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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652화 (652/956)

소실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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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사라지고 난 뒤, 전의 모습은 전혀 떠올릴 수 없을 정도의 참혹한 현장만이 남아 모습을 드러냈다. 무엇보다 앞의 시야를 가로막았던 성문이 사라지고 녹스 성 바깥의 넓은 평야가 훤히 보였다. 성문을 잇던 성벽들도 사라져, 그 자리에는 보는 사람이 아득하게 느껴질 만큼 거대한 크레이터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크레이터의 바깥쪽엔 사라지지 않고 남은 성벽들이, 그나마도 언제 무너질지 모를 정도로 불안한 형태로 서 있었다. 동시에 성벽과 바닥에 흩뿌려진 수많은 핏자국과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타버리거나 뭉개진 덩어리들은 차마 눈뜨고 바라보기 힘든 것들이었다.

열이 채 식지 않았던지 크레이터를 중심으로 피어오른 아지랑이들이 눈을 어지럽히는 가운데, 단유는 고개를 내려 품에 안긴 에밀리아를 바라보았다. 갓 태어난 아기새처럼 부들부들 떨며 숨죽이고 있는 그녀의 이름을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불렀다.

“에밀리아.”

두어 번을 더 부른 뒤에야 에밀리아는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뜨고는 고개를 들어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는 그녀의 눈꼬리에 달린 눈물을 닦아주며 물었다.

“괜찮아요?”

“···무서워요.”

“괜찮아요. 이제 괜찮아요.”

에밀리아가 고개를 돌리려는 걸 붙잡아 막았다.

“그냥 이대로 조금만 기다려요.”

에밀리아는 단유를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숙였다. 가슴 앞에 모인 작은 두 손은 지금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기도의 손짓일까?

성문을 향해 ‘해체’ 마법을 사용했는데, 생각보다 큰 폭발력을 발휘했다. 성문을 통과하던 이들은 물론이고, 단유의 근처에서 벼르고 있던 병사들에게까지 폭발의 영향이 미쳤다.

폭발이 끝난 지금에도 주위에는 바닥을 뒹굴며 눈을 비비는 자들과, 신체 한 부분이 소실(燒失)되어 고통의 비명을 지르는 자들, 겨우 영향권에서 벗어났으나 엄청난 광경을 맞닥뜨리고 이지를 상실한 자들로 가득했다. 누구도 단유를 신경 쓰지 않았고, 단유를 주의하라고 지시할 이성을 가진 이도 없었다. 단유를 향해 접근을 시도할 담력을 가진 이 자체가 전무했다. 오히려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면 어떻게든 현장에서 멀리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 뿐이었다.

비명과 눈물과 아우성이 가득한 곳에서 단유는 에밀리아를 일으켜 세웠다.

“잠깐 눈, 감을래요?”

단유는 에밀리아의 손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이끌었다. 순진하게도 단유의 말을 따라 눈을 감은 에밀리아는 작은 보폭으로 단유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마침내 성문을, 아니 성문이 있던 자리를 나오니 해자를 건널 수 있게 만들어졌던 다리는 무너져 있었다. 그러나 별문제는 되지 않았다. 다리만 무너진 게 아니라 주변 지형 자체가 모두 움푹 파인 형태였기 때문이다.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크레이터를 빠져나오니 드넓은 평야가 펼쳐졌다. 그리고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군단이 멀뚱히 서서 녹스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유와 에밀리아가 군단에 가까이 갔을 때, 군단의 지휘자로 추정되는 은빛 중갑의 기사가 단유를 향해 흉흉한 눈빛을 뿌렸다.

“네놈이 마인이냐?”

“네.”

“네놈이 녹스 성을 저렇게 만든 것이냐?”

“네.”

단유의 차분한 대답에 기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서, 설마 대공까지···.”

아니라고 말은 못했다. 왜냐하면, 만약 대공이 성문 근처에 있었다면 생존 여부는 장담할 수 없으니까. 그럴 가능성은 무척 낮지만 말이다.

“잘 모르겠습니다.”

창을 든 기사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설마 창이 무거워 그런 것은 아닐 테니, 역시 단유를 쏘아보는 바이저 속 눈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그러기를 잠시, 기사는 팔을 뒤로 당겼다가 있는 힘을 다해 창을 내던졌다. 단유를 노렸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창은 단유를 지나 맨땅에 깊숙이 박혔다. 어쩐지 분을 못 이겨 던진 것이 아닐까 추측되었다.

기사는 허리에 매고 있던 칼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높이 내지르며 외쳤다.

