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256화 (256/956)

상승(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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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감히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런 일을 겪고도 자신의 수준에서, 지금까지 수십 년을 살아오며 수천, 수만 단어의 어휘들을 배우고 익히고 써먹었을 텐데도 지금의 현상, 지금의 체험을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내가 없다가, 갑자기 내가 다시 생겼다.’

정도나 될까? 그런데, 이렇게 표현하면 자신이 겪은 고통과 절망과 공포에 대해서는 전혀 묘사되질 않으니 부족함이 많았다.

‘엄청난 고통 속에 내가 사라졌다가, 사라지고도 계속되는 고통과 죽음을 뛰어넘는 공포와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의 시간이 영원히 이어지다가 갑자기 내가 다시 생겼다.’

라고 표현해도 이상했다. 특히 마지막의 ‘생겼다’는 표현은 다른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던 와중에, 멀지 않은 곳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문득 자신 역시도 대화 속에서 언급된 것과 같은 기적(!)을 체험했음을 깨달았다.

포세는 아주 오래전에 적대 패거리와 싸움질을 하다가 오른쪽 귀를 다쳤다. 그 후, 오른쪽 귀가 전혀 들리지 않았고 늘 희미한 이명(耳鳴)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이명이 전혀 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매우 선명하게 대화가 들리니, 오른쪽 귀의 청력이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또 며칠 전, 사소한 실수로 팔꿈치 부근에 심한 타박상을 입었었는데, 지금 그 부위에 전혀 통증이 없었다. 손으로 꾹꾹 눌러도 아프지 않기는 마찬가지. 게다가 조금 전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상쾌한 기분이 들어서 의아해했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속이 편해서였다.

세력 다툼과 본격적인 확장에 앞서 준비를 하는 기간에 신경을 너무 썼던 나머지 소화가 잘 안 되고, 속 쓰린 통증이 발병했고, 그 때문에 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심지어는 속 쓰림이 너무 심해서 잠을 자지 못할 때도 잦았는데, 그 지긋지긋한 통증이 전혀 느껴지질 않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자잘하게 있던 부상들이 말끔히 사라졌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자신의 몸에 생긴 변화도 당황스럽고, 귀에 들려오는 대화의 내용도 혼란스러운 포세였다. 그래서 자신이 왜 여기에 왔는지 그 목적마저 잠시 망각했던 포세가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몸을 일으켜 세울 무렵, 목소리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러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그쪽 분들도요.”

그리고 그때, 포세는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토엔과 눈이 마주쳤다.

“어?”

“아!”

토엔은 포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이유를 몰라 의문을 표했고, 포세는 토엔의 얼굴을 보자 왜 자신이 여기에 왔었던지를 떠올렸다. 거의 조건 반사적으로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간 포세는 칼집에 손을 가져갔다.

“너 뭐야? 니가 왜 여기 있어?”

토엔이 얼떨떨해하며 물음을 던졌으나, 포세는 대답 대신 칼을 뽑아 들었다. 자신에게 생긴 변화는 둘째치고, 오랜 시간 동안 벼르고 벼려왔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에 집중한 포세는 지금이 기회임을 알았다. 생김에 맞지 않게 늘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깔아보던 토엔이 저렇게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면 언제 저 녀석을 제칠 수 있겠는가.

포세는 칼을 든 손에 힘을 주고 토엔을 향해 힘껏 달려들었다.

****

게리는 헐떡이는 숨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어 주변을 훑었다. 조금만 가면 금방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경비대의 눈에 띄지 않게 돌아오느라 다친 몸을 혹사한 것도 모자라, 갑자기 흩어지는 경비대원 때문에 갑자기 숨느라고 몸을 급히 움직였던 터라 신음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숨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억지로 두 손바닥으로 입을 막고 버텼더니, 가슴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그런 노력 덕분에 게리는 경비대에게 들키지 않고 숙소 근처까지 다가올 수 있었다. 이제 눈앞에 드러난 골목만 들키지 않고 건넌다면 숙소로 들어가는 뒷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분주해진 경비대원들 때문에 들킬까 봐 차마 움직일 수 없었다. 녹스 성의 경비대원들이 모두 출동한 듯 사람이 몰려든 와중이라 거리를 돌아다니는 행인 한 명도 보이지 않는데, 여기서 모습을 드러내면 단순히 의심만 사는 정도로 끝나지 않으리라.

“하아.”

