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257화 (257/956)

상승(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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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치드는 토엔과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자신에게 생긴 변화, 혹은 능력에 대해 고민을 했다. 아까까지는 너무 머리가 아파서 도저히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 하지 못했지만, 정돈된 숫자를 보며 편안해진 덕분에 자신을 돌아볼 여유도 찾게 되었다.

가장 큰 이유라면 역시 마약이 문제였다. 마약을 먹고 난 뒤에 생긴 변화였으니 원인은 마약 때문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지구에서 듣고 알게 된 마약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에서 이런 현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약 때문에 환상을 보는 것이라고 치부하기엔 눈앞의 숫자들을 단순히 환상이라고만 할 수 없었고, 환상이 아니라고 하면 자신의 시각을 빼앗으며 나타난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만약 마약 때문이라고 가정했을 때, 마약의 약효가 떨어지면 이 현상도 사라지는 것인지, 아니면 약효와 무관하게 계속 이렇게 ‘숫자’로만 이뤄진 세상을 바라봐야만 하는 것인지, 지금으로써는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의 숫자가 급격하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멀미가 날 정도로 어지럽게 변하는 수의 변화에 루치드는 ‘짜증’이 났다. 자신을 방해하는 것도 모자라, 고쳐놓은 것을 다시 고장까지 내고 있었다.

“쯧.”

루치드는 다시 의지를 발현했다. 주위가 다시 어두워졌고, 모든 사물이 공간과 시간으로부터 괴리되기 시작했다.

****

마약은 환각제였다. 환각에 시달리다 약효가 떨어지면 심각한 금단증상을 유발하여, 다시금 마약에 손을 뻗게 하는 강한 부작용을 지닌 약이었다. 특히 토엔이 거래하던 마약은 매우 강력한 환각 작용과 흥분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소량의 흡입만으로도 신체에 심각한 데미지를 입히고, 폐인으로 만드는 약이었다.

그런데 루치드는 호기심에, 그리고 본인도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마약에 손을 댔다. 비록 매우 미미한 양이라 할지라도 신체에 가해진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루치드에게는 보통 사람과 다른 환각 작용이 발생했다. 어떤 뇌의 작용이 있었던 건지, 루치드는 빛의 굴절과 반사에 의한 시각적 이미지를 눈으로 받아들이고 뇌로 해석하는 과정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문제’인지 ‘축복’인지는 차치하고, 루치드는 세상을 ‘수(數)’로 보게 된 것이다.

루치드가 보고 이해하는 세상은 온통 수로만 가득하였다. 색, 모양, 혹은 그 어떤 시각적 이미지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었다. 오로지 숫자만이 존재했고, 숫자만이 루치드가 볼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 숫자들이 어떤 형태를 지닌, 예컨대 지구에서 배운 것과 같이 아라비아 숫자의 형태를 지녔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루치드에게 있어 그것들은 어떠한 형태도 지니고 있지 않으면서, 또 가장 익숙한 형태를 지닌 것들로 인식되었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루치드는 ‘숫자’라고 인식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개념’으로서의 숫자일 뿐, 형태로서 숫자임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직관적인 이해의 대상으로서 숫자가 존재했고, 숫자를 받아들였으며, 그 숫자로 세상으로 해독해나가는 루치드였다.

어쩌면 이 역시도 루치드가 바라보는 환상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환상이 너무나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루치드는 미칠 듯한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 부작용이 있었을 뿐이다.

숫자는 쉼 없이 변했다. 그런데 루치드는 그 숫자들을, 여러 가지 수식으로 이해할 수 있었고, 여러 가지 등식으로 분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숫자들이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알려주는 정보임을 깨달았을 때, 토엔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앞선 사건들이 벌어졌다. 루치드의 눈, 아니 뇌에 해독되는 수의 행렬에 규칙성을 깨뜨리는 것들, 혹은 거대한 흐름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제거하거나, 혹은 변형시켜서 흐름에 따라 맞추기를 원했더니, 루치드의 뜻대로 그 수들이 사라지거나 혹은 버려졌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버린 덩어리도 있었고, 또 어떤 것은 변형되어 거대한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게 된 것들도 있었다.