“부오노 공국군이여! 저자를 죽여 동료들의 한을 풀어주어라! 알량한 사술을 두려워 말고, 정의를, 동료를 위해 용감히 맞서라!”

기사의 뒤에 도열해 있던 병사들의 함성이 녹스 평야를 뒤흔들었다.

“잔인무도한 저 마인에게 천벌을!”

그리고 기사는 힘차게 말을 몰아 가장 먼저 단유를 향해 달려왔다. 거의 동시에 병사들도 더 큰 함성과 함께 날 선 무기를 앞세워 달리기 시작했다.

‘잔인하다, 라.’

결과만 놓고 보면 잔인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고, 그 광경을 만들어낸 주범이니 딱히 내세울 변명은 없다. 그러나 목숨이 달린 일이라면 단유도 가만히 당할 순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그가 지키겠노라 약속했던 사람을 옆에 두고 있으니.

단유는 손을 들었다. 그때 단유의 팔을 붙잡는 에밀리아.

“음?”

단유가 내려다보자, 에밀리아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무서워요.”

잠시, 에밀리아가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군대를 무서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에밀리아의 눈빛을 보며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에밀리아···.”

단유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알지만, 지금은 속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상황이 되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저 차가운 금속의 칼날들이 자신과 에밀리아를 꿰뚫을지도 모르니까. 그녀의 이해를 구하는 것은 일단 뒤로 미루자, 단유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마법을 사용했다.

내뻗은 주먹을 펼침과 동시에 강력한 회오리가 빈 땅에서 솟아나 적들의 돌진을 막아냈다. 정면에서 무시무시한 회오리가 나타나니 기사도 어쩔 수 없었고, 그보다 말이 먼저 놀라서 앞발을 크게 들어 올리며 뜀박질을 멈췄다.

요령껏 중심을 잡아 말에서 떨어지는 것을 피한 기사는 목이 터져라 큰 소리로 명령했다.

“산개하라!”

곧 병력이 회오리의 좌우로 크게 나뉘며 회오리의 공격권에서 벗어난 뒤 멀찍이 돌아서 단유를 향해 짓쳐 들려 했다.

시간을 벌었지만, 여전히 여유는 없었다. 단유는 에밀리아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다시 눈, 감아 줄래요?”

“루치드···.”

“마지막···이에요. 에밀리아.”

에밀리아는 결국 질끈 눈을 감았다.

이 시점에서 단유는 두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바람 마법은 다수를 상대할 때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은 방법이었기 때문에 제외했다. 생각해낸 첫 번째는 아까와 같이 특정한 대상을 ‘해체’시켜 인위적으로 폭발을 일으키는 방법이었고, 두 번째는 눈이 부실 정도의 빛을 만들어내 섬광탄 효과를 유도하는 방법이었다.

첫 번째 방법의 단점은 폭발의 규모를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자칫 생각했던 것보다 약한 폭발력을 보인다면 제대로 피해 입힐 수 없기에 반격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 방법은 저 많은 이들의 눈을 모두 가릴 만큼의 빛을 생성키 위한 수식을 계산해낼 여유가 되느냐는 점이었다. 회오리로 적들의 돌진을 막으며 시간을 번 뒤 사용해볼까 했지만, 기사의 빠른 대처가 그 여유를 뺏었다.

그래서 단유는 두 가지를 모두 선택했다.

성문처럼 거대질량을 지닌 물체가 없으니, 단유가 선택한 것은 가장 앞서 달리는 병사의 칼이었다. 병사는 손에서 무게감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번쩍이는 빛과 열기에 반사적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 비명도 폭발에 파묻혀 바로 곁에서 달리던 병사나 겨우 들을 정도에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그 폭발은 꽤나 유용해서 또 한 번 짓쳐 들어오는 이들의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반대쪽도 마찬가지로 ‘해체’로 적들의 진격을 막은 단유는 들숨을 천천히 마시며 집중했다.

대기 중에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수많은 입자들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조합하면 그 자체로 에너지를 보유한 양자, 즉 빛이 된다. 진공에서 초당 299,792,458m의 속도로 움직이며, 가시광선은 대략 400㎚의 범위의 파장을 가진다. 빛의 파동성과 입자성을 이해하여 일전에 깨달은 법칙에 따라 조합을 한 뒤, 그 광원을 한 점에 집중하여 발산케하면···.

선두에서 달리던 병사들이 원인 모를 폭발에 놀라 넘어지며 비명을 지르는 통에 잠시 멈췄던 돌격이 다시 이어지려는 찰나에, 시야를 하얗게 만드는 빛이 폭사되었다. 어떠한 전조 현상 없이 시야를 가득 메우는 화살 같은 빛의 공격에 병사들은 무기 대신 눈두덩을 붙잡고 땅 위를 굴렀다.