게리는 가쁜 숨을 억지로 누르며 조금씩 천천히 숨을 내쉬다가 마침내 숨을 고른 뒤, 계획을 세워보았다. 너무 많은 눈들이 골목과 주변을 살피는 중인지라, 이렇게 몸을 숨긴 것도 용했다. 하지만 저들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모르는 상황인데 여기서 오래도록 기다릴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궁리해봐도 자신의 능력으로서는 저 눈들을 피해 거리를 지나갈 수 없었다. 뭔가, 저들의 시선을 빼앗는 어떤 일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은.

“어? 안이 보입니다!”

토엔의 집 앞을 지키고 있던 누군가의 외침에 기적같이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게리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외침이었지만, 자신이 기다렸던 기회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게리는 절룩거렸던 다리의 고통도 잊고 오로지 ‘건넌다’는 일념 하나로 거리로 몸을 던지다시피 뛰쳐나갔다. 큰 걸음으로 네 걸음이면 지나갈 수 있는 거리가 왜 그렇게 넓은지.

첫발이 땅에 닿고, 발을 땅에 딛는 소리가 너무 크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 번째 발이 땅에 닿을 때, 허벅지로부터 시작되어 전신을 관통하는 통증에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신기하게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야 하는데, 깊게 새긴 음각(陰刻)처럼 지워지지 않는 한 단어는 ‘뛰어라’였다.

세 번째 발이 땅에 닿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네 번째 발이 땅에 닿을 때는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의 보폭이라면 4걸음이면 건널 텐데, 지금 자신의 몸의 부상을 고려하지 않고 뛰었던 터라, 의지와 달리 몸은 정직하게도 통증과 긴장을 호소했다. 한 걸음, 아니 두 걸음을 더 뛰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다섯 번째 발이 닿을 때,

“저기다!”

라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부디 자기만 아니길 바랐다. 여섯 번째 발이 닿을 때, 다시 생각이 사라지면서 대신 눈앞까지 하얗게 변하는 통증이 왔다. 그것은 흐르는 물을 손날로 갈랐을 때, 순간적으로 물의 흐름이 끊어지는 순간보다 더 짧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게리는 숙소의 뒷문으로 향하는 골목 안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계속 뛰어야 한다고 하는데,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조금 전의 뜀박질이 마지막 힘을 다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력이 다해 앞으로 고꾸라지고만 게리였다.

‘안 돼! 빨리 움직여! 도망가야 돼!’

게리에게는 삶의 원칙이랍시고 되뇌는 경구 따위는 없었다. 그냥 되는 대로 사는 삶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무의식적으로 게리가 지켜온 신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살아남는 것’이었다. 그냥 사는 것이었다. 똥물을 퍼든, 지붕 위를 뛰어다니든, 먹고 살 수 있는 일이라면 무조건 하는 것이고,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든, 욕을 하든 먹을 수 있을 때 먹고 잘 수 있을 때 자는 것이 그의 신념이라면 신념이었다.

그리고 지금, 게리는 자신의 생존 본능이 이토록 강한 것이었나 하는 자각을 할 만큼 가슴속에서 뜨겁게 불타올랐다. 잡히면 죽는다, 늦으면 죽는다, 빨리 도망가야 한다, 여러 가지 추측들이 게리의 생존 본능을 자극하고 통증마저 극복했다.

쓰러진 것과 동시라고 할 만큼, 빠르게 몸을 일으킨 게리는 몇 걸음 앞으로 다가온 뒷문을 향해 걸어갔다. 뛰어가고 싶었지만, 그것만은 의지로 되지 않았다.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라도 눈앞의 문을 열고 들어가겠다는 일념으로 나아가던 게리가 마침내 숙소의 문고리를 잡았다.

“꼼작 마!”

그 순간 게리의 마음속에, 머릿속에 깃든 절망과 좌절의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토록 힘든 길을 왜 걸었던가. 왜 땅에서 구르고 가슴이 타는 통증을 참으며 숨소리를 막았던가. 불과 4걸음밖에 안 되는 거리를 6걸음이나 걸으면서 뛰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넘어지면서 이마가 깨졌는지 위에서 흘린 피가 시야를 붉게 적시는 중인데도 참아낸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게리는 혀끝을 살짝 깨물며 솟구쳐 오르는 감정을 참았다. 돌아서서 상대에게 보일 자신의 모습이 너무 비참하게만 보이지 않았으면 했다. 울컥하는 감정은 다시 막연한 분노로 변했다. 자신을 이 꼴로 만든 이들에 대한 분노, 이 고생을 하고 눈앞에 목표물이 다가왔는데도 이를 좌절케 한 이들에 대한 분노, 뒤에서 자신에게 창을 겨누고 있을 이들에 대한 분노, 거슬러 올라가 녹스에서 똥물이나 푸게 하였던 토엔에 대한 분노, 조금 더 참지 못하고 토엔에게 대들다가 오물 속으로 사라진 파트너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이 모든 분노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맞서지 못한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분노.

