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누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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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치드는 한참을 울다가 어느새 지쳐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하루가 지났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봄기운이 차올랐지만 그래도 밤은 추웠다. 밤이슬과 추위에 몸이 꽁꽁 얼어붙어버릴 정도가 되어 깨어난 루치드는 피로는 조금 풀렸을지 몰라도 통증은 더욱 심해졌다. 온 몸 구석구석이 모두 결리고 아파서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로 옆에 죽은 늑대의 사체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보니 다시 분노와 절망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이를 악물고 사체를 노려보지만 당장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태우고 싶다.’
으슬으슬한 몸 상태 때문이었는지 루치드는 저 놈을 태워서라도 불을 지펴 몸을 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놈 정도면 불쏘시개 없이도 알아서 잘 타겠지.’
그러나 당장 불을 피우고 싶어도 피울 방법이 없었다. 저쪽 세계였다면 쉽게 불을 피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부싯돌이나 다른 점화도구가 없으니 어렵다. 게다가 불을 만지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어서 자신은 제대로 피워본 적이 없었다. 그저 어깨 너머로 구경해 본 수준에 불과했던지라, 흉내라도 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충동적으로 떠올린 생각이었지만, 루치드는 배고픔이나 추위도 잊고 당장 불을 피울 방법만 골똘히 생각했다.
‘마법으로 가능할까?’
갑작스럽지만, 어쩌면 당연스럽게 마법을 떠올린 루치드는 불을 떠올려 보았다. 아직 프라에테도 제대로 재현해내지 못하는 마당에 ‘불’을 구현해낸다는 것은 어찌 보면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절박함이 가득했던 루치드는 막무가내(?)식으로 불의 고유성질을 떠올려 보았다. 빛, 뜨거움, 물건을 태우는 성질……. 생각하다보니 불에 대해 알고 있는 몇 가지 지식들이 연계되어 떠오르기도 했다. 안전 교육 시간에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들, 보육원에 찾아온 소방관의 안전교육과 실습.
어느 순간 머릿속에 불이 떠올랐다. 아니 정확히 머릿속이라고 표현하기 힘든, 하지만 분명 이미지화 되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이 ‘보였’다.
“아나그노리시.”
루치드는 자연스럽게 불의 아나그노리시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떠올린 이미지를 가만히 바라보다, 이제는 저 이미지를 구현해 내야겠다는 생각에 집중했다. 핀체노는 조건을 붙여야 한다고 했다. 어느 정도의 크기, 어느 정도의 뜨거움으로 조건을 붙여야 할까?
다시 밤이 되었다. 산 속 어딘가에서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소리가 스산한 기운을 흩뿌리며 지나갔다. 뒤척임도 없이 잠든 밤의 숲. 그 속에서 갑자기 빛이 뿜어져 나왔다.
“됐어!”
눈앞의 늑대가 불에 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머리만 불타고 있었다. 하지만 곧 저 불은 몸통으로 번져나갈 것이 분명했다. 땀범벅이 되어 온 몸이 축축해진 루치드는 엉거주춤 일어나 불타는 늑대에게 한 발 다가갔다. 열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 열기만큼, 아니 그 열기보다 더한 희열이 루치드의 몸을 감쌌다.
루치드는 마법사가 되었다.
아마도 간밤의 그 불이 계속 커져나갔다면 이미 숲 속은 불바다가 되고 그 속에서 마법사가 된 루치드는 그대로 땔감처럼 새카맣게 타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날 밤 모처럼 축축한 비가 내려 루치드의 생명을 구했고, 루치드는 그것이 물을 다루던 핀체노의 은혜라고 생각했다. 뒤를 생각하지 않고 저지른 자신의 아찔했던 실수를 자책하며 루치드는 도시로 향한 길 위에 서 있었다. 여전히 옆구리의 통증이 가시지 않아 한 걸음 걷기가 무척이나 괴로웠지만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산 속에서 시간을 낭비할 순 없었다.
‘핀체노 할아버지. 고마워요.’
