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51화 (651/956)

심판의 날(9)-수정(0107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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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을 돌아 다시 대로변으로 나오기 전, 에밀리아의 머리에 후드를 씌어주고, 자신도 얼굴이 잘 드러나지 않게 후드를 깊이 눌러썼다. 그리고 대로변으로 나오니, 아까 단유가 마법을 사용했던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임에도 불안에 떠는 사람들의 표정과 어수선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단유는 에밀리아와 함께 길을 걷다가 눈에 보이는 잡화점에 들어갔다.

“어서 오시오. 혹시 저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셨소? 난 계속 가게에만 있느라고 보지를 못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 말로는 큰 난리가 났다더라고.”

단유는 가게 주인의 말을 무시하고 에밀리아에게 물었다.

“필요한 거 있어요?”

가게에 들어오기 전, 되도록 후드를 벗지 말라고 말한 탓에 에밀리아는 턱을 살짝 치들고 전방을 보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다. 단유가 그녀의 후드 끝을 살짝 잡아 벗겨주니, 그제야 주변에 제대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다시 묻자, 에밀리아는 매대와 벽에 걸린 물건들을 살폈다.

“음?”

가게 주인이 조금 수상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저희 곧 여행을 갈 건데, 혹시 필요한 것들이 뭐가 있을까요?”

“여행? 지금 이 판국에 여행을 간다고? 지금 병사들이 녹스 성 주위에서 모든 길을 틀어막고 있는 걸 모르나?”

“그런 건 상관없고, 그냥 여행에 필요한 것들만 추천해주세요.”

“아니, 자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

말을 잇던 주인은 단유의 눈을 보더니 말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나 싶더니 곧 가게 안쪽에서 이것저것 꺼내기 시작했다. 간단한 취사도구부터 시작해서, 대장간에서 파는 것과는 조금 다른 주머니칼과 온갖 잡동사니를 담을 수 있는 주머니, 그리고 등짐을 편히 질 수 있게 돕는 지게 같은 것도 있었고, 지붕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방수가 가능한 천 두루마리도 권했다. 이것저것 사다 보면 끝도 없을 것 같아, 일단 가장 필요로 해 보이는 몇 가지만 골라 샀다. 지게까지는 필요 없지만, 가방 대용으로 쓸 만한 자루는 필요해 보였다. 에밀리아가 줬던 자루는 사실 너무 낡기도 했고 크기도 작아서 많은 것을 담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 정도를 고르고 에밀리아를 바라보니, 어느새 주변에 전시된 물건들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웬 팔토시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기에 물어보았다.

“그거 갖고 싶어요?”

“네? 아, 그게...이것도 예쁘고, 저것도 예뻐요.”

“그럼 다 사요.”

“안 돼요. 비싸고, 돈도 없고....”

“제가 사 줄게요.”

에밀리아가 흠칫 놀라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왜 놀랄까 싶어 그녈 보다가 순간 무언가를 떠올렸다. 단유는 몰래 이를 악물며 표정관리를 했다.

“괜찮아요, 에밀리아. 그냥 사 주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에밀리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요.”

더 이상한 말이 나오기 전에 단유는 매대에 놓여 있던 토시들을 종류별로 모두 집어서 주인에게 건넸다.

계산을 모두 치른 후, 단유는 다시 에밀리아의 손을 끌고 가게를 나왔다. 잡화점에서 여행자들이 입을 만한 옷이라도 있었다면 사고 싶었는데, 그건 또 다른 가게에서 판다고 해서 그 가게를 찾아갔다. 그렇게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사러 여러 가게를 들리느라 바쁜 그때였다.

****

“마인?”

“네. 마인입니다, 분명.”

“마인들은 몇십 년 전 교국에서 모두 처리했다고 공표하지 않았던가?”

아이러니한 일이다. 교국은 신의 뜻에 반하는 마인들을 이단으로 지정하여 모두 신벌(神罰)을 받게 해야 한다고 떠들었고, 그러한 목적 아래 대륙 전역에 자신들의 기사단을 보냈다. 몇몇 나라에서는 교국의 기사들이 허락도 없이 자국의 땅을 가로지르는 것에 불편한 시선을 보내기도 했지만, 애써 막으려 들진 않았다. 왜냐하면, 마인이란 보통의 사람들이 감히 상대하기 힘든 이들이었고, 이들을 처치하기 위해서는 보통 이상의 희생을 감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신기한 일이지만, 교국의 기사단들은 큰 희생 없이 마인을 사로 잡았다. 희생이 아주 없다고는 못 해도, 다른 나라에 비하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물론 그 방법은 교국 외에 다른 나라는 전혀 알지 못한다.

“얼마나 넓은 대륙인데, 교국이 설마 모든 마인들을 처리할 수 있었겠습니까? 본래 더러운 욕심을 가지고 있던 교국이었으니, 거짓으로 대륙을 선동했던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렇지. 더러운 놈들.”

대공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교국에 대한 분노를 표현했다.