“돌아서!”

게리는 천천히 돌아섰다. 돌아서는 동작마저도 힘겨워 다리가 후들거리고 무릎이 꺾여 나갔다. 마침내 돌아선 게리의 얼굴은 그야말로 흉악한 범죄자의 그것과 다를 게 없었다. 머리에서 흐른 피가 오른쪽 눈을 지나 광대뼈를 타고 턱선을 따라 흐르다 아래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입가에도 피가 한가득한데, 입술 끝으로 새어 나온 피가 입술 아래에 거뭇하게 난 잔털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누구냐?”

경비대원 한 명이 엄중한 어조로 창을 겨누고 물었다. 게리는 눈 앞을 가리는 피를 닦으려고 손을 들어 눈을 훔쳤다.

“···게리입니다.”

입을 열자, 입안에 고여있던 피가 쏟아졌다. 이름을 말해봐야 정체를 알 도리가 없는 경비병은 재차 물었다.

“뭐하는 놈이야? 여긴 왜 온 거냐!”

“뭔데?”

경비병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또 다른 경비병이 게리에게 시선을 주었다. 피범벅이 된 얼굴의 게리가 심상치 않게 보인 것은 당연한 일. 함께 창을 겨누면서 게리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어차피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나 게리의 현 상태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오물 수거 담당일을 하는데, 여기가···제 숙소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교환한 후, 게리에게 다가왔다.

“꼼짝 말고 손들어!”

게리는 입안에서, 정확히는 상처가 난 혀에서 난 피 때문에 계속 메슥거리는 느낌이었다.

“제기랄···.”

게리는 다시 눈을 가리는 피 때문에 손을 눈으로 가져갔다. 머리에서 피가 나는 게 아니라, 눈에서 피가 나는 것 같았다. 뭐가 그렇게도 끝없이 솟아나는 건지.

****

경고 따위는 없었다. 그저 머릿속에서 내린 단 하나의 명령, 혹은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포세는 달려들었을 뿐이었다. 토엔은 아직 정신이 수습되기 전이었고,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조금 전에 겪었던 혼란이 너무 컸다. 그래서 포세가 몇 걸음도 안 되는 거리에서 달려드는 것을 멍청하게 바라만 봤다.

그러나 토엔 역시 녹스라는 성에서 목에 힘 좀 주고 다니던 사람이었다. 수없이 많은 습격과 싸움의 경험이 몸에 밴 사람인데, 무방비로 당하고만 있을까? 생각보다 몸이 조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게다가 몸의 상태가 좋은 까닭인지, 평소보다 훨씬 날렵하게 칼날을 피했다. 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라면, 상대 역시 평소보다 훨씬 몸이 좋은 상태였다는 점이다. 첫 공격이 아슬아슬하게 무위로 지나갔을 때, 포세 역시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아마 다시 하라면 못할 것 같은 그런 동작으로, 쥐고 있던 칼을 순간적으로 고쳐잡으며 칼날의 방향을 틀어버린 포세는 연속 동작으로 칼을 휘둘렀다. 마치 첫 공격이 피할 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그 동작은 매섭고 빠르고 강했다.

“새끼!”

토엔은 말을 마칠 수 없었다. 놀랍도록 빠른 칼날이 그의 뱃가죽을 뚫고 들어와 내장을 가볍게 찢어 놓았다. 그러고도 힘을 잃지 않은 칼날은 비스듬히 비틀리며 토엔의 배를 가르고 올라갔다. 칼날 끝에 걸린 내장이 비틀려 찢어지고 동시에 동맥까지 건드렸던지, 순식간에 뱃속이 피로 가득 찼고, 나갈 곳은 오로지 칼이 들어왔던 구멍뿐이었다. 찢어진 뱃살에서 뿜어져 나온 피로 포세는 금방 붉게 물들었다.

“흐흐.”

숨이 가쁘기도 하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환희에 휩싸인 포세는 입에서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상이다!’

힘을 주느라 한껏 찌푸렸던 얼굴이 환하게 펴지던 포세는 뒤에서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루치드를 보지 못했다.

“쯧.”

루치드는 짧게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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