핀체노의 은혜는 비단 비를 내려 불을 끄게 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루치드는 비었던 물주머니를 조금 채울 수 있었고, 허기진 배를 늑대 바비큐로 채울 수 있었다. 도구가 없어 야만인처럼 맨 손으로 죽죽 잡아 뜯어야 했지만 먹을 수 있었다는 데 고마워했다. 다소 핏기가 서렸다는 점과 비 때문에 눅눅해진 고기 식감은 불만거리가 되지 않았다.
걸어가는 동안 루치드는 10원짜리 동전 크기의 불을 만들어 툭툭 던져보았다. 마치 불똥 같은 모양새였지만 허공에서 침 대신 불을 뱉는 모양새 때문에 즐거웠다. 혹시라도 불이 번지진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땅에 떨어진 불을 신발 앞굽으로 꾹꾹 눌러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른 마법도 구현해보려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핀체노처럼 물을 해보려 해도 물의 이미지가 명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돌을 만들어 던지면 위협적이지 않을까 싶어서 시도해봤지만 역시 실패. 원인은 대상에 대한 연구가 부족해서. 다시 말해 자신이 아는 바가 많지 않다는 것이 원인이었다. 그래서 그나마 가능한 불이라도 익숙해지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불똥놀이’를 하는 중이었다.
주변은 벌판이었다. 통길이 난 옆으로 잡초밭이 나 있고 군데군데 나무들이 들어서 그늘을 만들어주는 정도였다. 이 거리까지 나와 본 것은 루치드 생애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두렵다는 생각은 많이 줄었다. 그간 극한 경험을 하기도 했고, 마법사가 되었다는 자각에 용기가 생기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걷는 여유가 생긴 루치드는 마침 벌판 가운데 샘물이 솟아나는 곳을 찾았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이곳을 들렀던 것인지 샛길이 나 있었다. 목을 축이고 잠시 그늘을 찾아 앉은 루치드는 핀체노의 지팡이를 떠올렸다. 지팡이가 있다면 걷기가 좀 더 수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곧 마법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까지 닿았다.
지팡이의 고유성질, 샤락티라스는 ‘걸을 때 짚을 수 있는 막대기’ 라는 정도이다. 루치드는 과연 이 정도만으로도 아나그노리시가 가능할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조금 집중을 하니 곧 이미지가 연상되었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다소 희미한 형태.
“챕터…….”
조건을 붙여 보기로 했다. 우선 적당한 길이를 떠올리고 굵기도 잡아보니 이미지가 점점 명확해진다. 하지만 아직은 구현이 어렵다. 조금 더 조건을 붙이자면…….
“무조건 단단한 … 쇠막대?”
이쪽 세계에서는 많이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저쪽 세계에서는 쇠의 질감이나 형태, 속성들을 경험해볼 수 있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떠올려 보니…….
‘컨슈메’, 구현이 되지 않았다.
“어렵구나.”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쇠’를 구현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이러고 보면 가장 원시적 에너지체인 ‘불’을 마법으로 구현한 것은 어찌 보면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차라리 나뭇가지라도 하나 주어서 지팡이 삼는 게 낫겠어.”
마법에 실패하고 의기소침해진 루치드는 기분 전환할 겸 다른 쪽으로 의식을 돌렸다. 가장 먼저 ‘디아포’, 깨달음을 얻어 아나그노리시를 이룬 ‘프라에테’라는 마법. 이제는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숙달되었기에 다시 한 번 도전해 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 루치드는 팔 다리를 땅에 대고는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었다. 한 순간 앞을 짚었던 손이 맨땅에서 미끄러지며 몸의 중심이 흐트러졌다. 허리에 힘을 줘 중심을 잡으려하니 통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까스로 땅 위를 뒹구는 꼴불견은 피했지만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루치드는 들뜬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마치 사냥에 성공한 늑대처럼 소리를 질렀다.
결국 프라에테는 성공했다. 비록 매우 작은 범위에 적용되었지만 충분히 미끄러운 상태가 만들어졌다. 다음은 숙련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니, 범위를 넓히거나 미끄러지는 정도를 지정해보면서 마법을 수련했다. 어떻게 ‘챕터’ ? 조건을 지정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프라에테가 재현되었다. 다만 연못에는 적용이 되지 않았다. 아마도 물이 얼지 않아서 그런가보다, 라고 생각하고 넘어간 루치드는 이내 흥미로운 꾀를 냈다.
