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27화 (27/956)

천도(1)

-------------- 27/952 --------------

“누, 누구세요?”

경계심을 잔뜩 키운 아이의 눈초리가 생긴 것 같지 않게 여간 사나운 게 아니다 싶었던 남자는 자리에서 멈췄다. 괜한 오해를 부르는 것은 자신으로서도 반갑지 않은 일.

“나야말로 묻고 싶구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이 산에 혼자 올라와 있다는 게 믿기지 않거든.”

아이의 이마에서 솟아난 땀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니 그냥 젖은 머리에서 떨어진 물인가? 자신을 바라보는 큰 눈망울에서 경계와 두려움이 느껴졌다.

“쉽게 대답을 하지 않을 거 같군. 나는 모슬라. 보다시피 사냥꾼이다. 됐냐? 그럼 듣기 힘든 네 이름도 한 번 들어보자. 설마 이름도 없는 녀석은 아니지?”

아이의 꾹 다문 연보랏빛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잠시간 들숨을 들이마신 아이는 힘겹게 이름을 밝혔다.

“루치드, 예요.”

“도망친 노예라도 되는 거냐?”

준비된 질문이 곧바로 이어졌다. 모슬라는 섣부른 예단은 금물, 이라는 격언이 잠깐 생각났지만 누가 봐도 저 아이는 거지, 아니면 노예였다.

“아, 아닌데요.”

저 머뭇거림을 어색함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당황스러움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알 것 같았다. 우선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겠다, 고 마음먹은 모슬라는 다시 말을 건넸다.

“알겠다. 사정은 나중에 다시 듣도록 하고 일단 너 몸부터 좀 보자. 보아하니 정상이 아닌 듯한데.”

루치드는 사냥꾼이 다가와도 딱히 제지할 핑계가 없어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의 몸은 추위와 배고픔, 오래된 상처로 정상이 아니었고, 사냥꾼 ? 모슬라는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든 제압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성인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리라고 여겨지진 않았기에 그의 접근을 묵인했다. 사냥꾼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 그런지 모슬라의 얼굴은 누가 봐도 사냥꾼의 그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덥수룩한 수염에 부리부리한 눈매가 인상적인 얼굴이었다.

“일단 어깨의 상처가 심하군.”

가까이 다가온 모슬라의 굵은 턱이 불빛에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갈비뼈도 다친 거 같고.”

루치드의 옆구리로 향한 그의 손은 엄청나게 크고 두꺼워 마치 어지간한 돌멩이는 계란 깨뜨릴 듯이 부셔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의외로 자신의 몸을 살피는 그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온 몸에 성한 곳이 없군. 시간도 꽤 지난 것 같고······. 용케도 잘 버티는구나. 다른 아이들 같았으면 고통에 못 이겨 기절했을법한 부상인데··· 불까지 피우고 말이지.”

감탄인지, 비아냥인지 모르겠다. 루치드는 불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지, 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나 마법사요’라고 말하는 것이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쯤은 판단할 수 있었으니까.

“그 정도 상처라면 도시의 치료술사를 찾아야겠다. 어쩔 테냐?”

도움을 주려는 그의 마음을 의심해야 했다.

“왜 도와주시려는 거죠?”

그는 경찰도 아니고, 보육교사도 아닌 그냥 ‘낯 선 사람’이었으니까.

“어른이라서? 다친 아이를 보면 돕는 게 당연한 거다. 아무리 도망친 노예라도 말이다.”

친절을 무작정 받아들일 만큼 루치드는 어리지 않았고, 게다가.

“전 도망치지 않았어요.”

어쨌든 호의를 밝힌 사냥꾼에게 괜한 오해를 받긴 싫어서 루치드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실종된 빈촌 사람들과 어머니, 동생의 이야기. 그리고 가족을 찾기 위해 나선 루치드의 험난했던 여정. 물론 저 세계 이야기나 핀체노에게 마법을 배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다니. 믿기 힘든 이야기군.”

모슬라는 어느새 모닥불 근처에 앉아 루치드의 이야기를 들었다. 모닥불의 온기가 경계 서린 분위기를 다소 누그러뜨렸다.

“전 엄마와 동생을 찾아야해요. 사람이 많은 도시라면 소문이라든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가는 중이였어요.”

모슬라는 수염이 덥수룩한 턱을 긁으며 대꾸했다.

“나는 비록 외곽이지만 저 도시에 자주 들어가서 물건을 거래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런 이야기를 들은 바가 없다. 마을 사람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일이라면 사람들 입에 오르지 않았을 리 없어.”

타당한 추론이지만 루치드에게는 실망을 안겨주는 말이었다.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냇물이 흐르는 소리, 나무가 타들어가며 나는 소리가 대화가 끊어진 틈을 파고 들었다. 냇물이 흐르듯 시간이 흘렀고, 땔감을 태우는 불빛처럼 서쪽 노을이 하늘을 물들였다.

“우선 날이 완전히 저물기 전에 우리 집으로 가자. 불이 있다고 해서 산의 추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닐 테고, 니 몸을 생각한다면 밤이슬을 피할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군.”

사냥꾼의 집은 그 곳에서 멀지 않은 산 중턱에 있었다. 사냥을 위해 산을 오를 때 사용한다는 간이 오두막이었지만 두 사람이 밤을 보내기엔 충분했다. 몇 장의 가죽을 깔고 루치드는 모처럼 바람 불지 않는 지붕 아래서 잠을 잘 수 있었다.