기사단은 단순히 마인들을 잡아 단죄하는 일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륙을 돌아다니며 포교활동도 겸했고, 그들의 정신 세뇌에 당한 무지한 국민들은 국가에 반항적으로 변했다.

그리하여 몇 년 후, 교국은 자신들을 받아달라는 교인들의 부탁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한다는 명목으로 세력 확장을 시도했다. 작은 나라들은 손쉽게 병합되었고, 큰 나라들과는 군사력으로 맞부딪혔다.

교국의 세뇌에 물든 이들은 그들의 군사가 되어 창을 자국으로 돌렸고, 교국의 뜻에 반하는 생각을 가진 지역에서는 소요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부오노 공국은 바로 그런 참화를 직격으로 맞은 나라였다. 무려 수도에서 발생한 대규모 소요사태에 상류계급층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주변에서 군사들을 황급히 불러모았을 때, 교국이 침략을 시도했다.

“그런데 대공.”

“응?”

“보고를 올린 ‘알 루페’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후작은 최초 보고를 한 기사의 말을 전했다.

“약점이라고? 가능성이 있는가?”

“시도해 볼 만 하지 않겠습니까?”

고심 끝에 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진 후, 구두 명령을 전달하기 위한 전령들이 성 밖으로 말을 몰아 달려갔다. 그리고 성 밖에서 대기중이던 군단의 일부가 성으로 진군(進軍)했다.

****

에밀리아는 새 옷으로 갈아입은 게 무척 기쁜 모양이었다. 꿰맨 자국도 없고, 얼룩도 없고, 거기다 자기가 좋아하는 꽃 모양의 자수가 소매에 그려진, 마치 귀족들만 입는다는 옷처럼 깨끗하고 화려한 옷이 너무 좋은 모양이었다. 망토를 들추고 안에 입은 옷을 둘러보는 에밀리아를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망토마저 가게에서 파는 가장 비싸고 좋은 것으로 사서 입혔더니,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모르는 에밀리아다.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단유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그녀의 미소도 북쪽의 성문에 다가갈 쯤에는 조금씩 옅어지더니, 닫혀있는 성문 안쪽으로 도열한 어마어마한 부대의 위용에 얼굴을 굳히고 떨기 시작했다.

이미 주변에는 병사들이 시민들을 소개(疏開)시켰는지 지나다니는 일반인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단유가 걸음을 멈추자, 부대 앞에서 기다리던 기사 한 명이 눈을 치켜떴다. 병사 한 명이 달려와 기사에게 단유를 손가락질하며 무언가를 이야기하자, 기사가 긴장된 표정으로 단유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인! 지금이라도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피를 보게 될 것이다!”

“그쪽이 먼저 물러서는 게 어때요? 그렇지 않으면 피를 보게 될 텐데요.”

기사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바이저를 내리며 말했다.

“아무리 너라도 이 병력들을 뚫고,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은가? 살고 싶으면 당장 항복하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단유의 주위로 병력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단유가 걸어왔던 대로에서도 병력들이 밀려와 뒤를 막았고, 골목 사이사이에서 대기하던 이들도 나와서 단유에게 칼과 창을 겨눴다.

“이 문 바깥에 얼마나 많은 병력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느냐? 넌 달아날 수 없을 것이며, 너는 물론이고 그 여자까지!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기사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에밀리아를 움츠리게 만들었다.

“만약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항복한다면,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게 해주겠다. 물론, 니가 지키고 있는 그 여자의 생명도 포함해서 말이다!”

에밀리아는 수많은 병력에 둘러싸여 목숨의 위협을 받는 상황이 두려웠던지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단유가 에밀리아를 살피기 위해 고개를 잠시 돌렸을 때, 그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던지 몇몇의 병사가 창을 들고 짓쳐 들었다.

그 모습을 에밀리아가 봤던 모양이다. 창백해진 그녀는 질끈 눈을 감으며 비명을 질렀다.

“쯧.”

단유는 짧게 혀를 차며, 손을 내저었다. 거대한 망치에 맞기라도 한 것처럼 달려들던 병사들은 그들이 달려왔던 방향으로 밀려났다. 그 모습을 목격한 다른 병사들은 주춤거리며 더 달려들지 않았다.

“어리석은 놈! 끝까지 가보자는 것이냐? 그랬다간 그 여자의 목숨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약점임을 상기시키려는 수작이겠지만, 단유에게는 조금의 위협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단유는 조금 더 과감하게 나가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아주 오래전, 온돌 구조의 방을 만들 당시 석판을 만들기 위해 커다란 바위를 가르던 것처럼, 긴 바람의 칼날을 만들어 병사들을 향해 날렸다.

희미한 먼지들을 꼬리에 매달고 날아간 투명한 칼날은 그들이 피할 틈도 주지 않았다.

“으헉!”