우선 프라에테로 샛길 가운데 일부분을 지정한 뒤, 그 위에 덧옷을 벗어 올려놓고 옷 위로 올라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펼쳐둔 옷 위를 오른 뒤, 발로 지면을 한 번 밀었다. 길을 따라 천천히 미끄러지는 루치드. 루치드의 몸무게 때문인지 급격히 미끄러지진 않아도 호수에 띄어진 뗏목처럼 흙바닥 위를 미끄러졌다. 몇 미터 가지 못해 멈추었지만 루치드는 아이처럼(?) 신이 났다. 스케이트 타며 놀던 아이들이 부럽지 않은 순간이었다.
이를 활용하여 아이는 큰 길이 난 곳까지 재미있게(!) 이동할 수 있었다. 큰 힘 들이지 않고, 마법도 수련하며 이동해 보았다는 사실에 만족한 루치드는 오랜만에 활짝 웃을 수 있었다.
‘계속 이렇게 가볼까?’
생각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이후 불꽃을 허공에 날리며 들판 사이 난 길을 폭주(?)하는 루치드였다.
루치드는 시간을 알차게 보냈다. 마법을 수련하는데 매진하면서 점차 마법의 속성이나 과정에 대한 공부가 깊어졌고, 덕분에 더 수월하게 마법을 부릴 수 있었다. 덕분에 비참한 처지에 놓인 현실 부정이나 파괴적 감성, 자기 비하나 자괴감에 빠지지 않게 되었고 대신 자신감과 긍정적인 용기와 인내를 배울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아, 저건가?”
어느덧 또 하나의 고개를 넘으니 저 멀리 성과 마을이 보였다. 아직은 멀어서 희미하게만 보이지만 그래도 사람이 사는 도시에 입성하게 되었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저 곳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생활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꽤 지저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피나마나 오랜 시간을 이동하며 쌓인 먼지와 축축이 배인 땀, 무엇보다 피범벅이 되었던 자국과 찢어진 구멍 등이 누가 봐도 ‘거지’를 연상케 할 복장이었다. 현실적으로 따지자면 루치드는 ‘거지’가 맞지만, 그래도 ‘거지’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냄새도 조금 나는 것 같은데…….’
어디 흐르는 물이라도 찾아서 옷 좀 씻어야겠다, 는 생각을 갖고 고갯길을 넘었다. 비탈길 옆으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가니, 과연 꽤 넓은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차갑기가 거의 얼음 수준이었지만 몸을 씻을 만한 기회라 여겨 앞뒤 생각도 하지 않고 들어갔다.
“으으으… 추워.”
그래도 오랜만에 목욕을 하고 나니 정신이 맑아진 느낌이었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물에서 나와,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땔감을 모아다 냇가에서 불을 지피고 몸을 말렸다. 옷은 겉만 보면 씻으나마나 한 거 같았지만, 그래도 찝찝했던 땀이나 흙먼지는 씻겨 내려간 거 같아서 말리고 나면 꽤 보송보송한 느낌일거라 상상했다.
“따뜻해…….”
온기가 들자 몸의 떨림도 잦아 들었다. 돌이켜보니 자신의 처지가 많이 나아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늦은 오후가 될 무렵이었지만 불을 피운 후로는 이전처럼 위험하다는 생각도 덜하게 되었다. 조금 여유로워진 기분이었다.
“이런 곳에 어린 아이라니. 신기한 일이군.”
굵은 성인 남성의 목소리에 흠칫 놀란 루치드가 뒤를 돌아보았다. 갈색 가죽 브레스트를 입고 어깨에는 활을 멘 남자가 숲 속에서 나와 루치드에게 다가왔다. 무의식적으로 벌떡 일어나려는데 깜박 잊고 있었던 옆구리의 통증이 전신으로 퍼졌다. 외마디 신음과 함께 루치드는 무릎을 꿇었다. 어느새 루치드 바로 앞에까지 다가온 남자는 표정 없이 아이를 관찰했다.
“심하게 다쳤나보군.”
그간 조심하며 움직이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통증이 재발하는 바람에 제대로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루치드는, 시선을 들어 남자를 바라보며 경계심을 세울 뿐이었다.