다음 날, 부지런한 사냥꾼만큼이나 예민한 소년은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다. 간단히 준비를 한 두 사람은 이내 도시를 향했다. 모슬라는 시장에 내다 팔만한 가죽 몇 장을 등에 진 채로 길을 나섰고 그 옆에서 적당한 지팡이를 얻은 루치드가 따라갔다.

이윽고 두 사람은 해가 중천에 다다를 때쯤 도시에 도착했다. 도시에 가까이 다가가니, 4층 높이의 큰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그 스케일에 놀라기도 했을 테지만 루치드는 큰 감흥을 느끼진 못했다. 4층 높이의 초등학교 건물이나 그 옆으로 우뚝 선 20층 높이의 아파트 단지들을 보며 지냈던 루치드였다. 굳이 감상을 표현하자면, 그저 옛스러운(?) 건축물에 대한 짧은 소회 정도?

기대했던 대로 도시는 빈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 저 세계의 도시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지만 - 큰 규모를 자랑했다. 잘 정비된 도로와 튼튼해 보이는 가옥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만큼은 이보다 많은 수의 사람들을 본 적 없었기에 다양한 복식과 얼굴들을 마주하고, 조금은 다른 의미에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색다른(?) 경험을 한 루치드에게 이 도시의 복잡함은 ‘무질서’로 느껴졌고, 사람들의 의복과 생활환경은 ‘후진성(後進性)’으로 다가왔다.

반면, 눈을 좁히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루치드의 모습을 보며 - 정반대의 의미로 - 오해를 한 무슬라가 피식 웃으며 등을 툭툭 두드렸다.

“우선 치료술사를 먼저 찾아 치료부터 받고 감상해라. 촌뜨기처럼 굴지 말고.”

진짜 촌뜨기는 가짜 촌뜨기를 위무했고, 가짜 촌뜨기는 진짜 촌뜨기를 시늉 냈다.

****

치료술사는 루치드의 상처를 보고 놀랐다가 늑대의 습격이라는 이야기에 천만 다행이라는 반응을 보이며 ‘운이 좋았다’라고 표현했다. 루치드는 그 표현에 대해 딱히 따지고 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어색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깨 상처에는 치료 술사 특제 연고를, 옆구리는 가문의 비약이라는 액체 비스무리한 것을 바른 후, 각각에 붕대를 감아 치료를 끝냈다. 속으로 ‘주사’를 맞지 않아 다행이라고 루치드는 생각했다. 치료를 마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사냥꾼은 부리부리한 눈매를 하고 아이의 치료가 끝날 때까지 곁을 지켜 주었다. 혹시 도망갈까 봐 감시하는 걸까, 라는 생각도 했지만 딱히 경계하는 태도는 아닌지라 그 의심은 지워버렸다.

‘애 혼자 뒀다간 무서워서 울지도.’

라고 무슬라가 생각하는 줄은 꿈에도 모를 루치드였다.

둘은 다시 시장 골목으로 나왔다. 무슬라가 가지고 온 가죽을 팔기 위해 피혁점을 찾았다. 가죽 5장에 299쿠퍼의 수입을 얻은 무슬라였다. 루치드는 자신의 치료비가 얼마가 나갔는지 물어봤다.

“왜? 돈 있어?”

“나중에라도 갚을 거예요.”

“됐다. 이런 건 당연히 어른이 내는 거다. 그건 그렇고 일단 집으로 가자. 날도 저물었는데 거리에 어물거리다 경비대에 잡히면 답이 없다.”

여전히 도망 노예라고 생각하는 걸까, 묻고 싶었지만 이미 한 발 먼저 앞서나가는 무슬라 때문에 루치드는 그저 졸졸 뒤를 따랐다. 도시 동쪽 외곽의 낡은 집으로 초대된 루치드는 무슬라와 늦은 저녁을 함께했다. 비록 반 강제적인 초대였지만 루치드는 아주 오랜만에 뜨거운 요리를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따뜻한 버섯수프와 토끼다리구이는 적당한 향신료가 없어 퀴퀴한 잡내가 조금 나긴 했어도 제대로 된 식사도 못하고 지냈던 며칠간의 산행에 비하면 진수성찬이나 다름없었다. 식사하는 동안 딱히 대화는 없었지만 루치드는 식사시간 내내 접시와 그릇에 코를 박을 듯이 집중을 하고 먹었던 터라 어색함을 느낄 일은 없었다. 식사가 끝난 후에 몰아서 밀려들어온 부끄러움 ? 식사 예절은 전혀 상상 못했다 ? 과 어색함 ? 오늘 처음 만나 빚을 지게 만든 사람이다 ? 에 집 구경도 못하고 소파에 앉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보이는 거라곤 빛바랜 나뭇결의 바닥과 그 위에 미세하게 쌓인 흙먼지들, 들리는 거라곤 삐걱거리며 문이 열고 닫히는 소리와 설거지 소리.

‘아, 내가 설거지라도 해야······.’

생긴 것 같지 않게 깔끔한 사람인지 먹자마자 바로 설거지를 하는 모슬라. 지금이라도 달려가야 하나, 내적 갈등에 눈동자만 흔들리는 루치드의 동거 첫 날의 모습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