그런데 거대한 수의 흐름은 또 다른 수의 흐름과 맞부딪쳤다. 조화롭지 못한 수의 충돌은 루치드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고, 마치 파란 물감만 있어야 할 캔버스에 붉은 물감이 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차라리 그게 어떤 예술적 의도를 가진 조화였다면 이런 불쾌함은 없었겠지만, 그것은 완벽하게 구성된 흐름을 깨뜨리는 부조화였고, 그래서 거대한 수의 흐름을 감상하는 숭고한 감상자의 평온을 깨뜨렸다.

‘일단은···.’

먼저 한 것은 수의 흐름을 멈추게 하는 것. 예컨대 동영상 편집과 같았다. 재생 중인 동영상을 편집하는 것은 어렵지만, 재생을 멈춘 동영상을 프레임별로 분석하여 편집하기는 쉽다.

그 후, 일단 가장 눈에 거슬리는 것, 바로 흐름을 정상화하는 것이었다. 52개의 흰 건반과 36개의 검은 건반이 조화롭게 구성되어야 완벽한 88개의 건반이 되듯이, 빠진 건반이 있다면 채워 넣으면 된다.

마찬가지로 저기 보이는 수의 흐름에서 빠진 수는 주변의 수에서 유추하면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간단한 수열 문제였으니까.

쉽게 답을 구하고 나니, 곧 빠진 공백을 채우는 수의 흐름이 생겼다. 그 수는 기존의 흐름에 합일되면서 다시 거대한 수가 되었다. 보기 좋았다.

끼어든 수가 보였다. 전체의 흐름에 불필요한 수를 찾는 것은 방정식이었다. 등식을 만족하는 해(解)를 구하는 법을 찾으면 된다. 그래서 루치드는 몇 가지 수식을 이용하여 해를 찾았다. 그리고 그 해와 맞지 않는 수를 제거해 나갔다.

그리하여 모든 수가 정상이 되었다.

그러고 나니 루치드는 고민이 되었다.

‘분명 저대로 두면 또다시 충돌이 벌어질 것 같은데.’

생각해보면, 지금 이 순간 루치드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든지 수를 고쳐서 반대로 흐르게 할 수도 있고, 잘못된 수를 일부러 집어넣어 ‘고장’ 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루치드는 고개를 저으며 방금 자신이 한 생각을 부정했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짓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언제까지나 저 숫자들을 감상하고 만족하는 감상자로서 있고 싶었지, 저 숫자들을 조작하여 어떤 수의 흐름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수를 만드는 행위는 창작자의 역할이고, 창작자의 의도를 제삼자인 자신이 해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무의식적인 생각의 끝에 나온 것이지만, 루치드는 저 수들을 창조한 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저 수는 의도적인 흐름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각각이 목적을 지향하고, 전체가 다시 어떤 목표를 향해 변화하고 있었으니까.

자신은 그 흐름을 바라만 봐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루치드는 다시 숫자가 흘러가도록, 수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도록 의지를 드러냈다.

****

토엔은 다시 한번,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포세에게 칼침을 맞고 난 후,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못한 자신을 후회하며.

‘겨우 살아났더니, 이렇게 죽는구나.’

그리고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졌다가 다시 정신을 돌아왔을 때, 토엔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직 할 일이 너무나 많은데 그것들을 다 포기해야 한다는 억울함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

그때, 그의 귀에 들린 소리에 반응하여 시선을 돌리니 멍청한 얼굴을 한 포세의 역겨운 얼굴이 자기 코앞에 있었다.

물론 포세 역시 토엔을 찌른 후, 아득히 먼 곳으로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고, 정신을 차렸을 때, 멀쩡한 얼굴로 서 있는 토엔을 바라보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만들 하세요, 이제. 정말 정신 사나우니까.”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토엔과 포세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아까와 같이, 아니 더 지쳐 보이는 얼굴의 루치드가 두 사람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만 떨어져 봐요.”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루치드가 손을 내저으니, 두 사람이 서로 주욱 밀려났다. 귀신을 본 것 마냥, 두 눈을 부릅뜨고 살펴봐도 어찌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던 토엔과 포세가 입을 벌리고 있는데, 루치드가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다 가만히 서 있어요. 한 번만 더 문제 일으키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포세와 토엔이 이런 협박에 눈 하나 깜짝할 리 없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분명 칼로 찌르고 배를 가른 토엔이 멀쩡한 몸으로 서 있었다. 분명 자기 코앞에서 역겨운 냄새를 풍기던 포세가 가벼운 손짓에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루치드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누, 누구십니까?”