“으악! 내 눈!”

시야가 완전히 회복되려면 적어도 10초 내지 20초 정도는 걸리지 않을까, 생각하며 단유는 에밀리아를 들어 안았다. 에밀리아가 놀라며 무의식적으로 단유의 목을 둘러 잡았다.

“꼭 붙잡고 있어요.”

단유는 그렇게 말하고 힘껏 발을 굴려 뛰기 시작했다.

고통은 없지만 당혹감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모르던 병사들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을 때, 단유는 이미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리고 한 병사가 겨우 단유를 발견했을 때, 단유는 다시 한번 준비했던 마법을 구사했고, 그들은 또 제자리에서 동동 발을 구를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단유의 어깨너머로 보던 에밀리아가 단유를 세게 끌어안았다. 아니, 단유가 그녀를 세게 끌어안았다.

“힘들어도 조금만 더 붙잡고 있어요.”

그렇게 에밀리아를 고쳐 안은 단유는 쉬지 않고 발을 놀려 마침내 평야의 끝자락에 도달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병사들이 열심히 쫓고 있었다. 거리는 대략 200m 정도. 단유는 병사들과 자신 사이에 서 있던 나무 한 그루를 향해 ‘해체’마법을 사용했다.

단유의 마법은 전조 현상이 없었고, 그렇기에 언제 어떻게 마법이 시전 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병사들에게 만들어진 상황이었다. 또 한 번 눈앞에서 번쩍임이 감지되는 순간 눈을 감고 팔을 들어 눈이 멀게 되는 것을 막았지만, 이번에는 단순히 빛만 번쩍인 게 아니었다.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 살갗이 따가울 정도의 열기와 함께 옷깃을 뒤흔드는 바람이 밀려왔다. 병사들은 무의식적으로 바닥을 굴러 위험을 피하려 했고 덕분에 또 한 번 단유는 그들의 접근을 막아냈다.

****

마침내 단유는 에밀리아를 안은 채로 늪지대의 다리까지 오게 되었다. 예전에도 이 길은 꽤 길고 복잡하여 쉽게 통과하기 어려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려주세요.”

에밀리아가 부끄럽다는 듯 작은 목소리로 부탁했고, 단유는 순순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 가쁜 숨을 내쉬며 루치드를 바라보던 에밀리아는 문득 손을 들어 그녀의 소매로 루치드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주었다.

“괜찮아요.”

단유는 그녀의 손을 잡아 내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 아직 쉴 틈이 없어요. 오래 걸어야 하는 데 괜찮아요?”

“···네.”

“힘들면 말해요.”

“괜찮아요.”

단유는 고개를 끄덕인 후, 먼저 다리 위로 올라갔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끝이 날 줄 모르는 다리 위에서 에밀리아가 뜨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만약 단유가 틈틈이 쉬어주지 않았다면 에밀리아는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지치고 말았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지친 상태이긴 하지만, 단유에게 안겨서 부담을 주고 싶진 않았다.

“물 좀 마셔요.”

이럴 줄 알고 물주머니를 준비했던 것일까, 생각하며 에밀리아는 단유가 건넨 주머니를 받아 입을 축였다. 차가운 날씨임에도 온몸을 푹 젖게 만들 정도의 땀이 흘러내려, 에밀리아는 망토를 벗고 싶었지만 단유가 이를 막았다.

“땀이 식으면 체온이 내려가서 더 힘들어져요. 몸살감기에 걸릴 수도 있고요.”

평소에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이 극히 적었던 에밀리아는 자신의 모자란 체력 탓에 단유가 고생을 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사과할 일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미안해요. 에밀리아를 이렇게까지 고생시키게 만들 줄은 몰랐어요.”

에밀리아의 사정을 알고 반쯤은 충동적으로 일을 주도했던 단유의 잘못도 있지만, 에밀리아는 그게 꼭 단유의 탓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에밀리아 본인도 단유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혹했다. 단유가 말했던 ‘자유로운 삶’, ‘싫은 건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자신을 보고 싶었기에 단유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니 지금의 두려움, 공포, 그리고 일말의 후회는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 집에 계속 있었다면?

‘······.’

에밀리아는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아직은 무엇도 명확하게 판단할 수 없었다. 에밀리아는 힐끔 눈을 돌려 다리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단유를 바라보았다.

‘저 사람도 후회할까?’

때마침 단유가 고개를 돌려 에밀리아를 바라보았다. 놀라서 황급히 시선을 피하는 에밀리아에게 단유가 말했다.

“다시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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