기겁하며 비명을 지르는 몇몇이 있었지만 칼날은 그저 그들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기만 했다. 어떤 이들에겐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고, 어떤 이들에겐 눈앞에서 흩날리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관찰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가장 놀란 것은 역시 기사라, 말에 타고 있던 그는 기사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재빨리 공격을 피하려 몸을 기울였다. 중력의 법칙에 따라 그는 거칠게 땅을 구르며 통증을 입으로 삼켜야 했지만, 덕분에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 이번 공격에서 오직 애꿎은 말 한 마리만 목을 잃고 쓰러졌을 뿐이다.

기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물러서고 싶었지만, 이미 명령을 받은 상태였기에 이대로 물러설 순 없었다. 그리고 증원병력만 도착한다면 그는 더 이상 나서지 않아도 된다.

“물러들 나세요.”

단유는 에밀리아를 일으키며 말했다.

“물러서지 마라! 물러서는 녀석들을 먼저 베겠다!”

기사는 악을 썼다.

“공격하라! 모두 한꺼번에 달려들면 반드시 저 녀석을 잡을 수 있다!”

단유의 시선이 기사에게 쏠려 있을 때, 뒤에서 커다란 함성이 들렸다. 그리고 땅이 쿵쿵, 요란하게 울리며 일단의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동시에 앞에서도 기사의 독려에 맞춰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나만 아니면 된다!’

어쩌면 그런 생각일지도 모른다. 공을 세운다는 생각보다 죽지 않기 위해 필사적일 수밖에 없는 병사들, 이지만 단유는 더 이상 경고로 그들을 막지 않았다. 그들은 적이었다.

우선 성문을 등지고 달려드는 병사들이 있는 전방을 향해 회오리를 일으켰다. 회오리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하며 마주 오는 병사들을 멈추게 하였다. 그 틈에 뒤로 고개를 돌리고 바람의 칼날을 만들어 뿌렸다. 급하게 서두른 탓에 제대로 이미지(피구라 figura)를 그리지 못해서인지, 형성된 칼날은 가장 앞에 선 두 사람의 어깨를 가르며 지나가다 흩어져버렸고, 다른 이들은 피 흘리는 동료를 지나 여전히 미친개마냥 악을 쓰며 달려들고 있었다.

‘침착해야 돼.’

아무리 다급해도 머리는 항상 침착하게,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에밀리아를 지킬 수 있다.

지척에 다가선 한 병사의 창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물론 주먹으로 창을 막겠다는 의도는 아니었으니, 조금 전과 같이 주먹에서 바람의 망치가 뻗어져 상대를 때리고 지나갔다.

손짓을 하지 않아도 마법을 쓸 수는 있지만, 손을 사용하여 시각적인 이미지를 활용하는 것이 마법을 좀 더 직관적으로 펼치기에 유용했다. 그래서 양손을 옆으로 쭉 뻗어 오른쪽, 왼쪽 양방향에서 달려들던 서넛의 병사 무리를 향해 휘저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온 칼날 같은 바람에 팔이 베인 병사 두 명이 팔을 붙잡으며 악을 질렀다. 그러나 단유는 쉴 틈 없이 다시 마법을 연사했다. 양손을 다시 휘둘러 더 가까이 다가온 병사들의 다리를 갈랐다. 이번에는 직격으로 맞은 터라, 가죽 보호대마저 자르고 나간 칼은 무식하게 두꺼운 허벅지를 갈라냈고, 병사들은 바닥에 피웅덩이를 만들며 허우적댔다.

다시 고개를 돌려 후방에서 달려드는 다섯 병사들에게 주먹을 뻗어 그들을 멀리 날려버린 후, 전방을 살폈다.

후방의 공격들을 막아내느라 집중력이 살짝 흩어졌던 바람에 회오리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처럼 피어올랐던 먼지가 가라앉는 틈에 병사들이 두려움을 애써 누르며 달려들려고 준비하는 게 보였다. 이리 죽나 저리 죽나 마찬가지라면, 차라리 명령을 따르며 죽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인지도 모른다.

“저 녀석은 혼자다! 모두 한꺼번에 달려들면 반드시 저 악마 새끼를 잡을 수 있다!”

기사의 외침이 먼지구름 사이를 뚫고 들려왔다.

그때, 성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바람이 단유를 향해 불어닥쳤다. 손을 들어 눈을 가리고 잠시 바람이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단유는 감히 한눈에 담기지 않을 정도의 많은 병사들이 중무장을 한 채로 단유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게다가 달려드는 무리 뒤로 활을 든 궁수들도 보였다.

어느새 다시 주저앉아 떨고 있는 에밀리아. 단유는 그녀에게서 한 발자국도 떨어질 수 없었다.

‘결국, 이 방법을 써야겠구나.’

아무리 막 나가기로 했기로서니, 사람을 죽이며 즐거움을 느끼는 변태도 아닌 이상, 최대한 사람을 죽이지 않는 방법을 사용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도의니, 인의를 따질 수는 없는 노릇.

단유는 한 손으로 에밀리아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달려드는 그들을 향해 입술을 달싹거렸다.

“사라져.”

동시에, 귀가 먹먹하게 만드는 커다란 폭음과 동시에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빛이 사방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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