 한 걸음 더 물러섰고, 그 틈에 다른 동료가 빈자리를 채우려 달려들었다.
머리 위로 치켜들었던 칼날이 아래로 빠르게 그어지고, 단유는 바닥에 딛은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뒤로 한껏 기울였다. 사선으로 휘어지는 칼날을 피한 단유는 상대의 품으로 한걸음에 돌진, 상대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감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동시에 달려들던 힘을 어깨에 실어 상대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흐읍.”
바닥을 발로 밀어 몸을 살짝 일으켜 세운 후, 팔꿈치로 상대의 얼굴을 강하게 내리친 단유는 다른 손으로 바닥을 강하게 밀어치며 옆으로 굴렀다.
깡.
바닥에 떨어지는 다른 이의 칼을 다시 피한 뒤, 다시 몸을 일으키려 발을 굴렀다. 바닥의 모래가 쓸리며 먼지가 일어나는 와중에 단유는 바로 근처에 있던 복면인의 다리를 두 팔로 감싸며 다시 한번 체중을 실었다.
“으윽!”
다리를 빼지 못하고 넘어진 복면인이 만곡도를 아래로 내질렀는데, 이건 차마 피하지 못해 단유의 팔뚝에 깊은 상처가 생겼다. 살점이 너덜거릴 정도의 상처였지만 여기서 멈출 순 없었다. 다친 팔을 뒤로 물리는 것과 동시에 다시 바닥을 기듯이 앞으로 나간 단유는 무릎으로 상대의 급소를 짓눌렀고,
“끄어억!”
상대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짧은 비명을 내지를 때, 상대의 손에 들린 칼을 뺏어냈다. 당황으로 물든 상대의 눈을 볼 겨를도 없이 칼을 휘둘러 상대의 가슴에 깊은 검흔을 남기고 단유는 또 한 번 바닥을 굴러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려든 다른 복면인의 발차기에 옆구리를 강하게 걷어차인 단유. 와중에도 칼을 휘둘렀지만, 상대는 뒤로 폴짝 뛰어 칼을 피하고는 위로 몸을 던져 단유를 덮쳤다. 누운 상태에서 그 모습을 본 단유는 있는 힘껏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퍽, 하고 바닥에 칼이 꽂히는 소리가 귀 바로 옆에 들렸고, 단유의 얼굴 바로 위에 뜨겁고 역겨운 입김을 내뿜는 상대의 얼굴이 자리했다. 단유는 역시 이번에도 임기응변으로 머리를 들어 상대의 코를 이마로 쥐어박은 뒤,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칼을 상대의 옆구리에 쑤셨다. 그러나 단검이 아닌 장도인데다 만곡도를 다룬 적이 없어 칼은 상대의 옆구리를 스치며 빗나갔다. 얇은 혈선을 그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상대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진 못했다.
“죽어!”
활활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가 단유를 노려보더니 몸을 곧추세우고 칼을 아래로 내리찍으려 했다. 단유는 있는 힘껏 칼을 휘둘러 상대의 칼날을 쳐낸 후, 다시 팔을 잡아당겨 칼을 역으로 휘둘렀다. 적잖은 힘이 가해진 단유의 칼이 상대의 얼굴을 가르고 지나가자 피가 뿌려졌다.
“끄아악!”
광대뼈가 갈라질 정도로 깊은 상처에 상대가 얼굴을 감싸고 바닥으로 나가떨어졌고, 그 사이 단유가 빠르게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살폈다.
더이상 이어지는 공격은 없었지만, 단유를 향해 칼끝을 세운 3명은 조금도 경계를 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울펜이 놀랍다는 듯 휘파람 소리를 냈다.
“마법사치고는 체술이 보통이 아닌가 봅니다.”
겨우 숨을 몰아쉬고 있던 단유의 시선이 울펜에게로 향했다. 울펜이 혀를 차며 바닥에 드러누운 동료들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방심하지 말라고 일렀건만, 고작 개싸움에 저렇게 당하다니 말이죠.”
개싸움이라는 평가는 적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