루치드의 정체를 모르는 포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루치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부탁이니 가만히 있어 줘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여러분들이 움직일수록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으니까. 그 뒤에 분들도요.”

포세가 돌아보니, 집 안에 수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언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는지,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이 이 좁은 집에 들어올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여러분들. 부탁이 있어요.”

사람들이 모두 루치드에게 주목할 때, 루치드가 힘겹게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제발, 순리대로 행동하세요. 순리에 맞지 않는 행동은 여러분들 본인에게 좋지 않아요.”

말로 설명할 수는 없다. 어떻게 사람들에게 일일이 당신을 구성하는 숫자가 이러이러한데, 당신들이 이런 이런 행동을 할 때마다 이렇게 변하고, 저렇게 비틀려서 변형된다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변형된 숫자가 수의 흐름에 영향을 주어서, 결국 전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루치드는 최대한 간단하게, 그리고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했다.

“바르게 행동하면 오래 살 수 있을 거예요.”

말을 마친 루치드가 힘에 겨워 주저앉으려다, 멈칫했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돌려 막힌 벽을 향했다.

“게리···.”

게리에게서 매우 불쾌한, 그리고 매우 불합리한 흐름이 보였다.

****

게리는 분노를 터뜨리지 못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저 시킨 대로만 일하고, 시킨 대로만 심부름하고, 시킨 대로 토설했을 뿐이지 않은가? 자신하건대,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음해하거나 해칠 의도를 가진 적도 없었고, 나름 착하게 살았다고 자부하는 바인데,

“왜!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

결국, 울먹거림 속에서 피를 토하는 고성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뭐, 뭐야?”

다가오던 경비병이 놀라 창을 쭉 뻗었다. 위협과 경고의 목적으로 뻗은 창이 비틀대는 게리의 가슴을 향했고, 게리는 그 창날에 가슴을 틀어박았다.

가슴을 찢는 고통이 실감 나게 전달되었다. 이제껏 겪은 고통과 다른 고통이 온몸을 짓눌렀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고, 화끈한 격통이 뒤따르며 동시에 전신을 마비시키는 충격이 흘렀다.

“씨···발···.”

게리는 피를 뿜어내며 악에 받친 눈으로 창을 뽑아 드는 경비병을 향해 손을 뻗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 순간, 지옥의 사자가 찾아드는 것인지 주변이 천천히 어둠으로 물들어갔다.

눈에 보이는 것이 사라져가자, 게리는 생각했다.

‘나, 이렇게 죽는 거구나. 이렇게 죽으려고 그렇게 아등댔구나.’

게리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은 아니에요, 게리. 아직은.”

게리는 그 목소리가 아주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죽음의 사자가 마중 나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뭔가를 말하려는데, 입이 열리는 대신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이 조각나는 느낌? 입을 열려고 했던 생각이 오른쪽으로 흩어지고, 살고 싶다고 소원하던 희망이 왼쪽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다시 게리가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조금 전의 체험이 죽음이라고 생각한 게리는 눈물을 흘렸다.

“죽으면 고통도 사라지는구나.”

게리가 흐느껴 울 때, 뒤에서 예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니까, 그런 생각 마시고요.”

“응?”

“게리, 앞으로도 부디 착하게 살아요.”

그 뒤로 목소리가 사라졌다. 게리가 몸을 일으키니 앞에 멍청한 얼굴로 서 있는 경비원 두 명이 보였다.

“어, 너? 어떻게···.”

경비병은 말을 잇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가, 심지어는 가슴이 창에 찔려 피를 뿜어댔던 녀석이 멀쩡한 얼굴을 하고, 가슴의 상처도 온데간데없이 말끔하게 ‘치료’된 채로 일어섰다.

“부, 불사신?”

한 경비병이 멍청한 어조로 툭 내뱉었을 때, 다른 경비병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뒷걸음질 쳤다.

그런 반응을 살필 겨를이 없던 게리는 뒤로 돌아서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보았다.

“루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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